
안창호는 기울어져 가는 조국과 2천만 민족을 구할 계획을 가슴에 안고 1907년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가 도락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미국을 떠난 것은 1907년 1월 8일이었으며, 호놀룰루와 도쿄에 들른 뒤에 서울로 갔다. 그는 도쿄에서 유학생들과 망명 정치인인 유길준과 박영효를 만났다.
그의 구국계획은 리버사이드에서 친목회를 발전시켜 설립한 공립협회 활동에서 싹이 튼 것이다. 광활한 오렌지 농장 지대인 리버사이드에서 노동을 하고 있던 35명이 이룬 ‘빛나는 도산의 공화국’은 거대한 미국 사회내의 소수 민족집단인 한인공동체가 구성원들의 강력한 협동의식과 미래에 대한 원대한 비전으로 괄목할만큼 성장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모국에서 실천함으로써 자주독립을 유지하고 개방과 개혁을 통해 근대 사회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지금에 깨달아 스스로 고치고,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면 망국을 뉘 있어 막으랴”고 외치면서 각 개인의 자아 수양과 지도자들의 굳은 단결로 교유과 산업 진흥에 온갖 에너지를 쏟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동령, 이동휘, 전덕기, 이승훈, 이갑, 양기탁, 김구 등을 모아 리버사이드에서 동지들과 발기한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짧은 시일안에 전국적인 조직으로 상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던 조선 총독부는 1911년에 이른 바 ‘데라우찌 총독 암살음모사건’을 조작해 7백여 명의 혐의자를 검거하고 105명을 재판에 넘겨 그 가운데 윤치호, 안태국 등 ‘주모자’를 징역형에 선고한 뒤 감옥에 가두었다. ‘105인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 조지 매큔 등 선교사들도 구속되었다. 그 결과 미국해외선교부는 미국정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안창호가 1907년 설립한 평양의 대성학교, 일장기 계양 거부로1912년 폐교.
DaeSung School Ahn, ChangHo founded in 1907 in PyongYang, Korea
신민회 자체는 비밀결사였으나 사업은 공개하였다. 학교를 비롯하여 도자기 회사, 서점, 출판사, 그리고 여관이 평양과 대구에 세워졌다. 이 가운데서도 평양 대성학교는 그가 심혈을 기울인 결과 가장 성공적이었다. 안창호는 또 학생들과 젊은 세대 지도자들의 품격과 역량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였다. 비정치적 성격을 띤 이 단체는 도덕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4대 정신으로 인격을 함양하고 덕체지의 단체 훈련을 통해 건전한 인격을 갖춘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이 단체가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들어진 흥사단의 효시이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만들어 독립전쟁을 준비했으며, 그의 구상에는 만주에서의 독립군 양성과 기지 설립 등이 최우선 과제였다. 약 4년 동안 그가 이끌었던 신민회 운동은 비록 쓰러져 가는 나라를 지키지는 못했으나 여러분야의 인재들을 결속시킴으로써 독립운동의 튼튼한 기초를 만들고 원동력이 되었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사가 조선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총살하자 그는 국내에 더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그는 1910년10월 한국을 떠나 칭타오에서 이강, 유동열, 신채호 등과 만나 항일투쟁의 전략에 관해 협의한 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신한촌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한인사회 지도자들에게 단합해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 머무는 동안 독립군 양성과 기지설립을 구상하면서 이상촌 건설부지를 찾아 만주를 답사하였다. 그해 8월 29일 강압적인 한일 합장이 선포되었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유럽에 도착해 베를린과 런던을 방문한 뒤, 1912년 9월 3일 뉴욕에 도착한 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레스를 거쳐 그가 살았던 리버사이드에 돌아와 다시 오렌지 밭에서 노동을 시작하였다.
원글출처 - http://heungsadahn.com/im_activist/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