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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역사 제4장 : 아유타야 왕국
Ayutthaya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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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540년경의 아유타야 왕국의 세력권
[출처: thailandsworld.com]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อาณาจักรอยุธยา, 혹은 Ayudhya)은 1351년부터 1767년까지 존속한 태국의 왕조이다. 아유타야는 중국, 베트남(안남), 인도, 일본, 페르시아, 그리고 보다 후대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델란드, 프랑스 등에 대해 성읍 바깥에 한해 집단거주지를 허용함으로써, 국제무역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 자세를 보여준 왕조였다.
16세기의 외국 상인들은 이 왕국을 동양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왕국이라고 묘사했다. 나라이(Narai, 1656–1688 재위) 왕의 궁전은 프랑스의 루이 14세 국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온 대사는 나라이 왕의 도성을 파리에 버금가는 규모와 부를 축적한 곳이라 표현했다.
버어마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아유타야의 조공국에는, 오늘날의 미얀마(버어마)에 위치했던 샨족(Shan) 국가들과 치앙마이(Chiang Mai) 지역에 위치했던 란나왕국(Lanna), 중국의 운남성과 산시성 지역, 라오스의 란상왕국(Lan Xang), 베트남에 위치했던 참파왕국(Champa), 그리고 하-버어마(반도부 버어마)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포함됐다.(주1)
외국의 기록들에 따르면 아유타야는 공식적으로는 "시암"(Siam: 사얌)으로 알려졌지만, 여러 자료들은 아유타야 사람들은 스스로를 "따이족"(Tai)이라 불렀고 그 국가에 대해서는 "꿍따이"(Krung Tai) 혹은 "따이족 왕국"(Kingdom of the Tais)으로 불렀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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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개관
1.1. 아유타야의 기원
아유타야의 기원에 관해 가장 광범위하게 수용되는 이론에 따르면, 이 시암의 왕국은 그 초기에 짜오파야 강(Chao Phraya River, 차오프라야 강) 계곡에 위치한 아유타야(Ayutthaya, อยุธยา)를 근거지로 삼아 성립됐고, 그 주변에는 라워왕국(Lavo, 라보)과 수와르나부미 왕국(Suphannaphoom 혹은 Suvarnabhumi, 수판나품 왕국)이 인접해 있었다.
(사진) 왓 파난 초엥(Wat Phanan Choeng)에 봉안되어 있는 19미터 높이의 거대한 청동불상. 아유타야 도성이 건설된 1351년보다도 이전인 1324년 무렵 조성된 것이다. ☞ 확대사진 바로가기
한 사료는 14세기 중반에 역병이 번지면서 우텅(U Thong, อู่ทอง: 1351-1369 재위) 왕이 짜오파야 강(Chao Phraya, 차오프라야) 줄기로 둘러싸인 범람원 지역의 섬과 같은 지형으로 천도를 했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이전의 항구도시였던 아요타야(Ayothaya)로, "아요타야 시 람텝 나콘"(Ayothaya Si Raam Thep Nakhon), 즉 "스리 라마(Sri Rama)의 천사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이곳에 건설된 신도시는 "아요타야"(Ayothaya) 혹은 "쿵텝 드와라와티 시 아요타야"(Krung Thep Dvaravadi Si Ayothaya)라 불렀는데, 후대에 "아유타야"(Ayutthaya), 즉 "무적의 도시"란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알려졌다.(주2)
또다른 사료에서는 우텅 왕이 원래 남부의 해안도시 페차부리(Phetchaburi, เพชรบุรี) 출신으로 부유한 화교계 상인이었다고 전한다. 이 사료는 그가 부를 추구하여 아유타야로 왔다고 한다. 원래 "아요다야"(Ayodhaya)라는 산스끄리뜨어 지명은 이 지역에 대한 힌두교 문화의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다.
1.2. 정복과 팽창
14세기 말에 이르면, 아유타야는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대국으로 평가받게 된다. 이때부터 아유타야는 북쪽에 위치한 이웃의 도시국가들인 수코타이(Sukhothai), 깜팽펫(Kamphaeng Phet), 피사눌록(Phitsanuloke) 등을 정복하여 헤게모니 쟁탈전에 뛰어든다. 그리고 15세기가 끝나기 전에 아유타야는 이 지역의 가장 고전적 강대국이었던 크메르제국의 수도 앙코르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다. 결국 짜오파야 강 평원에서 크메르제국의 영향력은 감소해갔고, 그 사이 아유타야가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이 제안한 바와 같이,(주3) 아유타야는 통일국가라기보다는 자치를 누리는 여러 도시국가들과 조공국들의 결합체였다. 이들 조공국들은 아유타야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상태에서 권력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부 조공국들은 아유타야 왕족이 직접 다스리는 경우도 있었고, 일부에서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소유한 지방통치자들이 다스리기도 했다. 조공국들은 수도인 아유타야가 전쟁을 치르거나 침략을 당하면 지원을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조공국의 반란이 발생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그럴 경우 아유타야는 그들을 제압해야만 했다.
아유타야에서는 왕위계승에 관한 규정된 절차가 부재했고 강력한 능력주의(meritocracy) 전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매번 왕위계승이 문제가 될 때마다 지방의 실력자나 고위 세도가가 군세를 모을 수 있는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도로 진격하여, 유혈 쿠테타에 의한 권력승계도 여러번 존재했다.(주4)
15세기부터 아유타야는 말레이반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은 말라카해협에 위치해있던 항구도시가 주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아유타야는 말라카(Malacca)에 대해 수차례 실패로 돌아간 원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명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말라카는 점차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요새화되어 갔다. 15세기 초에 이르면 명나라 제독 정화(鄭和, Zheng He, 마삼보)가 이 항구도시에 자신의 군사기지를 건설함으로써, 시암인들은 더 이상 이곳을 노릴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보호 덕분에 말라카는 번성하여 아유타야의 강력한 적대국으로 부상했고, 1511년 포르투갈에 정복당할 때까지 그러한 구도를 유지했다.(주5)
하지만 16세기 중반이 되면, 퉁구(Taungoo 혹은 Toungoo)에 위치해있던 버어마 왕국의 세력이 강성해졌다. 이후 버어마는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작해, 타빈슈웨티(Tabinshwehti: 1531~1550 재위) 왕과 바인나웅(Bayinnaung) 왕 치세에 아유타야를 공격했다. 1548년 타빈슈웨티 왕의 침략을 시작으로 기나긴 갈등의 시대가 이어졌다. 1569년 결국 아유타야는 함락당했고, 퉁구의 조공국으로 전락했다. 왕세자와 고위 관료들이 볼모가 되어 퉁구로 끌려갔다. 그러한 왕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후대에 나레수완(Naresuan, นเรศวร: 1590-1605 재위) 대왕이 되는 나렛(Naret) 왕자였다.(주6)
나렛 왕자가 아유타야로 귀환한 후 다시금 국가는 강성해졌다. 나레수완 왕은 버어마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는 유명한 "코끼리 전투"를 통해 퉁구의 왕위계승권자까지 살해하면서 버어마로부터 최종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후 아유타야는 역내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당시 아유타야는 북부의 수코타이 왕국과 란나왕국, 그리고 남쪽의 말레이반도와 해양까지도 관할권에 두었다. 아유타야는 해상무역을 통해 사치품은 물론이고, 새로운 전쟁무기와 총포류들도 확보했다. 그리하여 17세기 중반 나라이 왕 치세의 아유타야는 대단히 번영된 나라로 성장해있었다.(주7)
아유타야는 18세기에 점차 그 지방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지역 관찰사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독자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고, 도성에 반기를 드는 반란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중엽이 되면 아유타야는 몬족(Mons)과 서부 해안 지역의 버어마 사이의 전쟁에 말려들게 된다. 이 전쟁에서 패한 몬족들이 아유타야로 피난을 해왔다. 버어마는 아유타야를 적대적 국가로 파악하고 마침내 침략을 해왔다. 수개월에 걸친 포위가 이뤄진 후, 아유타야는 마침내 1767년 4월에 항복을 했다. 이후 도시는 약탈당했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로써 아유타야 왕국은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주8)
(주3) Higham, Charles (1989). The Archaeology of Mainland Southeast Asia. Cambridge, Eng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p.355.
(주4) "The Aytthaya Era, 1350-1767", U. S. Library of Congress. 2009-07-25 접속.
(주5) Jin, Shaoqing (2005). Office of the People's Goverernment of Fujian Province. ed. Zheng He's voyages down the western seas. Fujian, China: China Intercontinental Press. p. 58. 2009-08-02 접속.
(주6) Wyatt, David K. (2003). Thailand: a short history.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pp. 90-91.
(주7) Wyatt, David K. (2003). pp. 90-121.
(주8) "The Portugese in Ayutthaya", History of Ayutthaya. 2010-03-05 접속. |
2. 아유타야의 왕권
아유타야의 왕은 거의 신격화된 절대군주였다. 통치 이데올로기는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자연적인 지도력으로부터 도출해냈다. 수코타이에서 발견된 "제1 비문"에 따르면, 수코타이 왕국은 도덕률에 기반한 통치이념을 갖고 있었다. "제1비문"에는 람캄행(Ramkhamhaeng) 대왕이 성문 앞에 걸려있는 종을 두드리는 백성이 있으면, 그 누구의 소청이라 할지라도 귀담아 들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왕은 백성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아유타야 왕국 시대로 들어오면, 이러한 자애로운 아버지 상은 사라진다. 대신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 문화권에서 이상적 군주상으로 여겨지는 "짜끄라와르띤"(Chakravartin, 전륜성왕[轉輪聖王]) 개념이 도입되어, 왕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를 법(法, 진리)으로써 장악한다는 "차까팟"(chakkraphat)이란 용어로 사용되었다.(주9)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왕은 위쉬누 신의 화신으로 백성을 보호하는 자이다. 한편 불교 전통에서는 왕이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백성들의 안녕을 목적으로 삼는 법왕(法王: 덕의 통치자), 즉 "담마라자"(Dhammaraja, 탐마랏)이다.
아유타야 국왕들의 공식 칭호는 그들의 종교였던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들은 인드라(Indra), 시와(Shiva), 위쉬누(Vishnu: 혹은 라마[Rama])와 같은 다양한 힌두교 신들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대관식 역시 "우주의 주군"인 시와신을 상징하는 바라문 사제들이 집전을 했다. 하지만 국왕은 법전에 의거하여, 자신의 궁극적 의무를 백성을 보호하고 악을 물리치는 것으로 삼았다.
힌두교와 함께 불교의 영향도 섞여 있었다. 왕은 붓다의 덕목을 닮은 "보살"(菩薩, Bodhisattava)과 같은 존재로 믿어졌다. 따라서 그는 붓다의 "진리의 가르침"(Dharma Law)을 존경하고 그에 따르는 것을 덕목으로 했고, 때로는 "법왕"(Dhammaraja[탐마랏]: 진리의 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국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번영과 평화를 위해 사찰과 불상을 조성하는 일이었다.(주9)
또한 이 지역 고유의 "파차오 팬딘"(Phra Chao Phaendin: 대지의 주군)이란 개념도 존재했다. 또한 왕궁 내 전범에 따라, 왕족들은 특별한 언어인 "라차삽"(Rachasap: 산스끄리뜨어로는 "라자샵다"[rājāśabda])을 사용했다.
아유타야에서는 왕이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를 수여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 범위는 귀족에서 평민에 이르렀으며, 심지어는 승려와 거지들까지도 "삭나"(Sakna) 혹은 "삭디나"(Sakdina)라는 규정에 따라 이 토지배분 대상에 포함됐다. 하지만 아유타야의 토지분배 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삭나" 혹은 "삭디나"가 유럽식 봉건제도와는 그다지 유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주10)
1685년 아유타야를 방문했던 프랑스인 사제 아베 드 슈와지(Abbé de Choisy)는 "아유타야의 왕은 절대적 권력을 지녔다. 그는 시암인들의 진정한 신이다. 어느 누구도 그의 이름을 감히 발음할 수 없다"고 적었다. 17세기의 또다른 네델란드인 작가 판 플리엣(Van Vliet)은 시암의 왕이 "그 백성들로부터 신 바로 다음으로 존경받고 숭앙되고 있다"고 적었다. 국왕은 법률과 명령을 내렸다. 반역자나 반란자와 같은 중요 범죄자의 경우, 때로는 국왕 자신이 최고 판관이 되어 재판을 진행하기도 했고, 처벌도 내렸다.(주11)
따일로까낫(Trailokanat, ไตรโลกนาถบพิตร: 1431-1488) 왕 시대의 수많은 제도개혁 중 하나는, 우빠랏(Uparaja, 親王)(역주1) 직위를 채용한 것이다. 이 직위는 언제나 국왕의 장남이나 친형제가 임명됐고, 왕위계승에 관한 일종의 정례적 절차를 형성했다. 특히 일부다처제 왕조일수록 왕위계승 문제는 특히 어려움이 많은 부분이었다. 실제로 왕과 우빠랏 사이의 갈등도 존재했고, 왕위계승권에 대한 논란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주12)
그러나 아유타야의 왕권에 제한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유타야 왕의 권력은 항상 그 연령이나 지지도와 같은 개인적 카리스마와 관련이 있었다. 지지도가 낮은 경우 유혈 쿠테타를 통한 왕위찬탈도 매 시기마다 나타나곤 했다.
도성 안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이는 "깔라홈"(Kalahom)이라 불리는 장수로서 국방을 담당하는 책임자였다. 특히 아유타야 말기에 이르면, 왕자들과 장군들 사이의 왕위다툼으로 인해 왕실은 쇠약해져 있었다.
(주9) "Introduction", South East Asia site.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2009-10-03 접속.
(주10) "The National Language", Mahidol University. November 1, 2002. 2009-10-17 접속.
(주11) Bavadam, Lyla (March 14, 2006). "Magnificint Ruins", Frontline 26 (6). 2009-10-17 접속.
(역주1) 산스끄리뜨어 "우빠"(upa)는 "가까운", "다가서다"를 의미하는 접두어이고, "라자"(raja)는 "왕"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빠라자"(uparaja, 태국어 발음-우파랏)를 "친왕"(親王)으로 번역한 것이다.
(주12) "HM Second King Pinklao", Soravij. 2009-10-17 접속. |
3. 사회 및 정치의 발전
아유타야의 왕은 고도로 계급화되어 있으면서 사회구조까지 확장된 사회정치적 위계질서의 정점에 서있었다. 증거가 충분하진 않지만, 아유타야 왕국 사회조직의 기본적 단위는 개별 가구들로 이뤄진 부락 공동체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소-자작농들이 얼마든지 오랜 기간 경작을 할 수는 있었지만, 토지의 명의는 "수령"(headman)이라 불리는 이가 공동체 명의로 관리하고 있었다.(주13)
경작가능한 토지 보유량이 늘어나면서, 국가는 농경 및 국방을 위한 적절한 인적 자원 관리에 의존했다. 아유타야의 드라마틱한 흥기는 끊임없는 전쟁을 수반했다. 하지만 지역 내의 어떠한 세력도 기술적 우위를 점하지 못해, 결국 전투의 결과는 항상 군대의 규모에 의존해야만 했다. 아유타야는 한차례씩 전승을 거둘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영토 내로 붙잡아왔다. 그리고 그들을 동화시키면서 강제노역을 부과했다.(주13)
모든 자유민들은 지역 영주와 함께 공복(phrai: 파이)으로 등록됐다. 전쟁이 발생하면 남성 "파이들"은 징병되었다. 지역 영주들은 점차로 궁정관리 및 지방행정관으로 변화되어 갔다. 왕은 궁극적으로 시와(Shiva) 신 혹은 위쉬누(Vishnu) 신이 지상에서 화현한 지위로 올라섰고, 정치-종교적 숭배대상으로서 원래 불교도 궁중의 한 부분인 왕실 바라문(Brahmans) 집단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불교적 맥락에서 법왕은 "보살"(깨달았지만 타인을 돕기 위한 자비심으로 열반[nirvana]에 들지 않은 이)이었다. "신왕"에 대한 믿음은 비록 후대로 오면서 종교적 함축은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18세기까지도 널리 퍼져 이어졌다.
"파이"의 위에는 "나이"가 있었고 군역과 공공사업의 부역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공식적인 토지도 지급됐다. "파이" 역시 조세의 의무로서 부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파이는 자신과 잘 맞지 않는 "나이"가 강제노동을 부과하면, 맘에 드는 "나이"나 영주에게 노예신분으로서 자신을 매각할 수 있었다. 그러면 공공 부역의 상실을 보상하기 위해 새로운 "나이"나 영주가 대금을 지불했다. 19세기까지도 노동력의 3분의 1을 제공한 것은 "파이"였다.(주13)
부(富), 신분, 정치적 영향력은 상호 관련되어 있었다. 왕은 "삭디나"(sakdi na) 시스템에 따라, 궁정의 관료와 지방행정관들, 그리고 군지휘관들에게 왕실에 대한 봉사의 댓가로 봉토를 지급했다. 각 관리들에게 배당되는 봉토의 규모는, 그들이 거느린 평민(파이)의 수에 비례했다. 아유타야의 계급제도에서는 "수령"이나 영주들이 거느린 인적 자원 동원능력에 따라, 다른 이들과의 신분 및 부의 차이가 결정됐다. 위계질서의 정점에 서있는 왕은 상징적으로 최대의 지주였고, 이론적으로는 "파이 루웡"(phrai luang: 왕실 공복)이라 불리는, 가장 많은 수의 "파이"를 거느린 이였다. "파이 루웡들"은 세금을 냈고, 왕군(王軍)에서 복무했으며, 국왕의 영지에서 일했다.(주13)
그러나 군 병력은 나이(nai) 혹은 문나이(mun nai)에 의존했는데, 이 명칭의 의미는 "영주"(lord)라는 뜻이다. 이러한 장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파이솜"(phrai som), 즉 백성들(subjects)을 지휘했다. 이 장교급 인원들은 전쟁이 발생하면 왕의 명령에 복종했다. 따라서 이러한 장교계급들이 왕국의 정치에서 핵심적인 인물들이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일으킨 쿠테타가 최소 2차례는 발생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국왕과 그 장군들 사이에 유혈을 동반한 권력투쟁이 있었고, 그 경우 언제나 궁정관료들에 대한 숙청도 이어졌다.(주13)
14세기 초의 따일로까낫(혹은 따일록[Trailok]) 왕은 봉토에 대한 원칙을 확정했고, 파이들을 신분질서 상에서 궁정관료로 등용토록 했다. 이로써 19세기에 공무원들에 대한 봉급제가 도입될 때까지 운영될 태국의 사회적 구조를 결정했다.(주13)
이러한 계급제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불교승단(sangha)이었는데, 시암 및 화교 남성들은 출신계급에 관계없이 승려로서 출가를 할 수 있었다. 불교사원(wat)은 시암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이 시기에 화교(중국인)가 처음으로 시암으로 건너와 정착했고, 얼마 안 있어 국가의 경제적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오랜 사회적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주13) 화교들은 부역의 의무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왕국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고, 상업활동에 종사했다. 16세기에 이르면 화교들이 아유타야의 국내 상거래를 장악했고, 관료사회 및 군사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화교들의 경우 중국에서 아내와 함께 온 경우가 많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대부분 태국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다.(주13)
라마티버티 1세(Ramathibodi I)는 법전인 <다르마 샤스뜨라>(Dharmashastra)를 편찬했는데, 이는 힌두교 전통 및 태국의 관습법에 근거했다. <다르마 샤스뜨라>는 19세기 후반까지도 태국 법률의 중요한 수단으로 존재했다. 품계 및 군호를 제수받은 관리들의 위계질서에 기반한 관료제도도 도입됐고, 이로써 사회 전체가 하나의 연관 속에서 조직화됐다. 하지만 힌두 전통의 카스트제도(caste system)는 도입되지 않았다.(주14)
16세기에는 호전적인 왕조가 들어선 버어마가 흥기했다. 이들은 치앙마이와 라오스를 침략하고, 태국과도 전쟁을 벌였다. 1569년에는 버어마가 대부분 왕족들로 구성됐던 반란군과 동맹을 맺고 아유타야 도성을 함락시킨 후, 모든 왕족들을 버어마로 붙잡아갔다. 버어마에 조력했던 한 지방관찰사였던 탐마랏(Dhammaraja: 1569–1590)이 아유타야에 버어마의 조공국을 세운 후 왕이 되었다. 태국은 탐마랏의 아들인 나레수완 왕 시대에 이르러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나레수완 왕은 버어마에 대항했고, 1600년경에 버어마 세력을 몰아냈다.(주15)
나레수완 왕은 부왕 시대에 발생했던 반란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 전체의 행정을 아유타야의 도성에서 직접 관장토록 했다. 그리하여 왕자들을 지방행정관으로 내려보내던 관습을 중지시키고, 국왕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아 실행하는 관료들을 지방행정관으로 파견했다. 이후로 왕자들은 수도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다. 물론 권력투쟁은 지속됐지만, 그것은 왕이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궁정 내부에서만 제한적으로 진행되었다.(주16)
나레수완 왕은 새로운 관료들을 통제하기 위해, 파이 의무를 지닌 모든 자유인 백성들을 파이 루웡이 되게 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왕의 통제권 하에 직접적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후 왕은 이들의 복무서비스를 여러 관료들에게 분배해주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러한 방식은 왕이 모든 인적 자원을 독점한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또한 왕이 모든 백성의 노동 서비스를 소유했다는 점에서, 동시에 왕은 모든 토지도 소유한다는 논리를 제공했다. 장관급 관료나 지방행정관 직책은 ----- 그에 부수되는 삭디나 권리를 포함하여 ----- 언제나 일부 가문들이 독차지 했는데, 그들은 혼인관계를 통해 국왕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제로 국왕과 세도가 사이의 혼인은 그 결연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특히 19세기에는 이 전통이 매우 만연했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 왕은 언제나 수십명을 헤아리는 아내들을 두고 있었다.(주16)
비록 나레수완 왕이 개혁을 단행하긴 했지만, 국왕의 중앙집권 행정체제의 효과는 이후 150년간에도 상당히 불안정하게 운영됐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절대적으로 국왕이 소유권을 가진 것이었지만, 왕토 이외의 지역에서는 행정체제가 누수됨으로써 실제의 양상은 제한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국왕과 중앙정부의 영향력은 도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18세기 후반에 버어마와 전쟁을 치르게 되자, 지방들은 매우 손쉽게 도성을 포기했다. 따라서 군대가 쉽사리 버틸 수 없게 되면서, 버어마 침략자들의 공격에 저항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주16)
(주13) "Ayutthaya", Mahidol University. 2002-11-1. 2009-11-01 접속.
(주14) "Background Note: Thailand", U.S. Department of State. July 2009. 2009-11-08 접속.
(주15) Ross, Ph.D., Kelly L. (2008). "The Periphery of China -- Korea, Vietnam, Thailand, Laos, Cambodia, Burma, Tibet, and Mongolia", Freisian School. 2009-11-08 접속.
(주16) Ring, Trudy; Robert M. Salkin (1995). International Dictionary of Historic Places: Asia and Oceania. 5. Sharon La Boda. Chicago: Fitzroy Dearborn Publishers. p.56. 2009-12-10 접속. |
4. 종 교
아유타야의 주요 종교는 상좌부불교(Theravada Buddhism)였다. 하지만 국가 내 여러 지역에서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 역시 신봉되고 있었다. 또한 17세기에 중국을 거쳐 도착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일부 제한된 지역에서 가톨릭교 역시 신봉되었다.(주17)
5. 경제발전
태국민족(Thais, 타이족)은 언제나 풍요로운 식량공급을 누렸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소비할 용도 및 세금을 납부할 목적으로 쌀을 재배했다. 남는 것은 종교적 제도들을 위해 보시했다. 하지만 13~15세기에는 태국의 쌀농사에 주목할만한 변화가 발생했다. 천수답 농사에 의존하던 고지대들이 관개시설을 갖추게 되었고, 이를 통해 논에 공급하는 농업용수를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지역들에서 점착질의 쌀을 파종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북부 및 북동부 지방의 특산물로 산출되고 있다.
하지만 짜오파야(Chao Phraya, 차오프라야) 강의 범람원 지역 농민들은 다양한 종류의 벼농사를 지었다. 여기에는 소위 벵갈(Bengal) 지역에서 보급되어 들어온 부유성의 호리호리하게 생긴 비-점착성 쌀이 재배되었다. 이 품종은 저지대 논들의 수위가 상승하기 전의 짧은 기간에 수확을 할 수 있을만큼 빠른 생장력을 갖고 있었다.(주18) 새로운 품종은 매우 쉽고 풍부하게 자라났고, 이로써 산출된 잉여 쌀을 싼 가격에 해외로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아유타야는 범람원의 남쪽 말단에 자리하고 있어서, 경제활동의 허브 역할을 했다. 왕실의 보호 아래 부역 노동을 통한 운하들이 건설되었고, 이 수로를 통해 논에서 생산된 쌀들이 중국으로 수출하러 가려는 국왕의 화물선으로 옮겨왔다. 이 과정에서 바다와 육지 사이에 위치한 뻘밭으로, 사람의 거주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됐던 짜오파야 삼각주가 새로운 경작지로 자리매김을 했다. 전통적으로 왕은 벼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을 거행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주18)
비록 아유타야의 쌀 생산량이 풍부하긴 했지만,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해 때때로 쌀수출이 금지되기도 했다. 쌀은 서양인들과 사치품이나 무기를 교환하는 데 사용되곤 했지만, 벼농사 자체는 주로 국내시장을 겨냥한 것으로, 쌀수출이 그다지 지속적인 목표가 되지는 않았다.
17세기에는 유럽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서양 상인들은 주로 소총이나 대포 같은 현대식 무기들을 가지고 들어와, 내륙의 정글에서 산출되는 소방목(sappanwood, 蘇枋木) 목재나 사슴가죽, 그리고 쌀과 같은 토산품들과 교환했다. 포르투갈의 여행가 토메 피레스(Tomé Pires)는 16세기의 오디아(Odia=아유타야)에 대해 "좋은 상품들이 풍부한 곳"이라 적었다. 아유타야로 들어오는 외국 상인들은 대부분 유럽과 중국에서 왔다. 그들은 정부에 세금을 납부했다. 아유타야 왕국은 쌀과 소금, 건어물, 아라크 주(arrack: 독한 증류주), 채소가 풍부했다.(주19)
아유타야의 해외 교역은 17세기에 네델란드인들과 교류하면서 그 절정에 달했다. 아유타야는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에게도 주 목적지가 되었다. 또한 외국인들이 아유타야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아유타야 왕들은 봉급을 받는 외국인들을 고용했고, 때때로 이들은 적과의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17세기 말에 프랑스와 단교한 이후, 아유타야의 주요 교역상대국은 중국이 되었다. 하지만 "네델란드 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es Company: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VOC)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아유타야의 경제는 18세기에 급격하게 쇠퇴했는데, 버어마가 침공하자 아유타야 경제 전체가 1788년에 붕괴하고 말았다.(주20)
(주18) "The Economy and Economic Changes", The Ayutthaya Administration. Department of Provincial Administration. 2010-01-30 접속.
(주19) Tome Pires. The Suma Oriental of Tome Pires. London, The Hakluyt Society,1944, p.107.
(주20) Vandenberg, Tricky (March 2009). "The Dutch in Ayutthaya", History of Ayutthaya. 2010-01-01 접속. |
6. 서양과의 접촉
포르투갈은 말라카(Malacca)를 정복한 직후인 1511년, 두아르떼 페르난데스(Duarte Fernandes)를 대표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아유타야의 라마티버티 2세(Ramathibodi II: 1473–1529)의 궁정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포르투갈 왕국과 시암 왕국 사이에 우호관계를 수립한 후, 포르투갈 국왕에게 보내는 친서와 선물을 지닌 시암 외교사절단과 함께 돌아갔다.(주21) 아마도 이들이 시암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들이었을 것이다. 아유타야는 포르투갈과 최초의 관계를 수립한지 5년이 지난 후에, 포르투갈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후 1592년에는 네델란드와도 유사한 조약을 체결하여 쌀 교역 특혜를 주었다.
(사진) 롭부리의 유적지에는 나라이 왕이 프랑스 외교사절단을 접견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나라이(Narai: 1657–1688) 왕의 궁정에서는 외국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바깥 세계의 영향력을 우려하면서도 코스모폴리탄적 시각을 가졌던 통치자였다. 일본과의 상업적 결연은 거부했다. 하지만 네델란드 및 영국의 교역회사들에게는 공장을 지을 수 있게 허락했고, 태국의 외교사절단이 파리와 헤이그에도 파견됐다. 이러한 관계들을 유지함으로써, 태국 왕실은 수완을 발휘하여 네델란드로 하여금 영국과 프랑스를 견제토록 했고, 하나의 강대국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주22)
하지만 1664년, 네델란드는 무력을 사용해 치외법권 부여 및 보다 자유로운 교역조건을 강요했다. 이러한 사태를 맞이하자, 나라이 왕은 자신의 외무부장관이었던 그리스인 탐험가 콘스탄틴 파울콘(Constantine Phaulkon)을 채근해 프랑스의 원조를 청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기술자들은 태국을 위해 새로운 성들을 건설했고, 나라이 왕을 위해 롭부리(Lopburi)에다 새로운 왕궁도 지어주었다. 또한 프랑스 선교단은 교육과 의학 부문에서 활동했고, 태국 최초의 활자 인쇄기를 도입해주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나라이 왕이 기독교로 개종할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올리면서, 루이 14세(Louis XIV) 국왕의 개인적 관심이 증대되기도 했다.(주23)
(사진) 1686년 프랑스 루이 14세의 궁정을 방문한 시암의 외교사절단을 묘사한 Nicolas Larmessin의 기록화. ☞ 확대사진 바로가기
파울콘의 주도로 프랑스 세력이 출현하자, 태국의 귀족들과 불교도인 관료들 사이에서 적개심과 의심이 증폭되었다. 결국 나라이 왕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펫라차(Phetracha, เพทราชา: 1632 - 1703) 장군이 정변을 일으켜 기독교인이었던 왕세자 및 파울콘과 더불어 여러 선교사들을 처형시켰다. 한편 영국 전함들의 출현은 더 많은 유럽인들에 대한 학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펫라차(재위: 1688–1693)는 왕위를 찬탈하고 남아있던 외국인들을 추방시켰다. 일부 연구들은 아유타야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양세력을 멀리 하고 중국상인들을 환영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에 진행된 또다른 연구들은, 유럽에서 18세기 중엽에 발생한 전쟁들 및 갈등들로 인해 유럽 상인들의 동양에서의 활동이 감소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아유타야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분명하게 이 시기에도 아유타야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주23)
(주21) Donald Frederick Lach, Edwin J. Van Kley,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pp.520-521,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주22) "The Beginning of Relations with Buropean Nations and Japan (sic)", Thai Ministry of Foreign Affairs. 2006. 2010-02-11 접속.
(주23) Smithies, Michael (2002). Three military accounts of the 1688 "Revolution" in Siam. Bangkok: Orchid Press. p.12, 100, 183. |
7. 말 기
왕조의 유혈 권력투쟁이 끝난 후, 아유타야는 "황금기"(golden age)라 불리는 시대로 접어든다. 이 시기는 18세기 초중반 경으로 예술과 문학, 교육이 만개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도 외국에서의 전쟁은 있었다. 이 시기의 아유타야는 캄보디아의 종주권을 놓고 베트남 남부를 통치하던 "응우옌 공국의 영주들"(Nguyen Lords)과 1715년부터 시작하여 일련의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더욱 큰 위협은 버어마였다. 당시 버어마에서는 알라웅파야(Alaungpaya) 왕이 즉위하여 샨족 국가들을 복속시키고 있었다.
아유타야 말기의 마지막 50년 동안은 왕자들 사이의 유혈 권력투쟁으로 얼룩졌다. 그들은 오직 왕좌만을 노렸다. 궁정관료들과 유능한 장군들의 숙청이 이어졌다. 원래 아누락몬뜨리(Anurakmontree, อนุรักษ์มนตรี) 왕자였던 마지막 군주 에까탓(Ekathat, เอกทัศ) 국왕은 자신의 동생이었던 전임국왕을 물러나게 한 후 스스로 왕위를 찬탈했다.
1765년, 버어마의 대군이 북부 및 서부로부터 아유타야 영토로 침공해왔다. 대부분의 주요 읍성들은 재빨리 함락되었다. 유일하게 주요하고 성공적인 저항이 있었던 곳은 방라짠(Bang Rajan, บางระจัน)이 유일한 사례였다. 1767년 아유타야 도성은 상당한 기간의 포위상태에 놓여있다가 마침내 함락되어 불탔다.(주24) 아유타야의 예술품과 문헌을 포함한 도서관, 역사적 기록들을 보존했던 박물관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버어마는 아유타야 왕국을 멸망시켰다.(주24)
왕국은 혼돈에 빠졌고, 도성에는 기근이 엄습했다. 왕국의 재정적 기반도 완전하게 붕괴되었다. 각 지방들은 장군들이나 과격파 승려, 혹은 왕족들의 통치 하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버어마에 대한 복속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딱(Taak 혹은 Tak) 지방의 행정관이었던 딱신(Taksin, ตากสิน: 1734-1782) 장군이 버어마 세력에 대해 반격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도성이 남긴 것이라곤 무너진 왕궁의 유적뿐이었다. 딱신 장군은 도성에서 탈출해 군대를 결집한 후, 버어마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오늘날의 수도 방콕에서 짜오파야 강을 가로질러 위치한 톤부리(Thonburi)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등극했다. 그가 바로 딱신(Taak-Sin 혹은 Taksin) 대왕이라 불리는 사람이다.(주25)(주26)
아유타야의 역사적 도시 유적 및 "관련 역사적 읍내들"은 현재 "아유타야 역사공원"(Ayutthaya historical park) 내에 위치하는데,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주27) 현재의 아유타야 시는 구-도성 근처에 새롭게 건설됐고, 현재는 아유타야 도의 도청소재지이기도 하다.(주28)
아유타야 왕국의 역대 국왕
초대 우텅 왕조 (1st Uthong Dynasty: 1350-1370)
Name |
Birth |
Reign From |
Reign Until |
Death |
Relationship with Predecessor(s) |
Somdet Phra Chao Uthong (Somdet Phra Ramathibodi I) |
1314 |
1350 |
1369 (20 years) |
• First King of Ayutthaya |
Somdet Phra Ramesuan (First Reign) |
1339 |
1369 |
1370 (less than one year) (abdicated) |
1395 |
• Son of Uthong |
초대 수판나품 왕조 (1st Suphannaphum Dynasty: 1370-1388)
Name |
Birth |
Reign From |
Reign Until |
Death |
Relationship with Predecessor(s) |
Somdet Phra Borommarachathirat I (Khun Luang Pha Ngua) |
? |
1370 |
1388 (18 years) |
• Usurper • Former Lord of Suphanburi |
Somdet Phra Chao Thong Lan (Chao Thong Chan) |
? |
1388 (7 days) (usurped) |
• Son of Borommarachathirat I |
제2대 우텅 왕조 (2nd Uthong Dynasty: 1388-1409)
Name |
Birth |
Reign From |
Reign Until |
Death |
Relationship with Predecessor(s) |
Somdet Phra Ramesuan (Second Reign) |
1339 |
1388 |
1395 (7 years) |
• Former King reclaiming the throne • Son of Uthong |
Somdet Phra Rama Ratchathirat |
1356 |
1395 |
1409 (14 years) (usurped) |
? |
• Son of Ramesuan |
제2대 수판나품 왕조 (2nd Suphannaphum Dynasty: 1409-1569)
Name |
Birth |
Reign From |
Reign Until |
Death |
Relationship with Predecessor(s) |
Somdet Phra Intha Racha (Phra Chao Nakhon Int) |
1359 |
1409 |
1424 (15 years) |
• Grandson of Borommarachathirat I • Former Lord of Suphanburi, offered crown |
Somdet Phra Borommarachathirat II (Chao Sam Phraya) |
? |
1424 |
1448 (24 years) |
• Son of Intha Racha |
Somdet Phra Boromma Trailokanat |
1431 |
1448 |
1488 (40 years) |
• Son of Borommarachathirat II |
Somdet Phra Borommarachathirat III |
? |
1488 |
1491 (3 years) |
• Son of Trailokanat |
Somdet Phra Ramathibodi II (Phra Chettathiraj) |
1473 |
1491 |
1529 (38 years) |
• Younger brother of Borommarachathirat III • Son of Trailokanat |
Somdet Phra Borommarachathirat IV (Somdet Phra Borommaracha Nor Buddhankoon) (Phra Athitawongse) |
? |
1529 |
1533 (4 years) |
• Son of Ramathibodi II |
Phra Ratsadathirat |
1529 |
1533 (4 months) (usurped) |
• Son of Borommarachathirat IV • Child King, reign under regency |
Somdet Phra Chairacha (Somdet Phra Chairacha Thirat) |
? |
1533 |
1546 (13 years) |
• Uncle of Ratsadathirat • Son of Ramathibodi II • Usurper |
Phra Yodfa (Phra Keowfa) |
1535 |
1546 |
1548 (2 years) |
• Son of Chairacha |
Khun Worawongsathirat (Khun Chinnarat) (Bun Si) |
? |
1548 (42 days) (Removed) |
• Usurper monarch, not accepted by some historians |
Somdet Phra Maha Chakkraphat (Phra Chao Chang Pueak) |
1509 |
1548 |
1568 (20 years) |
• Son of Ramathibodi II • Younger brother of Borommarachathirat IV and Chairacha • Seized the throne from usurper |
Somdet Phra Mahinthrathirat |
1539 |
1568 |
1569 (1 year) |
• Son of Maha Chakkrapat and Queen Suriyothai |
제1차 아유타야 몰락 |
수코타이 왕조 (Sukhothai Dynasty: 1569-1629)
Name |
Birth |
Reign From |
Reign Until |
Death |
Relationship with Predecessor(s) |
Somdet Phra Maha Thammarachathirat (Somdet Phra Sanphet I) |
1517 |
1569 |
29 July 1590 (21 years) |
• Former Lord of Sukhothai • Installed as vassal of Bayinnaung of Burma, declared independence in 1584 |
Somdet Phra Naresuan the Great (Somdet Phra Sanphet II) |
25 April 1555 |
29 July 1590 |
7 April 1605 (15 years) |
• Son of Maha Thammarachathirat |
Somdet Phra Ekathotsarot (Somdet Phra Sanphet III) |
1557 |
25 April 1605 |
1620 (15 years) |
• Son of Maha Thammarachathirat |
Somdet Phra Si Saowaphak (Somdet Phra Sanphet IV) |
? |
1620 (less than a year) |
• Son of Ekathotsarot |
Somdet Phra Songtham (Somdet Phra Borommaracha I) |
? |
1620 |
12 December 1628 (8 years) |
• Minor relative, invite to take the throne after leaving the Sangha |
Somdet Phra Chetthathirat (Somdet Phra Borommaracha II) |
circa 1613 |
1628 |
1629 (1 year) (assassinated) |
• Son of Songtham |
Phra Athittayawong |
1618 |
1629 (36 days) (usurped) |
• Younger brother of Chetthathirat • Son of Songtham |
빠삿 텅 왕조 (Prasat Thong Dynasty: 1630-1688)
Name |
Birth |
Reign From |
Reign Until |
Death |
Relationship with Predecessor(s) |
Somdet Phra Chao Prasat Thong (Somdet Phra Sanphet V) |
1599 |
1629 |
1656 (27 years) |
• Usurper, formerly the Kalahom • Rumored to be a son of Ekathotsarot |
Somdet Chao Fa Chai (Somdet Phra Sanphet VI) |
? |
1656 (9 months) (usurped) |
• Son of Prasat Thong |
Somdet Phra Si Suthammaracha (Somdet Phra Sanphet VII) |
? |
1656 (2 months 17 Days) (usurped) |
26 August 1656 (executed) |
• Usurper, Uncle of Chao Fa Chai • Younger brother of Prasat Thong |
Somdet Phra Narai the Great (Somdet Phra Ramathibodi III) |
1629 |
26 August 1656 |
11 July 1688 (32 years) |
• Usurper, nephew of Si Suthammaracha • Son of Prasat Thong • Half-brother of Chao Fa Chai |
반푸 루웡 왕조 (Ban Phlu Luang Dynasty: 1688-1767)
Name |
Birth |
Reign From |
Reign Until |
Death |
Relationship with Predecessor(s) |
Somdet Phra Phetracha |
1632 |
1688 |
1703 (15 years) |
• Usurper, cousin of Narai • Former commander of the Royal Elephant Corps |
Somdet Phra Suriyenthrathibodi (Somdet Phra Sanphet VIII) (Phra Chao Suea) |
? |
1703 |
1708 (5 years) |
• Son of Narai |
Somdet Phra Chao Yu Hua Thai Sa (Somdet Phra Sanphet IX) |
? |
1708 |
1732 (24 years) |
• Son of Suriyenthrathibodi |
Somdet Phra Chao Yu Hua Boromakot |
? |
1732 |
1758 (26 years) |
• Brother of Thai Sa, Former Front Palace • Son of Suriyenthrathibodi |
Somdet Phra Chao Uthumphon (Somdet Phra Ramathibodi IV) (Khun Luang Hawat) |
? |
1758 (2 months) (usurped) |
1796 |
• Son of Boromakot |
Somdet Phra Chao Ekkathat (Somdet Phra Chao Yu Hua Phra Thinang Suriyat Amarin) |
? |
1758 |
7 April 1767 (9 years) (removed) |
17 April 1767 |
• Brother of Uthumphon • Usurper, Former Front Palace • Son of Boromakot |
제2차 아유타야의 몰락 |
아유타야 왕국 시대의 주목할만한 외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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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국 현대사에서 쿠테타가 빈발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역사적 연유에서 찾아 볼 수도 있겠는데요. 아유타야 왕국에서 반란이 많은 것을 보면.....
흥미로운 지적이시라고 생각됩니다.. ^^ 사실 아직 우리가 역사 쪽으로는 깊게 안들어가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유타야 역대 국왕 도표를 보시면 알 수 있듯이.. 이름은 <아유타야 왕국>인데, 실제로는 여러 가문이 돌아가면서 정권을 잡아서, 실제로는 몇개의 왕조가 이어진 시대인 것 같습니다..
아유타야가 원래 수와르나부미(수판나품) 왕국 시절에 라워 왕국과 합작을 해서 아유타야 왕국으로 개국을 했다고 하는데.. 특히 개국 초기에 양쪽 집안이 서로 한번씩 주거니 받거니 정변으로 왕위를 바꿔치기 하다가.. 결국은 수판나품 왕조가 정권을 잡았다고 하는데.. 이후로도 보면 업치락 뒤치락으로 보이네요.. 또 동일 왕조 내에서도 정변이 많이 보이고 말이죠.. 거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더 소수일듯도..... ^^ 그러니 쿠테타 뿐만 아니라, 좀더 넓은 의미에서 유혈 권력투쟁에 이골이 난 사람들로 생각이 됩니다... 중국 역사나 일본 전국시대보다 더 복잡해보입니다.. ^^
이런 역사적 모습을 보면, 레드셔츠 시위 때 왜 학살이 일어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듯도 하고 말이죠...
태국 영화산업이나 미디어업계에서, 저 위에 나오는 방라짠 항쟁이나.. 혹은 몇몇 여성 영웅들을 중심으로 한, 반-버어마 항쟁사를 영화로 좀 대작으로들 만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 민족주의 뻘짓거리를 할게 아니라.. 태국의 권력투쟁 암투, 권모술수 이런 부분을 영화로 만드는 게 오히려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네요.. 나중에 한번 깊이 관심을 가져보겠습니다..
다른 국가들에서는 개국 초기나 특정 시기에만 암투가 두드러지는데, 태국은 그냥 역사 전체가 암투가 아닌가 싶을 정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