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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어느 따뜻한 날에 1
김 삼 석*
며칠째
격동의 소용돌이가 멈추고
이렇듯 화창하고 포근한 날이면
너와 둘이 무작정하고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기도 했지만
일어오는 바람과 엷게 드리운
회색빛 구름으로
묵묵부답인 너와 상상에 나래만 펼치다
결국엔 되돌아선다.
또 다른 햇살 좋은
다음날을 기다리며 가득히
부어놓은 술잔 속에 널 빠트려
거품 목욕을 시키고 있다.
겨울 어느 따뜻한 날에 2
노란 한지 같은 해거름,
고양이 한 마리 앞발을 모으고
절집 잔디 위에 앉아
피안의 길을 더듬고 있다
예불을 올리지 않는 시간
마당에는 먼지를 몸에 묻히고
법당으로 올라서는 미물들과
연인의 손을 청승맞게 나이도 잊은 채
대웅전 뒷켠을 빙빙 도는 不惜身命
天堂寺 계단을 오르면서 알았다
생의 한 복판에서도
홀로 울던 고독 속에도
저처럼 부드러운 눈이 있었다는 것
인간의 본성을 되찾고
알 수 없는 평화로움에 도취되어,
참으로 얼마만인가
붉은 피가 멈추어 서는 날들도 있었으리라
* 경남 거제 출생, 창신대 문예창작과 졸업, 경희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경희 사이버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월간 시사문단 신인상 수상, 한국시사문단 작가협회회원, 빈여백 동인, 북한강 문학제 추진위원, 반딧불 문학회
동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거제문인협회 이사, 공저 봄의 손짓 3호, 현)농협 지점장, kss7337@hanmail.net
깡 통
김 순 일*
골목길에서 밤새 알몸으로 떨고 있는 사랑을 모셔옵니다
공원이나 놀이터에 몰래 내버린 사랑을 모셔옵니다
단물 한 방울까지 다 빨아먹고 냅다 차버린 사랑을 모셔옵니다
구둣발로 납작하게 밟아 뭉개버린 사랑을 모셔옵니다
주식시장 바닥에 코풀어 버린 사랑을 모셔옵니다
새벽마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쓰레기 사랑을 모셔오는 노파
주일날이면 무거운 다리 가볍게 끌고 나가
척박한 자선 상자에 꼬기꼬기 접고 접은 할미꽃 사랑을 심습니다
웃음을 돈사려고
오늘도 가을 하늘 같은 파아란 웃음을 돈사려고 서산장터에 나가네 한바지게 풀어놓고 “진짜 웃음 사가유 원조 바보 웃음이유 싸구려 싸구려유우”호객을 하지만 이젠 서산 촌놈도 서울 사람 뺨치는 깍쟁이가 되어서 싸구려 웃음 따위는 거저 준다 해도 쳐다보지도 않네 값비싼 서울의 냉동웃음에 인이 박힌 아이들은 더더욱 들은 척도 하지 않네
네팔 산골이나 몽골 초원의 아이들이랑 어른들의 그림자 없는 웃음을 시장바닥에 부려놓고 케냐의 어느 바닷가에 사는 파아란 웃음 푸지게 풀어놓고 거져준다 해도 모두 가난한, 미개한 웃음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네
오늘도 원조 바보 웃음 돈사려고 한 짐 땀나게 짊어지고 서산 장터에 나온 나의 바지게를 태깔 반드르한, 얼음 박힌 웃음들이 툭 툭 차고 지나가네
* 충남 서산 출생,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서산 사투리, 섬, 어둠꽃, 서산장터,
우울한 햇빛, 사람 어디 있나요, 물찾아 나선 목어, 숲의 나라, 미꾸라지사원 등,
시선집 바보네 집 호박꽃, soonil39@hanmail.net
다시, 구만리
권 선 희*
명자꽃 같은 누이가 살았다
검은 머리 길게 땋은
나의 첫 처녀
청보리 수런대며 익어가는 구만리에
누이가 살았단 말이다
고작 열아홉 위로 군용트럭이 지나고
뻐꾸기 쑴벅쑴벅
통신병 제대 날짜 당겨 올 때
다섯 그루 소나무 아래서
물등대 바라보던 누이의 눈
그렁그렁 차오르던 젖은 봄
분명 있었단 말이다
산당화처럼 때론 해당화처럼
어둡사리 무렵 내음은
붉어서 간혹 아렸단 말이다
호미곶 구만리 바다가 온통
누이의 노래로 붉은 적
있었단 말이다
오해를 풀다
너를 닥나무로 알고 베겠다
길게 자라는 오후에다
터억 무쇠솥 걸고
백피가 될 때까지 삶고 또 삶겠다
까칠한 말들이 끓어
입 안 가득 백태가 끼면
초경처럼 붉은 꽃무릇 닥풀삼아
풋대질 하겠다
네가 으엉으엉 말문을 열면
나도 어응어응 대답하겠다
말과 말이 서로 부둥켜안고 누운 부벽
뜨거운 평면의 시간을 지나
등뼈 투명한 한 지 한 장
허리 세우는 소리 듣겠다
* 강원도 춘천 출생,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집 구룡포로 간다, 한국작가회의 회원, gsh6007@hanmail.net
오로라가 없는 밤
문 근 식*
주말의 그녀가 헬스클럽
런닝머신에서 땀 흘리고 있을 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축제를 보고 있어
어둠 없는 밤이 거기 있지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사라진 도시에서
샴페인을 터트리지
시간도 어둠을 불러오지 못해
그냥 저 혼자 돌고
곳곳 어둠의 흔적마다 빛이 가득하지
저 엉덩이 큰 사람들
밤에도 잠들지 않는 사람들은 알 수 없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사막의 긴 건기,
물끄러미 축제를 바라보는
인디오 노파의 미소,
몇 겁의 공전에도 분리되지 않는
적도 어느 작은 도시의 가난을
모르지, 258만 킬로미터의 공전으로도
좀처럼 섞이지 않는
어둠과 빛의 관계를
비밀의 방
아내가 기타를 메고 아파트를 나갔다
또 다른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캐논 변주곡을 쳤었나?
펼쳐진 책갈피에서 솔향이 난다
얼핏, 갈피에 꽂아둔 방 하나를 훔쳐본다
수시로 자리 바꾸는 이곳으로 오는 길
오래 비워둔 공간 가장자리
불면이며 우울이며 슬픔이 만져진다
만져질 때마다 딩딩 기타가 운다
이 방에선 어떤 곡이 흘렀을까
어떤 꽃이 피었다 졌을까
아내가 기타를 메고 현관을 나간 사이
방과 방을 오락가락하는 사이
몸에서 자꾸 기타 소리가 난다
아내가 없는 방 암호처럼 펼쳐진 악보에서
늦은 노을 냄새가 난다
그녀가 누구였던가
* 충북 단양 출생, ≪포엠토피아≫ 신인상, 시집 눈썹 끝의 별, 산문집 길에서 그리운 이름을 부르다,
어느 대나무의 고백
복 효 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있는 것이다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 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전북 남원 출생, ≪시와 시학≫(1991)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마늘촛불, 시선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bokhg62@hanmail.net
채석강의 누이 이야기
송 반 달*
그곳에 가자
괜찮은 격포에 가자
썩 괜찮은 채석강에 가면
그 누이동생 적벽강 만나면
사랑 같고, 사랑 같고, 사랑 같은 것이
한꺼번에 일어서서 붉은 손을 내민다
하 그 마음,
붉어질 대로 불어져 강바닥까지 쌓이면
<안>에게 깊은 키스 하고 싶어
그 강렬한 파도의 아가미 강바닥 부비다
슬피 서 있는 적벽의 발부리에 쓸쓸한 입 부비며
그렇게 또 한 세월 광기를 토할 일이다
파도야, 파도야,
시인을 취하게 하는 채석강의 파도야,
<안> 때문에 취하게 하는 적벽강의 파도야,
붉은 벽에 광기의 못을 쳐라
그 위에 <안> 걸어두리라
사랑에서 사랑까지 사랑으로 쳐라
사랑이 사랑인 사랑의 힘이여,
내 안의 붉은 것 토하고 싶을 때
<안>으로 하여 어느 날 생긴 내 안의
벽 붉게 토해버리고 싶을 때
적벽으로 오라
적벽강으로 오라
<안>에 취해 사랑 사랑 붉으리라
노을 격포
물거품 별처럼 이는
노을궁宮 격포 해변에서
웃는 눈물방울 보네.
저 한 송이 석양화夕陽花 앞에서
떠나온 여인은 소리 지르고
고래등 같은 섬 노을 분만하는
인어는 자장자장 하네.
그때, 모래 젖 물고 칭얼대는
거품들 떠밀어 탁아하고
바다의 풍성함에
연연하는 바람에 사로잡혀
파도의 두상들 금관 쓰고 너울춤 추는데
모여드는 해변엔 반짝이는
거품과 거품뿐이네.
날마다 잉태하고 날마다 분만하는
그 마음
몹시 슬퍼서 웃는 눈물 속으로
연한 연미복 입은 금성이
석양화 꽃마차에 노을공주를
태워 떠나네. 그리고
눈물방울 속에서 달이 뜨고 마네.
별들은 자장자장 반짝여라.
* 전북 부안 출생, ≪현대시≫(2002) 등단, 시집 「야야 바람이 분다」, 수주문학상 수상(2010), bandal1010@hanmail.net
데자뷰
정 푸 른*
제본되지 않은 시간이 있어요 낱장으로 날리는 시간은 내용증명처럼 고개를 갸웃거리게 해요 구천을 떠돌던 줄거리가 발신지도 없이 우송되었을 때 이 생은 표절이었음을 알았어요 수채화로 그려진 삽화처럼 중첩된 시간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순간, 내 것이 아니면서 내 것이었어요 페이지에 묶인 나는 빠진 번호 없이 유려한 얼굴로 흘러가고 있는데 누가 나의 문체로 나를 흘려 쓰고 있을까요 투명한 글씨로 한 장 한 장 나를 필사하고 있는 거긴 어디일까요
기억 속을 헤집으며 걸어가고 있는 발자국이 절취선처럼 시간을 횡단하고 있어요
아득한 소실점으로 시작해서 점점이 멀어지고 있는 나는
장편인가요 단편인가요
먼지 그림
황사는 허구다 덧칠한 유화처럼 그 안에 전혀 다른 생살을 숨기고 있다 아득히 먼 사막의 먼지 구름이 당신의 호흡기를 지나 피톨 속에서 물감처럼 끈적하게 뒤섞인다 소용돌이의 검고 붉은 색감은 당신의 안색이다 여러 겹으로 숨어버린 밑그림을 찾을 수 없다 연필선이 사각거리던 아득한 당신의 생살, 웃을 때마다 일그러지는 표정은 그래서 허구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사막을 뒤집어 쓴 얼굴 그 위로 어지럽게 지나간 굵고 얇은 붓 자국들, 깜빡이는 눈동자는 당신이 어쩌지 못한 속살이다 가끔 눈물 속에 지워진 연필선들이 속눈썹처럼 젖어있다
너무 먼 간격을 떠도는 희뿌연 표정이 액자도 없이 걸려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무표정하게 다가오는 당신은 먼 먼 사막을 거쳐 온 가늠할 수 없는 황사의 표정이다
* 경남 진주 출생, 미네르바(2008) 등단, ≪시와 지역≫ 편집장, purnc@hanmail.net
불 면
최 춘 희*
검은 꽃잎이 물속을 떠간다
날선 의식 끝에서 부레처럼 부풀어 오르는 떠돌이 별
죽은 이들이 산 자의 입을 봉하고 호출되는 밤이다
북극해를 떠도는 유빙처럼 정처 없는 마음에
밥 한술, 술 한 잔 건네주지 못하고 길 떠났다
살을 나누고 피를 섞은 한 몸인데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다
후회란 늘 때늦게 오는 밤눈 같은 것
바람에 머리칼 잡혀 새가 된 영혼이 뜬눈으로
꺼이꺼이 울고 있다
전 생애를 떠메고 물속 깊이 마른 몸 잠긴다
몸을 건너가는 검은 꽃잎들 피어나 물안개 뜬다
도플갱어
혹을 떼어냈다
빚쟁이처럼 집요하게 박혀있던 이물 덩어리
5분 마취 수술 한 방에 제거되고
무겁던 몸 0.2그램쯤 가벼워졌다
의사 앞에 섰을 때의 긴장이 풀린 발걸음
구름신발 신고 어딜 가지?
침대위에 눕기엔 하늘이 너무 파랗고
시간은 게을러도 좋을 오후 2시
길가 공원에서 비둘기들 우르르 햇살을 물고
날아올랐다
빌딩의 유리창 쨍하게 눈부시고
치통도 투명해지는 바람의 시간
아주 작은 혹 하나 떼어냈을 뿐인데
혹이 붙어 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시간을 살고 있지
유령거미가 되어 빌딩 숲 사이로 숨고 싶어
도시의 미로 속을 떠다니다
불쑥, 당신 앞에 나타나 서있고 싶어
* 경남 마산 출생, 1990년 《현대시》신인상에 고등어 외 5편으로 등단, 시집 세상 어디선가 다이얼은 돌아가고,
종이꽃, 소리 깊은 집, 늑대의 발톱, 시간 여행자,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졸업,
poet5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