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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최초의 살인 사건 - 카인과 아벨 이야기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로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야훼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시면서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창세기 4장 8절-10절)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류 최초로 벌어진 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도 남들이 아니라 형제간에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전 하와를 인류의 어머니라 불렀다. 카인과 아벨은 하느님이 지상에서 만든 최초의 인간들이자 자식들이었다. 아들 둘을 얻은 것이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뒤 아담이 맛 본 가장 행복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행복한 시간을 페라리는 목가적 풍으로 그려놓고 있다.
페라리, <아담과 하와>, 알베르티나 빈, 1504년
아담은 농사일을 마치고, 약간은 피곤한 표정으로 하와에게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하와는 그런 남편을 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띄며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페라리는 그림에서 앞으로 이 단란한 가족에게 벌어 질 일을 보여준다. 하와의 발 밑에는 어린 아들 둘이 놀고 있다. 과일 무더기 옆에서 동생이 잡으려 한 사과를 빼앗으며, 동생을 내려 다 보고 있는 아이는 카인이 틀림없다. 양을 한 손으로 깔고 형을 쳐다보며 사과를 빼앗기려 하지 않는 아이는 아벨일 것이다. 두 형제의 다툼은 예견된 것이다. 큰 놈은 동생이 태어나면, 부모의 사랑을 빼앗길까봐 두려워 경계하게 되고, 뒤늦게 태어난 놈은 형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할까봐 안간 힘을 쓴다. 그러기에 형제는 평생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의 관계를 형성한다. 카인과 아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 라이벌 관계가 끔직한 살인 사건을 불러 온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카인과 아벨은 때가 되어 야훼께 예물을 바쳤다. 아벨은 양떼 가운데 처음 태어 난 새끼 양을 드렸고,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드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카인은 아벨에 대해 질투와 시기를 느꼈다. 야훼 하나님은 그런 카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카인을 힐책하면서 죄를 피하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카인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동생을 들판으로 끌고 가서 죽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카인의 예물을 왜 반기시지 않으셨을까? 두 사람의 제물을 공평하게 받아주셨다면, 살인 사건의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안토니오 디 프란체스코 솔리아니는 <아벨의 제물> 그리고 <카인의 제물>의 연작에서 야훼께서 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지 보여준다.
<아벨의 제물>에서 아벨은 양치는 선한 목자로 상징된다. 그는 양떼 가운데 가장 좋은 어린 양을 야훼께 바치고 있다. 아벨 옆의 개는 충실함을 의미하며, 신에 대한 신앙을 뜻한다. 화가는 아벨 뒤에 검은 방울새를 그려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단단하게 쌓인 밤송이에서 밤이 나오려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뜻한다. 밤송이 아래 바위 위에 앉은 검은 방울새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한다. 이것은 아벨의 죽음을 죄 없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결시켜 해석하려는 화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조반니 안토니오 디 프란체스코 솔리아니, <아벨의 제물>, 피사 대성당, 1533년 경
그러면 화가는 카인을 어떻게 그려 내고 있을까? <카인의 제물>에서 카인은 좋은 곡식다발들은 바위 뒤에 숨겨 놓고 시들고 엉성한 곡식다발을 신에게 바치고 있다. 그것도 한 손으로. 그리고 뻔뻔하게 하나님을 쳐다보고 있다. <아벨의 제물>에서 아벨 뒤에 있던 나무가 풍성했다면, 카인 뒤에 있는 나무들은 말라 죽어 버렸다. 카인이 앞으로 벌일 일을 나타내고 있다. 카인 옆의 앵무새는 검은 방울새와 달리 아벨을 죽인 카인의 죄를 상징한다.
조반니 안토니오 디 프란체스코 솔리아니, <카인의 제물>, 피사 대성당, 1533년 경
화가는 연작 그림을 통해 카인의 부정직함과 뻔뻔함이 하나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원인으로 그려 놓고 있다. <카인의 제물>을 보면, 뻔뻔한 모습의 카인은 자신의 부정직함을 반성하기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서운해 했을 것이다. 어쩌면 카인은 이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똑 같은 제물을 바쳤는데 어째 제 것만 무시하는 것입니까? 혹시 아벨을 좋아해서 아벨의 것만 반기시는 것은 아닙니까? 카인은 제물을 바친 이후로, 동생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를 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개 형은 동생이 태어나면 동생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할까봐 위기감과 시기심을 느끼는 법이다. 카인도 하느님의 사랑을 두고 아벨을 경쟁상대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을 반기자, 동생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카인을 사로잡자, 하느님은 그런 카인을 보고 죄를 피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미 카인은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카인은 동생 아벨을 들판으로 데리고 가 죽인다.
티치아노 베첼리오(1488~1576)는 카인이 아벨을 몽둥이로 쳐 죽이는 이 잔인한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 속에서 아벨은 이미 몽둥이에 맞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그러나 카인은 아벨의 가슴을 발로 눌러 조준한 뒤 다시 두 팔을 높이 들어 있는 힘껏 동생을 내려치려고 하고 있다. 아벨은 경황이 없는 도중에도 팔을 뻗어 카인을 제지해 보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들판에서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먹구름이 피워 오르며, 사태가 급박함을 알려준다. 그런 와중에 한 줄기 붉은 빛의 번개가 급속하게 퍼져 가는 것이 먹구름 사이로 보인다. 먹구름은 카인의 죄를, 번개는 죄의 응징을 암시한다.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이 작품에서 비극적인 내용을 암시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화면을 어둡게 처리하고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을 택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아벨을 살해하는 카인>, 베네치아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 소장, 1542~44년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나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사람을 죽이고 나서 감당하지 못할 후회와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인에게는 그러한 죄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것 같다. 하느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시미치를 떼고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로렌초 기베르티는 피렌체 성당 앞 <천국의 문>에다가 이런 뻔뻔한 카인의 모습을 청동부조로 새겨 놓았다. 금박을 입힌 청동부조 왼편 상단에 보면, 아담과 이브는 어린 두 아들 카인과 아벨과 함께 초막집에 앞에 앉아 있다. 왼편 상단에는 성장한 카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데, 아벨의 불이 높이 타고 있는 반면, 카인의 불은 잘 타오르지 않고 있다.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에 반응을 보이신다. 바로 제물 그림 아래에서 카인은 몽둥이로 아벨을 내리 치고 있다. 카인의 뒤에 있는 하느님은 아래를 향해 카인을 꾸짖는다. 부조 하단에서 카인은 아벨을 내리 친 몽둥이를 들고, 뻔뻔하고도 불경하게 하느님에게 대들고 있다.
로렌초 기베르티, <천국의 문 중 카인과 아벨>, 피렌체, 1425-52
결국 하느님께서는 분노하시고 카인을 꾸짖는다. 하느님은 자기가 지은 죄를 숨기고 뉘우칠 줄도 모르는 카인을 저주한다. 카인은 아벨의 피를 받은 땅에서 쫓겨나 유랑하도록 저주를 받았다. 그때서야 자기가 지은 죄로 어떠한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지 깨달은 카인은 두려워서 하느님께 하소연한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창세기 4장 14-15)
그러나 카인은 자신이 행한 죄를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자신이 받을 벌만을 두려워한다. 하느님께서는 피의 보복살인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누구도 카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머리에 표식을 찍어 준다. 그를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는 말과 함께.
카인은 이후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놋은 유랑이라는 뜻이다. 카인의 후손 중 카인을 닮은 라멕이라는 자가 있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냥꾼 라멕은 카인을 야생동물로 오인하여 죽여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라멕은 카인처럼 전혀 뉘우침이 없는 자였다. 창세기에 보면 그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고, 자기를 다치게 한 젊은이를 죽였다고 아내들에게 살벌하게 외치는 자였다.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 기울여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나의 상함을 인하여 내가 소년을 죽였다.
카인을 해친 사람이 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 받으리라.“ (창세기 4장 23-24)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잔인하고도 살벌한 라멕에게서 인류의 참다운 시조가 되는 노아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악이 다하면 선이 보이는 것일까.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물론 창세기의 저자는 이 노아를 카인의 계보보다 아담과 이브가 새롭게 얻은 아들 셋과 연결시킨다.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걸출한 화가 중 한명이며 수학자인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1416 ~1492, 이탈리아)는 산 프렌체스코 성당에 <아담의 죽음>에서 아담의 계보를 잇는 셋을 그려 놓았다. 그림에서 죽음을 코앞에 둔 아담은 마지막 유언을 이야기하고 있다. 몸을 일으키기도 어려워 아담의 머리를 이브가 손으로 받쳐주고 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는 셋도 이때는 거의 팔백세에 가까운 나이라, 화가는 셋을 노인으로 묘사해 놓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담은 아들 셋에게 낙원의 문에 있는 천사에게 가서 자비의 기름을 청하라고 했다. 셋은 아버지의 말을 따라, 낙원의 문으로 가서 대천사 미카엘에게 자비의 기름을 청했다. 그러나 미카엘은 자비의 기름을 주는 대신 죄의 나무의 씨앗 몇 알을 아담의 입에 넣으라고 건네 준다. 삼일 후 아담은 죽음을 맞이하고, 아담의 혀 아래에 넣어 둔 이 씨앗들에서 커다란 나무가 자란다. 이 나무에서 나온 목재가 처음에는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했을 때 감탄해 마지않던 다리를 세우는 데에 사용되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아담의 죽음>, 성 프란체스코 성당, 1452년 경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하느님께서는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고 왜 경고만 하고, 말리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흔히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든다. 하느님은 마음이 아프셔도,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래 인간은 이제 자신의 의지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의지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아닌지는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인간은 악을 범할 수 있는 원죄의 가능성에 항상 놓여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이 원죄를 범할 수 없도록 아예 세상의 악을 만드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본래 세상에 악은 없다. 악은 선의 결여일 뿐이다. 그는 ‘어둠’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어둠은 원인 그 자체가 아니라, 빛이 없는 상태이다. 어둠과 같이 ‘악’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인 빛, 즉 선의 결핍이다. 그러나 15세기에 미하엘 파허가 그린 그림을 보면, 엉덩이에도 얼굴이 달린 악마가 찾아와 죄업이 기록된 책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내밀고 있다. 마치 죄업을 발생시킨 악이 이렇게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Michael Pacher, <아우구스티누스와 악마>, 뮨헨 알테피나코텍, 독일 , 1471-1475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의 부재에서 인간은 마치 광명을 잃은 것처럼 신에게서 이탈한다고 말한다. 신에게서 이탈하는 것이 죄다. 비존재로 인해 존재를 이탈하는 죄! 악은 존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마가 죄업을 기록한 책을 내미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손가락 두 개를 모아 그러한 악의 존재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르게 지긋지긋하고도 끔찍한 종교전쟁을 겪고 난 후 라이프니츠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필요성을 어쩔 수 없이 변호한다. 그는 신을 변호하는 <신정론>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첫 번째 악은 모든 피조물의 불완전한 성질에서 비롯된다. 완벽하다면 그것은 신이고, 악할 수가 없다. 두 번째 악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악이다. 신은 자연의 악을 꼭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죄에 대한 벌로서, 또 때로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더 큰 악을 저지하거나 보다 더 큰 선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의 악을 원할 수 있다. 세 번째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 악은 인간의 자유의 결과이다. 신은 가장 선한 것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고, 이에 따라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선’ 뿐만 아니라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신은 ‘악’을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악을 허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이프니츠의 말대로라면, 하느님은 ‘악’을 원하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에 카인의 ‘악’을 그냥 두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 악에, 인류 최초의 불경한 자유의지에 의해 희생된 불쌍한 아벨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신약에서는 그 아벨의 희생을 죄 없이 희생당한 어린 양 예수로 해석해 새롭게 부활시켰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던, 아벨의 희생이던 간에 그 부모의 고통과 참담함은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같은 배를 타고 나온 형제가 저지른 살인이라면. 윌리엄 블레이크가 그린 그림은 형제 살인을 목격한 부모의 참담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담의 두 손은 너무 놀라서 그대로 하늘을 향해 있고, 얼굴은 슬픔과 놀라움이 교차해 있다. 어머니 하와는 죽은 아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두 팔을 모으고 있다. 아들의 죽음을 껴안고 머리조차 들 수 없는 이 피에타 ! 카인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 줄 깨닫고 머리를 감싸고 놀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아담과 이브가 아벨의 시체를 발견하다>, 런던 데이트 갤러리, 1826년
인류 최초의 참담한 비극인 형제 살해 사건 ! 인류가 아담에게서 나왔고, 한 가족이라면,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형제 살인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전쟁이 있고,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는 한, 대홍수를 겪었다 하더라도,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끝나지 않는 형제 살해에 인류의 어버이이자 창조주 하나님은 어디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실까. 아니면, 또 다시 고민을 하시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다시 대홍수를 보내야 할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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