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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각산에 올라가 본 전정각산과 붓다가야 일대.> |
뜬눈으로 밤을 새고 다음날 새벽 5시 득달같이 대보리사로 갔다. 대탑이 그대로 있는지 보고 싶었다. 마침 스리랑카 스님들이 예불 중이었다. 어제 밤에 이어 다시 1층 법당에 들어가 정중히 삼배했다. 마군(魔軍)들을 굴복시키고 정각을 이룬 부처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중생의 번뇌·고통을 없애줄 부처님이 거기 계셨다. 법당을 나와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며 '파란' 많은 대보리사의 역사를 회상했다. 대탑 바로 뒤에서.
<나이란자나 강> |
사진설명: 2002년 3월말 현재 건기로 말라있는 나이란자나 강. 건너편에 대보리사 대탑이 보인다. |
반면 7세기에 대보리사를 방문한 당나라의 현장스님(629∼645년 순례)은 <대당서역기>에서 대탑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리수 동쪽에 정사(精舍)가 있는데 높이 160 - 170여 척이다. 아래 기단의 너비와 면적은 20여 걸음에 달한다. 층 층으로 이뤄진 감실에는 모두 금상(金像)이 있고 사면의 벽은 빼어난 솜씨로 조각돼 있는데 구슬의 형상이 잇따라 새겨져 있거나, 천인과 선인의 상이 있다. 정사 위에는 아마라카과(보물단지)를 놓았다. … (중략) … 본래 이 정사가 있던 땅에는 무우왕(아쇼카왕)이 먼저 작은 정사를 세웠는데, 후에 어떤 바라문이 이것을 더 넓혀지었다 한다." 굽타왕조가 인도를 통치하던 5∼7세기 어느 때, 대탑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 불교유적지도> |
수십 년 뒤인 1880년 영국 고고학자 커닝햄 등에 의해 대보리사 일대가 발굴되고 대탑이 수리되면서, 붓다가야는 세계적인 성지로 추앙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1891년 스리랑카 출신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등장 "불교도가 대보리사를 관리해야 한다"며 투쟁을 전개, 1953년 5월28일 운영권은 결국 힌두교 측에서 대보리사관리위원회로 넘어가게 됐다. 물론 이것은 '절반의 성공'으로 표현해 맞을 것 같다. 대보리사 '관리·운영권'은 지금도 불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에 '해결해야 될 문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수자타 마을> |
사진설명: 싯다르타에게 우유죽을 공양한 수자타가 살았다는 마을. |
30분 정도 걸어 건너편에 도착하니 거대한 핍팔라수(보리수)가 반겨준다. 바로 옆에 마을이 있다. 목욕하고 올라오는 싯다르타에게 우유 죽을 공양한 수자타가 살았던 '수자타 마을'이란다.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니 거대한 스투파(탑)가 앞에 나타났다. 우유죽 공양을 올린 수자타를 기념해 세운 수자타 스투파다. 이곳까지 찾아온 이방인이 낯설지 않은 듯 한 무리의 동네 아이들도 다가오며 대뜸 "루피! 루피!"하고 손을 내민다.
못들은 체하며 스투파로 올라가니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아이들 중 한 명이 열쇠를 갖고 있다 열어주며 "노 포토"라고 다짐받듯 말했다. "발굴중이라 사진촬영은 절대 안된다"는 설명이었다. "어린애가 열쇠를 갖고 있다니. 이상하다"생각하며 수자타 스투파에 올라섰다.
수자타는 무엇 때문에 사문 싯다르타에게 우유 죽을 공양했을까. 목욕하고 나오는 모습이 성스러워 그랬을까, 아니면 고행으로 야윈 모습이 측은해서였을까. 성도를 이루게 한 '수자타의 공양'은 부처님을 열반에 들게 한 '춘다의 공양'과 함께 대단히 중요한 공양 아닌가. <니다나 가타>에 의하면 수자타는 니그로다 나무에 기원하기를, 결혼 후 첫 아들을 낳게 되면 매년 공양을 올리겠다고 맹세했다.
소원대로 사내아이를 낳자, 바이샤카 달 보름날에 우유죽을 만들어 니그로다 나무 아래로 갔다. 마침 싯다르타가 그곳에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나무신인 줄 알고 공양했다고 한다. 수자타의 공양이 없었다면 싯다르타는 어찌 됐을까.
<수자타 스투파> |
사진설명: 부처님께 우유죽 공양을 올린 수자타를 기념해 세운 탑. |
곳곳에 부지런히 일하는 인도 농부들이 보였다. 이렇게 넓은 평원을 두고 가난하게 살다니.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맨발이고, 옷차림도 형편없다. 어른들의 옷차림도 마찬가지다. 왜 이다지도 가난할까. 현실의 가난, 가난에서 파생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인도인들은 그렇게 생천(生天)을 기원하는가. 부처님도 가난이 주는 고통을 알았기에 '윤회의 집'을 부수고자 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뒤로한 채 들판 끝의 '전정각산'으로 갔다.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6년 간의 고행을 버리고 공양을 받은 뒤 싯다르타는 정각할 자리를 찾기 위해 동북쪽 언덕으로부터 이 산에 올랐다. 정상에 이르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했다.
산신이 놀라 싯다르타에게 말했다. "이 산은 정각을 이룰 만한 복 있는 땅이 아닙니다"고. 서남쪽으로 내려가던 싯다르타는 거대한 동굴을 보았다. 석실에 자리 잡자마자 "여기는 정각을 이루실 곳이 못됩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4-15리 가면 핍팔라수가 있는데, 그 아래에 금강보좌가 있습니다. 과거·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정각을 이루셨습니다"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정각을 이루기 전에 올랐던 산, 그래서 전정각산이 됐다. 한편 싯다르타가 일어나자 굴에 있던 용이 "여기서 정각을 이뤄 달라"고 간청했다. 기특히 여긴 싯다르타는 그림자를 남겼고, 굴 이름은 자연스레 유영굴이 됐다.
<유영굴과 티벳사원> |
사진설명: 전정각산 중턱에 있는 유영굴 주변엔 숲이 우거져 있고, 그곳에 티벳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
전정각산 정상에서 바라본 붓다가야는 정말 평화로웠다. 서남쪽 저 멀리 대보리사 대탑이 보였다. 잠시 앉아있는데, 태양이 사무치게 뜨거웠다. 발걸음이 절로 산 밑으로 옮겨졌다. "싯다르타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해도 과연 정각을 이루기 힘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행환경은 열악했다. 작은 몸조차 가려줄 나무 한 그루 없고, 기초 체력을 유지해 줄 물도 없다. 그저 돌만 있는 산, 그런데 이런 곳에서 정각을 이룬다. 글쎄, 고행처론 적당해도, 정각의 장소론 적합치 않아 보였다. 싯다르타는 자연스레 붓다가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전정각산에서 내려와 차에 몸을 싣고, 이런 저런 잡념에 빠져 있는데 앞에 문득 코끼리 머리를 닮은 산이 보였다. "아 상두산!"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가운데 높은 산은 코끼리 머리를, 좌우의 낮은 봉우리는 코끼리 귀를 닮은 산. 지금은 힌두교의 전통적인 성지로 간주되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차를 세웠다. 녹야원에서 첫 설법한 부처님은 다시 우루벨라(붓다가야)로 와 카샤파 3형제를 교화했는데, 막내 가야 카샤파가 바로 이 산에서 살았다. 카샤파 3형제와 제자 천명을 교화한 부처님은 후일 이 산에 와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는 유명한 설법을 그들에게 했다.
<부처님이 '불의 설법'을 펼친 상두산> |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상두산을 보고 또 보며, '불의 설법' 말미에 부처님이 외쳤던 "나의 괴로운 생존은 끝났다. 청정한 수행은 완성되었다. 실천해야 할 바를 모두 실천했다. 다시는 괴로운 생존을 받지 않는다"는 게송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래도 '쇠잔한 인도불교의 현실'이 자꾸만 마음을 아프게 했고, 가슴을 짓이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