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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견문기
쓰기에 앞서
1988년 해외관광이 개방된 후 불과 15~6년만에 관광인구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로 전국민 해외 관광시대가 되어 나라가 관광수지의 역조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기에 국민소득 10,000달러가 넘는 요즘의 눈으로 국민소득 2,500달러시대의 해외여행 체험을 돌아보며 今昔지감에서 자부심도 느끼고 배울 것도 찾아보기 위해 이글을 쓴다
이하는 필자가 1986,6,11부터 6,28까지 약 2주여 일간 오스트리아, 스위스, 그리스 등의 의회 및 정당 제도를 시찰하기 위한 시찰단의 일원으로 출장을 갔을 때 보고 들은 사적인 체험의 기록이다.
당시 이들 나라를 가기 위해서는 일단 항공교통의 허브공항이라 할 파리공항을 거쳐야 했다. 우리는 파리의 국제공항인 드골 공항에 내려 잠시 쉬어야 했고, 나는 공항 화장실에 들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요즘도 그렇지만 누런 재생화장지는 어쩌다 보는 거고 하얀 화장지가 주류이던 때인데, 파리의 국제공항의 화장지가 누런 화장지가 아닌가?. 나라의 얼굴인 공항에 재생지를 쓰는 구나? 선진국의 실용성에 감동하여 조금 뜯어온 것이 지금도 갖고 있지만 재생기술이 우수한 건지 색만 누럴 뿐 재생지는 아닌지 아직도 진실을 모르겠으나 그때는 충격이었다.
스위스
우리는 곧 스위스로 날아갔다. 비행장엔 K. L. M이라 쓴 비행기가 눈에 들어오는데, 저게 혹시 북한 비행기가 아닌가 하여 긴장하고 경계했던 생각이 난다, 제네바는 U N 기구가 있는 국제도시이고 바젤은 중화학 공업도시, 베른은 행정 도시라하나 우리는 쥬리히에서 본무인 주 업무를 끝내고 남는 시간을 아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융프라우를 가기 위해 시골길을 달렸다. 시골길 곳곳에 산재한 시멘트 구조물은 민방위 용품보관소란다, 길옆 구릉지하의 격납고도 보았다 스위스가 민방위조직이 잘된 나라라는 건 국내에서도 귀가 아프게 익히 들었던 터라 새삼스럽지는 않았으나 나는 호기심도 있고 하여 유심히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융프라우 산 입구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보니 식당 앞 매점 처마엔 세계 20여국의 국기가 걸려 있는데, 그 속에 태극기가 걸려 있어 참 반가웠다. 식당을 나와 걸어 들어가는 그 긴 얼음 터널 중간엔 촛불 하나가 켜있고 방명록이 놓인 조그만 탁자가 있었다. 그 두툼한 방명록을 몇 장을 뒤넘기니 한국인 이름도 보여 우리가 처음은 아니 듯했다. 나도 물론 몇 자 적어 넣었으나 뭐라 적었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가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이라 사업차 출장 왔다 들른 사람이거나 나처럼 공무로 출장 왔다 들른 사람들일 터인데도 그 수가 적지 않았기에 이런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시내로 돌아와 바0로 호텔에 들르니 프론트 한쪽에 젊은 일본여성이 앉아 있어 나도 대화가 통할 수 있어 다행이다 생각되면서도 우리말을 할줄 아는 직원도 빨리 있었으면 하고 성급한 희망을 가져보았다. 그러나 나중에 들른 시내의 시계점에는 중년의 한국 여인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스위스는 보수적인 나라라 사창이나 도박장 등 환락의 거리등은 없으나 관광국이다 보니 관광 외국인용으로 일정 지역 내에만 유흥업소를 허용한다고 한다. 저녁엔 스위스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만찬초대가 있었는데, 그곳 주재하는 민,관 기관장의 부인들이 대사관저에 모여 잡채, 부침개, 샐러드, 쇠고기 구이 등 식사류를 만들어 뷔페식으로 만찬을 하며 진지하고도 성실한 한담을 했던 기억이 난다.
‘디디제’ 호수와 웅장한 ‘라인폴’ 폭포를 보고 우리는 독일의 "슐로크데"호수와 "흑림지대"에 들렀다가 돌아와 항공편으로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오스트리아
15일 10;55 비엔나 공항에 도착했다. ‘아리랑’에서 식사를 하고 유엔센터 도나우 탑등 간단히 시내관광을 하고 parkhotel schonbrunn에 여장을 풀었다. 이 곳 뷔엔나도 백야(白夜)의 영향이 있어선지 밖이 훤한데 호텔 방에 검은 커텐을 쳐서 캄캄하게 밤을 만들고 잤던 기억이 난다. 또 이 나라는 정책적으로 건축한지 50년 이상된 건물은 기념물로 보존토록 한단다,
우리는 본무를 끝내고 사의(謝意)를 표하고자 오스트리아 집권당인 국민당 사무총장을 예방했다, 국내서는 그때가 이른바 6월 항쟁의 만 1년 전인 때로서 일반인이 김대중, 김영삼 이름자를 입 밖에 내기가 거북할 때인데, 우리가 예방한 사무총장의 제일성이 “김대중 선생 어떠시냐?”는 안부부터 물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다뉴브강’ 다리 건너 ‘뷔엔나 숲’ 지하에는 지하폐광이 있다, 여기 지하에 설치된 히틀러의 군수품공장에선 좁은 갱내의 운반을 마차로 해야 했는데, 말이 무서워 나가지 않으므로 눈을 빼고 장님을 만들어 운반을 시켰다니 히툴러의 잔학상에 또 한번 전율했다. 인간성을 말해 뭘 하랴. 그리고 그 갱엔 채탄 때부터 있었던 인명 희생자를 위해 지금도 굴 곳곳에 촛불을 켜 놓고 가톨릭식으로 명복을 빌고 있었다. 굴 끝엔 지하 호수가 있었고 우리는 전기동력선으로 호수를 한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시내의 ‘슈태판 성당앞 벽에는 200년 전 터키 침공시의 탄흔이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고, 아침에 호텔에서 주는 반달형의 딱딱한 빵도 아침마다 이 빵을 씹으며 불행한 침략기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라 하니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베토벤의 집, 200년 전에 대리석 돌을 네모로 깎아 땅에 박아 만보도, 당시 마차가 다녔던 단단한 석조보도 지금도 단단하여 몇 백년은 더 가리.
그리고 모짜르트, 슈베르트 등 유명한 음악가들의 묘지공원, 루브르 궁전을 본 떠서 지었다는 쉔부른 궁전, 이 궁전을 짓느라 국력을 기우려 왕조가 폐망했다는 일화 등은 역사의 교훈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사에서도 그렇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군이 진주했던 나라는 다 미,소 양 진영으로 분활 통치되다가 결국 분단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소련군이 진주했었어도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싸웠던 오스트리아 독립 운동가들이 서로 손잡고 다시는 그리고 더는 그런 고통을 겪지 말자고 결심하고 좌,우가 굳게 손잡고 단합하여 좌파가 소련을 상대로 우리는 당신 네 소련편이니 우리를 믿고 철수해달라고 설득했고, 이 설득을 납득한 소련군은 소련군 진주기념탑을 세워 남기고 철군을 했다,
우파도 우대로 연합군을 상대로 설득하여 미, 소 양군이 다 철군하게 한 다음 좌,우가 합심하여 정부를 세움으로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민족의 단합으로 외군을 내보내고 단일 정부를 세운 나라이다, 분단국인 우리도 1945년을 회고하며 우리에겐 깨달을 거리가 없는지 곰곰 생각해 보게 한다. 그들의 성공요인은 궁극적으로 좌,우 지도자들이 모두 집권하기 보다는 나라의 독립에 더 힘을 기울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곳 비엔나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1년 전 서방으로 탈출한 곳이기도 하여 탈출한 거리를 통과 해 보기도 했다
그리스
11;50 오스트리아를 떠나 그리스로 가야하는데, 그 당시엔 공산국가인 헝가리와 알바니아의 영공을 통과해야 했기에 비행기가 불시착이라도 한다면 우리는 북한으로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며 불안하고 긴장하며 비행기를 타야했다. 13;50 아테네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엔 대사관에서 박영사와 김참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프레지덴트 호텔에 여장을 풀고 김참사의 안내로 시내 무명 용사탑과 올림픽경기장, 대통령궁 앞길 등을 둘러보았다.
빨간 모자에 빨간 나막신을 신고 흰색의 짧은 주름 원피스 같은 제복에 장총을 어깨총하고 행진하는 보초병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동안 거쳐 온 다른 나라에서는 보지 못했던 낯익은 광경이 보여서 나를 실소케 했다.
헌병 찝차가 시내순찰을 돌고 시내 요소요소에 소총으로 무장한 제복 군인이 보초를 서있고 특히 철망차를 보는 건 서울 어느 거리 같아 친근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나라 형편이 우리나라와 너무 닮았다 그리스는 일찍이 오스만 터키의 오랜(475년?)지배하에도 종교가 살아 있었기에 종교를 구심으로 결집하여 말과 글과 문화를 지켜내었다 세게대전때도 독일의 침공에 일반시민만이 아니라 문화 예술음악인들도 저항에 가담하였고 저항세력 중엔 공산세력이 국토의 70%나 관할할 정도로 세력이 커 동서 재편에 차질이 있을 번했으나 영국 처칠수상의 강력한 저지책과 미국의 원조로 공산세력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한다.
전후 1967년에 반공을 기치로 군부 쿠테타가 일어났다. 군부는 흔히 독재정부가 그러하듯 국민의 불만을 갈아 앉히기 위하여 경재발전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야당 지도자인 조지 파판드레으스의 아들 안드레아? 파판드레으스가 런던 빠리등을 순회하며 그리스 군사독재의 반대를 여론화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고 있었다.
국내서도 저항의 소리 없이 침묵만 하던 중 전 총리 조지 파판드레으스의 장례식때 반정부의 목소리를 낸 걸 시작으로 아테네 대학 법대생과 중산층 시민들의 저항 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군부도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아 키프로스의 대통령을 바꾸는 등 강경책을 쓰다가 무너지고 말았다.
1974년에 민정으로 복귀되자 총선을 실시하였고, 국민투표로 독재 군부와 가까웠던 왕을 축출하고, 공화제를 채택하며 쿠테타군을 반역죄 살인죄로 법정에 세우고 민주주의를 복원시켰다. 그래서 지금도 그리스 국민들은 해외 망명 중 귀국한 콘스탄틴 카라만니스를 민주주의의 복원자라 하여 제일 존경한다 한다,
이와같이 우리와 비슷한 면이 많은 나라다. 경제적으로도 1960년대에는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2,500달러일 때 그리스는 3,300달러로서 우리소득이 그리스의 76% 정도였으나 군사정부기간이 우리 보다 훨씬 짧았는데도(7년?) 요즘 우리 소득이 10,000달러일 때 그리스는 17,000달러나 하여 우리보다 성장 속도가 더 빨랐으니그리스의 58%밖에 안 되는 우리로선 (배가 아파) 안타까움이 없지 않다.
그리스는 고대 유적이 많고 올림픽의 원조나라일 뿐만 아니라 유럽문명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아테네는 시민이 직접 민주정의를 실현한 도시국가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던 나라요, 대모크라씨 어원이 만들어진 나라이기도 하다.
종교적으로 고대엔 올림푸스신 등 다신 신앙이었으나 일신 신앙인 그리스정교에 대한 깊은 신앙(97%)으로 터키의 오랜 침략기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문화, 전통을 지킬 수 있었다한다. 또 그리스에도 종교자치국이라 할 ‘아토스산’이 있다. 여기에 입국을 위해서는 비자를 받아야하고 여자는 입국이 금지되며, 이곳의 사제는 시민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는다한다.
대사관측 얘기는 이 때가 그리스가 막 정권 교체가 되어(3월에 개헌 된듯) 정부측과 대화통로가 없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대사관측이 주재국의 야당과는 교류를 하지 않고 여당과만 교류를 헸었는데 정권이 바뀌니 대화 통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앞으로 상당한 시일을 두고 공식통로로 대화의 길을 열어야 하나보다. 하긴 우리 나라도 강대국의 대사가 야당 쪽 인사를 만나고 다니는 것을 정부는 못 마땅해 하는 듯 하고 국민들도 못 마땅하게 생각하도록 길들여지고 영향 받아온 처지라 미루어 짐작만 할 수밖에. 형편이 이러고 보니 우리를 도우러 나선 한인회장에 대한 감사를 잊을 수가 없다.
몇 분 계시지도 않은 한인들의 회장 장여상씨, 그는 그리스군을 따라 다녔던 소년이었는데 6,25가 끝나면서 참전했던 그리스군 장교를 따라 그리스로 건너갔고, 그곳서 성장하며 교육도 받고 결혼도 그곳 여인과 함께 사업을 이룬 분인데, 고국에서 온 우리에게 성심성의껏 해주시는 모습이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다시 기운을 내어 신화의 나라 신전순례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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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태논, 포세이돈과 아크로포리스 신전, 아폴로, 고린토, 디오니 소스 원형극장 등을 보고, 시내로 돌아오는데, 에머럴드빛이 고운 바닷물 빛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 바다와 접한 해안도로에 왔을 때, 오른쪽 산언덕에 불이 타고 있고 왼쪽 바다엔 꽤나 큰 비행정이 바다에 앉는 듯이 해수면을 스치다 떠올라 오른쪽 산에 가서 불에 바닷물을 쏟아 붓는다. 우리나라엔 아직도 헬리콥터에 물통을 매달고 가서 쏟는 식만 보이는데 바다가 멀어서 인지 소화용 비행기에 대해서도 검토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에서의 대사관 초대 만찬은 장소가 부산의 용두산 탑에서 보다 더 직근의 언덕바지에 있었는 듯, 아테네 야경에다 손에 집힐 듯한 항구에 떠있는 많은 기선들의 불빛들이 어우러져 얼마나 아름다운지? 야경의 아름다움에 취해 칵테일 잔을 기울이며 그리스의 정세, 종교, 문학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던 그 밤이 내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일반직으로서 최고위 직급(1급)에 승진했을 때도 이 밤만은 못했다.
나는 여기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자 한다.
“공사 다망하셨는데도 우리 시찰단을 초대해 만찬을 베풀어주시고 협력을 아끼지 않으신 당시의 스위스, 오스트리아, 그리스의 주재 대사, 대사영부인, 영사 및 주재외교공무원과 그 가족들께 늦게나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건승을 기원합니다, 또 KOTRA . KAL 등 민, 관 주재기관의 간부와 가족들께도 감사와 건승을 기원합니다.” 우리 시찰단은 오스트리아를 떠나며 귀국보고에서 야당과의 교류도 건의키로 했다.
프랑스
우리는 귀국을 위해 다시 파리에 돌아왔다. 본무는 다 끝낸 처지라 파리를 더 보기로 했다. 파리하면 몽마르뜨 언덕이 떠오른다. 몽마르뜨하면 왠지 문화적 교양이 넘치는 문화인들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프랑스의 작가들이 꾸며내어 세계에 펴뜨린 결과다. 정작은 자그마한 언덕에 거리의 화가와 관광객이 마주하는 장터 같은 곳이었다. 나는 미리 사전에 본 성심사원(聖心寺院)이 혹시 절이 아닌가 하여 몽마르뜨 뒤쪽의 성심사원을 일부러 찾아 가보았다. 그것은 절이 아니라 성당이었다.
이는 일본인들의 종교=불교 불교=절이라 생각하는 고정관념 때문에 성당을 보고도 절이라는 뜻의 사워(寺院)이라고 번역한 결과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여보았다.
세느강 유람선을 내려 에펠탑을 향하는데, 2차선 정도의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우리는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 고장 사람들은 무단 횡단을 마구 한다. 서울선 무단 횡단자를 단속할 때고 나라를 대표하는 공무원으로서 신호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무단 횡단자들은 우리의 생각이 경직되었다고 흉이나 보지 않았는지?
저녁의 분수대 광장 안은 종이쓰레기가 바람에 날리고, 흑인 노숙자도 보였고 서울엔 포장마차가 있으나 그곳엔 포장 트럭이 있었다. 그러나 꽁꼬드 광장은 깨끗했다. 나도 아산(정주영)의 농처럼 솔본느 대학을 들어갔다 나왔다 .
호텔식당서 아침을 먹을 때다. 접시에 아침거리를 주는 대로 받아들고 식탁을 찾아 앉았는데, 아침거리라는 것이 빵 조각 몇 개를 주로 하는 간단한 것이어서 실망스러웠다. 다른 서양인에겐 직원들이 계란 후라이를 갖다 주는데 우리에겐 그나마 안 주는 게 아닌가.
식사를 끝낸 우리는 안내인에게 물으니 배식창 앞 접시 옆에 있는 계란 후라이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집어다 식탁에 놓아야 직원들이 계란 후라이를 한 접시 갖다준다는 것이다. 이튿날은 우리도 기분 내며 계란을 받아먹고 있는데 옆 식탁에 앉은 신혼인 듯한 일본인 신부가 계란 후라이를 다른 사람은 주는데 우리는 왜 안 주는지 모르겠다며 신랑에게 불평을 했다. 동네 반장성격의 내가 가만히 그 신랑에게 저 배식 창 앞에 있는 계란 후라이 그림 한 장을 집어다 놔야 갖다 준다고 일러 줬더니 고맙다며 그들도 찾아 먹었다.
밀레의 생가는 다음 날 보기로 하고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다. 궁 앞에서 필름을 사는데 한 통에 어제 27 프랑하던 것을 35프랑 내란다. 알고 봤더니 파리에서는 남이 쉬는 날 장사를 하는 것이라 공휴일에는 더 받는다 하니 문화의 차이임을 어찌하랴. 평일의 필름 값도 국내에 비하면 너무 비싸서 다음엔 필름 준비를 국내서 다 하리라.
루브르궁엔 화장실이 안 보였다. 요강에 볼일을 보고 버렸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에펠탑을 오를 때다. 초입의 저층라운지 까지만 오르는 입장권보다 꼭대기까지 오르는 입장권 값은 3배나 더 비쌌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비싼 걸로 꼭대기까지 올랐다. 파리 밖까지 다 보인다. 하긴 개선문 옥상서도 시내가 다 보였었으니 당연하지 않나.
또 우리는 기왕 온 건데 ‘리도 쇼’를 보기로 했다. 예약을 안 해 돈을 더 주어야 한다는 가이드 말로 우리는 거의 100프랑(달러?)을 주고 입장했다. 정상요금은 35프랑? 정도였던 것 같다. 저녁 7시쯤에 오프닝 멘트가 나오는데 아마 춤을 추고 싶은 사람은 나와서 춤을 춰도 좋다는 말이었는지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양인이 조금 꾸부정하고 땅딸막한 부인을 후로어로 데리고 나와 부르스를 추기 시작하자 서양의 노소가 쌍쌍이 나와 춤판이 펼쳐졌다.
그 동양인은 일본인이었다. 나는 지금 그날의 쇼의 내용은 기억나는 게 별로 없으나 그 일본인의 모습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의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과 여유로운 자유와 당당함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 당시 구라파엔 일본인 안내가 호텔 백화점이나 큰상점등에 다 있었으나 우리 한국인 안내는 쁘랭땅 백화점에서 청년 1인을 만났을 뿐이다. 우리한국인은 언제쯤 저렇게 당당할 수 있고 한국인 안내가 배치될까? 1986년 우리 국민소득이 정확히 2,550달러, 우리도 국민소득이 10,000달러 시대가 오면 일본 못지 않게 한글로 된 팜프렛과 한국인 안내인들이 배치되고 있겠지. 긴 생각에 잠겨야 했다, (지금까지 지루함을 참고 읽어주신 독자제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13. 4. 27)
(참고; 1, 공식수첩은 진작 폐기했고 약기한 메모 수첩과 기억에만 의존하느라 아직도 기억불명으로 공개하지못한 부분이 있으며 또 틀린점이 있었다면 너그러히 양해하여주시기 바라옵니다
2,이 글은 1993년에 어느 카페에 올렸던 글이다, 그리스에 흥미가 있는 분은 니코스 카랜차스키 지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사 읽는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