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오후에는 학교에서 돌아온 처남 처제들과 얘기를 나누는데 “ 매형은 미국에 대해 실망하실꺼라”
하고 “자기들은 학년을 낮추어 학교에 들어갔지만 영어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
젊은나이인데도 장시간 여행을 하고 피곤히 쌓여서 그런지 시차적응에 어려움도 없이 초저녁부터
잠에 떨어저 아침에 자고 나니 아내는 일터로 처남 처제들은 학교로 떠나고 없었다.
장모님이 아침을 준비하시는 동안 집밖을 나가 한두 블락을 돌아보니 집 옆에는 철길이고 길가에는
맥주병과 담배갑등 쓰레기가, 공중에는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저공 비행을 하니 소음이 굉장했다.
곧 노인부부께서 오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나를 데리고 시내에 있는 연방정부 청사에 가서 합법적
노동허가를 받는 사회보장 카드(Social Security Card)를 신청하고 와야 된다고 하셨다.
약속대로 노인부부(Mr & Mrs Williams) 가 오셔서 나를 데리고 가서 S.S. Card를 신청했다.
오가며 대화하는 중에 내가 알아듣기 쉽도록 영어를 천천히 정확하게 발음해 주시는 배려와 친절은
내 마음을 감동케 하셨고 “인호(Inho)"라는 어색한 이름을 외우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아름다웠고
미국에 막 도착했지만 그런대로 대충 나와 대화의 소통이 이루워지니 매우 좋아하셨다.
은퇴한 이 두분들은 우리 처가집과 나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따뜻한지 나에겐 부모님처럼 정말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데 미국인에 대한 첫인상을 너무 나 좋게 심어주셨고 차가없는
처가식구들에게 발이 되어 주셨고 온갖 도움을 주시는 분들인데 나에겐 정말 감동의 연속이였다
자기들이 내 Lunch를 사주신다고 했다. 무엇을 먹고 싶나고 해서 Mac Donald Hamburger 를 먹고
싶다고 하니 Big Mac/French Fry/ Coca Cola 를 사주시는데 처음먹어보는 Original American Food 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기름기있고 튀긴 음식이기 때문에 거의 먹지 않지만 ….
앞으로 나의 계획이 어떠냐고 물으시길래 “위3개의 신분증이 준비되면 미육군에 입대해 3년만에
시민권을 받아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빨리 초청해 오고 싶다” 고 대답했더니 이분들이 “너는 아직
젊으니 공부를 하면 전액 장학금도 주고 기본 생활비도 주는데 관심이 있느냐” 하시길래 “ Yes I do”
라고 대답했더니 나를 루이빌 남침례교 신학대학원 (Southern
Baptist Seminary)으로 안내하셨다.
건물안에 들어가니 침례교 유명인사들의 대형사진들이 있는데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Billy Graham
Martin Luther King ,
Abraham Lincoln 등 이세분 뿐이였다.
얼마후에 알았지만 이분들은 나를 침례교 목사를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선교하실 생각을 하셨다.
이분들 말씀이 너의 Driver License는 자가들 차가 Station
Wagon 이라 크고 나이가 많아 너에게
운전 가르쳐 주기가 서로 불편하니 자기들이 가능한 한국사람을 찾아서 운전면허증을 빨리 딸 수
있도록 돕겠다고 하시니 그야말로 감동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영주권(Green
Card)과 시민권(Citizenship)을 받기가 매우 까다롭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한다.
그 당시는 미국 이민법이 매우 느슨하고 쉬웠다. 주한 미국대사관 산하 영사관(Consulate
Office)에서
Visa를 받을때 다른 서류안에 영주권이 들어 있었고 입국하는 도시의 이민국(INS)에 제출하면
미국 거주지 주소로 일주일 정도 후에 우편으로 배달 되었다.
지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신용카드와 다른 삶의 편의를 위해 사용되는 카드가 많이 있지만
그당시 미국에서는 이 3가지 신분카드가 기본적으로 있어야 살아갈 수 있었다.
이중에 영주권(개목걸이, Yangkee Tag)에 관련된 초기 미주 한인들 애환의 스토리는 정말
연속극 같이 그 내용들이 무궁무진 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