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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위한 바른 길 안내자 - 金宇鍾 문학평론가
김순진(시인. 소설가) 사람들은 지루하던 겨울을 떨치고 남녘에서 올라오는 봄소식에 목이 마르건만 봄은 조급한 사람들을 꾸짖기라도 하는 듯 많은 눈을 뿌렸다. ‘눈 구경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는 부산에 최고 40Cm의 눈이 내렸고 서울의 기온도 꽤 쌀쌀하다. 2005년 3월 7일 김우종 문학평론가의 메인스토리 취재를 위해 잠원역에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니 알싸한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며 그간 견뎌왔으니 조금 더 기다리라 꾸짖는 듯하다. 전철 역사 안에서 나올 것으로 알고 최현근 월간 스토리문학 회장을 기다리니 최 회장은 다른 교통수단으로 도착하여 역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아파트 7층에 위치한 김우종 선생 댁의 초인종을 누르니 선생께서 나오시며 반겨주신다. 댁 내부로 들어서니 역시 원로학자의 집답게 통로부터 많은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윤동주 생가와 고향 사진, 그리고 윤동주의 초상화와 함께 선생께서 그린 수많은 미술작품들이 눈에 띠었다. 평소 김우종 선생의 에세이전집을 잘 읽었다고 자랑하며 선생님을 취재하게 되면 꼭 좀 데리고 가 달라던 월간 스토리문학 출신 전봉진 시인에게 함께 취재하러 가자 하니 급히 지방에 일이 있어 내려간다며 건네준 작은 선물을 선생께 드렸다. 선생께서는 소년처럼 수줍은 미소를 띠우시면서 손수 물을 가스레인지에 올려 커피를 타 주시는 모습에서 꼿꼿한 몸매에 선비다운 기개와 할아버지의 정이 넘쳐흘렀다.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늙지 않으시고 늘 그대로이신지라 따로 건강의 비결이 있으신지 여쭈니 선생은 과음하지 않고 담배는 피우지 않으며 일요일이면 가까운 산을 산책한다며 건강의 비결을 절제에 있음을 귀띔하신다 ![]() ![]() 김우종 선생은 1929년 2월 4일(陰) 함경북도 성진에서 아버지 金在煥(雪城金氏. 作故) 씨와 어머니 宋泰淳(礪山宋氏, 作故)의 사이에서 칠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30년 강보에 싸여 부모님의 고향인 개성으로 돌아온 뒤 다시 황해도 연백군 연안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선생의 본은 설성김씨(雪城金氏)로 시조는 김알지(金遏止)의 39대손이며 고려의 대제학 지선(芝宣)이다. 설성(雪城)은 충청북도 음성과 경기도 이천의 일부지역에 걸쳐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의 노음죽현(奴音竹縣)을 신라에 와서 음죽(陰竹)으로 고쳐 개산(介山 : 죽산) 군(郡)에 속하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와서는 음죽군(陰竹郡)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일부는 음성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이천군에 합해졌다. 설성 김씨(雪城金氏)의 시조 김지선(金之宣)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후손이며, 개성 김씨(開城金氏)로 분적한 김용주(金龍珠)의 증손이다. 고려의 상장군 원(源), 장악원정(掌樂院正) 대수(大壽), 중추부지사 윤방(潤邦) 등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 김세희(金世禧)는 역과(영조 41년)에 급제하여 통문관교회(通文館敎晦)와 첨정(僉正) 등을 역임하였고, 여러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문집으로 《관아당유고》를 남겼는데, 역관이 남긴 흔치 않은 기록으로서, '대청(大淸)'이라는 표현을 쓴 데서 보이듯이 명분론 등에서 당시의 일반 사대부들과 사상적 경향을 달리하였는데 아마도 김우종 선생의 나라를 위하여 바른 말을 하는 대쪽 같은 기개가 가문의 전통인 듯하다. 학문으로 유명했던 수항(壽抗)과 판서(判書) 훈(壎), 교관 치홍(致洪), 의관(議官)을 지낸 영배(永配) 등이 가문을 빛냈다. 집성촌으로는 경기도 개풍군, 개성시 일원과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일원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2000년 인구조사에서 643가구에 2,0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우종 선생의 가족으로는 아내 유덕임(柳德姙. 1999년 作故) 여사의 사이에 장남 성천(聖天. 1960년생 중앙대학교 법학과 교수), 차남 성보(聖甫. 1962년생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 그리고 딸 나리(1968년생. 홍익대학교 서양학과 졸업. 현재 渡美)가 있다. ![]() ![]() 선생은 어릴 적부터 문학과 미술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 소질을 보였다. 개성의 송도중학교 시절 그는 곤충학자나 화가, 그리고 문학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생물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곤충학자의 꿈을 접었다. 그렇지만 미술에는 깊은 관심을 보였었다. 그는 1946년 京城齒醫專門學校에서 주최한 全國學生美術展示會에서 靜物 部門에 응모하여 特選을 하였던 적이 있다. 그런 그는 미술 분야로 진로를 결정하려 했었다. 해방 이후 그가 6년제 중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풍토가 곳곳에 만연해 있었다. 학교는 군사학교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는 같은 미술부원 반장에게 경례를 붙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하실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작은 체구의 학생이었음에도 소년 김우종은 배짱이 두둑한 학생이었다. 그는 어짜피 매를 맞을 것이라면 먼저 때린다는 생각으로 먼저 상급생을 때렸다고 했다. 그리고 무수한 구타로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때 그 미술반장과의 싸움은 화가의 길에서 문학가의 길로 가게 되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그는 미술을 접고 문학으로 방향을 설정하면서 앙드레지드나 토스토예프스키 등의 대 문호에 대한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 일본어로 되어 있는 일본어 세계문학전집을 읽게 되어 세계의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사상적으로 기울어 비판하고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따지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다룬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소재로 한 독일의 철학자이며 미술평론가인 레오파르지의 「라오곤」을 읽고 평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50년 3월 개성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로부터 잠시 후 6.25전쟁이 터졌고 그해 12월 그는 학도병으로 입대하여야만 했다. 1951년 5월 그는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어 인민군 병사가 되었고 포격으로 중상을 입고 인민군 야전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52년 7월에 탈출하여 월남하였다. 그리고 미군감시하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또다시 1952년 10월 전방 제1사단 포병사령부로 복귀하여 복무하다가 이듬해 1953년 10월에 전역하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남북 양진영의 틈바구니에서 이데올로기의 참맛을 보아야만 했다.
선생은 1955년 서울대에 복학한 이후 대학 3학년 때인 1957년 「현대문학」<隱喩法論考>와 <李箱論>으로 조연현 선생의 추천을 받아 문단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 ![]() 문학을 하면서 어려웠던 시기가 언제였느냐 여쭈니 선생은 1960년대 초 문학의 사회참여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라 말한다. 그 때만 하더라도 순수문학은 현대문학의 지표라 여겨져 왔고 문학은 경제, 사회, 정치에 대해 돌아앉아 있는 형태였고, 감히 문학에 정치나 경제, 사회에 관한 이론을 접목하려 들지 않았다고 선생은 말한다. 1938년 김환태 선생이 주창한 “예술의 순수성”이론은 당시 사회주의 문학을 비판하기 위한 이론으로 사상성에서 벗어나고 목적성을 벗어나고 사회성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김우종 평론가는 순수문학이라는 것이 잘못 인식되어왔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현실을 피하지 말고 사회문제를 적극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문학의 사회참여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에게 정말 어려웠던 시기는 1973년 유신독재에 항거하며 유신헌법 반대운동에 참여하다가 경희대학교 교수직에서 해직되고 투옥된 시기가 아닐까? 그렇지만 선생은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지 그 부분에 대한 말을 아낀다. 선생은 교수직에서 해직 된 후 연명의 수단으로 그림을 그리며 아이들을 길렀다고 회고한다. 그는 외국으로는 빅토르위고, 톨스토이, 앙드레지드, 토스토예프스키 등의 문학을 섭렵하며 문학평론에 대한 지식을 넓혀나갔다. 선생은 가장 존경하는 문인이 누구냐고 묻는 필자의 질문에 민족시인인 윤동주 시인을 가장 먼저 꼽으면서 윤동주의 문학과 우리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의 문학에 들어있는 세계적이고 범인류적인 사랑정신, 평화정신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문학은 우선 서정적이어야만 세계적일 수 있는데 윤동주 시인의 시는 서정적이면서도 그 안에 민족적 정신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우리만을 고집하는 국수주의를 뛰어넘어서 세계 인류의 사랑과 평화를 지양하는 윤동주 시인이야말로 정말 큰 시인이라 거듭 강조한다. 윤동주 시인은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고 선언하는 시를 쓰게 되고 어두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시를 쓰고 감옥에서 죽어갔는데’ 그가 30살이 넘기 전에 쓴 시들이라서 보다 원숙한 기교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윤동주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보편성에 감동하고 그의 민족성에 큰 비중이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선생은 금년 3월에 새로이 창간된 계간지 「서시」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우리 소설의 역사를 보는 관점을 말하면서 식민지 시대의 소설들은 감동이 있긴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찬양과 계몽에 앞장서온 부분에 대하여 부정하면서 말을 아꼈다. 해방 이후 소설에는 이범선, 손창섭, 선우휘, 황순원, 장용학, 김동리 등의 소설을 손꼽으면서 순수문학에 대한 잘못된 전통이 문학에 대한 운신의 폭을 좁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1970년대 이후 윤흥길, 박완서, 황석영, 조정래의 문학에 비중을 두며 말하였는데 그 중에서 조정래의 소설을 윗길로 꼽았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황석영의 ‘장길산’에 비하여 다소 약하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홍명희의 임꺽정에 대해 점수를 더 주는 경향이 있다면서 무엇보다도 우리 소설단에서 조정래의 소설은 어느 한쪽을 정당화하고 어느 한 쪽을 부정하는 세태에 태풍을 피해가는 슬기로움이 있다고 말하며 우리나라 문학역사의 방향을 틀어놓았다고 평가한다. 좋은 작품의 순위를 꼽아달라는 최 회장의 말씀에 선생은 순서를 어떻게 꼽느냐며 대답을 피하시면서 조정래의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 같은 작품이나, 황석영의 ‘장길산’ 등에 대해서 큰 점수를 주었다. 또 윤흥길의 ‘장마’ 같은 작품은 이데올로기의 갈등 구조를 해결하는 방향을 제시하며 분단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해 나갔다고 평가한다. 역시 윤흥길의 작품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나이’란 작품은 현실에 대한 이 깃든 작품으로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고 말한다. 이청준의 ‘매잡이, 서편제, 줄광대, 소문의 벽, 눈길’ 같은 작품은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되찾아주는 좋은 작품이었다고 말하면서 손창섭, 오영수, 김승옥 등에 대한 좋은 평가도 잊지 않는다. 원로 문학평론가 김우종 선생은 이제 문학을 하러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작가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요즘 문학을 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그저 교양을 닦는 수단 정도로 하는 것 같아요. 문학창작기법에 대한 공부가 많이 부족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탐구정신이 부족합니다. 진정한 프로정신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구조도 약합니다. 일반 독자들이 작품을 읽고 ‘누구의 작품이 좋다.’란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평가를 받을 기회가 적습니다. 독자들이 작가에 대한 수준을 모르게 한다면 그 작가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많은 문학지들이 범람하고 저마다 추천제를 도입하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한 작품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끔 아는 사람들이 제게 시집의 발문을 써 달라고 조릅니다. 저는 절대로 칭찬만하는 발문 칭찬만 하는 평론은 쓰지 않습니다. 책을 팔기 위한 해설을 전재로 해설을 쓴다면 할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칭찬만하는 평론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평론가라 한다면 할 말은 꼭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학을 하러 나온다면, 적어도 등단작가라 한다면 투철한 프로정신을 갖고 독자 앞에 당당히 나아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라며 힘주어 말한다. 좋은 소설은 문학적 기법을 잘 터득하고 주제를 ‘인류에 대한 사랑’에 무게를 두며 아무리 작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도 인류에 대한 사랑을 담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작품의 질적 향상문제는 치열한 작가정신만이 작품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그간의 경험을 미루어 평가하면서 평론가로 문단에 나온 지 벌써 50여년이 되었다며 잠시 회고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김우종 선생은 지난 1월 한국대학신문에 ‘과거사 규명은 대학 소관이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과거사 연구가) 대학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지금 왈가왈부 논의가 한창”이라며 “밝힐 역사가 있으면 그것은 우선 대학 소관으로 그것을 위해 대학에 사학과가 있고 전공교수가 있고 연구기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과거사 규명은 검찰이나 정치인들의 문제이기 전에 당연히 학문의 영역”이라며 “비록 전공교수는 소수지만 그들이야말로 지금까지 확실하게 학술적 입증자료를 통해서 과거사를 밝히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온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또 “교수들에게 참된 연구를 위한 어떤 지원도 생각해 보지 않은 채 친일행위가 일본군 소위까지냐 아니냐나 따지는 우스갯짓을 그만하고 정부가 역사 앞에서 이제야말로 정말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부터 깊이 생각해 봐야 옳을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왜 전문가들을 제쳐놓고 아마추어들 세상인가”라며 “우리 국민 다수는 친일의 역사나 군정시대와 군사정권의 역사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지한 편”이라고 주장하여 주목을 끌었다. 지난달 3월 3일 서울대학교 미술학과 김민수 교수가 복직되었다. 그는 거의 10년 전에 선배 교수 장달 학장과 다른 두 교수의 친일행적을 논문에 인용했다가 선배교수들과의 마찰로 해직되었던 인물이다. 서울대 미대 원로교수들의 친일행위를 거론하다 30대 후반에 쫓겨난 소장학자가 40대 중반이 돼 강단으로 돌아가게 된데 대하여 김우종 선생은 “이 사건이 끝나더라도 아직 큰 과제가 남아 있다”며 역사는 많이 바뀌었지만 학문에 관계없이 그들의 충성도가 교수채용의 최우선 순위가 되고 그들만을 위한 배타적 이기주의가 아직도 팽배하다는 것을 꼬집었다. 선생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동주 시인을 우리민족을 사랑하는 진정한 민족 시인이라 평가하면서 서정주, 이광수 등의 친일에 대하여 누누이 바른 말을 해 온 문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70년대 유신헌법 반대운동에 참여해 해직과 동시에 투옥됐고, 지난해 4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지난 90년대 참여연대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몸을 사리는 그런 이중인격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가 바로 가는 길이라면 어떤 고난도 감수하는 참된 문학인이다.
![]() 金宇鍾 敎授 年譜 1929. 2.4. (陰). 咸北 城津에서 父 雪城 金氏(字 在煥), 母 礪山 宋氏 泰淳의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남. 1930. 강보에 싸여 父母님의 고향 開城으로 들아옴 1933. (?) 黃海道 延安으로 移住. 1937 .4. ~ 1941. 3. 山陽學院 4년 수료. 1941.4.~ 1944. 3. 延白國民學校 4學年에 편입학하여 졸업. 1944.4.~ 1950. 3. 開城 松部中學校 6年 졸업. 1946. 全國學生美展(京城齒減醫專主催) . 特選(靜物) 1950. 5. ~ 1958.2. 서올大學校 文理大 國文科 졸업 . 1950. 10. 6.25 戰爭으로 失鄕. 1950. 12. 陸軍에 學徒兵으로 入隊. 1951. 5. 中共軍에 포로가 됨 1951. 10~ 12. 砲擊으로 重傷, 人民軍 野戰病院 入院. 1952 7. 脫出 越南, 美軍 감시하의 포로수용소에 갇힘 1952. 10.(?) 前方 第一師團 砲兵司令部로 復歸. 1953. 10. 유행성출혈열로 미군 후송병원에 입원 1955 2. 除隊, 곧 서울大에 復學. 1956, 10 23(陰) 父 사망. 1957. 3.~5. 「現代文學」에서 (隱喩法論考)와 (李箱論)으로 趙演鉉 선생의 추천을 받고 評論家로 登壇. 1958. 1 여원사 편집부 기자 1958. 2 서울大學校 國文科 졸업 . 1958. 5. 柳來謙의 딸 德姙과 결혼 1959. 韓國文學家協會賞 授賞. 1959.4. ~ 1960. 3. 진명여고 교사 1959. 12. 長男 聖天 出生. 1960. 4. ~ 1960. 9.배화여고 교사 1960. 10.-1962. 9.보성여고 교사 1961. 1 3.(陰) 어머니 사망 1962. 1 次男 聖甫 出生. 1962.10. ~ 1963.2. 忠南大學校 講師 1963. 3. ~ 1967. 3. 忠南大學校 專任講師. 助敎授. 1967.4. ~ 1976. 2. 慶熙大學校 助敎授 副敎授 및 敎授 1968. 2. 長女 나리 出生. 1'969. (韓國現代小說史)로 月漢文學賞 受賞 1969. 11. 第6回 木友會 公募展 入選(油畵 (晩秋)) 1970. 5. 第7回 木友會 公募展 入選(油畵 (靜物)) 1973. 겨울 維新獨裁下에서 李浩哲, 張伯逸, 鄭乙炳, 任軒永과 함께 날조된 문인간첩단사건으로 투옥됨 1974. 6. 出獄, 慶熙大에서 休職. 1976. 2. 慶熙大에서 政府彈壓에 의한 解職. 1975. 1 美術會館에서 第1回 油畵展. 1975. 3. 陽地畵廊에서 戈人書畵 12人展. 1977. 5. 美術會館에서 제2회 油畵展. 1979. 5. 出版文化會館에서 제3회 油畵展. 1988 5. 白갤러리에서 제4회 油畵展 1980 3.~ 1995. 2. 덕성여대 국문과 교수 1994 10. 서울市文化賞 受賞 1995.2. 詩人 尹東柱 追慕 慰靈祭 및 심포지움을 위해 50명을 引率하여 日本 후쿠오카형무소와 교토 동지사대학에서 행사를 개최. 1995. 2월말. 停年退任. 기타 KBS 初代妨送審議委員. KBS 公開大學 (한국근대 문학사조사) 강의(단행본 출간), KBS [시민법정] 변호사, MBC (古典百選)MC, MBC [별이 빛나는 밤에] (문학해설)등 방송에 참여 . 韓國文學評論家協會長, 韓國大學新聞 主筆, 西草文人協會長, 參與聯隊 諮問委員 등 歷任. 현재 國際 팬클럽 韓國本部 會員, 韓國美精家協會 會員, 季刊「序詩」 主幹 (著書目錄)
(학술) 1 世界의 小說家 70人 1960. 女苑社 2 文學의 理解(尹炳魯 共著) 1960. 女苑社 3 韓國現代小說史 1968. 宣明戈化社 4 作家論 1973. 同化文化社 5 韓團現代小說史(日譯販) 1975. 日本龍奚書社 6 現代小雪의理解 1976. 그友出版社 7 韓團現代小說史(增補販) 1980. 成文閣 8 世界長篇小說의 理解 1981 國際出版社 9 韓團近代文學思潮史 1982 한국방송사업단 10 文學의 理解(編著) 1983. 덕성여대출판부 11 批評文學論(金嘒尼 共著) 1984. 汎友社 12 韓團現代小說史(再增補販) 1992. 成文閣
(에세이) 1 來日이 오는 길목에서 1968. 弘益出版社 2 밤이 길어서 남긴 사연 1969. 弘益出販社 3 외롭지 않으려고 써버린 落書 1969. 弘益出版社 4 昭陽江에 비 내리다 1969. 弘益出版社 5 돌과 속삭인 인생노트 1971. 弘益出版社 6 金字鐘 에세이 全作集 1971. 弘益出販社 7 목마른 별들의 대화 1972. 弘益出販社 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72. 弘益出版社 9 사랑과 진실 1972. 陽地書沐 10 우리들만의 運命 1972. 學窓社 11 그래도 살고픈 人生 1975. 學進出販社 12 繪畵의 反亂(繪畵의 解說) 1977. 世宗出版公社 13 이 조용한 時間에 1977. 汎友社 14 아픔으로 크는 나무여 1978. 汎友社 15 뚫어진 軍靴와 쫑고파 1978. 文知社 16 너는 날아야만 갈매기 1978. 正宇社 17 사랑과 孤獨을 위한 연습 1979. 금박출판사 18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위하여 1980. 甲寅出版社 19 金宇鐘 에세이 全集 1980. 陽地堂 20 지금은 시련의 잔을 들 때 1982. 五象社 21 가장 아프고 순수했던 시간들 1982. 自由文學社 22 오늘을 사랑하라 1983. 自由文學社 23 누가 삶의 길을 묻는다면 1984. 文志社 24 우리들의 진실을 위하여 1984. 自由文學社 25 생각해 봅시다 1984. 自齒文學社 26 한국인의 웃음 1985. 自由文學社 27 완전한 사랑을 위하여 1986. 自由文學社 28 그대 내결을 떠나도 1986. 自由文學社 29 영원의 숲속에 멈추어 서서 1987 自由文學逃 30 사랑과 행복의 조건 1987 기린원 31 내일도 우리가 사랑한다면 1988. 白羊出版社 32 사랑과 고뇌의길 목에서 1988. 현대문화센터 ((締畵의 反亂) 增補版) 33 외롭고 상처받은 너를 위하여 1988, 自由文學社 3친 바보야 이 바보야 1994. 自由文學社 (論 文) 隱喩法論考 1957.3. 現代文學 27호 李箱論 1967.5. 現代文學 29호 抵抗없는 成春香 1957.6. 現代文學 30 久遠의 悲歌(蔓橫淸文學小考) 1957.8. 現代文學 32 難解詩의 本質 上 1957.9. 現代丈學 33 難解詩의 本質 下 1957.10. 現代文學 34 薔花紅蓮傳小考 1957.11. 現代文學 35 植君神話의 詩的意味 1. 1958.2. 現代文學 38 植君神話의 詩的意味 2. 1958.3. 現代文學 39 囚入의抗辯(春香論) 1958.8 現代文學 44 批評의 原則問題 1958.9. 現代文學 45 批評의 自由 1958.10. 現代文學 46 主題와 構成의 問題(金東里 作 “사반의 十字架”評) 1958.12. 現代文學 48 東仁文學賞受賞作品論 1960.2. 思想界 8 剩餘人問論 (손창섭 作品) 論思想 作家와 批評家와의 關係 1960.10. 自由文學 破産의 純粹文學 1963.8.7. 東亞日報 流適地의人間과 그文學 1963.11. 現代文學 107 純粹의 自己欺瞞 1964. 漢陽 作家와 現實 1964.9. 漢陽 31 農材과 文學 1964.11 漢陽 33 藝術 속에 나타난 韓人의 諦觀 1964.11 18. 人物韓國史(博友社) 吳尙源론 1965.2. 文學春秋 鄕歌와 土着語의 이미지 1966.10. 現代文學 142 古代文學과 現代文學의 전통 계승문제에 대하여 1967.1. 國語國文學會誌 34 民族文學의 새 次元 1966.5. 漢陽 三十年代作壇의 文學史的 變貌 1967.12 國語國文學會誌 37 金東人論 1967. 慶熙大高鳳誌 工業社會에 나타난 체념주의 1968.6. 現代文學 162. 韓國現代小說을 論斷한다. 1968.1 現代文學 157. 藝術과 諧謔 1970.7 藝術界 2. 韓國文學史의 社會史的 狀況 1971.4 신동아 韓國文學의 反省(證言, 思想 그리고 小說의 美學) 1971·.12. 知性 散文精神의 求道者(염상섭 론) 1973.3 文學思想 民族文學의定義 1973.5 14. 淑大新聞 民族文學의 새 地點(羅稻香論) 1973.6 文學思想 창밖엔 太陽없는 하늘이 1974.11. 韓國文學 韓國文學의 展望 1975.1. 月刊文學 어두운 歷史의 敍事詩 1975.3. 文學思想 良心의 自由 1975.3. 韓國文學 自由의 實感 1975.2. 女性東亞 良心이 가는 길 1975. 世代 “감자” 1976.11 文學思想 創造的 意志 1975.7 現代文學 尹東柱論(암혹기 최후의 文學) 1976.4. 文學思想 한국 梵鍾의 空間과 宇宙性 1976.9. 空間 한국現代文學의 成立 1976.7. 德成(운현) 짧은小說의 反省點 1977.9. 詩文學 新聞小說과 商業主義 1978.2. 小說文藝 韓國文學의 商業主義와 그 反省 1978.2.20. 月刊文學 社會惡의 告發과 農村啓蒙의 人間刑 1988. 북으로 간 작가 선집 文學의 形態變化에 政治權力이 미친 影響 1992. 省谷論叢 [출처] 민족을 위한 바른 길 안내자 - 김우종 문학평론가|작성자 김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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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이 많이 지워졌네요.
제가 시간을 내서 다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교수님의 프로필을 아주 잘 올려 놓으셔서 담아 왔네요
김순진선생님이 그렇게 해주시면 더욱 멋지겠네요
좋은글 멋진글 많이 나눠요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드립니다..
오직 문학이란 외길로 평생을 살아오신 교수님은 우리나라의 큰 산입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한국문화훈장 수상하심을 감축드립니다,
백세를 넘어 천세 만세로 강녕하시옵소서~
교수님 글 잘 보았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신 교수님 힘들게 걸어 오신 그길
글을 읽을 때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교수님, 제 블로그에도 소개해 올리려고 글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