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끝내고 신혼여행도 하는둥 마는둥 하며 보냈고 나는 정릉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시작으로 신혼생활에 들어갔다.
시집에는 아들만 둘 있어서인지 나를 딸처럼 대해주고 귀여움을 받았다. 시아버지는 철도공무원이셨고 시어머님은 사립 국민학교 선생님이시어 낮에는 시외할아버지와 둘이서 집을 지켰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심적 갈등을 느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밥해야되고 설겆이 하고난뒤 빨래를, 그리고 점심을, 좀 쉬었다 싶으면 저녁준비 설겆이로 이어지는 주부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학생신분에서 처녀시기가 없이 막바로 여편네가 돼버린 나는 그래서 더욱 갈등을 느꼈는지 모른다. 미역국에 파, 마늘을 넣을 것인지도 몰랐고 연탄불하나 어떻게 가는지 몰랐던 나의 주부수업은 고역 바로 그것이었다. 더구나 배는 불러오고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식모라면 월급이나 받겠지만 내 처지는 월급 한푼 없는 며느리 바로 그 위치였다.
주부들이라면 그 시절 다했던 일을 나 혼자 겪은 것처럼 얘기한다고 핀잔할지 모르나 내 희망은 뭉개져 갔고 고생만 더해지며 나는 짜증만 더해졌다. 그러나 누구한테 짜증을 피울 것인가. 남편이 된 그 사람은 나갔다 밤늦게 들어오면 그만이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나는 어느날 신문에서 이라는 광고를 보고 설렘을 감출수 없었다. 짤짤거리고 쏘다니던 내가, 네온사인만 봐도 퇴보하는 느낌이 들던 나는 TV드라마 <거북이>를 보고 욕망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탤런트 모집이라니 구원의 손길만 같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인사동 MBC방송에 달려왔다. 배가 남산만해진 것도 잊은 채로 방송국에만 가면 탤런트가 되는 것 같이 느껴져 한숨에 달려왔던 것이다. 탤런트 시험보기 위해 원서가지러 왔다고 하니 웃으며 수위아저씨는 어떻게 임신하고 오느냐고 피식 웃었다. 혹시나 하고 달려왔던 결과는 역시나로 끝났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발걸음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탤런트 시험을 포기한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시집살이를 계속했다. 곱기만 했던 손등도 억세지고 손톱은 깎지 않아도 닳아 길이는 맨날 같았다.
나는 69년 1월 8일 결혼 3개월만에 혼인신고를 했다. 그리고 3월 18일 아들 범구를 낳았다.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집에 돌아오니 집마다에 붓꽃이 움을 틔워 나를 반기고 있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돼 그 사람은 공군간부후보생으로 군에 입대했다.
신혼초부터 독수공방이니 참으로 갑갑해지기만 했다. 애가 애낳아 업고 시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내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동정은 톡톡히 받을 만한 처지였다.
69년 한해를 이렇듯 보낸 나는 70년 2월 MBC탤런트 2기 모집에 응모를 했다. 응모하기전 나는 시부모님에게 "탤런트가 되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러나 시부모님의 반응은 거센파도와 같았고 절벽 같기만 했다. 시아버님은 평소 약주만 드시면 "내 마누라가 밖으로 나다녀 싫다고 얘기한 적도 있으니 며느리까지 내 돌릴수 없다"고 단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나는 이 거절에 그런줄만 알고 그러려니 하는 것으로만 알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나의 탤런트진출 욕망은 이 한마디에 거절에 가라앉지를 않았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긴급요청을 해 가까스로 허락을 받았다. 당시 시어머니는 탤런트가 되면 뭐가 되는지 알고 OK를 하셨던 것이다.
나는 마감 하루전날 응시원서를 내고 정동 MBC사옥을 물러 나왔다. 1차는 서류 2차는 연기실기 3차는 면접으로 시험이 치러졌다.
나는 연기실기 시험에서 다방 마담역의 대사를 받아들었다. 내 순서는 중간 정도였는데 내 앞에까지는 처제역이었는데 나부터 마담역이 주어졌다. 대사는 '찻값 받았니. 아니 왜 찻값 안주시는 거예요'라며 호들갑 떠는 마담역이었다. 나는 신나게 했는데 심사위원들의 반응이 좋았던 것을 느낄수 있었다. 나는 연극무대에 올랐기 때문에 그 반응은 금방 알수 있었다. 2차 시험까지는 합격을 했다. 3차는 면접이어서 시험날 나는 있는 대로 없는 대로 멋을 내고 중역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은 유독 나에게 시선과 질문을 많이 던졌다. 한 심사위원은 나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가씨 결혼했나" "아녜요" "그럼 그 반지는 무슨 반지야-" "네 - 엄마가 해준 반지예요"
어른은 척 보면 아는 일인테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으니 나는 떨어지고 말았구나 싶어 낙담이 이만 저만 큰게 아니었다.
실의에 빠져 집에 왔을때 시부모님은 '어떻게 됐느냐고' 묻지도 않아 나는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떨어지기기를 바라고 있었다면 틀린 얘기가 될까?
10여 일이 지난뒤 탤런트 시험 합격자 발표에는 당당히 내가 끼어 들어 있었다. 집으로 합격통지서도 날아들어 나는 이제 탤런트가 됐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집에 통지서가 날아든 뒤 나는 시아버님께 "저 탤런트 됐어요"라고 알리자 싫은 표정을 얼굴 가득히 담았다.
그러나 나는 집안일을 하고 튕겨나가다 시피하며 방송국으로 달렸다. 탤런트 합격하고 나니 연기자가 다 된 것처럼 느꼈는데 방송국에 갈때마다 나의 패기는 시들어 가기만 했다. 대 선배들에게 꼬박꼬박 인사해도 봐주는건지 귀찮은 건지 '응'하고 답변만 들었다.
당시 나와 함께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 연기자들은 김자옥, 한혜숙, 양정화, 권기옥, 최은숙, 김민아(현재 LA에 거주)등이었다. 이들은 입사동기였지만 처녀들이었는데 나는 명색이 애 엄마였다. 이들은 나에게 언니라고 부르며 따라주었으며 친하게 지냈다. 당시 김자옥은 아역배우출신으로 김수현씨의 <수선화>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으며 한혜숙은 KBS로 옮겨가 빛을 보며 인기를 모았다. 양정화는 곱상하며 드라마 <새엄마>에 출연, 큰 인기를 모았다.
우리들은 모이면 "어디 가서 옷 해입니?" "너 얼마 받았니"등 묻고 재잘거리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지만 선배들 앞에선 웃음소리도 크게 못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멋진 배역 줄때를 기다리며 방송국을 분주히 쏘다녔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견습탤런트는 바쁘기만 했다. 나는 그때 별명이 '3천대 1'로 불렸다. 선배 탤런트 전운씨의 어머님과 나의 시어머님이 잘 아는 처지인데 시어머님이 한증탕에서 전운씨의 어머니에게 "내 며느리 박원숙이가 3천대 1로 탤런트가 됐다"고 자랑해 붙여진 것이다.
하루는 전운씨가 "네가 3천대1이냐"고 해 분장실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다.
지금도 견습탤런트들이 방송국에 오면 인사도 잘 못하고 게걸음을 걷는 것을 볼때 나는 예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나는 시댁에 있을때 어쩌면 가장 궁핍한 생활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군것질 잘하는 편인데 용돈은 고사하고 돈 한푼 제대로 만질 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답답함은 오죽했겠는가.
남편인 그 사람은 대전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고 나는 탤런트 한답시고 나돌게 됐으니 금전적 어려움은 또 다른 짜증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친정집에 가서 손을 내민 적은 없었다. 어려움은 어려움대로 참고 넘어가니 그런 대로 지탱할만 했다.
그나마 탤런트라고 몇푼의 돈을 만질수 있었던 것이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긴히 쓰였다. 나는 첫 배역을 맡았다. 배역이란 드라마의 '여인A' '여인B' '동네아낙'등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나는 신명나기만 했고 목에 힘이 잔뜩 들고 어깨가 으쓱거렸다.
견습탤런트 1년반쯤 지났을 무렵 나는 KBS. MBC. TBC 3개 방송국이 공동으로 제작해 군위문 공연을 나간 적이 있다. 이때 선배인 추송웅,강부자, 여운계, 강계식씨등이 합류해 공연한 무대물이었다.
출연료는 나라에서 나오는 것이었던 만큼 줄만큼 준것 같았다. 공연을 가면 도지사도 나오고 기관장들도 나와 우리 공연단들을 융숭히 대접해주었다. 그때 받은 출연료는 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3년 탤런트 수련기간 동안 내가 받은 출연료는 1일 연속극 5회 출연에 1만 5천원을 받았다. 말하자면 1작품에 3천원 꼴인셈이었다.
그 당시 이돈은 고급백을 하나 사고도 남았으니까 지금돈으로 환산하면 약 20만원은 됨직하다.
나는 첫 출연료를 받아 그릇을 산 것으로 기억한다. 쓰고 싶은 곳에 썼을 뿐 사치라는 것은 해보지를 못했다. 고급스럽고 화사한 옷 한벌을 해입고 싶지 않은 생각이 왜 들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그런 여유도 없었다.
생활의 계획은 없고 덜렁덜렁 했지만 돈 쓸곳은 내몸이 아니라 살림에 쏟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첫 출연작품은 아마도 <화려한 계절>로 기억된다. MBC .TV 1기생인 조경환씨가 과장으로 등장하고 나는 타이피스트로 출연했다. 나는 이 드라마에 출연하며 NG도 몇번 내 연출자 선생님에게 혼도 많이 맞았다.
나는 내 등장 신만 끝났다 싶으면 떠들고 달려나가 "야 너 놀러왔어"라며 꾸지람도 퍽 많이 들었다. 그때는 기본도 안돼 있었고 연극무대만 생각했지 카메라의 특성을 몰라서 이런 실수를 자주 일으킨 것이다.
내가 역다운 배역을 처음 맡은 것은 표재순 선생님인가 유길촌 선생님인가가 연출한 작품으로 74년에 방영된 <아버지>였다. 나는 딸로 등장하며 투피스. 원피스. 미니스커트를 자주 걸치고 각선미를 자랑이라도 하듯 설쳐대며 연기에 정열을 쏟았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다음 작품에서는 미역국 먹을 것 같아 악착같이 달라 붙어 연기를 했다.
이 작품은 방영되고 얼마 안돼 인기가 치솟으며 덩달아 내 인기도 따라 올랐다. 이 인기가 뒷받침 돼서 인지 나는 영화출연교섭을 받았다. 제목은 <새벽에 온 방문객>으로 주인공역이었다. 당시 출연료는 35만원이었으니까 꽤나 많았던 듯 싶다.
고은아씨와 박근형씨가 부부로 등장하고 나는 박근형씨의 병원 간호원으로 박근형씨와 은밀한 관계를 갖는 역할이었다.
나는 복수극을 펼치는 마지막 장면에서 열연을 보여 영화배우로서도 좋은 평을 받았다.
영화배역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많은 영화에서 말괄량이 역할을, 때로는 극성스런 여자, 원한을 사는 역등 통념상 좋지 않은 배역이 많았다. 올드 미스 독신녀 기숙사 사감역등 그 배역도 헤아릴 수 없이 가지각색의 역할은 다해봤다.
데뷔영화 <새벽에 온 방문객>에서 박근형씨와 공연했듯 나는 김수용 감독의 <망명의 늪>에서도 박근형씨와 공연을 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박근형씨와 공연하더니 지금까지 제일 많은 상대역으로 출연한 배우를 꼽는다면 아마도 박근형씨를 첫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이다.
TV드라마에서는 이정길씨와 많이 했는데 최불암씨와 김혜자씨의 커플처럼 한적은 없다.
영화 <망명의 늪>에서는 박근형씨가 작가로 그리고 나는 술집여자로 출연했다. 생계를 꾸리지 못하는 박근형씨를 뒷바라지하며 일종의 사육(?)으로 까지 분위기가 이끌어져 가는 이 영화는 꽤나 깊은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82년도 인가로 기억되는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은 인상깊은 영화로 꼽을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에서 늙은 창녀역을 맡았는데 비바람 몰아치던 늦겨울 슈미즈 차림으로 교회앞에서 울부짖는 연기는 지금 내가 생각해도 퍽 괜찮았던 것 같다. 이외에도 영화 <복부인>등도 추억에 남길만한 영화로 꼽을 수 있다.
나는 요즘 영화출연교섭을 자주 받는 편이다. 출연료는 한 5백 만원을 받는 편이지만 영화출연에는 세가지 조건을 꼭 달아놓는다. 그 첫째는 나의 배역이 빛나야될것, 둘째는 받고 싶은 액수를 받아야 할것, 셋째는 감독과 제작자가 인연이 있는 사람이면 나의 영화출연 조건은 예스가 된다.
지금도 나는 영화에 대해 무척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방송드라마는 방영할 때는 탤런트도 인기가 치솟으나 막을 내리면 남는 것이 없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영화는 작품으로 한 시대를 구분하는 영향력을 남기게 된다. 나는 요즘 간혹 TV에서 <한국영화초대석>등을 보노라면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어이 내 얼굴이 나오잖아. 내가 저 영화에 출연했었나"라며 혼자 낄낄댈 때가 많다.
이제까지 내가 영화에 출연한 작품은 어림잡아 3백여 편은 족히 넘을 것이다. 이 많은 영화를 하며 목돈도 만져보고 저축도 하며 어려운 줄 모르고 살아왔던 게 사실이다.
나는 요즘 이 <임이네>를 쓰며 갈등을 느낀다. 미국에 가 있는 친구가 전화를 해와 "너 너무 일 저질러 놓은 것 아니냐"는 걱정도 있고 친정식구들은 "언니 무슨 대단했던 일이라고 그렇게 털어놓느냐"고 항의 해오고 어머니는 "너혼자가 아니고 자식이 있는데 기분내키는 대로 다 밝히면 어떻게 하느냐"고 꾸지람도 하고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임이네 잘보고 있어요" 라고 인사한다. 나는 <토지>에서 "임이네가 죽었는데요-"라고 대답하다 씨익 웃는다.
신경도 쓰이며 지난날 십이지궤양이 도졌는지 얹히고 속이 편칠 않다. 기왕지사 털어놓는 얘기인데 감출 수도 없는 일이고 얘기하다말고 중도포기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나는 갈팡질팡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밖에서 나를 보고 퍽 재미있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 알지 모르나 내 마음은 냄비물 끊듯 자글자글 끓는 편이다.
그러나 어쩌랴-. 또다시 얘기를 뒤짚어 갈 수밖에-.
나는 72년 봄 시부모님의 "따로 살림나거라"라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 했다. 그 당시 그 사람은 대전에서 군복무를 할 때라 한달에 두번씩 면회 가던 시절이어서 살림 나가라는 소리가 얼마나 기뻤는지 나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
냄비에 숟가락 두개만 꽂고 살아도 좋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탤런트로 수입도 있으니 걱정은 없었다. 사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먹고 사는 것쯤은 해결하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나는 MBC정동사옥에서 가까운 곳에 방을 얻기로 하고 냉천동에 두번째 살림을 펼쳤다. 장롱, 찬장, 화장대를 차에 싣고 자질구레한 살림도구를 들고 정릉시댁을 떠났다.
냉천동 집은 전세 50만원을 주고 얻었는데 피아노 레슨하는 집이었다. 친정식구들도 달려와 도와주어 이삿짐 운반은 쉽게 끝냈다.
연탄불 갈고 잠자리에 누운 첫 이삿날 밤은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짓지 않고 늦잠도 잘수 있어 제일 좋았다. 누구의 눈치 살피지 않아도 되고 밥탈 걱정 반찬걱정 안해도 되니 얼마나 편한지 두다리가 죽 뻗어졌다.
이사한 다음날이 일요일이어서 나는 애를 업고 대전으로 그 사람을 면회갔다. 그리고 이사한 소식도 전하고 살맛나는 얘기로 하루를 보냈다.
나는 그 당시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았다. 다만 내 마음이 편하면 그저 이것이 행복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실 지내놓고 보니 어려웠던 세월을 살아왔구나 하는 계산이 선다. 나는 첫살림을 나면서도 살림은 잘 몰랐다.
살림을 하는 여자라면 규모도 있어야 되고 계획도 짜임새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나는 그렇질 못했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그만인 바로 그런 살림을 했다.
그저 어린애와 함께 살며 옹기종기 차리고 살아가는게 그저 행복한 것이고 즐거운 나날이었을 뿐이다. 웬만하면 얼른 돈 모아 잘살겠다는 생각은 막연한 것뿐이었으며 또한 돈을 목적으로 연기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욕심 없는 삶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냉천동에서 1년쯤 살다 충정로 쪽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전세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비워달라면 그저 비워줘야 했던 때다. 자질구레한 살림을 끌고 충정로로 이사했다. 6개월만에 나는 다시 정릉시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딴 살림을 났지만 아이문제도 그렇고 경제적인 여건, 그리고 시부모님의 뜻하지 않은 권유도 있어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6개월쯤 지났을까 시부모님의 도움도 받고 해서 나는 홍은동에 있는 고은아파트로 이삿짐을 끌고 내집장만을 해 이사를 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가진 내 집이었으니 그 기분이란 하늘을 찌를것만 같았고 하루정도 굶어도 배고픈 것을 모를 것만 같았다.
74년 20평짜리 아파트를 지녔다는 것은 큰 재산이었고 누구에게나 큰 자랑은 못됐지만 " 나 아파트 샀다"라고 한마디쯤은 던질 수 있는 일이었다.
전셋집 세간나던 시절은 싹 잊었고 "아 이제부터는 살림도 장만해야겠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젠 철이 드나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