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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스크랩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한아름 추천 0 조회 98 12.08.15 15:3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쉐퍼 | 조회 3 | 09.09.05 15:16 http://cafe.daum.net/CPI2002/5lnD/286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총회신학교(박형룡 박사) 3천만환 재정 사고와 그를 이용한 음모
 
소재열
금년 2009년 9월에 소집될 제9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통합측과 분열된지 꼭 5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리폼드뉴스>는 기획연재 시리즈로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왜, 무엇 때문에 분열했는지,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입장에서 연재한다. 본 연재는 소재열 목사가 집필하여 곧 출간하게 될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의 일부 내용을 요약해서 연재하게 된다(리폼드뉴스 편집부).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1) 사건을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과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합동측에서는 3천만환 사건을 이용한 W.C.C.측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총회 안에서는 W.C.C.와 NAE라는 두 세력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대립의 씨앗이 발아 되어 갈등관계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갈등과 대립은 이미 1959년 제44회 분열 총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 3천만환 부정지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본다.2) 이러한 시각이 W.C.C.을 지지하는 통합측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W.C.C.의 신학적인 문제로 반대했던 합동측에서는 W.C.C. 운동과 그 신학을 은폐하기 위하여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3)

이 같은 두 대립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려는 논리이며 분열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확보하려는 생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 분열의 책임을 논할 때에는 양측이 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분열이후 정통성이 자신들의 총회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설명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역사는 주관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필자는 어느 한쪽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그 시대 무엇이 문제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배경을 살펴서 과거 치열했던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교훈 받게 될 것인지 추적하게 될 것이다.

통합측에서는 지나치리만큼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으로 전개한다.4) 민경배 교수는 “분열의 기원이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신학 기금 유용에서 유래된 교장 사임과 관계가 있고 더욱이 에큐메니칼의 중상이라는 박형룡 일파의 소행에서 결국 왔다고 한다면, 한국 장로교회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5)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에게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진현 목사의 말대로 역사를 그렇게 창작하면 안 된다.6)

조동진 박사는 ‘총회신학교 건축기금의 실체와 그 오용(誤用)에 관한 진상’에 있어서 그 헌금이 어떻게 박형룡 박사에게 전해졌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불법으로 지출했다는 신학교 건축기금 3천만 환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의 장로로 미국의 대 은행금용기업가가 개인적으로 친구로서 교장 박형룡에게 보낸 1만 달러 개인수표와 별도로 공식으로 보내진 10만 달러 중에서 지출한 것이었다. 제 십장로교회 장로의 이 특별헌금은 본래는 미국장로교회 총회의 세속적이며 비복음적인 것을 불신하는 제 십장로교회의 미국 은행금융가의 거물 장로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통해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위하여 헌금하기를 원하여 준비된 돈이었다.

1956년 “한국NAE” 총무였던 필자는 WEF 총무 엘윈 라이트(Elwin Wright)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 헌금자는 자기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신학교 교육기금의 제1차 헌금액이 10만 달러였다. 필자는 이 신학기금이 한 교파의 신학교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보다는〈한국복음주의신학교 육재단〉을 만드는 종자돈으로 수령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 재단기금으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수의 봉급 지원과 교수 양성 장학금과 건전한 신학 교재의 출판과 세계 수준의 신학도서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WEF 총무에게 보냈다.

그러나 WEF 국제총무의 견해는 달랐다. “이 돈이 장로교 장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교신학교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인 박형룡 교장을 믿고 그에게 보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신학교의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적극 만류하였지만 필자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헌금이 교장 박형룡을 통하여 총회신학교에 보내어진 것이다. 제 십장로교회는 끝까지 연합장로교회가 속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는 탈퇴하여 지금은 70년대 후반부터 PCA 장로교회 총회에 속하여 있다.”
7)

요약한다면, 그 특별헌금은 교장 박형룡의 총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지 그를 축출한 미국연합장로교회 산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장 박형룡이 남산에 있는 신학교 대지를 불하받기 위하여 3천만 환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지불한 것은 행정상 과오이기는 하지만 그 지불의 결과로 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 불하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부터의 헌금이 선교부를 통하지 않고 교장 박형룡이 수령한 것부터 문제를 삼고자 했던 선교부로서는 그것을 교장 박형룡 축출을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교장의 행정적 실수를 구실로 박형룡을 추방하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는 새 교장을 세운 연합장로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책에 합치된 신학교로 개편하자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의 개요를 박형룡 박사의 진술서를 총회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의 보고서로 채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번 이 사건에 대하여 본인의 불민한 관계로 여러분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어 대단 히 미안하다고 전제한 후, 박호근을 소개받은 것은 숭의여중 교장 이신덕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같은 남산에 소재하고 있는 숭의학교의 기지 불하 관계를 알선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믿고 총회신학교에 쓰라고 온 돈 10,OOO불(환액 8,8OO,OOO 환), 북장로 선교부에서 5,OOO불(2,500,OOO환), 특별비 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 산액 중 13,807,042환, 1958 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계 30,162,172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금번 사건을 추진 중 일부 이사는 격려로써 속히 추진시키라고 말씀한분도계셨으나, 본래 경리관계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 큰 사기꾼인 박호근을 만나게 되어 이 같은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됨은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다.
 
이 모든 지출관계는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와 의논하여 지출된 것이므로 박호근을 사기죄로 징역 보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줄 아오나, 우리 신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고 미국서 온 돈 10,OOO불도 학교에 쓰라고 온 돈이므로 내 친구로부터 내게 보내 왔으나 응당 학교에서 쓸 돈이라 경상비에서 임시로 17,973,742환을 유용한 것은 우선 이 사건을 속히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후일 북장로회 선교부에 보조를 얻어 충당하려고 생각하고 지불한 것인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처럼 실패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8)

총회에 보고 된 이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박형룡 교장께서 교장직을 사임하셨음으로 이를 수리하였사오며”라고 기록하였고 “후임 교장이 선출된 때까지 교장 대리는 총회장으로 하되 이사장이 협동케 하였사오며”9)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 박사 사표수리

교역자 양성에 일생을 바쳐 온 박형룡 박사의 사표가 이사회에 의하여 수리되었다. 이사회 전체 회의는 3월 10일 오후 3시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회되어 8일 오전 1시까지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교장 사표수리는 7일 밤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다(밤 회의는 인톤 선교사 집에서 열림). 회의는 이사장 인톤 선교사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참석 이사는 42명 중 38명이고 가 부 투표에서 20:17 기권 1표로 수리되었다 한다.

동 회의에서 교장 사표수리에 대한 결정에서

① 1958년 3월 7일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대전제일교회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박형룡 박사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은 총 38표 중 가 20, 부 17, 기권 1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과장 박내승 씨도 역시 가 30, 부 7, 기권 1로사표가 수리되었다.

② 1958년 3월 8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교장 인선위원 9인을 선임키로 하고 선교회 3인, 이사회 3인, 실행이사회 3인을 결정하기로 하고 후임 선정위원으로 선교사 대표 인톤 감부열 감의도 실행이사 대표 전필순(미참 경우에 노진현) 김윤찬, 김재석, 전체 이사 대표 이승길, 김형모, 김석진 9인을 선정하였다.

③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박 박사가 계속 집무할 것

모 이사는 회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교장서리를 권세열 교감으로 추천하는 동의 제청이 있었으나, 총회 결의를 상기시키면서(초대 교장엔 선교사도 무방이나 2대 교장 이하는 한국인으로 할 것) 총회 결의가 번복되기 전에는 될 수 없다고 하여 선교사가 교장 사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며 한편 후임자 결정에는 전체 이사회의에서 2/3의 표를 획득하여야 하며 총회(금년 총회는 금년 9월에 회집 됨)에서 인준을 받아야 정식으로 교장으로 취임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제3대 교장취임은 일러도 10월 초순에야 가능.
한편 사무처장 박래승 목사의 후임은 4월 11일에 회집할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 하며, 총회 인준 여부에는 관계가 없다 한다.
10)

제43회 총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교장직 사표를 내고 명예교수로 있도록 하면서 교장서리에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학교의 내무는 계일승 목사로 담당케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그 후 신학교에서 물러나서 쉬었고 그가 가르치던 조직신학은 김규당 목사가 담당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단 3천만 환 사건은 수습단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43회 총회는 신학교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조직케 하였다. 이를 위해 1959년 1월 20일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새로 조직되는 이사회가 모였다.11) 안광국 목사는 NCC측 인사로서 그가 집필한 「장로회신학대학 70년사」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NAE측은 신학교 3천만환 사건을 무마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재임케 하기 위하여 실행이사를 유리하게 선임코자 했다. 저희들의 비밀히 추천한 실행이사는 다음과 같다. 이환수, 정선득, 양화석, 송암석, 나기환, 노진현, 정일영, 황병혁, 김수영, 전제영, 김윤찬, 황득환, 김치선 등이었고 이사장으로 보이열 목사를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당선된 실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 안두화, 부 : 김석진
서기 : 안광국, 회계 : 위두찬
실행이사 : 안두화, 김석진, 권세열, 양화석, 보이열, 김재철, 노진현, 계창봉, 이환수, 김재석, 위두찬, 김윤식, 안광국, 황병혁

이상 14인 중 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 외에는 다 탈락이 되고 말았음으로 이사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고, 저희는 박형룡 박사의 구명운동이 실패함을 느꼈다.”

이렇게 역전 되기까지 NCC측의 안광국, 위두찬, 김성칠, 김석진, 나기환 등은 온양에서 모여 구수밀의를 하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진두 지휘한 결과 40:17이란 차이로 승리하였다.
12)

1958년 3월 7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교장 사표수리는 총 투표수 38표 중 가 20표, 부 17표, 기권 1표의 근소한 차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처장 박내성의 사표는 압도적인 가표로 가결되었고,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열리기 전에 신학교 이사회는 회합을 갖고 후임 교장을 선출키 위하여 투표에 임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명되었다.

교장 지명투표 - 게일승 19표, 명신홍 17표, 기권 2표
교장 선거투표 - 계승일 가 18표 부 19표 기권 1표

교장 선임에 실패한 이사회는 다시 인선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안두화, 김석진, 노진현, 권연호, 김재석, 안광국, 김윤찬. 그러나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시비로 인하여 비상정회가 되자 교장선임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이것이 분열 전의 마지막 이사회였다.13)

총회가 분열되기 1년 전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가결시켰다. 박형룡 박사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사회는 이 사표를 받을 것인지를 표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 전 교장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교장 선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장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필자는 칼빈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으로 처음에 준비한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였다. 논문을 다 완성한 후에 지도 과정에서 본 논문은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논문을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이 더 권위있는 논문이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지도에 순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장로교회 분열사>가 탄생되었다. 본 논문은 공적 문서를 기준으로 신국판 500여 페이지로 준비된 논문이다. 곧 출판된다.

기사입력: 2009/08/09 [12:58]  최종편집: ⓒ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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