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亞)태(太) 정상들 반테러 성명 채택
상하이 보안군의 눈빛
최재욱(전 환경부 장관)
지난 10월 16일 버스를 타고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상하이(上海)로 가는 길이었다. 톨게이트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군경이 우리 버스를 검문했다. 다른 차들은 다 통과시키면서도 우리 버스만은 한참 세워두었다. 다른 군경들도 우리 버스로 다가와 차창에 부착된 한글 팻말을 가리키며 저희들끼리 긴장된 눈빛으로 무엇인가 의논했다. 우리 대표자가 내려 우리가 양저우(揚州)에서 개최된 학술대회 참석자 일행임을 밝히고 여권을 보이자 그제서야 웃는 얼굴이 되면서 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나흘 뒤 상하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중국이 초비상경계를 펴고 있는 때였다. 주요 도로 등에 20여만 명의 보안군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우리 한글을 알리는 없었다. 아마 아라비아 글자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정부는 정상회의를 전후하여 중동-아랍인들에게는 상하이행 항공권을 팔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특히 중국에도 탄저균이 들어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우편물이 배달된 사실이 전해지면서 중국당국의 경계조치는 더욱 강화되었다.
상하이는 상주인구가 1천 700만 명, 유동인구까지 합치면 2천만 명이 훨씬 넘는데 회의기간 중 시가는 무인지경 같았다고 한다. 정부가 회의기간동안 모든 관공서 은행 회사 학교 음식점 술집의 문을 닫게 했고 대부분 도로의 통행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의장이 있는 푸동(浦東)지구 내 모든 음식점과 유흥업소 종업원 등 5만여 명을 외곽으로 소개시키기도 했다. 20세기 초 상하이가 열강들의 조계지(租界地)였을 시절, 각 공원 입구에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狗與華人不進入內)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 얘기가 상기된다.
그 무렵 이곳을 여행했던 한국인 청년 김소엽(1912~? 시인)은 상하이를 가리켜 <동-서양의 혼혈아(混血兒), 아! 불행한 혼혈아야, 너는 장차 어디로 가려나?>라고 탄식했었다. 그 후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우리 한국과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동-서양의 정상들이 이곳에서 만났다. 그렇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탄식할 필요가 없다. 이번 만남의 주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경제발전, 그리고 테러방지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회동한 20개국 정상들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나라가 일치협력 할 것을 다짐하는 반테러 성명을 채택했다. 이 성명이 내실 있는 성과로 이어져야 하겠다는 당위성을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새삼스럽게 체감했다. 테러의 여파로 승객은 좌석의 3분의 1도 차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테러가 세계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하는 것을 웅변해주는 하나의 예증이었다.
--2001. 10. 25. 국방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