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경이물훼(敬而勿毁) 화첩- 의령남씨 사가(私家)의 가전화첩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 태조가 망우령에서 능지(陵地)를 살피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자신의 능을 쓸 터를 정하지 못하여 근심이 많았는데, 남재(南在, 1351년~1419년)가 자신의 장지(葬地)로 정해 두었던 터를 언급하자 함께 가보고 그 곳을 수릉지(壽陵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화면을 대각선으로 갈라 망우령에서 왕이 지세(地勢)를 살피고 있는 모습과 호위병사들이 행군하는 모습을 그렸다. 산수배경을 비중 있게 다룬 점이 특징이다.
▲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서문
태조조(太祖朝)에 영의정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 1) 가 경연(經筵)에 참가하였을 때 임금이 묻기를“경은 수지(壽地) 묏자리 가 있는가?”라고 하니, 충경공이 대답하기를“동쪽 성 바깥 30리에 점찍어 둔 곳이 있습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나와 경은 가서 보아야겠다.”고 하였다. 곧이어 가마를 타고 묏자리로 정하여 둔 지역에서 가장 맞은편의 먼 산[外案]에 가마를 멈추고 머물렀다.
남희로(南羲老)의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서문
산세의 여러 모습을 가리키면서 충경공에게 말하기를“이곳은 신하의 묏자리가 아니고, 나의 수릉(壽陵,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무덤)으로 하면 딱 좋다”고 하였다.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명령을 내려 충경공을 위해서 수릉동 외곽의 줄곡 (乼谷)에 따로 마련해라고 하였다. 무학대사가 돌아와 보고하기를“이 지역이라면 국가와 더불어 종신토록 복을 누릴 곳입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충경공에게“임금과 신하 모두가 묻힐 자리가 있으니 근심을 잊을 만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가마가 머문 지역을 이름 짓기를‘망우령(忘憂嶺)’이라고 하였다. 희로(羲老,2) 가 삼가 쓰다.
- 1) 남재(南在, 1351년~1419년) : 조선초기 개국공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경지(敬之), 호는 구정(龜亭).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저서로 『구정유고(龜亭遺稿)』가 있다.
- 2) 희로(羲老) : 남희로(南羲老, 1728년~1769년). 본관은 의령(宜寧). 행적이 자세하지 않으나 왕조실록에 의하면 공릉참봉(恭陵參奉)과 용안현감(龍安縣監)을 역임하였다.
궁중행사 기록화로서 주목된 《경이물훼》 화첩은 그러나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의령남씨 가전화첩》 과 고려대박물관 소장의 《남씨전가경완》과 그림의 도상과 글씨의 내용이 일치하여, 사실은 사가(私家)의 가전화첩이었음이 이후에 밝혀졌다.
조선 태조의 수릉지(壽陵地) 물색, 중조대에 세자 서연관들에게 베풀어졌던 연회, 명조대에 서총대에서 행해졌던 시예, 선조대에 있었던 경수연 행사, 영조대에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있었던 연회 등 다섯 건의 행사를 다룬 기록화가 포함되었다. 이들 행사에 참여하거나 관련된 인물들은 각각 의령 남씨 5세 남재(南在, 1351년~1419년), 10세 남세건(南世健, 1484년~1552년), 11세 남응운(南應雲, 1509년~1587년), 13세 남이신(南以信, 1562년~1608년), 14세 남두첨(南斗瞻, 1590년~1656년)・남두환(南斗煥, 1591년~?년), 18세 남태회(南泰會, 1706년~1770년)이다. 《경이물훼》 화첩과 동일한 내용과 구성인 홍익대박물관 소장의 《의령남씨가전화첩》의 경우 화첩 제작에 서사자(書寫者) 혹은 찬자(撰者) 로 참여한 인물들의 서명이 있는데, 18세 남태용(南泰容, 1722년~1775년), 19세 남은로(南殷老, 1730년~1786년) 외에 남헌로(南憲老, 1727년~1782년) 와 남희로(南羲老, 1728년~1769년) 가 그들이다. 이들은 충경공(忠景公) 남재와 그의 손자인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둘째 아들로 내섬시(內贍寺) 부정(副正)의 벼슬을 지낸 남칭(南偁)의 후손들로 의령남씨(宜寧南氏) 부정공파(副正公派)의 인사들이다. 이들의 활동 시기는 14세기 조선 태조 대부터 18세기 후반 영조 대까지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있다.
◆ 남재(南在 )의 가계도 - 충경공 5세
| 재(在) 충경공 ◈ | 5세 |
| 경문(景文) 의랑공 | 6세 |
| 지(智) 충간공 | 7세 |
| 칭(偁) | 윤 (倫) | 8세 |
| 변(忭) |
| 9세 |
| 세건(世建)-6남 ◈ |
| 10세 |
| 응운(應雲)-장남 ◈ |
| 11세 |
| 호(琥)-차남 |
| 12세 |
이순(以信) -3남 | 이신(以信) -차남 ◈ | | 13세 |
두환(斗煥) -장남 ♣ | 두첨(斗瞻) -장남 ♣ | | 14세 |
| 항(?) -5남 | 훤(翧)-장남 | | 15세 |
| 영훈(永薰) -차남 | 지훈(至熏) -7남 | 상훈(尙熏) -3남 | | 16세 |
| 찬명(贊明) -장남 | 효명(孝明) -장남 | 근명(近明) -4남 | 달명(達明) -3남 | | 17세 |
| 태용(泰容) -장남 ♣ 書 | 태온(泰溫) -장남 | 태회(泰會) -4남 ◈ | 태보(泰普) -장남 | 태기(泰耆) -장남 | | 18세 |
|
| 희로(羲老) -3남 ♣ 書 |
| 헌로(憲老) -장남 ♣ 書 | 은로(殷老) -장남 ♣ 書 | | 19세 |
| 부정공 | 감사공 | 파 |
1.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태조가 망우령에서 능지(陵地)를 살핀 일화를 그린 것이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자신의 능을 쓸 터를 찾게 된 내력을 기록한 그림과 글이다. 태조는 자신의 수릉 (壽陵,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 을 정하지 못하여 근심이 많았는데, 남재(南在)가 자신의 장지로 정해두었던 터를 언급하자 함께 가보고, 그 곳을 수릉지로 채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태조는 남재를 위해서는 줄곡에 따로 장지를 물색해 주도록 하였다. 이에“임금과 신하가 모두 장지를 정했으니 근심을 잊었다”고 하고, 이들이 함께 행차하여 지형을 살폈던 곳을‘망우령’이라 명명하였다.
이 일이 있었던 때는 태조가 한창 자신의 능지를 물색하던 1395년~1396년 사이였을 것이다. 태조가 수릉지를 물색하였음은 『태조실록』에 1395년 3월부터 확인이 되고, 그 해 7월11일에는“임금이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 과 좌사 남재(南在)와 참지문하 남은(南誾)과 중추원사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광주(廣州)에 가서 수릉(壽陵)을 살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남재가 수릉지 물색에 참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396년 4월 6일에“임금이 광주(廣州)를 지나다가 수릉(壽陵)의 땅을 물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듬해까지도 수릉지를 물색하고 있었으나, 11월과 12월에는 “수릉지에 거둥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4월에서 11월 사이에 수릉지를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왕과 신하가 함께 돌아보았다는 수릉지는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이 있는 오늘날의 동구릉 자리로서, 이는“도성 동ᆼ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다”는 화첩 5면의 기록과 일치한다. 건원릉이 들어선 이후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일대에는 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 등 능침이 집중되었으니 왕조 최대의 능침지로 19세기 헌종대까지 사용되어, 천혜의 지세를 보인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일화를 통해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는‘망우리’라는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어 흥미롭다.
태조가 수릉지를 정하는데 큰 공헌을 한 남재(南在, 1351년~1419년)는 의령남씨 시조인 남군보(南君甫)의 5세손으로 고려말인 1371년(공민왕 20년)에 진사에 오르고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에 가담해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가 영의정을 지낸 것은 66세 때인 태종 16년 1416년 3월부터 10월까지이고, 시호는 충경(忠景) 이다. 『의령남씨족보』에는 그의 묘가 “남양주군 별내면 화접리”에 있다고 하였고 “태조가 장지를 하사하였다. 太祖所賜陪葬地也”고 부록되어 있어 위의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남재의 문집인 귀정유고(龜亭遺藁)에도 자신의 장지를 임금에게 하사받은 사실이 기록되었다.
태조께서 이미 건원릉 자리를 정한 후에 공과 함께 그 앞의 고개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망우리라 명명하였다. 그 아래 민전(民田)을 특별히 공에게 내려주어 무덤을 지킬 전호(田戶)로 삼도록 하고 부차적 용도로 남아있던 땅을 내려주어서 만세토록 배장(陪葬) 하고자 한 뜻을 담았다.
같은 내용이 조선말기 이유원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망우리조’에도 수록되어 그 지명의 유래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기록에는 다만 태조가 그에게 장지를 하사하였고, 그 앞의 고개를 ‘망우령’이라 이름하였다는 내용만 전해질 뿐이어서 어떤 근심을 잊게 되었다는 것인지의 설명은 없는데, 《경이물훼》 화첩 중의 이 글 내용을 통해 상세한 내막을 알 수 있다. 의령남씨 집안에 대대로 구전(口傳) 되던 내용을 남희로(南羲老, 1728년~1769년)가 화첩에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의령남씨 부정공파로 남재의 후손이다.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태조망우령가행도> 화보 003 그림은 과감한 대각선 구도로 이루어졌는데, 좌상단에 망우령에서 왕의 행렬이 멈추어 쉬고 있는 모습과 그 아래에 호위병사들이 행군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우반부는 산능선이 연이은 산수배경을 비중있게 다루었고 화면 상단에 병풍처럼 늘어선 원산(遠山) 이 어우러져, 기록화이지만 산수화 한 폭을 감상하는 듯하다. 태조조 당시에 이러한 도상의 기록화 원형이 존재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후대에 그려진 것임이 분명한데, 남희로를 포함한 의령남씨 후손들이 가전화첩을 꾸민 18세기 말에 처음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조선왕조행사기록화 도록 중에서)
◆ 남재(南在 )의 <장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전경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후경
<참고문헌>
의령남씨족보
다음카페 불교일주원<이미지>건원릉
[출처] 태조망우령가행도 (박물관에서 공부하며 놀자) | 작성자 김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