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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3강 -2(2009.07.06)
10-5 돌아가 쉬는 곳 大德(대덕)아 儞且識取弄光影底人(이차식취농광영저인)하라 是諸佛之本源(시제불지본원)이요 一切處(일체처)가 是道流(시도류)의 歸舍處(귀사처)니라 是儞四大色身(시이사대색신)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脾胃肝膽(비위간담)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虛空(허공)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나니 是什麽(시십마)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고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시이목전역역저물일개형단고명)한 是這箇(시자개)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이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便與祖佛不別(변여조불불별)이니라 但一切時中(단일체시중)에 更莫間斷(갱막간단)하야 觸目皆是(촉목개시)언마는 祇爲情生智隔(지위정생지격)하고 想變體殊(상변체수)로다 所以輪廻三界(소이윤회삼계)하야 受種種苦(수종종고)하나니 若約山僧見處(약약산승견처)하면 無不甚深(무불심심)하며 無不解脫(무불해탈)이니라 돌아가 쉬는 곳. 大德(대덕)들이여, 그대들은 또한 識取(식취)하라. 알아서 취하라. 잘 알아라. 깊이 깊이 알아라 하는 뜻에서 취할 取 자를 붙혔습니다. 식취하라, 무엇을. 弄光影底人(농광영저인), 그림자를 희롱하는 사람을 식취하라. 그림자를 희롱하는 사람을 알아라 이 말이여. 그림자는 뭐여. 우리의 그 생각들이고 우리의 몸이고 생각 따라서 몸이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자면 인형극을 할 때 인형을 조종하는 무대 뒤에 사람이 있듯이. 그걸 알아라 이 말이여. 임제 스님은 그걸, 그걸 하나 알면은 뭐 온갖 팔만 대장경에서 뭐라고 설명을 해놨든, 천불 만불을 설명하고 천보살 만보살을 해놨든 그건 한꺼번에 그냥 한방에 다 해결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림자를 조종하는 그 사람을, 조종하는, 弄, 희롱하는, 그랬죠. 그림자를 희롱하는 그 사람을 식취하라. 잘 알아라. 그게 소위 隨處作主,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바로 그 주인공을 식취, 알아라. 지어라, 주인을 지어라. 그러면은 立處皆眞이다. 어디에 있든지간에 서 있는 그곳이 그대가 있는 그곳이 전부 진리의 세계고 행복한 삶이다. 그것은 是諸佛之本源(시제불지본원)이다. 모든 부처의 근원이다, 본원. 또 一切處(일체처)가 是道流(시도류)의 歸舍處(귀사처)다. 그렇게 되면은 이 그림자를 조종하는 그 사람만 잘 식취할 것 같으면은 일체처, 어디에 있든지 그 모든 곳이 도류들, 그대들의 귀사처다, 집으로 돌아가 쉬는 곳이다. 객지 생활 실컨 하다가 저기, 수십년 객지 생활 하다가 집에 돌아가 가지고 정말 편안하게 다리 뻗고 푹 쉬는 그런 곳이다 말야. 그러기 전에는 항상 객지 생활입니다. 왜냐, 밖을 향해서 돌아다니고 경전에 뭐라고 해 놓은 거, 교리 쫓아 가고 이론 쫓아 가고 무슨 경전에 이렇게 했는데 하, 그거 부처님 경전인데 어찌 감히 부정할 수 있나. 내가 뭐라고 부정하겠나. 그대로 경전 소리 쫓아야지. 아미타불이 어떻고 뭐 극락 세계가 어떻고 분명히 해 놨는데... 그래서 얼마나 복잡해집니까. 쉴 날이 없는 거요. 그러면 계속 그런 데에 휘말리는 것은 뭐라고? 객지 생활이고 나그네 생활이고 노숙자 생활이야. 그런데 그림자를 희롱하고 있는 그 한 물건, 그것을 잘 알 것 같으면은 그대로가 쉬는 곳이다. 집으로 돌아가 쉬는 곳이다. 쉬는. 그 다음에 여기 이제 사십 구재 법문할 때 반드시 이야기하는 그런 글이죠. 是儞, 儞 자 부터, 이, 이것은, 하는 건데 四大色身(사대색신)도, 지수화풍 사대로 된 이 육신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설법하고 청법할 줄 알지 못하며, 不解, 이해하지 못한다, 할 줄 모른다, 이런 뜻입니다. 설법도 못하고 청법도 못한다. 사대 육신이 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여. 몸뚱이 안에 있는 脾胃肝膽(비위간담)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이라. 설법하고 청법할 줄 알지 못한다. 또 그러면 텅 빈 저 허공이 하느냐, 虛空(허공)도 說法聽法(설법청법) 할 줄 알지를 못하나니 그러면 是什麽(시십마)가 說法聽法(설법청법)고, 무엇이 그러면 설법하고 청법할 줄, 解, 아는가. 뭐가 들어서 말을 하고 말을 들을 줄 아는가.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시이목전역역저물일개형단고명), 그랬어요. 그대들, 是儞(시이), 目前(목전), 지금 바로 눈 앞에, 뭐 멀리 있는 게 아냐. 일 촌도 떨어져 있는 게 아냐. 바로 눈 앞에. 그리고 歷歷底(역역저)야, 너무 역역하고 분명한 거. 그러면서 勿一箇形段(물일개형단)이야. 조그마한 모양도 없다, 勿. 일개형단도 없다. 형단이 뭐야. 형상, 몸. 어떤 모양도 없다 이거여. 연필 만한 것도 없어. 그런 것도 없어. 그러면서도 孤明(고명)이야. 홀로, 외로울 孤 자 밝을 明 자. 이건 이것 만이 우주에 꽉 찼다 이겁니다. 고명이여. 외롭게 밝다. 다른 거 아무 것도 없어요. 전부 나 뿐이여. 바로 목전에 너무나도 역력하고 그러면서 일개의 형단도 없어. 아무 형체도 없어. 아무 형체도 없는 오직 그것 만이 있는, 그래서 孤明, 외로울 고 자가, 이것 뿐이다 하는 뜻입니다. 고명이라는 게. 내가 없어봐요. 내 한마음이 없어봐요. 여기에 뭐가 있겠는가. 아니 이 세상에, 이 우주에 뭐가 있겠어요. 그러면 내가 있다고 하는, 내 마음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로서 모든 이 세상과 이 우주가 순식간에 이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전부 나야. 나라구. 그래서 孤明이라 했어. 내가 이렇게 있는 거요. 그런 정도입니다. 목전에 역역한 이 이것은. 這箇(자개)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이다. 이것이 설법하고 청법할 줄 아나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만약에 이와 같이 본다면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은 便與祖佛不別(변여조불불별)이니라, 곧 바로 조사와 다르지 않고 부처와 다르지 않다. 바로 부처고 바로 조사다. 그러니까 지금 말할 줄 알고 말 들을 줄 아는 이 사실, 이것 뿐이다 이거여. 이게 모두다, 그 말입니다. 이게 이제 보면은 뭐 완벽한 이론은 물론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육신을 부정했기 때문에. 육신도 사실은 불생불멸이예요. 따지고 보면은 육신도 불생불멸이거든요. 그래서 이건 완벽한 이론은 아니지마는 그래도 우리가 보통 불교로써는 아주 그 이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십 구재 법문을 할 때 나도 이 법문을 참 잘 하는데, 왜냐. 사대 육신은 없어졌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재를 지내고 천도를 하잖아요. 무슨 물건이 있어서 재를 지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천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말이야. 지금 재 지내고 천도한다고 모두 안 왔네, 앞에. 윤달이 돼 가지고. 그래서 육신은 한 줌의 재로 돌아갔지마는 천도해주고 재를 지내주고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대 육신이 불해설법청법이니까 설법하고 청법할 줄 모르니까 사대 육신하고 관계 없다 이거여. 관계없는 그 무엇이 있어서 우리는 천도도 해주고 재도 지내주는 거라. 만약에 육신 뿐이라면은 인간이 사대 육신 뿐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육신의 법칙대로 살아야 됩니다. 육신의 법칙이 뭡니까. 죽으면 그 뿐이다 이거여. 재 지낼 필요도 없는 거여. 땅에 그거 묻어버리고 태워서 한줌의 재로 돌아왔는데 뭐 재 지낼 게 있어요? 육신의 법칙은 그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만이 보는 것이 아니고 깨달은 사람 눈에는 그 외에 다른 진짜 존재가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그걸 도외시할 수 있습니까? 무시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육신의 법칙대로 하지를 않고 정말 일심의 법칙대로 살다 보니까 눈에 없는 영가도 제도를 하고 눈에 없는 영가도 천도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걸 꼭 이제… 비싸게 법사 돈 주고 청하지 말고 요거만 잘 해석해 주라고요. 요 구절만. 나도 어차피 이거 밖에 안 해주니까, 잘. 이 원리가 우리가 천도하는 데는 딱 들어맞는 원리야 그냥. 육신은 다 갔다 이거여. 갔는데 천도해 줄 필요가 있는가. 왜 천도하느냐. 바로 육신 아닌 진짜 생명체가 있기 때문에 한다 이거야. 비위간담도 불해설법청법이요 허공도 불해설법청법. 그래 뭐가 설법청법할 줄 아느냐. 바로 목전에 역력고명한, 물형단자라고 했으니까 모양없는 놈이라고 했기 때문에 사대 육신으로서 모양을 형성하고 있는 그거하곤 관계없는 거에요, 이게. 그래서 이 존재를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재를 지내는 것이고 천도를 올리고 또 그것을 믿고 그대로 그 법칙대로 일심의 법칙대로 우리가 불교를 실천하고 신행하고 있는 거죠. 아니면은 사실 불교 생명은 없어요. 이거 아니면 불교 생명 없습니다. 우리 생명도 물론 없지마는 불교의 생명이 없어져버려요. 그래 어떤 남방에서 공부한 스님보고 사십 구재 법문하는데 소개를 어떻게 했는데 올라가가지고는 사십 구재 이거 아무 소용 없다고. 무아만 공부한 사람이 돼 놓으니까 무아를 공부한 사람이 돼 놓으니까 아무 필요 없는 거, 법문을 한다고 올라가가지고는 필요없다는 소리를 하니 그게 그런 모순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이해가 안되면 이런 거라도 펴놓고 이야기를 해주든지 하지. 그러니까 우리가 간단해요. 무아를 주장하는 사람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은, 무아, 무아, 무아, 아가 없다, 내가 없다 라고 하는 그 사람, 지금 그 사람, 그 사람은 우리가 부정하지 못하지 않느냐 이거여. 무아, 무아, 하는 그 사람은 부정하지 못하지 않느냐. 그래서 천도하고 사십 구재 한다. 그걸 뭐 대승불교에서 그리고 일체 선불교에서 뭐 수천 수만 가지 이름을 지어 붙히지 않습니까. 但一切時中(단일체시중)에 更莫間斷(갱막간단)하야, 그것은 일체시중에서 간단이 없어. 간단이 없어요. 그게 우리가 잠 잔다고 그게 가만히 잠자는 줄 아세요? 그것은 말하자면 제 六 의식과 제 七 말라식까지 잠이 들지. 그렇지만 저 밑에 그보다 더 밑에 근본식은 잠들지 않아. 간단이 없어. 觸目皆是(촉목개시)라, 그것이 작용하기로 하면은 촉목개시야. 눈에 닿는 것마다 다 그것이야. 촉목개시. 참 좋은 말이여, 觸目皆是다. 그 이제 만목청산이다, 이런 표현을 해요. 滿目靑山. 찰 滿 자 눈 目 자. 만목이 청산이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게 청산이다. 그게 뭔 말인고 하니 전부 마음이다. 나다. 마음이다. 같은 말이거든요. 촉목개시다, 눈에 닿는 것마다 다 그것이다. 그래 어떤 수행자가 조실스님한테 왔어요. ‘도가 뭡니까.’ ‘네 앞에 지금 보이는 게 뭐냐.’ ‘아 뭐 스님도 보이고 뒤에 병풍도 보입니다.’ ‘그래? 그래도 모르겠냐?’ 그랬어요. ‘예, 모르겠습니다.’ 마침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어. ‘지금 무엇이 들리느냐?’ ‘아, 지금 비가 많이 와서 비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 그래도 모르겠느냐? 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세계, 네 귀에 꽉 차게 들려오는 그 모든 세계가 전부 도다. 그래도 모르겠냐?’ 이런 대화가 있어요, 옛날 그 어록에. 알고 보면 그렇게 쉽습니다. 왜냐하면은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 그렇게 못되는 이유를 여기다 밝혀놨어요. 祇(지), 다만, 그런데 觸目皆是야. 전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그것이 전부 그것인데, 그런데 다만, 情生智隔(정생지격) 想變體殊(상변체수), 유명한 말입니다, 이게. 是 情生智隔(정생지격) 想變體殊(상변체수)다. 情이 생겨서, 정이 뭡니까. 마음 心 변에 푸를 靑 했죠. 마음이 변색이 됐다 이거여. 마음 그대로 있질 않고 뭔가 꿈틀거려가지고 뭔가 꿈틀거려가지고 거기에 색깔이 칠해지기 시작해. 그대로 드러나질 않고. 그래서 정이 생김으로 해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隔(격)해졌어, 막혀졌어. 情이 생기면서 지혜가 막히고. 想變體殊(상변체수)라, 생각이 변함으로, 생각은 한 순간도 그냥 있지 않거든요. 한번 흘러 내려 나오기 시작하면은 예를 들어서 저기 샘물이 한번 터지면은 계속 끊임없이 흘러 내려오듯이 상변체수라, 이건 뭐 구산차제의 어떤 교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만 그럼 임제 스님한테 미안하지, 그건. 임제 스님 사상에 안 맞으니까. 그저 간단하게 단순하게 이렇게 설명하고 마는데, 想이 변함으로해서 本體가 달라져버렸다. 지금 우리는 전부 그런 상황입니다. 정생지격하고 상변체수해서, 촉목개시이고 만목청산인 그것을 그대로 여과없이 탁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보지를 못하고 전부 거기에 뭔가 망상이 끼고 색깔이 끼고 그러면서 변해져 버리고. 그래서 촉목개시인, 눈 앞에 보이는 것마다 전부 道고 전부 法이고 전부 진리인 거기에서 전부 변색이 되고 달라져 버렸다. 所以로, 輪廻三界(윤회삼계), 삼계에 윤회하게 되고 受種種苦(수종종고), 가지가지 고통까지 받게 되나니, 若約山僧見處(약약산승견처)하면, 만약 若約, 산승견처에다 의지한다면은, 산승견처에 입각해 본다면은 無不甚深(무불심심)이며 無不解脫(무불해탈)이라, 나는 깨달은 사람이야, 촉목개시인 사람이야. 만목청산인 사람이야. 일체유심의 사람이야. 그러므로 무불심심이야, 甚深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 매우 깊고 깊고 깊은 그 도리 아닌 것이 없고 무불해탈이야, 여기도 해탈이고 저기도 해탈이고 누워도 해탈이고 앉아도 해탈이고 서도 해탈이고 죽어도 해탈이여. 살아도 해탈이고 죽어도 해탈이여. 무불해탈이여. 이게 바로 생사해탈이 가능한 그런 그 이야기입니다. 뭐 다 죽는데 생사해탈이라니 그 참 이해가 잘 안 되지요. 그런데 해탈, 해탈, 해탈을 그만치 많이 이야기할 때는 거기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실과 다른 그런 세계의 해탈이 있는 거죠. 그래서 임제 스님은 내 입장에 있어서는 무불심심이고 무불해탈이다. 참 아주 속 시원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0-6 마음은 형상이 없다 道流(도류)야 心法無形(심법무형)하야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在眼曰見(재안왈견)이며 在耳曰聞(재이왈문)이요 在鼻齅香(재비후향)하고 在口談論(재구담론)하며 在手執捉(재수집착)하고 在足運奔(재족운분)이라 本是一精明(본시일정명)이 分爲六和合(분위육화합)이니 一心旣無(일심기무)하면 隨處解脫(수처해탈)이로다 山僧與麽說(산승여마설)은 意在什麽處(의재삼마처)오 祇爲道流(지위도류)가 一切馳求心(일체치구심)을 不能歇(불능헐)하야 上他古人閑機境(상타고인한기경)이니라 道流(도류)야 取山僧見處(취산승견처)하면 坐斷報化佛頭(좌단보화불두)라 十地滿心(십지만심)은 猶如客作兒(유여객작아)요 等妙二覺(등묘이각)은 擔枷鎖漢(담가쇄한)이요 羅漢辟支(나한벽지)는 猶如厠穢(유여측예)요 菩提涅槃(보리열반)은 如繫驢橛(여계려궐)이니 何以如此(하이여차)오 祇爲道流不達三祇劫空(지위도류불달삼지겁공)일새 所以有此障礙(소이유차장애)니라 若是眞正道人(약시진정도인)인댄 終不如是(종불여시)니 但能隨緣消舊業(단능수연소구업)하고 任運著衣裳(임운착의상)하야 要行卽行(요행즉행)하며 要坐卽坐(요좌즉좌)하야 無一念心希求佛果(무일념심희구불과)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古人云(고인운), 欲作業求佛(약욕작업구불)이면 佛是生死大兆(불시생사대조)라하니라 그 다음, 마음은 형상이 없다. 道流(도류)야 心法無形(심법무형)하야 通貫十方(통관시방)해서, 心法은 형상이 없어요, 마음의 도리는. 그 형상이 없다고 해서 무아, 무아, 무아만 옳다고 자꾸 그렇게 남방불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거, 그거는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르고 너무 치우친 소견이죠. 무형하면서도 통관시방이야, 十方을 다 꿰뚫고 있어, 시방을. 그래서, 在眼曰見(재안왈견)이요, 눈에 있으면은 보는 작용을 하고, 在耳曰聞(재이왈문)이요, 귀에서는 듣는 작용하고, 在鼻齅香(재비후향)이요, 코에서는 향기를 맡는 작용을 하고, 在口談論(재구담론)이요, 입에서는 끊임없이 말하고, 在手執捉(재수집착)이라, 손에서는 책도 잡고 연필도 잡고 책상도 잡고 이렇게 집착, 잡잖아요. 잡는 작용. 在足運奔(재족운분)이라, 발에 있어서는, 운분, 걸어다닌다 이거여. 발은 계속 몸을 옮기고 걸어다닌다. 本是一精明(본시일정명)이여, 본래는 하나의 정밀한 밝음, 하나의 정명이라. 그런데 分爲六和合(분위육화합)이라, 나눠져서 여섯 가지로 화합하게 됐다. 그러니까 발하고 화합하면 걸어다니고 또 손에 있으면은 가만히 있다가도 손에 가면 척 연필로 글씨도 쓰고 책도 잡기도 하고 덮기도 하고 뭐 손 작용이 되고. 또 그것이 입에 있으면 또 그냥 가만히 있더니 그냥 말을 막 하기도 하고 향기도 맡고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그게 이제 여섯 가지로 화합해서 그렇게 작용하는 거죠. 一心旣無(일심기무)하면 隨處解脫(수처해탈)이로다, 한 마음이 육근으로 작용하는 그 마음, 그 놈. 그 놈의 마음이 뭔지 하여튼 그 놈의 마음이 만약에 없을 것 같으면 수처해탈이라. 그거 다 거둬들였다 합시다. 지금 우리는 거둬들일래야 쉽게 거둬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수처해탈이야. 어디 있든지 다 해탈이야. 山僧與麽說(산승여마설)은, 산승이 이렇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意在什麽處(의재삼마처)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가, 뜻이 어디에 있는가. 祇爲道流(지위도류)가, 다만 도류가, 도 닦는 여러 벗들이, 一切馳求心(일체치구심)을 不能歇(불능헐)하야, 일체 치구하는 마음, 자꾸 뭔가 밖을 향해서 구하는 그런 마음을 능히 쉬지를 못해서 上他古人閑機境(상타고인한기경)이니라, 저 古人들의 부질없는 機境, 부질없는 기경이라고 하는 것은 뭐 손가락을 들었다든지 꽃을 들었다든지 무슨 뭐 주장자로 내리쳤다든지 아니면 할을 했다든지 뭐 아주 일구법문을 했다든지 등등 그런 것을 전부 고인의 한기경, 부질없는 거여, 그것도 일종의. 뭐 덕산방 임제할 그래봤자 그것을 현재 지금 하고 있는 그런 모든 것, 그것을 전부, 上, 이것은 이제 그것을 받든다, 그것을 인정한다, 그 위에 올라가서. 그래서 그것만 자꾸 받드는 거죠. 거기에 올라가가지고 이리 저리 높힌다, 이런 뜻으로 봐도 좋습니다. 저 고인의 부질없는 기경만 높히고 있다. 그것만 떠받들고 있다 이말이여, 떠받든다, 이런 뜻입니다, 上 자는. 그러니까 치구심을 쉬어버릴 것 같으면 그런 일이 없죠. 무슨 뭐 천불 만조가 와서 뭐라고 한들 뭐 눈 하나 까딱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치구심이 있으니까 있지도 않는 것을 찾아 나서는 거죠. 道流(도류)야 取山僧見處(취산승견처)하면, 산승의 견처를 취할 것 같으면은, 坐斷報化佛頭(좌단보화불두)라, 보신, 화신, 뭐 법신도 다 해당 되는 거죠. 법보화 삼신을 부처의 머리를 앉은 자리에서 댕강 잘라버린다. 단, 자를 斷 자니까. 坐斷, 앉은 자리에서 잘라버린다. 이거 뭔 말인고 하니 싹 부정해 버리고. 그거 다 나와는 관계없다 이겁니다. 하도 들어 놓으니까 법신 보신 화신이 있는 거 같이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어요. 十地滿心(십지만심), 그래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이렇게 해서 오십 이위 점차가 너무나도 확연하게 사실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공부 많이 하면 그래요. 불교 공부 많이 해 놓으면은. 뭐라고? 십지만심, 십지 보살은 猶如客作兒(유여객작아)요, 노숙자다 이 말이여, 객작은. 나그네다 이 말이여. 요즘 노숙자란 말이 딱 맞아, 전국구라고 할까. 허허허, 그거 괜찮겠네. 십지만심은 마치 전국구요. 객작아니까, 딱 맞네요. 等妙二覺(등묘이각)은, 제일 높은 자리 아닙니까. 등각, 묘각은, 이 두 개는. 두 각은, 擔枷鎖漢(담가쇄한)이며, 말하자면 가쇄한, 가쇄를 짊어진, 이 枷는 목에 죄인이 아주 죽을 죄를 지은, 반역죄 같은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쇄를 채워요, 목에다가 큰 칼을 채우고 그 다음에 손에도 채우고 발에도 채우고 다 채워가지고 겨우겨우 걸어갈 수 있도록 그래 가지고 또 이제 우리에다 가둬 가지고 수송을 하고 그런 걸 많이 보잖습니까. 그런 것을 짊어진 사람이다 이 말이여. 등각 묘각이라는 게 그런 죄인이여. 천하의 죄인이여. 천하의 나라를 뒤엎으려고 했던 그래서 지금 사형장에 끌려가는 그런 죄인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 아주 매정하고 극단적인 이런 표현을 써도 이게 우리 의식 속에서 잘 지워지지가 않는 거요. 너무 우리 의식 속에 뿌리를 깊이 깊이 내리고 있어서. 그래서 이제 간혹 이런 극단적인 표현을 보고 깜짝 깜짝 놀래서 눈을 환하게 뜨는 사람들이 있어요. 羅漢(나한),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猶如厠穢(유여측예)다, 마치 똥이다 말여. 똥과 같은 것이다. 菩提涅槃(보리열반)은 如繫驢橛(여계려궐)이라, 마치 당나귀를 묶어 매는 말뚝이라 이말이여. 참 이런 표현을 어떻게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여기 불교 십대 용어가 나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법보화 삼신이 나왔고 십지만심이 나왔고 십지 보살, 등각, 묘각, 아라한, 벽지불, 무슨 보리 열반, 다 나왔네요 뭐. 최고의 아주 높은 경지를 이야기한 용어들이죠. 그게 뭐예요. 요즘말로 한마디로 하면 전부 뻥이다, 이거여. 뻥이여. 그건 차라리 점잖은 표현이죠. 何以如此(하이여차), 어째서 그러냐. 祇爲(지위), 다만, 때문이다. 뭣 때문이여. 道流(도류)들이, 도 닦는 여러 벗들이, 삼아승지겁이 空하다고 하는 것을 通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삼아승지겁을 통해야 수행을 해야 성불한다고 하는 그런 이론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저 선문에서 아주 참 자주 인용하는 마조 선사와 대매 법상 스님의 이야기도 참 그런 것을 뒷받침해주는 좋은 대화죠. 법상 스님이 이제 마조 스님에게 가서 즉심시불이라고 하는 법문을 듣고는 ‘아 그래? 우리 마음이 부처구나. 그럼 뭐 별 거 아니네’ 하고 돌아와서 토굴 생활을 오래 했어요. 하도 오래 토굴 생활을 깊은 산중에 가서 하니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그냥 산에서 산전해서 먹고 살고 그래.. 어떤 스님이 주장자를.. 그때도 이제 우리도 어릴 때 산에 가서 그 노가지 나무 베 가지고 뭐 해제철 가까우면 그걸 베 가지고 불 때 가지고 주장자 만들고 이제 하는 거 좋아했는데… 어떤 스님이 그런 주장자 나무 벨려고 산에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다가 그만 길을 잃었는데 길 잃은 덕택에 어떤 토굴을 하나 보게 됐는데 거기에 마침 법상 스님이 살고 있었어. 그래서 이에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아 이러이런 스님이 혼자 그렇게 살거든. 그래서 와서 마조 스님한테다 이야기를 했어. 아, 그 스님이 없는 줄 알았더니 사라진 줄 알았더니 토굴에서 그렇게 혼자 그렇게 수십 년을 살더라, 마침 주장자 베러 갔다가 길을 잃고 그 스님 토굴을 발견하게 됐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 얼마나 공부가 됐는가 한번 누가 가서 시험해 봐라, 그랬어요. 그래 심부름 하는 사람이 가서 그랬어. 왜 여기 이렇게 오랫 동안 있느냐 하니까 아, 그전에 마조 스님이 뭐 즉심시불이라고 이 마음이 부처라고 해서 뭐 그러면 됐지 더 이상 뭐 할 게 있냐고 그래서 이렇게 그냥 사노라고. 그러니까 그 스님이 아주 상당히 사람 점검을 잘 하는 이라. 아 요즘 마조 스님이 그런 이야기 안 하고 그 유행은 지나갔고 요즘은 非心非佛이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데 무슨 여태 즉심시불 붙들고 늘어졌냐. 그러니까 아, 그 노장 참 사람을 놀리기도 잘한다, 노장이야 비심비불이라 하든 말든 나는 즉심시불이다, 나하고는 관계 없으니까 가라고. 그래서 그 말을 그대로 와서 이제 마조 스님에게 전했죠. 그러니까 아, 참, 매실이 어지간히 익었구나, 그 그 산이 대매산이야, 마침 큰 大 자 매화 梅 자 대매산인데 매실이 어지간히 익었다, 다 익었다 그런 뜻이지요. 그래서 이제 대매 법상 스님이라고 그렇게 유명하게 됐는데 아주 그 재미있는 이야기죠. 거기에 삼아승지겁이 거기에 세상에 어디 있으며 한순간에 그냥 즉심시불이라고 하는 말 듣고 그냥 그대로 아무 의심도 없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빨려 들어가버린 거죠, 그 이치에.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사는 거죠. 所以(소이)로 有此障礙(유차장애)니라, 삼지겁이 공한 줄을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所以로 이와 같은 장애가 있다. 이게 전부가 무슨 뭐 온갖 장애들 뿐이죠. 장애가 있게 됐다. 若是眞正道人(약시진정도인)인댄, 만약에 진정한 도인이라면, 도 닦는 사람이라면은 終不如是(종불여시)니 마침내 이와 같지 아니하니 但能隨緣消舊業(단능수련소구업)하고, 이거 이제 중요한 말입니다. 임제 스님이 업을 녹인다는 이야기가 여기 딱 한 마디 나와요. 업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즉심시불이면 끝이고 청법저인 식취하면 그걸로 끝인데 그 다음에 업의 문제는 어떻게 할건가. 여기 이제 그 말이여. 종불여시니 단능수련소구업이라. 다만 능히 인연 따라서 구업을 녹이는 거야. 구업 녹이는 노력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거 세월만 가는 거요. 세월만 가면은 말하자면은 즉심시불의 도리를 바로 알면은 바로 알면은, 뭐 등각, 묘각, 뭐 십지만심, 벽지불, 나한 뭐 보리열반, 이거 다 때려치우고 바로 청법저인, 임제 스님의 이론대로라면은 법문 듣는 그 사람, 그것이 부처면 부처고 조사면 조사다 라고 하는 이 사실을 알면은 그 다음에는 업은 저절로 녹는다, 무슨 참회를 하고 절을 하고 뭐 백팔 참회를 하고… 그런 거 아니다 이거여. 그런 사실을 안 사람이 무슨 짓을, 무슨 악한 짓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설사 좋지 아니한 업이 있다손 치더라도 隨緣消舊業(수련소구업)이여, 인연 따라서 옛 업이 녹아진다. 저절로. 봄이 오면은 골짜기에 있는 눈도 절로 녹듯이 그렇게 녹는 거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그 업은 문제되지 않아요. 업이 있든 없든 간에 그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 삼지 않습니다. 隨緣(수련)이라고 하는 것, 참 좋은 말인데 隨緣無作이죠. 인연 따라서 조작 없이, 억지로 무슨 행위를 假姿하지 않고 하는 것이 수련입니다, 수련무작. 인연 따라서. 作은 이제 억지로 하는 거요, 뭐든지 시간 정해 놓고 한다든지 무슨 뭐 하루에 무슨 백 팔 배를 한다든지 뭐 삼천 배를 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을 딱 정해놓고… 그런 거 없이 그냥 시간 가면 저절로 업이 녹게 돼 있다. 그러니까 근본을 딱 알아차려 버리면 지엽적인 건 절로 돌아가게 돼 있다. 任運著衣裳(임운착의상)이라, 任運, 운에 맡겨서, 그러는데 사정 따라서, 사정 따라서 의상, 옷을 입는다. 말하자면 뭐 옷이, 갈아 입을 옷이 있으면 입고 없으면 못 입는 거요. 任運이라는 게 그겁니다. 사정 따라서. 要行卽行(요행즉행)하며, 행하기를 요하면은 곧 행하며, 앉기를 요하면 곧 앉아서, 앉고 싶으면 앉고 서고 싶으면 서서, 無一念心希求佛果(무일념심희구불과)니, 한 순간의 마음도, 佛果, 부처의 결과를 희구하는 것이 없다. 더 이상 뭐 부처가 있어야 부처를 구하지. 그래 부처를 구하는 마음이 없음이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무엇을 인연해서 이와 같이 되는가. 古人(고인), 여기는 이제 양나라 지공 화상인데 대승찬에 있는 말입니다. 欲作業求佛(약욕작업구불)하면, 만약에 업을 지어서, 육바라밀이라든지 참선이라든지 뭐 경이라든지 일체 수행하는 것을 業이라 그래요, 여기서는.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할 것 같으면은. 佛是生死大兆(불시생사대조)니라, 부처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생사의 큰 근원이다, 대조, 큰 근원이다, 조짐이다, 이런 말이죠. 생사의 근원. 멀쩡한 사람에게 말하자면은 긁어서 멀쩡한 사람에게 긁어서 부스럼을 내는 일이다. 그리고 머리 위에다가 다시 머리를 하나 더 올려 놓는 거와 같은 그와 같은 일이다. 그 영가 증도가에도 구불시공조만성(求佛施功早晩成)가, 그런 말이 있죠. 부처를 구하는데 공을 베푸는 것이 공을 베푸는 게 이제 수행을 말하는 거죠. 수행을, 말하자면 수행을 해서 부처를 구할려고 하면 도대체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부처는, 진짜 부처는 수행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하는 그런 이야깁니다. 그거 얼마나 좋습니까. 수행해서 이루어진다면은 정말 삼아승지겁, 정말 누가 보장도 못하는 삼아승지겁 세월을 누가 그걸 기다리며 그걸 어떻게 경과할 것이며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 이론은 참 정말 잘못된 이론이여. 부처님 물론 위대한 존재는 위대한 존재야. 그렇다고 그런 사람이 되는데 삼아승지겁의 세월이 걸린다는 그런 이론을 만들어 내놓고 저 멀리 부처님을 그렇게 우리하고 거리를 멀리 두는 그런 이론은 정말 그건 잘못된 거요. 언제 그걸 갈 것이며 누가 갈 것이며 또 다음 생도 보장 못하는데 그 어떻게 그 삼아승지겁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바로 이 순간, 참 그래서 그런 문제에 있어서 이 선불교, 특히 임제록 같은 이런 선불교의 극치에 이르렀을 때 이런 그 조사 어록은 정말 뭐 더 나아갈 데 없는 그런 아주 명쾌한 가르침이예요, 이거는. 정말 더 이상 좋은 가르침이 없습니다, 사실은. 본래의 부처, 본래 사람 사람이 완전한 존재라고 하는 이 사실을 이해시키는 데는 이거보다 더 좋은 가르침이 없어요, 사실은. 그런데 이제 부처님의 정신에서 보면은 대승 사상, 대승 보살 사상이 결여돼 있다고 하는 이것이 아주 큰 약점이죠. 큰 약점이여. 선불교의 큰 약점이 이겁니다. 이게 왜 그럼 선불교가 높다고 하면서 왜 그런 게 없노 하면은 이건 이제 도교적인 색깔이야. 불교의 어떤 정신하고 중국의 도교, 기존,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그 도교하고 만나 가지고 그런 어떤 그 삶을 좋아하는, 아주 그 도사적인 그런 삶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무수히 많으니까 또 그런 사람들이 만나서 이런 선불교의 어떤 정신이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게 됐는데 이것은 정말 어디에도 없는 거거든요. 중국에서부터 비로소 생긴 건데 이것은 이제 정말 순수 불교 입장에서 보면은 대승 보살 정신이 없기 때문에 이건 아주 큰 결점이죠, 사실은. 지극히 소승적이라, 보면, 알고 보면. 그걸 우리가 알고 공부해야 돼요. 요런 게 우리에게는 또 기분이 좋아요. 상당히 좋고 뭐 남을 위하고 보살행하고 돈도 아까운데 어디가서 보살행 하기도 귀찮고 한데 이게 차라리 훨씬 마음에 들고 좋은 거야. 그래서 대승행이 어렵다는 거요, 보살행이 어렵다는 게 바로 그겁니다. 당장에 누구 뭐 보태 줄려고 해도 주머니 돈이 아까운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보살행 하겠어요? 차라리 뭐 앉아서 참선하는 게 낫지. 그래서 삼십 년 사십 년 참선한 사람도 단돈 만원을 누구한데 희사 못하는 거여. 자기를 위해서 삼십 년 사십 년은 참선해도 남을 위해서 단돈 만원 보시 못해. 보살행이 그렇게 어려운 거요. 만약에, 여러분들은 잘 하시겠지. 만약에 한다면은 여러분들은 대승 보살이야. 그거 참 신기하죠. 자기를 위해서는 삼십 년 사십 년 참선해. 하는데 남을 위해선 단돈 만원을 못 써. 참 신기한 일이예요, 이게. 그래서 이제 통불교적인 입장에서 정말 불교의 정상에서 바라볼 때 이것은 아주 철저한 소승 불교고 자기 개인 문제 해결하는 데는 너무 좋아. 그러니까 그런 것을 우리가 알고 공부해야 되는 거지.
첫댓글 _()()()_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고맙습니다.
情生智隔(정생지격) 想變體殊(상변체수) 觸目皆是(촉목개시) ㅡ눈 앞에 보이는 것마다 전부 道고 전부 法이고 전부 진리인 거기에서 전부 변색이 되고 달라져 버렸다. 고맙습니다._()()()_
但能隨緣消舊業...다만 능히 인연 따라서 구업을 녹인다. 고맙습니다. _()()()_
觸目皆是촉목개시 滿目靑山만목철산이언마는 祇爲情生智隔지위정생지격하고 想變體殊상변체수로다... 고맙습니다._()()()_
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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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是眞正道人인댄..만약에 진정한 도인이라면, 終不如是니..마침내 이와 같지 아니하니 ,但能隨緣消舊業하고..다만 능히 인연 따라 구업을 녹인다..고맙습니다 _()()()_
말할 줄 알고 말 들을 줄 아는 이 사실, 이것 뿐.....禪慧珠 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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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즉심시불,
감사 합니다...()()()
孤明, 외로울 고 자가, 이것 뿐이다 하는 뜻입니다. 고명이라는 게. 내가 없어봐요. 내 한마음이 없어봐요. 여기에 뭐가 있겠는가. 아니 이 세상에, 이 우주에 뭐가 있겠어요. 그러면 내가 있다고 하는, 내 마음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로서 모든 이 세상과 이 우주가 순식간에 이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전부 나야. 나라구. 그래서 孤明이라.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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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위해서는 삼십 년 사십 년 참선해. 하는데 남을 위해선 단돈 만원을 못 써. 참 신기한 일이예요.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但能隨緣消舊業 任運著衣裳 要行卽行 要坐卽坐 無一念心希求佛果 ... _()_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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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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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주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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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이 소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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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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