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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크랩 [해외역사] 로마 내전사 : 공화정의 몰락 - 2
Love 추천 0 조회 22 13.05.11 05: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5kZy6


출처 카페 >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 | virapasas
원문 http://cafe.naver.com/booheong/52382

@ 글을 쓰면서 가치 판단은 최대한 배제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판단을 가한 부분이 몇군데 존재하기는 합니다. 글을 읽고 이에 대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거침 없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간략하게나마 모든 점을 짚고 넘어가려 하니 분량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로마 내전만 몇 차례에 나눠서 게시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2. 젊은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C. Iulius Caesar Octavianus)>

젊은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누이의 손자였다. 그는 카이사르 사후 유언장에 쓰인 대로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이다.

바로 이 사람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C. Octavius Thurinus1))이며, 독재관 카이사르와 나이가 같으며 아들과 이름이 같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C. Octavius)와 아티아(Atia Balba)의 아들로 태어났다. 옥타비우스 씨족은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벨리트리라는 도시의 유력 씨족이었으며, 카이사르가 여러 씨족들을 파트리키 귀족으로 선출할 때 귀족으로 선출되었다


. 어린 옥타비우스의 아버지는 꽤 유능한 행정관이었다. 마케도니아 총독 재직시에는 속주를 공정하게 통치하였고 트라키아의 침략에서 속주를 방어하였다. 키케로는 아시아 속주(현재 터키 서부 지방) 총독이었던 동생 퀸투스 키케로(Q. Tullius Cicero)에게 "너는 왜 옥타비우스 만큼 잘하지 못하느냐?"는 질책성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2) 그는 거의 듣보잡이었던 앙카리아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공직 경력에 탄력이 붙기 시작하자 카이사르 가문에 빌붙기로 결심하고 그 쪽에서 혼처를 구해서 결혼하니, 그녀가 바로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였다. 독재관 카이사르에게는 누이가 둘 있었고, 그 중 동생이 발부스(M. Atius Balbus)3)와 결혼하여 딸을 셋 낳았는데, 둘째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결혼한 아티아이다. 그녀는 옥타비우스와 관계하여 1남 1녀를 낳고 집정관을 지낸 원로원 의원 필리푸스(L. Marcius Phillippus, BC 56년도 집정관)와 재혼하였다.


카이사르는 이 젊은이를 눈여겨 보고 있었으며, 문다회전을 치룰 때는 당시 애송이에 불과한 어린 옥타비우스를 동행시켰다. 카이사르 암살 당시 어린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명령에 따라 일리리쿰 속주로 건너가 군사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파르티아 원정에 이 소년을 동행시킬 생각이었다.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3월 15일에 품페이우스 극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어린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가 자신을 상속자로 지명했다는 소식에 큰 희망을 품고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아직 공인 받은 상태는 아니었으나 자칭하여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C. Iulius Caesar Octavianus)라 하였다. 최근에는 통칭하여 '옥타비아누스'라 부르나, 이 호칭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자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자신을 꼬박꼬박 '카이사르'로 불렀으므로, 이 글에서는 그를 일컬어 '젊은 카이사르'라고 하겠다. 


그의 의붓 아버지인 필리푸스와 어머니 아티아는 젊은 카이사르에게 카이사르의 아들 되기를 거절하라고 극력 조언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성급하게 나서지도 않았으며, 캄파니아 지방에 있는 의붓 아버지 집에서 머무르며 세심하게 자신을 드러낼 준비를 하였다. 그는 우선 카이사르의 고참병과 접촉하여 그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으며, 카이사르의 심복이었던 히르티우스 및 판사와 접촉하였다. 그는 한 붕당에게만 손을 내밀지 않았으며 심지어 원로원당의 거두인 키케로를 만나 갖은 아부와 찬사를 늘어놓았다.4) 키케로는 심정적으로 공화주의자였고 카이사르의 심복이었던 안토니우스를 불신하고 있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19살의 젊은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카이사르파의 균열을 예상하였기 때문이었다.


5월 초 그는 로마로 가서 집정관 안토니우스와 면담을 하였다. 젊은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에게 이르기를 자신은 카이사르의 뒤를 이을 것이며 카이사르의 유산으로서 갖고 있는 재산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거친 언사를 내뱉으며 거절하였다. 옥타비우스는 여러 번 간청하였으나 안토니우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5) 안토니우스로서는 갑자기 새파란 젊은이가 나타나서 자신이 느끼기에 이런 뻔뻔한 요구를 하다니 다소 황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카이사르가 남긴 돈으로 무려 수천만 세스테르티에 이르렀던 자신의 빚을 떼우고 그 돈으로 카이사르 고참병들의 정착을 위한 토지를 구입할 생각이라 절대로 넘겨주지 않으려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앞 포스팅에서도 설명하였듯이, 공화정파와 따로 사이가 특별히 나빴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들을 사면해주고 우호적인 연설도 해 주었다. 하지만 이는 카이사르 지지파라는 자신의 입지를 허무는 일이었다.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사람들이 안토니우스를 이 문제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또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측에서는 대담하게도 안토니우스의 측근들과 내통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이탈리아에서 떼어놓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안토니우스는 6월 1일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여 속주 교환에 관한 법률(lex Antonia de permutatione provinciarum)을 밀어붙였다. 이 법률의 대략은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을 끝내고 원래 맡기로 되어있었던 마케도니아 속주 대신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Gallia Cisalpina - 현재 북이탈리아)와 갈리아 코마타(Gallia Comata - 현재 프랑스 전 지역 밑 라인강 서쪽 독일 + 벨기에) 속주를 맡는 것이었다. 또한 6월 5일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한테 법무관 대리(propraetor) 권한을 줘서 각각 시칠리아 속주와 아시아 속주로 내보내는 방안을 가결시켰다.


당시 암살자들은 당시 어둡고 침침한 날씨들만큼이나6) 우울한 나날들이었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라는 사람이 만든 법은 말이 좋아 법무관 대리 권한이지, 사실상 자신들을 추방시키려 하였다. 이에 카시우스는 격분하였고, 키케로는 왜 안토니우스마저 죽이지 않았냐고 물으면서 카시우스를 몰아세웠다.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7)는 취소시키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그리 효과는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이 일을 잠시 잊게 된다.


한편 키케로와 손을 잡고 원로원파라는 붕당에 가입한 젊은 카이사르는 사태가 어찌 되었든 간에 카이사르의 고참병들과 로마 시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우선 자신의 자금과 카이사르 친구들의 자금을 풀어 대규모 축제를 개최하였다.8) 7월 7일 열린 아폴론 축제를 비롯하여 율리우스 씨족의 시조 여신인 베누스 게네트릭스(Venus Genetrix)를 기념하는 '카이사르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Ludi victoriae Caesaris 7월 20일 - 30일)'을 개최하였다. 이 때 살포한 각종 뇌물 및 성대한 연회, 구경거리 등에 의하여 로마 민중들의 지지는 젊은 카이사르에게 쏠리게 되었다. 게다가 천우신조로 하늘에 혜성9)이 하나 나타나 군중들은 "카이사르가 신이 되었다"고 환호하였다. 젊은 카이사르는 이에 독재관 카이사르의 조각상 머리 위에 별을 달게 하였다.


젊은 카이사르의 입지가 이리 탄탄해지자, 안토니우스로서는 이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암살자측한테 손을 내밀었고, 또한 몇 번에 걸쳐 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연설까지 하였다. 이에 맞서 카이사르의 장인이었던 피소(L. Calpurnius Piso Caesonensis, BC 58년도 집정관)는 갈리아 키살피나를 이탈리아에 편입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또는 그랬다 카더라는 말이 있다). 부결되었으나, 안토니우스는 자칫하면 자신의 속주로 내정되어있던 땅도 얻지 못할 뻔한 것이다.


원래 안토니우스에게 향했던 카이사르 고참병들의 충성이 위태로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안토니우스에게 젊은 카이사르와 화해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안토니우스는 젊은 카이사르와 카피톨리움(Capiotolius) 신전에서 화해의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암살자들과 카이사르파 가운데서 줄타기 노릇을 하던 안토니우스는 입장을 정하고 8월이 되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이탈리아에서 내보내 각각 크레타 속주와 키레나이카(Cyrenaeca - 현재 리비아 동부 지역) 속주 총독으로 임명하자고 원로원을 설득하였다. 이에 브루투스는 키케로의 전송을 받으며 바로 떠났으며, 카시우스는 머뭇거리다가 10월에 떠났다.


안토니우스는 자신 곁에 군대가 없으면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10월 9일 아내 풀비아와 함께 로마를 떠나 브룬디시움(Brundisium)으로 갔다. 또한 당시 갈리아 키살피아 속주 총독이었던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서한을 보내 당장 자신에게 속주를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도 이런 부탁을 순순히 들어줄리 만무하여 기존의 2개 군단 말고 개인 재산을 털어 몇 개의 군단들을 조직하고 애꿎은 알프스 산악 부족들을 공격하면서 단련시켰다.


브룬디시움에 도착한 안토니우스는 병사들에게 한 사람 당 400 세스테르티10)에 이르는 포상금을 주겠다고 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코웃음쳤는데, 젊은 카이사르가 공작원을 보내 다량의 금품을 살포하고 교란하는 짓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단체로 항명사태가 벌어졌고, 안토니우스는 격분하여 1/10 형11)을 선고하였다. 그는 이렇게 규율을 확립한 군대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북이탈리아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하지만 도중에 젊은 카이사르가 거병을 하였다는 소식이 안토니우스에게 들려왔다. 


당시 젊은 카이사르는 아버지(?) 카이사르의 고참병들을 선동하여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병사 한 사람에 500 데나리12)에 이르는 거액을 주겠다고 약속 한 뒤, 추가적으로 일이 성공하면 그의 열 배인 5000 데나리 씩 주기로 하였다. 젊은 카이사르는 이 장병들을 이끌고 11월 10일 로마 시내를 점령하였다. 그 후 그는 여러 정치가들에게 자신을 지지해 줄것을 호소하고 양아버지 카이사르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였으나 분위기는 썰렁하였다. 게다가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전 속력으로 로마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로마와 아레티움의 위치>

당시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남동쪽에 있는 브룬디시움에서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로마를 점령한 젊은 카이사르는 이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군대를 아레티움으로 퇴각시켰다.

이에 젊은 카이사르는 실재적인 위험을 느끼게 되어 퇴각하여 로마 북서쪽에 있는 아레티움(Aretium - 현재의 아레초)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아레티움은 현재 이탈리아 토스카나 속주에 위치한 도시로서, 젊은 카이사르의 동료인 마이케나스(C. Cilnius Maecenas)13)가 태어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성채가 훌륭한 도시고, 북이탈리아로 향하는 안토니우스의 행군 경로에 위치하지 않아서 어느 정도 안전할 수 있었다


. 한편 로마로 들어간 안토니우스는 11월 24일 젊은 카이사르를 역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원로원을 소집하려했으나 실패하였다. 위험을 느낀 키케로는 도주하였다. 이 와중에 급변 사태가 일어나, 행군 도중에 4군단이 이탈하여 젊은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이에 격분한 안토니우스는 11월 28일 밤에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원로원 의원들은 젊은 카이사르의 탄핵안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이 때 그는 다급한 심정으로 자신의 동생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속주를 빼앗는 동의안을 제출하여 가결시켰다. 안토니우스는 젊은 카이사르를 욕하며 스파르타쿠스와 카틸리나에 비교하고 거듭 젊은 카이사르의 역적됨을 극력 논하고 로마를 떠나 강행군으로 북 이탈리아로 향해 떠났다.

바야흐로 무티나 회전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3. 무티나 회전의 전말

이처럼 로마 내의 상황이 심각해지고, 분란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 되자 한 정치가가 나서서 상황을 공화정에 유리하도록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니, 바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 Tullius Cicero, BC 106년 1월 3일 - BC 43년 12월 7일)였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신참자로서 그의 경력은 뛰어난 웅변 실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은 매우 변화 무쌍하였는데

같은 동네 출신인 마리우스를 찬양하고 원로원파와 함께하기도 하면서 카이사르와도 친분을 맺기도 하였다.

말과 행동의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았으나, 그의 화려한 말솜씨 및 글솜씨 때문에 이 점은 많이 가려졌다.

본심은 철저한 원로원파로서, 여러 글들을 써서 본인의 사상을 피력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아르피눔(Arpinum) 출신으로서, 마리우스와 동향이었다. 어릴 때 콩깍지(cicero)라는 이름을 그 무엇보다도 유명하게 만들겠다는 일화가 있는 그는 로마에서, 그리스에서 피나는 노력과 연습을 통하여 최고의 웅변술을 갖추게 되었다. 


선거와 원로원 정치는 '대중' 및 '원로원 의원'을 설득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는 체제였고, 웅변술은 자연스레 로마 정치인이라면 누구든지 갖춰야 할 소양이었다. BC 75년, 일개 재무관(quaestor)14)였던 그는 부정부패 및 도가 지나친 가렴주구로 이름이 높던 베레스(C. Verres)15)를 탄핵하여 일약 로마 정계의 스타로서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BC 63년도 집정관이 된 그는 음모를 꾸민 카틸리나를 탄핵 및 제거하여 '국부(pater patriae)'라는 존칭을 받았다. 이는 '웅변으로서 적을 물리친' 사례로서 키케로가 매우 자랑스럽게 언급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막장 포풀라레스 정치가였던 클로디우스와 반목하여 로마에서 쫓겨났다가 돌아오기도 하였고, 내전 때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의 일레르다에서 꼼짝 못하고 있다는 소식16)을 듣고 그리스로 가서 폼페이우스측에 합류하였다. 그 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군이 박살난 이후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카이사르가 독재관으로서 로마를 다스리는 시기에는 행동을 자제하였으나, 카토를 예찬하는 글을 써서 카이사르가 반박론을 쓰게 끔 만들었다.17)


카이사르 암살 이후 암살자들은 키케로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키케로의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암살자들은 앞서 언급한대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캄파니아 지방에 피신해 있었는데, 키케로는 당시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그는 원래 브루투스의 뒤를 따라 그리스로 가려고 하였지만, 이 계획은 포기하였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에게 우호적인 언사를 몇 번 보였지만, 키케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젊은 카이사르가 그를 찾아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갖은 아부를 다 하고 사사건건 조언을 요구하자, 이 노회한 정치가는 젊은 카이사르를 이용하여 안토니우스를 타도하고 이후에 브루투스와 연합하여 젊은 카이사르를 몰아내는 환상적인 계획을 생각해내고, 9월에 로마로 돌아와서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을 하였다. 바로 '안토니우스 탄핵 연설'인 필리피카이였다. 이는 필리포스 2세를 극력 배척한 데모스테네스의 연설 제목에서 따 온 것이었다.


키케로의 웅변술과 글솜씨는 발군이었지만, 결코 정직하게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로마에는 이 카페와 같이 '회원의 인격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고, 이에 따라 선거와 집회에는 각종 유언비어와 잡설, 극악무도한 인신공격과 사실 왜곡에 기초한 뻔뻔한 공격이 판을 쳤다. 키케로도 마찬가지18)였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안토니우스를 탄핵하는 연설들을 발표하였다.


이 연설들은 작성자의 실력 덕분에 매우 정교하고 교묘하며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비추어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얼마나 뻔뻔하고 황당한 연설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안토니우스에게 지독한 인신공격을 가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무례하고 추잡하며 무식하여 꼭 검투사 같다. 또한 무능하고 책임감마저 없으며 겁쟁이 본성을 가졌다. 또한 술을 쳐마시며 수많은 창녀들이 연루된 난잡한 파티를 벌이고 술에 쩌든 채로 원로원에 출석하여 모두를 경악케 한다,


연설 내용 자체도 황당한 것이 많다.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안토니우스의 포위공격을 받고 있던 12월 20일에 키케로는 3차 탄핵문을 발표하였다. 키케로는 당시 안토니우스가 갈리아 키살피나의 속주 총독이 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1.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애국자이다.

2. 휘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소요를 일으키는 안토니우스는 로마 콘술의 자격이 없다.

3. 그러므로 안토니우스는 역적이고 누구든지 그를 칠 의무가 있다.

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명색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젊은 카이사르를 "아아!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젊지만 신뢰할만 하다. 그는 지성과 용기를 겸비하였으며....(중략)..... 카이사르의 퇴역병들을 불러모아 무적의 군대를 만들었다!!"고 찬양하였다.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젊은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를 원로원의 정식 허가를 받은 군대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그는 잊지 않고 키케로에게 사례하였는데, 키케로는 이에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소년(puer - 키케로는 젊은 카이사르를 이렇게 불렀다)을 "칭찬하고, 대접하고, 북돋아주어야(tolendum)한다."19)고 하였다. BC 43년도 집정관으로 뽑힌 인물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A. Hirtius)20)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C. Vibius Pansa Caetronianus)였다. 두 집정관은 카이사르의 부하였으며, 카이사르 덕분에 모든 것을 이룬 인물이기 때문에 굳이 젊은 카이사르를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의 군사 지휘권은 마땅히 자신에게 소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BC 43년 1월, 키케로는 원로원을 움직여 젊은 카이사르를 원로원 의원에 임명하고 법무관 대리 권한(propraefector)을 주고 집정관들과 함께 안토니우스에게 대항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전쟁을 벌일 것인가에 대하여는 이견이 있었다. 키케로는 확고하게 안토니우스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안토니우스 파인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Q. Fufius Calenus)는 사절을 보내자고 주장하였고, 이 안이 채택되어 루키우스 피소와 필리푸스(젊은 카이사르의 의붓 아버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Ser. Sulpicius Rufus) 세 사람이 사절로서 안토니우스 진영에 파견되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는 포기할 것이며, 갈리아 코마타(현재 프랑스 전체 지역) 속주 총독 자리는 BC 39년까지 유지하겠다는 협상안을 보내왔는데, 2월 1일자였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 안을 거부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여 안토니우스를 '역적'으로 선언하고 두 집정관과 젊은 카이사르에게 역적을 토벌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집정관 히르티우스는 4개 군단을 징집하여 젊은 카이사르와 함께 북상하였다. 판사는 추가로 4개 군단을 더 모집한 다음 합류하기로 하였다.



<무티나 전투>

고대의 무티나는 현재의 이탈리아의 에밀리아-로마냐 속주(Emilia - Romagna) 속주에 위치한 도시 모데나(Modena)이다.

당시 모데나에서는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안토니우스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었다. 안토니우스와 공화정 군대는 포룸 갈로룸

(forum Gallorum)이라는 곳에서 격돌하였는데, 현재의 카스텔프랑코 에밀리아(Castelfranco Emilia)이다. 현재의 모데나

와 볼로냐(Bologna 고대의 보노니아Bononia)를 잇는 도로는 옛 로마의 아이밀리아 가도(via Aemilia)와 정확히 일치한다.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전투의 시작과 끝을 대략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무티나 성채 안에 있는 데키무스의 그의 군단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히르티우스와 젊은 카이사르의 6개 군단은 안토니우스의 진영 가까이에 설치되었다. 양쪽에서 협공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된 안토니우스는 진지를 떠나 당시 보니니아(볼로냐)를 출발하여 다가오고 있던 집정관 판사와 신병으로 이뤄진 4개 군단을 먼저 격파하는게 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야음을 틈타 포룸 갈로룸(forum Gallorum)으로 이동한 안토니우스는 판사의 군대를 매복공격하여 대량학살을 자행하였다. 판사는 옆구리에 투창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보노니아로 피신하였다.


전투의 승리가 안토니우스에게 기울여질 무렵,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히르티우스는 즉시 6개 군단을 이끌고 승리에 취하여 아무런 대비를 취하지 않은 안토니우스 군의 후방을 급습하였다. 안토니우스군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숙영지로 돌아갔다. 안토니우스는 기병대를 보내 전투 지역에 방치된 부상당한 부하들을 구했다. 이 날이 4월 14일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히르티우스는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구하기 위하여 도시 후방에서 진입을 시도하였다. 4월 21일 안토니우스 역시 대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병대를 보내 진군을 막았다. 한편 무티나 회전 때는 진지를 지키고 있었던 젊은 카이사르는 이 때는 직접 전투에 나섰다. 히르티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진영을 포위하고 진입을 시도하다가 하필이면 낙마하여 말에서 떨어졌다. 전투가 급박해지자 젊은 카이사르는 쓰러져 있던 기수병에게서 시그눔(signum - 독수리를 조각한 금속으로 된 군단 기)을 받아 들고 전투를 끝까지 지휘하였다. 21)


판사는 중상을 당한 채로 신음하다가 결국 죽었다. 하지만 이리하여 젊은 카이사르가 권력을 노리고 이들을 암살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2) 정황은 충분히 의심스러울 만하였는데, 콘술 판사를 돌보던 의사 글리코는 약에 독을 탔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23) 또한 역사가 아퀼리우스 니게르(Q. Aquilius Niger)는 심지어 젊은 카이사르가 히르티우스를 직접 칼로 죽이고 판사를 독살하였다고 썼다. 하지만 당시 제반 상황을 살펴보면, 이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만약에 젊은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이 합법적으로 임명한 집정관들을 죽였다면 그 사실을 아는 즉시 원로원은 젊은 카이사르를 역적으로 선포했을 것이 뻔하며 또한 병사들의 신망도 잃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두 집정관의 사인이 전사이든 독살 내지 암살이든 간에 어쨌든 공화국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더이상 머물렀다간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 판단하여 패잔병들을 이끌고 바다 쪽의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Gallia Narbonensis - 현재의 남프랑스)로 퇴각하였다24). 레피두스와 세를 합치기 위해서였다.


4월 27일, 로마에 공화정 군대가 안토니우스를 궤멸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화파들은 뛰듯이 기뻐하며 당장에 50일 감사제를 선포하였다.25) 이제 공화파의 승리가 눈 앞에 다가오는 듯 하였다. 이제 키케로가 이끄는 원로원파는 서쪽의 폴리오(C. Asinius Pollio)의 2개 군단, 키케로에게 사사건건 조언을 구하는 젊은 카이사르가 이끄는 10개 군단, 동쪽에서 한창 성공을 거두고 있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17개 군단 등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제 국가의 정당한 군대가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세력을 포위, 섬멸하고 동방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이탈리아에 상륙하면, 젊은 카이사르를 제거하고 공화정 복귀를 선포하면 되었을 터였다. 키케로는 이러한 자기자신만의 완벽한 구상이 실현되고 있음을 느끼면서 자신이 국가를 구한 지도자가 되리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26) 하지만 본격적인 최악의 사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4. 2차 삼두 정치의 성립과 대량 학살

젊은 카이사르는 10개 군단을 이끌고 무티나에 입성하였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구출하였다. 원로원은 이 둘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는 정식 개선식(triumphus)을, 젊은 카이사르에게는 약식 개선식(ovatio)를 허락하였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젊은 카이사르를 부추겨 에트투리아 지방으로 남하하여 안토니우스의 앞잡이인 벤티디우스(P. Ventidius)27)가 안토니우스와 합류하는 것을 막으라고 부추겼지만, 젊은 카이사르는 양아버지의 암살을 거든자의 명령을 받기를 거부하였다.


젊은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키케로 및 원로원파와 손을 잡았지만, 이제 원로원파한테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 것을 간파하였다. 자신을 '어린애(puer)'라고 부른 '아버지' 키케로는 만약에 브루투스의 17개 군단이 이탈리아에 상륙하면 당장에 젊은 카이사르를 '역적'으로 선언할 것이다. 안토니우스도 퇴각하면서 젊은 카이사르에게 이 점을 지적하였다.


한 편 남프랑스에 도착한 안토니우스는 모험을 시도하였다. 그는 패전한 이후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아 덥수룩한 상태로 레피두스 진영으로 찾아가 일장 연설을 시도하였다.28) 레피두스는 겁이 나서 진영에 나팔을 불어 안토니우스가 연설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에 안토니우스의 병사들은 노예 및 창녀로 변장하여 레피두스 군에 들어가 병사들을 설득하였고, 안토니우스는 군사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레피두스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에 양 군은 서로 합치게 되었고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서로 악수하고 군대를 하나로 합쳤다.


한 편 이탈리아에서는 플랑쿠스(L. Munatius Plancus)가 안토니우스를 저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고 있었다. 키케로는 플랑쿠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편지를 보내 안토니우스를 추격해 섬멸하라고 닥달하였으나, 플랑쿠스는 그게 좀 어렵다는 편지를 보냈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플랑쿠스는 젊은 카이사르에게 투항하였고, 이에 젊은 카이사르의 군대는 14개로 증강되었다. 자신의 군대한테도 버림을 받은 딱한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아드리아해를 빙 돌아 마케도니아에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합류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북쪽으로 도주하였으나, 갈리아 현지 부족장에게 잡혀 참수당었다.


한 편 키케로는 자신이 계속 로마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굳게 믿은 채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하였다. 젊은 카이사르에게는 당장에 서쪽으로 진군하여 안토니우스와 결판을 내라고 촉구하였으며, 레피두스에게 편지를 보내 안토니우스와 합류하는 경거망동을 저지르지 말로고 극력 요구하였다.29) 또한 원로원에서는 젊은 카이사르를 극력 찬양하면서 '아아 신이 보낸 사람'이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그리스에서 이 사실을 듣고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내 이 점을 극력 반박하였다. 즉 안토니우스보다 젊은 카이사르는 군주정을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위험한 인물이며, 로마의 내전은 극력 피해야 하는데 키케로 당신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빼어난 감식안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던 마르쿠스 브루투스 다운 지적이었다. 하지만 키케로는 이를 묵살하였다.


젊은 카이사르는 7월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어 자신의 군대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원로원은 거부하였다. 이에 젊은 카이사르는 대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아무도 막는 자는 없었다. 11개 군단의 대군으로 로마를 포위한 젊은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출마하여 퀸투스 페디우스(Q. Pedius)30)와 함께 BC 43년도 보결 집정관(consul suffectus)에 당선되었다. 이 날이 8월 19일이었다. 아직 젊은 카이사르는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그는 BC 63년 9월 23일 생이다). 키케로는 절망하여 캄파니아 지방으로 도주하였다.


퀸투스 페디우스의 이름으로 법이 하나 제출되었다(lex Pedia). 이 법은 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주요 골자였다. 우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Sex. Pompeius)와 마르쿠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역적'으로 선포되었다. 또한 젊은 카이사르는 당시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던 로마 국고를 탈탈 털어서 병사들에게 일인 당 2500 데나리의 거금을 일시적인 포상금으로 주었다. 또한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에게 선포되어 있었던 '역적' 선포는 취소되었다.


이제 젊은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와 대등한 위치에서 서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처음엔 고작 카이사르의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일개 개인에서 법무관 대리 권한을 거쳐 로마 행정관 가운데 최상위인 집정관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는 돈으로 맹렬한 충성을 확보한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싸우는 방법이 있겠으나, 동방에서 막강한 세를 과시하고 있던 브루투스를 생각하면, 안토니우스와 타협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도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그들의 군단 수와 그들의 전투 경험을 미뤄 보면 젊은 카이사르를 군사력으로 제압할 수도 있었으나, 이 역시 동방의 브루투스라는 변수 때문에 현명치 못한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때 신나게 싸웠던 무티나 남동쪽에 있는 보노니아(Bononia - 현재의 에밀리아-로마냐 속주에 있는 Bologna)의 한 섬에서 사령부 막사를 차리고 젊은 카이사르와 협상을 시작하였다.


이 세 야심가의 협상 테이블 위에서 로마 공화국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들은 로마 세계를 셋이서 통치하기로 하고 이후의 계획을 정하였다(제 2차 삼두정치). 로마에서는 또다시 17년 만에 세 사람의 참주가 군림하는 참주정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독재관(dictator)직을 영원히 없애기로 합의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젊은 카이사르에게 집정관 직을 내놓으라고 압박하였다. 이에 젊은 카이사르는 동의하였고 BC 43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안토니우스의 심복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와 가이우스 카리나스(C. Carrinas)가 집정관을 맡기로 하였다. 이들은 차기 집정관 명단까지 짰다. 


이듬해인 BC 42년에는 레피두스와 플랑쿠스가 집정관이 되도록 하고, BC 41년 집정관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L. Antonius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BC 40년도 집정관엔 폴리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Gn. Domitius Calvinus)31)가 내정되었다. 이에 따라 집정관 직은 로마 국가의 최고위직이 아닌 그냥 고위 공직자의 하나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한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의 딸과 결혼한 젊은 카이사르에게 자신의 딸을 맞이하라고 종용하였고, 이에 젊은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와 풀비아의 딸 클로디아(Clodia)와 결혼하게 되었다. 또한 키케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역적'으로 선포하고32), 이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한 명 한 명 죽이고 살리고를 따지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므로 일정한 기준을 정해 놓고 이에 맞춰서 죽일 사람들을 결정하였다. 당시 이 회담장에 있었던 장교 라테렌시스는 공화정이 몰락하고 참주정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 수치심을 느끼고 자살하였다.


이렇게 합의를 본 삼두(三頭)는 11월 로마에 장대한 행렬과 함께 입성하였다. 그들의 정치 체계 및 합의사항은 11월 27일 발효된 티티우스 법(lex Titia)에 의하여 승인 받았다. 이제 공포와 대량 학살이 이탈리아를 휩쓸게 되었다. 130명에 이르는 원로원 의원과 수 백명의 로마 기사들이 처형 명단에 올랐다. 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다. 술라 시대와 마찬가지로 처형을 담당하는 무리들은 먼저 사람을 죽이고 명단에 등재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키케로는 12월 7일에 살해당하고 목과 손이 잘려 로마 원로원 회의장에 전시되었고, 그의 광대한 저택은 몰수당했다.33) 그의 동생 퀸투스 키케로(Q. Tullius Cicero)34)도 살해당했다. 폼페이우스의 친족이었던 루킬리우스 히루스(Lucillius Hirus)와 삼니테스 인으로 살아남아 있었고 원로원 의원이었던 스타티우스는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유명 인사들은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있던 그리스로 도망가거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할거하던 시칠리아로 도망갔다.


하지만 명단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BC 64년도 집정관)35)는 독재관 카이사르의 먼 친척으로서, 안토니우스의 외삼촌이었다. 당시 이미 늙었으며 키케로에게서 칭찬 받는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젊은 카이사르와 친했던(?) 키케로를 죽이는 대신에 자신의 외삼촌을 죽이라고 젊은 카이사르에게 내주었고, 이에 따라 추격병들이 늙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쫓게 되었다. 이 가련한 늙은이는 여동생 집으로 피신하여 숨었다. 앞마당까지 쳐들어온 추격자들에게 늙은 율리아(Iulia - 안토니우스의 어머니)는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죽이려거든, 임페라토르(imperator - 안토니우스를 가리킴)의 어머니인 나부터 죽이고 가라!"면서 극력 막았고, 이에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36)


이탈리아의 상황은 대략 정리되었다. 젊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이제 이탈리아에 남은 원로원파를 뿌리 뽑고 대량 학살 및 약탈로 어느 정도 군자금을 짜내게 되었다. 이제 토벌되어야 할 적은 하나 남았다. 바로 동방의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였다. 바야흐로 필리피 회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주석-----------------------------

1) 아우구스투스의 어린 시절 이름에 투리누스(Thurinus)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의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법무관급 마케도니아 총독에 임명되어 임지에 가던 도중 스파르타쿠스 군의 잔당을 만나 작은 승리를 거두어 승리한 지방 이름을 따서 '투리누스'라 불리게 된 것을 아들이 계승한 것인데, 당시 감각으로 상당히 우수운 것이었나 본지 안토니우스는 이 사실을 알고 젊은 카이사르를 대놓고 조롱하였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하고 시큰둥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2) 수에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3단락


3) 아티우스 발부스 가문은 라티움 지역의 유력 평민 씨족 중 하나였다. 아티아와 결혼한 마르쿠스와 먼 친척 가운데서는 극력 카이사르 반대파도 있었다.


4) 5월 초 로마로 복귀한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선포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대로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겠으며 재산을 달라는 옥타비우스의 부탁을 무시하였다.


5)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45권 5번째 단락.


6) BC 44년 카이사르 암살 당시 하필이면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켜 거의 6개월 동안 화산재로 하늘을 가렸다. 그리하여 당시 3,4,5,6월 달은 어두운 나날들이 많았다. 당시 그린란드에도 이 화산재로 인한 지층이 발견될 정도였다고 한다.


7)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Servilia Caepionis).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Q. Servilius Caepio)와 리비아(Livia - BC 108년도 집정관의 딸)의 딸이다. 그녀는 카이사르의 애인이기도 하였으며, 극력 카이사르 반대파였던 카토(M. Porcius Cato)는 그녀의 (어머니만 같은) 동생이오,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브루투스(M. Iunius Brutus)는 그녀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카이사르 덕분에 국유지를 대량으로 싼 값에 불하받는 등 여러모로 호사를 누렸으나, 아들이 카이사르를 살해하자 살해 명분을 찾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얼마 안가서 죽었다(BC 42). 아들 브루투스 외에 딸이 셋 있었는데, 각각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P. Servilius Vatia Isauricus),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M. Aemilius Lepidus - 삼두 정치가 중 한 사람), 가이우스 카시우스(C. Cassius Longinus - 카이사르 암살자)에게 시집갔다.


8) 당시 젊은 카이사르에게는 일리리쿰에서 4천만 세스테르티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을 손에 넣었다. 이 돈은 독재관 카이사르가 파르티아를 정벌하기 위하여 일리리쿰에 갖다 놓았었다.


9) 헬리 혜성이다. 76년 내지 77년 주기로 태양을 큰 쌍곡선 형태로 공전한다.


10) 당시 물가와 현재 물가를 비교해봤을 때, 400세스테르티의 금액은 대략 100만원에 못미치는 금액이었다.


11) 로마군에서 최악의 형벌이었다. 죄를 저지른 병사들에게 열 명 당 한 사람 씩을 뽑아 죽을 때 까지 때려 죽이게 하는 잔인 무도한 형벌이었다. 카이사르 같은 경우 딱 한 차례 언도한 적이 있었는데, 흐지부지시켰다. 하지만 이는 여러 로마 장군들이 즐겨 쓴 방법으로서, 안토니우스나 크라수스부터 시작하여 듣보잡 로마 군단장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장군들이 이 형벌을 애용하였다.


12) 1데나리우스(denarius, 복수는 denarii)는 4 세스테르티(sestertii, 단수는 sestertius)이다. 다시 말해 500 데나리는 2000세스테르티로서 거의 500만원에 상당하는 금액이라 그 선동 효과는 클 수 밖에 없었다.



<C. Cilnius Maecenas>

13) 가이우스 킬니우스 마이케나스(BC70 - AD13)는 젊은 카이사르의 평생 동료로서 주로 외교적인 업무에 주력하였다. 한때 아레티움을 일대로 한 세력 떨치던 에트루리아의 한 왕국 가문의 후손이었는데, 왕국이 몰락하고 마이케나스 가문은 기사 계급에 머물렀다. 내전이 끝난 후에는 공직 경력을 거치지 않고 다양한 예술가들의 후원가 역할을 하였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뚱뚱한 편이었다.


14) quaestor라는 관직은 라틴어 동사 'quaerere(묻다, 질문하다)'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다시 말해 '회계 장부' 및 여러 정치 사안에 대하여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재무관'으로 번역이 되며, 시오노 나나미 같은 경우엔 '회계감사관'이라는 낱말로서 번역하였다.


15) 시칠리아를 강탈하다시피 한 통치로 유명한 베레스는 "로마 관리는 총독으로서 속주에 세 번은 파견되어야 한다. 첫번째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 돈을 끌어모아야 되기 때문이고, 두번째에는 빚을 갚고 개인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며, 세번째에는 각종 고발을 대비하여 검사와 배심원들을 매수하기 위해서이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16) 당시 카이사르는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과 대치하여 지루한 싸움을 하고 있던 와중에 하필이면 대홍수 때문에 갈리아로 통하는 식량 수송로가 막혀 곤혹을 치뤘다. 하지만 도강하여 폼페이우스 군을 쫓은 끝에 항복을 받았다.


17) 키케로가 '카토론'을 쓰게 된 이유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카토론'을 보고 불만족스러워 했기 때문이었다. 키케로는 '자신이면 더 잘 쓸 수 있다.'는 말을 브루투스 면전에서 대놓고 한 뒤에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갔다. 카이사르는 이에 키케로의 문장력에 감탄하면서 카토의 혐의를 조목조목 지적한 글을 썼다. 안티-카토론의 대략은, 1. 카토는 웃긴 놈이다. 2. 재물에 관심 없는 척 했지만, 친구의 장례식 때 친구가 금니를 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재를 채로 걸러 금을 가져갔다. 3. 카토는 아들 딸 낳아주고 잘 낳아준 아내와 이혼하고 그 아내를 친구인 호르텐시우스에게 주어 아들을 보게 하였다. 그 다음 호르텐시우스가 죽자 그 아내와 다시 결혼하여 친구의 재산을 강탈하였다. 황당하지 않은가? 4. 그러므로 카토는 악랄 무도하고 파렴치한 인간!!! 이다. 키케로의 격조 높은 찬양에 대한 카이사르의 반박은 워낙 저급하여 결국 묻히게 되었고, 키케로에 의해 '자유의 투사'라는 이미지로 복고된 카토는 그 이후 자유를 갈망하는 로마 인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 실례로 키케로는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와 청담을 나누기 즐기고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생활 태도로 유명하였던 루키우스 피소(카이사르의 장인)를 일컬어 "탐욕스럽고 에피쿠로스 학파의 괴짜 철학자와 함께 지나친 성적 쾌락을 추구한 변태이며, 이는 그가 속주 총독이었을 때 그에게 욕보이기를 원치 않았던 비잔티움 처녀들이 한꺼번에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한 것으로 판명된다. 또한 그의 선조는 지극히 야만스러운 갈리아인"이라 매도하였으며 생판 멀쩡한 클로디우스를 "누이와 간통하고 누이를 통하여 매형을 독살한 극악무도한 인간"이라 하였다. 또한 뛰어난 장군이자 '용감한 남자(vir fortis)'라는 평판이 자자했던 가비니우스를 매도하여 "머리는 곱슬곱슬하고 파티에서는 흥청망청 난잡한 술판을 벌이며 그의 과도한 성욕에 남아나는 창녀가 없으며 천성적으로 겁쟁이다"라 하였고, 카이사르의 앞잡이이자 재치가 넘치는 유쾌한 인물이었던 바티니우스를 일컬어 "어울리지 않게 검은 색 토가를 입고 다니는 그는 극악무도하여 매번 잔치를 열어 인간 제물을 바치지 않는 때가 없었다."고 욕하였다.


19) tolendum에는 "북돋아주어야"는 뜻 말고도 "없애버려야"라는 뜻도 있다. 이 짖꿎은 농담을 듣고 젊은 카이사르가 내보인 반응은 전하지 않는다.


20) 아울루스 히르티우스(BC 90-BC43)는 카이사르의 부하이다. 갈리아 전기의 8권은 발부스의 권유에 의하여 히르티우스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리아 전기도 그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으나, 요즘엔 부정된느 추세라고 한다. 무티나 회전에서 승리하였으나 전사하였다.


21) 수에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10단락.


22) 수에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11단락.


23) 당시에 그리스에서 머물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의사 글리코를 "그는 품위 있고 올바른 사람이다. 독살 같은 것을 할리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이에 글리코는 무죄방면되었다.


24)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17절. 당시 안토니우스는 패주하면서 수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평소엔 방탕하고 자제력이 없었던 그는 역경을 맞이하여 미덕을 발휘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병사들이 의기소침해 있으면 격려해주었으며, 누구보다 솔선수범하여 야생초 뿌리나 먹지도 않는 동물들을 잡아 먹었다. 안토니우스가 결국에 패하지만 병사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25) 로마인의 내전에서 이런 감사제(supplicatio)가 선언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원래 supplicatio는 로마가 외적의 침입을 막았을 때, 또는 외국을 침략하여 승리하였을 때 벌어지는 것이었는데, 폼페이우스는 동방 평정을 완료하고 12일 감사제를,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을 치루면서 한 차례의 15일 감사제와 두 차례의 20일 감사제, 문다 회전을 치루고 50일 감사제를 열긴 열었지만, 다 외국의 적, 또는 국내의 반란자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공화정 파는 명분을 크게 잃게 되었으며, 심지어 공화정 지지자가 분명한 아시니우스 폴리오(C. Asinius Pollio)조차 이를 개탄하면서 무티나 회전에서 죽은 병사들을 애도하였다.


26) 당시 키케로는 원로원을 움직여 한창 성공을 거두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각각 마케도니아 총독과 시리아 총독 직위를 주라고 설득하였다. 또한 당시 집정관 둘이 모조리 전사하여 보결 집정관이 취임해야 했는데, 키케로는 그 중 한 자리를 자신의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7)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심복이었다. BC 40년 파르티아가 로마를 침공하여 소아시아 전역을 정복하였는데, 벤티디우스는 몇 개의 군단을 이끌고 세 차례의 회전을 벌여 파르티아 원정군을 박살내고 로마의 경계를 수복하였다. 키케로는 그를 싫어하여 '천박한 노새몰이꾼'으로 비하하였다.


28) 로마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공화국의 시민인 만큼 이러한 연설은 정말로 위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내전기에도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하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가 강 하나를 두고 폼페이우스 진영에 연설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이 때는 폼페이우스 측의 라비에누스가 바티니우스와 카이사르를 모욕하며 연설을 뜯어 말려 중지되었었다.


29) 당시 키케로는 레피두스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인격적 모독을 가했는데, 이는 나중에 원로원파에 대한 대량 학살이 벌어질 때 레피두스 역시 키케로의 살해에 동의한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


30) 퀸투스 페디우스(Q. Pedius)는 독재관 카이사르 누나의 아들이다. 그는 젊어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 종군하여 8년 동안 군단장을 맡았다. 이후 카이사르가 암살 당하고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그는 아버지 다른 형제인 루키우스 피나리우스(L. Pinarius)와 함께 카이사르 유산의 1/4을 받는 상속인으로 지정되었다.


31)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는 이미 BC 53년도 집정관을 지냈었다. 집정관 임기가 끝나고 당시 로마 정부를 상대로 내전을 일으켰던 카이사르 쪽에 빌붙었다. 그리스에서 폼페이우스 군과 싸울 때는 카이사르 군대에서 랭킹 2위였다. 파르살루스 회전 때는 중앙군을 맡아서 지휘하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놀러(?)가 있을 때는 아시아 속주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미트리다테스 임금의 아들인 파르나케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이에 맞써 싸우다가 패배당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아우구스투스 편에 붙어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32) 삼두는 자신들의 친척을 역적으로 선포함에 주저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의 경우 외삼촌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BC 64년도 집정관)를 명단에 포함시켰으며, 레피두스는 자신의 친동생인 파울루스(L. Aemilius Lepidus Paulus)를 죽이는 데 동의하였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에게 당한 게 너무 많아 그를 제일 먼저 죽이고자 하였는데, 젊은 카이사르는 처음에 반대하다가, 나중엔 묵인하기로 하였다.


33) 키케로의 집에 대해서는 필자의 이전 포스팅을 참조할 것


34) 키케로의 동생이다. 형보다 다소 재능이 떨어졌으나, 카이사르에게 빌붙어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갈리아 전쟁에 참가하였는데, 그는 군단장 노릇을 하면서 시를 쓰고 연극을 공연하기도 하며 형한테 군생활이 따분하다는 요지로 편지를 쓰기도 하였지만, 네르비 족이 5만의 군세로 5000명도 안되는 자신의 군단 기지를 포위 공격하였을 때는 놀라운 집념과 통솔력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 원로원파에서 내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곧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가 죽은 이유는 거의 형 때문이었다.


35)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이전 포스팅 http://cafe.naver.com/booheong/50264 을 참조할 것.


36)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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