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린도전서 15:35~44)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가르쳐준 신앙고백인데 우리는 여덟 가지를 믿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 둘째 예수 그리스도, 셋째 성령, 넷째 거룩한 공회, 교회, 다섯째 성도의 교제, 여섯째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사죄, 일곱째 몸이 다시 사는 것, 여덟째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를 통해서 교훈과 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이 고백을 가지고,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말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도신경은 여기에 대해 이미 앞에서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몸이 다시 사신 것과”라고, 과거형으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는 내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여덟 번째 조항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 몸의 부활”이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말을 바꾸면 “몸의 부활”이 됩니다.
성경과 찬송과 앞의 사도신경 밑에 새번역이 있는데 거기에는 “몸의 부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내 몸이 부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는 몸이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다가 엘리사를 통해 다시 살아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하시니 일어나 앉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욥바의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베드로를 통해 살아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는 삼층 창에 걸터 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가 바울을 통해 다시 살아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아닙니다.
‘내 몸이 다시 산다면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까?’ 하는 것도 궁금해집니다.
‘이왕이면 젊었을 때 모습으로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하는 소망이 슬그머니 생깁니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면 지구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로 꽉 차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생깁니다.
지난 15일에 유엔인구국(UNPD)이 세계 인구가 80억 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지요.
2080년에는 104억 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면 인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200억, 300억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부질없는 질문이기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그런 질문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의 답이 고린도전서 15장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한 최초의 증언이고 체계적인 증언입니다.
복음서들의 뒷부분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린도전서가 복음서들보다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의 순서는 기록된 순서가 아닙니다.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본문이 시작되는 35절 앞에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붙어 있습니까?
“몸의 부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몸의 부활”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오늘 본문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의 해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가운데 44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이 말씀이 짧고 단정적이어서 이 말씀이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육신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사도신경을 해설한 글들도 여러 편 읽었습니다.
그렇세 하는 가운데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라는 말씀이 강하게 떠오르며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신령한 몸은 어떤 몸입니까?
44절에 이 문제의 답도 있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신령한 몸은 “영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44절을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몸”을 “영적인 몸”이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니까 “신령한 몸”을 “spiritual bodies"라고 했습니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어성경을 보니까 “신령한 몸을” “영성적 육체(靈性的 肉體)”라고 했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이 말씀은 우리의 호흡이 멈춘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신령한 몸은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기에 가장 알맞는 형체입니다.
우리가 바라던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우리의 호흡이 멈추는 것이 우리 삶이 모두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비신앙적인 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 세상의 삶만 바라는 사람,, 다시 말해 육신의 삶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불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2절 후반부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이사야서 22장 13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22장 13절은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유원지에 가면 술에 취한 분들, 특히 연세 많은 분들이 춤을 추며 이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광경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오 달로 차면 기우나리라
얼시구 절시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이 노래를 ‘나라 망하게 하는 노래’라고 하면서, 가사를 ’일하세 일하세 젊어서 일하세 늘어지면 일하지 못하나니“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역설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노래 소리가 더 널리 퍼지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삶이 전부인 것으로 안다면 향락주의에 빠집니다.
쾌락추구가 목표인 삶을 살게 됩니다.
“찰나주의(刹那主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찰나”는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말합니다.
“찰나주의”는 “인간의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이나 의지의 상태로 돌아가서,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순간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려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육신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찰나주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신적인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씨를 심는 것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38절에서 씨는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고 말하고 42절과 43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은 썩습니다.
신령한 몸, 영적인 몸은 썩지 않습니다.
육의 몸은 욕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몸은 영광스럽습니다.
육의 몸은 약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몸은 강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령한 몸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몸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하면, 다시 말씀드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확실히 믿으면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세상에서 힘든 것, 어려운 것을 잘 극복하게 됩니다.
하루하루를 알차게, 힘있게 살아가게 됩니다.
목사님 한 분이 폐암을 비롯해서 세 가지 암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목사님의 암은 100명 중 5등 안에 드는 힘든 암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내 삶아 짧아졌으니 잘 살아야지. 허투루 살지 말아야지.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아야지” 결심했습니다.
유듀브로 성경을 강해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유튜브의 제목이 “날기새”입니다.
“날기새”, 무슨 듯일까요?
“날마다 기막힌 새벽”의 줄인 말입니다.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는 것을 믿으면, 몸의 부활을 믿으면 우리도 날마다 기막힌 새벽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 유튜브의 구독자가 25만 명이고, 매일 규칙적으로 접속하는 사람이 8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최근에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52회에 걸쳐서 마쳤는데요, 엊그제(11월 25일) 「국민일보」에 이 목사님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거기에서 이 목사님은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결론이라고, 그거 없으면 다 무너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패스오버(pass over)하는 사건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 도망쳤던 제자들이 돌아서서 거의 다 순교한 것은 부활을 목도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목도한 부활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는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시간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 것은 물론 우리 몸의 부활도 믿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몸의 부활과 관련된 많은 간증,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기록한 책들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신비한 체험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신비한 체험 중심의 이야기를 피하고 두 가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내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나는, 평안한 얼굴, 소망이 넘치는 얼굴로 살 수 있게 됩니다.
몇 해 전에 예수를 잘 믿는 중국분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북한을 자주 방문한다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북한에 갈 때마다 전도를 하기 위해 힘쓰는데 불가능합니다. 어디를 가나 안내원이 옆에 붙어 있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고, 감시의 눈초리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 상태에서 북한전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성 프랜시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하루는 성 프랜시스가 제자에게 “우리 전도하러 가자”하고서 그 제자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안의 가장 번화한 곳에 한참 서 있다가 다른 번화한 곳으로 가서 또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전도하러 가자고 하셨는데 전도는 언제 합니까?”
프랜시스는 “우리의 평안한 얼굴, 구원의 확신이 넘치는 얼굴, 소망이 가득한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훌륭한 전도다. 자, 다른 곳에 가서 전도하자”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아야기를 들려주고서 “제가 보니 형제께서도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신데 북한에 가면 그런 얼굴을 북한주민들에게 힘써 많이 보여 주십시오. 물건 살 때 점원을 친절하게 대하고 절대로 돈자랑 하지 마십시오.” 했습니다.
그 중국성도는 잘 알겠다고 그렇게 하기에 힘쓰겠다고 했습니다.
자기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관광을 비롯해서 여러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중국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 믿는 사람들도 꽤 있는데 그들에게 이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얼굴로 전도하는 것은 불교에서도 쓰고 있는 방법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안면보시(顔面普施)’라고 부릅니다.
‘안면’은 얼굴이고, ‘보시’는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을 베푼다는 뜻입니다.
안면보시를 줄여서 ‘안시(顔施)’라고 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으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이 말씀을 믿으면, 이 말씀을 붙들면 육신의 호흡이 끝날 때, 다시 말해 세상을 떠날 때 더욱 그런 얼굴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어느 선교기관을 섬기고 있을 때 그 선교기관 후원회 회장을 하시던 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대형교회 장로님으로 식품사업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교회에는 선교부, 교육부, 재무부, 여러 기관들이 있는데 그 장로님은 늘 경조부를 맡았습니다.
경조부는 초상이 나면 장례를 담당하는 부서입니다.
의논할 일이 있어서 그 징로님에게 전화를 하면 “교인 가운데 돌아가신 분이 있어서 상가에 가셨습니다”하는 대답을 듣기가 일쑤였습니다.
제가 그 장로님께 “장로님, 연락하기가 힘드네요. 장로님은 왜 늘 경조부장만 맡습니까?”라고 여쭤 본 일이 있습니다.
장로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을 것 같습니까?
“예수를 잘 믿다가 평안하게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보면 ‘아 이분 천국 가셨구나’하는 것을 확실히게 알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복을 받는구나!‘ 실감나게 깨닫게 됩니다.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드리기가 미안하지만 웬만한 설교 듣는 것보다 더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전도를 하면 잘 받아들입니다. 이중으로 유익하지요. 그래서 매년 교회 부서책임자들을 새로 정할 때마다 경조부장 자리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까 봐 겁이 납니다.“
세상을 떠난 분의 몸을 씻고 수의를 입히는 것을 ‘염(殮)’이라고 하는 데요 지금은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염을 하지만 예전에는 교인이 세상을 떠나면 교회에서 염을 맡았습니다.
이 장로님이 25년 동안 1,826명을 염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장로님이 연세가 많아져서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아드님도 장로였는데 힘을 써서 아들에게 경조부장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이런 세습은 좋은 것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최영자 장로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최 장로님도 틀림없이 그런 얼굴로 떠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 ‘’대“는 기다린다, ‘림’은 ‘강림’, 대림절은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라며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유대 사람들의 형편이 매우 고달펐습니다.
그때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식민지 통치가 가혹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는 형식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더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야의 강림을 기다렸습니다.
대림절에 많이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하나인 104장이 그런 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 오 임마누엘
지금 우리 국민들이 많이 지치고 피곤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 정치인들의 실망스러운 모습, 경제적인 어려운 여건들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맞이한 대림절이 성도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두에게 의미 있는 절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림절은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구주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이 예수님의 강림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우리의 육신적인 삶, 이땅 위에서의 삶이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의 준비라는 사실을 알고 잘 준비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절기도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몸의 부활에 대한 확신 가운데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 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지금 월드컵 열기가 대단하지요.
저는 ‘하나님 여러 가지로 침체되어 있는 국민들이 위로를 받고 사기가 높아지기 위해 우리나라가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해 주세요’ 기도하고 있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은 축구경기에서 축구공과 같습니다.
축구경기에서 축구공의 향방에 따라 승패(勝敗)가 결정되는 것처럼,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에 대한 믿음이,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믿음이 신앙생활의 성패(成敗)를 좌우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확신 가운데에서 이 고백을 드려 승리하는 삶, 성공적인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몸이 다시 사는 일의 기원이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부활의 주님,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이 고백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드린 일이 많았던 것을 고백합니다.
의심 가운데 드렸던 일도 있었던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에 대한 획신이 새로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몸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한 확신 가운데에서 매일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는 대림절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준비도 잘 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