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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년 ~ 1801년 4월 8일)
출생>
조선인 최초로 중국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1756년 서울 반석방(현재 중림동)에서 아버지는 참판 이동욱(李東郁)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창 이씨로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이다. 외할아버지가 성호 이익이며, 공조판서를 지낸 대학자 이가환(李家煥)은 외삼촌이 된다.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한다.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약현(若鉉)·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과 처남·매부 사이가 된다. 이벽의 누이가 정약현과 결혼하여 가까운 사돈지간이며, 서학에 관한 한 정신적 스승이며 벗이다. 아들은 장남 이택규, 차남? 삼남 이신규가 있다.
1785년에 터진 명례방 사건으로 신앙 활동에 잠시 주춤했으나 다시 회두하여 자치교회를 만들어 교세를 성장시켰다. 평택 현감으로 있던 1791년 신해 박해가 터져 관직을 박탈당하였고, 1795년 을묘박해 때는 귀양살이를 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당했다. 비록 수차례 배교한 전력이 있지만 이벽, 권일신과 함께 초기 한국 천주교회 설립을 주도한 공동 창립자이다.
성장>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20세 전후에 고명한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780년(정조 4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벼슬에는 큰 뜻이 없어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 학문이 남인 소장 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서학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서학 모임의 중심인물인 이벽(李檗)과 자연스럽게 친교를 맺으며 천주학을 알게 되었다.
1777년에서 1779년에는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벽, 정약전·정약용 형제등 남인 소장파 학자들과 함께 외딴 절인 천진암과 주어사에 들어가 서양 학문과 천주학을 연구하고 강학회도 열었다. 강학회에 참석했던 이들중에는 천주학 교리를 실천학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주일을 제정하여 지켰는데, 양력이 도입되기 전이라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주일로 정하여 엄수하였다. 그러나 이승훈은 서양 역법과 기하학 등에 많은 관심을 가졌을 뿐 천주교 교리를 듣고 좋아하기는 했으나 교리를 따르지는 않았다.
북경방문>
1783년(정조 7년) 황인점(黃仁點)을 정사(正使)로 하는 사절단이 구성될 때,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을 수행하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을 갈 수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이벽이 이승훈을 찾아와서 사절단에 동행하여 북경 천주당을 방문하고 셰례를 받고 관련된 성물들과 자료를 구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 이벽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비용을 모아 주며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필 것 등 여러 가지를 상세히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1783년 11월 8일(음력 10월 14일) 한양을 떠나 1784년 1월 13일(1783년 음력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했다.
입교와 세례>
당시 북경 교구장으로 있던 포르투갈 출신의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중국명 탕사선 湯士選 1751-1801) 주교가 1790년 10월 6일에 바티칸의 안토넬리(Leonardo Antonelli.1730~1811)추기경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여기에 당시 북경 성당을 찾은 이승훈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있다. “1784년에 조선 왕국에서 온 사신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이 수학을 너무도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북경 교회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리고는 수학을 가르치는 유럽인 선교사에게 수학의 원리에 대해서도 듣고 수학 책들도 얻어 갔습니다. 그런데 유럽인 선교사들은 이 조선 사람에게 수학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기회를 봐서 가끔씩 그리스도교의 원리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을 건네주기도 하는 등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은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으며, 마침내 세례를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사신으로 온 아버지의 승낙과 동의를 받은 다음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구베아 주교의 서신,윤민구 역주ㆍ’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ㆍ가톨릭출판사ㆍ2000년ㆍ44쪽)
이승훈은 북경 북 천주당을 찾아가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는데, 신묘하고 오묘한 가르침에 깊이 이끌렸다. 선교 사제들의 권면과 스스로 자진하여 세례받기를 청하였다. 부친 이동욱도 아들의 세례를 허락하여, 1784년 음력 1월 이승훈은 북당(北堂) 성당에서 예수회 선교 사제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중국명 양동재梁棟材, 1736~1812) 신부로부터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당시 북경성당에 있는 몇몇 사제들은 이승훈의 세례를 반대했지만 그라몽 신부가 강력히 주장하여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승훈의 당시 북경에 있던 서구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매우 놀라워했다. 신앙이 전연 전해지지 않는 국가의 한 젊은이가 스스로 찾아와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된 사례는 로마 카톨릭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으로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이승훈은 1784년(정조 8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기하학, 각종 과학서적, 성서, 천주교 자료, 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고, 이벽을 만나 자세히 보고하고 자료들을 건네주었고, 함께 교리서를 탐독하며 천주교 연구에 전력하였다.
전교>
이승훈은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후 이벽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전교 활동을 벌였다. 이벽은 천주교 전교 활동에 매우 열성적이었는데, 먼저 권철신, 권일신 형제를 설득하여 천주교에 입교시키고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벽은 또한 중인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파했는데,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지황등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공동체를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이벽의 전도로 천주교 교인이 된 권일신은 중인이던 천안 출신 이단원, 충청도 아산 출신 이존창, 전주 출신의 유항검을 입교시켰다. 이들은 출신 지역을 전교하여 훗날 조선 천주교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충청 내포 지역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이바지했다.
초기에는 주로 남자 양반들을 대상으로 전교하였으나 점차 중인, 상인, 부녀자들에게도 전교하였다. 부녀자들의 전교는 이벽의 부인 유한당 권씨, 이승훈의 부인 나주 정씨, 권일신의 부인 광주 안씨등 양반 신자들의 부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전교된 교인들은 서울 수표동에 있는 이벽의 집에 모이게 되었는데, 양반의 집에 너무 많은 중인과 상민들이 자주 출입하게 되자 주변의 이목을 끌게 되었고 점차 장소도 비좁아졌다. 그래서 명례방(현 명동)에 있는 부유한 중인 신분의 역관 김범우의 집으로 집회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명례방 사건>
집회 장소를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으로 옮긴 후 정기적인 신앙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을 오늘날 천주교 연구가들은 '명례방 공동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신앙공동체 모임을 조선 천주교회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1785년 중인 김범우(金範禹) 마티아의 명례방 자택에서 종교집회를 하던 중, 형조(刑曹)의 관헌들에게 적발되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여 모임 참석자 전원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발각 이유는 이용서, 정구, 조언일 김규, 홍낙흠등 반대파들이 형조판서 김화진에게 보낸 통문 때문으로 고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명망 있는 양반 신분들이라 모임 장소를 제공한 김범우만 투옥되었고 이승훈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훈방되었다. 그런데 석방된 권일신, 이윤하 등 다섯 사람이 형조에 가서 압수한 성상과 물건들을 돌려달라고 항의하며 물의를 일으켰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압수 물품을 돌려주고 김범우만 ‘충청도 단양’(가톨릭 대사전)으로 유배보내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김범우는 고문으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1786년 귀양지에서 사망하였다.(순교연도는 1786/7년설/ 순교지:경상도 밀양과 충청도 단양설이 있음) 사건 직후 성균관 유생들이 천주교 배척을 요구하는 통문을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돌려 양반출신 천주교도들과 양반가 문중들을 압박했다. 이승훈은 친척, 가족, 문중의 거센 추궁에 시달리다 천주 서적을 불태우고 천주학을 사학이라 배척한다는 취지의 벽이문(闢異文)을 작성하여 자신의 배교를 공언한 후 교회를 떠났다. 이벽은 부친과 갈등 속에 식음을 전폐하다 사망하였다. 신앙모임의 주축이었던 양반 출신 교인들이 배교하고 모두 떠나자 '명례방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천주교회 설립>
그러나 그다음 해인 1786년, 이승훈은 은밀히 회심하였고 다시 복교한 이들과 교회 조직 재건에 힘썼다.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정약전·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다. 이른바 가성직 교회운영이다. 그러나 교리문답을 연구하던 중 사도적 계승을 받은 성직자 없이 자치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교회법에 위반될 수도 있다는 의문이 생겼다. 교리 문답서에는 평신도의 성사집행을 금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북경 교구가 담당하였으므로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유권해석을 구해야 했다. 1789년 이승훈은 윤유일을 밀사로 임명하여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북경에 가서 구베아 주교에게 답신을 받아 오도록 했다. 북경 밀사 윤유일은 1790년 3월에 귀국하였다. 그런데 그가 가져온 회답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는 교회법에 위반 되는 가성직 제도를 파하여 자치교회를 해체하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펴나가게 되었다. 1790년 9월에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밀사로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파견하였다.
정미년 반회 사건(1787년)>
1787년(정조 11) 10월경,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錫泰)의 집에서 정약용, 이승훈, 강이원 등이 과거공부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토론했다. 이 사실을 안 이기경이 가서 그들이 지은 과거 글을 보니 거칠고 미완의 것이었다. 이기경이 “그대들의 과거 공부는 원래 정밀하였는데 지금 이렇게 거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라고 하니, 모두 얼굴빛이 달라지고 땀을 흘렸다. …반촌 모임에 함께했던 진사 강이원이 그때 자리에 있었는데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서책의 이름과 천주교의 예식을 모두 말하였다."(공서파, 기록) 이기경이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에게 알리자, 유생들의 척사 상소가 잇따랐다. 그로 인하여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천주학 도서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 되어 조정에서 그 폐해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은 목판으로 간행되어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는데, 충청도 지방의 산골 마을에까지 보급되어 있었다. 1788년에 8월에 이경명이 서학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임금은 전국에 천주교 관련 서학 서적을 색출,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관직 출사>
* 이승훈의 편지>
1790년 7월 11일에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승훈은 어쩌면 자신이 앞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행보를 예감한 듯하다. “저의 집안이 아직 박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이지만 그래도 저 힘닿는 대로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천주교 신자들을 돌보는 일을 책임지는 것은 현재 제가 처한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감히 청하오니, 부디 이 의무에서 저를 벗어나게 해주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쓴 이후 이승훈은 관직의 길로 나아 간다. (참고: 송란희,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1790년 음력 10월에 음서로 비로소 관직에 나가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고, 1791년(정조 15년, 신해년) 2월 서부 도사를 거쳐 그해 6월에 평택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790년 9월 성직자 영입 운동차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이 돌아와 선교사를 보내주겠다는 중국 교회의 약속과 함께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 구베아(Gouvea)의 명을 전하였다. 이승훈은 제사불가라는 이 가르침과 규정에 고민하다가 다시 한번 배교를 선택한다. 그의 신앙의 출발은 마테오 리치가 자신의 저서 《천주실의》에서 주장한 보유론(補儒論)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도정치, 쇄국과 개화, 근대화, 제국 열강의 침노속에 무능한 조선조정 등 조선 후기의 혼란 속에서 지배이념으로서의 유학의 한계를 천주학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유교적 가치와 천주 교회법의 충돌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하던 끝에 다시 교회를 떠났다.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Marchini) 신부는 1790년에 조선 사신들 과 함께 북경에 도착한 신입 교우로부터 들은 이승훈에 대한 소식을 포교성성 장관에게 전한다. “6년 전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던 이 베드로는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으며 짧은 시간 내에 여러 학자들을 회개시켰다고 합니다. 그 학자들은 또 다른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고, 1,000명도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받은 사람 중에서 남자 12명과 여자 12명을 회장(교리교사)으로 선발하였다고 합니다. …” 다블뤼 주교는 ‘이승훈이 조선에 천주교를 도입하였고 열렬히 그것을 전파하였음에도 대중의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했던 수많은 변절과 그에 동반된 글들로 인해 그 빛이 바래지고 말 것’ 이라 마음 아파했다. 하지만 이기경의 『벽위편』에 실린 「판결문」을 보면 이승훈의 사형 이유는 오직 ‘사교인 천주교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으며 사교의 우두머리’라는 죄목이다. “너는 직접 세례를 받고 만 리 밖에서 그 책을 구해 와서 인척들에게 전파하고 경향 원근에 퍼뜨렸다. …무릇 나라의 금령이 반포되고 사악한 실상이 모두 드러난 후에도 요사하고 추한 무리가 너를 교구 대부로 삼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 범한 죄를 논하자면 천지간에 그대로 두기 어렵다.” 신유년 2월 26일에 죄인 이승훈은 사형에 처 해졌다. 3일 뒤 이승훈의 시신은 자기 집으로 옮겨졌다. 아무도 감히 애도의 말을 하려고 그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이자 인척이었던 심유(沈浟)만이 홀로 상가를 찾아가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송란희,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신해박해(1791년)>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선비 윤지충은 신자로서 조상제사 불가 등의 종교적 가르침을 지키고자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 파장이 크게 일어나게 되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윤지충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서인들의 공격을 받으며 당쟁으로 비화됨에 따라 사회 도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명하에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참수당했다. 이승훈은 조상제사 불가라는 교리 때문에 이미 배교를 한 상태였으나 반회사건(1787년)이 빌미가 되어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었다. 서양 서적을 구입해 온 사실 등으로 문초를 받고 관직을 삭탈 당했다(음력 11월). 권일신은 예산으로 귀양을 가던 중 고문으로 얻은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이승훈은 투옥 중 이미 배교했다는 변론이 받아들여져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1792년 초에는 한해 전에 평택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다는 소문 때문에 다시 한번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을묘박해(1795년)
이승훈은 배교 후 천주교인들과 교류를 끓었으나 1795년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가 선교사로 한양에 들어와 전교 활동을 하자 교인들과 다시 접촉하였다. 같은 해 6월에 조정에서 주문모 신부 체포에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관련자로 최인길, 윤유일, 지황이 체포된 후 순교했는데 이승훈도 연루되었다는 서인들의 모함을 받아 충남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유배 생활 중 〈유혹문 牖惑文〉을 지어 유포하고, 1796년에 유배가 풀린 후 〈주자백록동연의 朱子白鹿洞衍義〉를 짓는 등 교회 활동을 단절한 입장을 밝혔다.
말년과 사망
신유박해(1801년)>
1801년 순조가 즉위하자 섭정인 정순대비에 의해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 집권세력인 노론이 사교철폐를 명분으로 남인들을 숙청하여 재기 불가능 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승훈은 1801년 2월 9일(양력 3월 22일) 서학의 원흉으로 체포되었다. 그날부터 2월 18일(양력 3월 31일)까지 총 여섯 차례의 신문을 받았다. 그리고 2월 26일(양력 4월 8일)에 이승훈은 정약종, 최창현, 홍교만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사형당했다. 이 외에도 이가환, 권철신, 주문모, 강완숙 등 약 300명이 처형되었고 정약용과 정약전등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당했다.
이승훈에 대한 판결문>
이승훈은 직접 영세를 받았고 만 리 밖에서 사악한 책을 구입해 와 모든 친척들에게 전파했다. 경향 각지의 멀고 가까운 데까지 미치게 했다. 사악한 서적과 요망한 말로 여러 무리를 나쁘게 물들였다. 이도 부족해 서양 사람과 왕래하고 다른 무리들과 얽혀 뭉쳤다. 요망하고 추한 무리들은 그를 교주(敎主)라도고 하고 대부(代父)라고도 하였다.
순교와 변절에 대해>
이승훈 베드로, 조선 천주교교회 창설자인 그가 항구하지 못한 믿음과 용감하게 순교하지 못한 사실을 두고 순교냐 배교냐 이견이 분분하다. 그의 한결같지 못한 신앙과 믿음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분들, 그들은 과연 똑같은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처신할까?
나는 조선천주교회의 머릿돌인 이승훈 베드로가 무서운 권력의 박해에 일시 배교했다 하더라도, 영민한 신앙인인 그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 그만의 방법으로 하느님을 증거했으리라 믿는다. 만일 그도 아니라면 그는 연옥 정화를 통해 주님 앞에 부끄러운 자신의 신앙을 처절하게 회개하며 완성하고 하느님께 안겼으리라 믿는다. 그 뒤에 면면히 이어지는 교회 역사를 보면서 누군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는 교회의 머릿돌인 베드로 이승훈이다. 그의 주보 성인 베드로 사도도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전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네 번째 돌아와 그의 믿음을 완성하고 교회를 세웠으며 주님을 증거하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이승훈 베드로는 그의 주보 베드로 사도와 참 많이 닮아있다.
한가지 반성할 일이 있다. 오래된 전통사상인 제사 폐지와 그로 인한 격렬한 충돌과 박해의 빌미에 대해, 당시 로마 교회와 선교사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인 성경와 다양한 사회조건에 살아가는 인간과 문화에 대한 통찰로 지혜로운 답변을 주었어야 했다. 그의 순교와 배교를 대하는 현대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순교자의 자손>
이신규(李身逵) (1794~1868)는 이승훈(李承薰)의 셋째아들로 세례명은 마티아이다. 1856년 조정에 탄원하여 이승훈의 대역죄를 면하게 하였다. 아버지 이승훈의 뒤를 이어 신앙을 일으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문재(文才)와 의술에 뛰어난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용인(龍仁), 진천(鎭川) 등지로 피난하다가 그해 9월 체포되었다. 그러나 뛰어난 학문과 의술의 사회적 공헌을 인정받아서인지 또는 배교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석방되어 그 뒤 인천(仁川)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永宗島)로 가서 1846년까지 살았다. 1846년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관련이 되어 5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처음엔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결국 배교하고 1846년 8월 1일 석방되었다가, 다시 1868년 이승훈의 손자이며 자신의 아들인 이재의 토마스(李在誼 토마스1807-1868)와 함께 순교하였다. 이재의 토마스는 이승훈의 손자로 국내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고 부제품까지 받았다.(주교품은 범주교인지 마카오나 북경인지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능숙한 필체로 쓴 다섯 통이 라틴어 보고서 맨 끝에서는 번번이, “부제 토마스 이재의"라는 서명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 서한은 파리 외방 전교회 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1871년에 증손 이연구(李蓮龜), 이균구(李筠龜)가 각각 순교하여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
이승훈의 유고문집으로 ≪만천유고≫(蔓川遺稿)가 있다.
이승훈에 대한 기록은 다른 이들에 비해 많다. 시복 자료집에 따르면, 교회 기록이 12건이고 정부에서 편찬한 관찬 기록이 26건, 이만채 등 개인 기록이 7건이다. 그 밖에 『평창 이씨 족보』와 『사마방목』(1790년,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 명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하는 「유시(遺詩)」가 있다. 그에 대한 교회 측 기록은 편지들이 많은데 이승훈이 북당 선교사들에게 쓴 2통의 편지도 있다(프랑스어 번역본으로 원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 편지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했으며 성사의 은총을 받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 사제품을 받지 않은 채 성사를 행한 것을 ‘하느님의 은총을 완전히 저버린 채 마귀의 종이 되어’라고 표현했으며, ‘세례를 받을 당시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교리를 피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하여 잘못을 저질렀다.’라며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또한 ‘세상의 모든 나라는 구속의 은혜를 받아 신부와 주교가 가득 찼는데 어찌하여 우리만 제외되었는가?’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 정란희,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참고:가톨릭 대사전, 위키백과, 변기영,이승훈 베드로), 구자룡,이승훈, 정란희.이승훈 베드로. 차기진, 고난의 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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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22년 2월 19일 인천 장수동에 소재한 이승훈 베드로 진묘터를 다녀왔습니다.
저녁 무렵 진눈개비가까지 흩날려 1801년 박해와 순교의 아픈 정황을 더욱 느끼게하더군요.
묘역에 도착하니 곧 일몰 시간, 급하게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그 끝 마지막에
아래쪽에 아들들의 묘지가 윗 쪽엔 이승훈 베드로님의 순교자님이 묘지가 있더군요.
너무 일찍 피어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의 뜻 하신 바, 피고 또 꺾일 수 밖에 없었던 순교의 삶과 길
한없는 감사함을 갖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