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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진도 7코스 제1부
용장성-용장마을-도론마을-오이시리-신리-죽제산 고성계곡 입구
20220802
1.아, 진도는 또 하나의 고려였네
2주전 땡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서해랑길 6코스 탐방을 용장성 주차장 후박나무 아래서 힘겹게 마쳤다. 2주만에 이곳에 다시 와서 서해랑길 7코스를 이어간다. 서행랑 7코스 안내도 앞에서 출발하여 서해랑길을 따라가지 않고 잠시 용장성 터, 용장성 홍보관, 고려항몽충혼탑, 배중손 장군 사당 정충사를 다시 한 번 거친다. 빙 돌아서 서해랑길 7코스 시작점으로 돌아나오니 15분여가 흘렀다. 일행들은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삼별초군이 고려 무신정군의 사병적 특수함이 있지만, 외세 몽골에 자주적으로 저항한 민족주체와 민족자존의 성격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이 남도 해안의 해상권과 주변 세력을 장악하고 민중의 지지를 얻어 자신들의 권력이 개경의 고려 정부보다 주체적이고 더 민중적임을 홍보한다. 개경의 고려 정부는 외세의 허수아비 정부이며 진도의 고려 정부가 정통 정부임을 표방하여 일본에 외교 문서를 보낸 것은 그러한 자신감의 표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진도 삼별초는 9개월만에 패망하고,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잔류군이 제주도 항파두리에서 항쟁하지만 결국 4년만에 삼별초군의 항쟁은 끝난다. 13세기 말 삼별초군의 주체적 외세 항쟁은 이렇게 끝나고, 고려는 원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그 속에서 고려의 생존과 주체를 도모한다. 그로부터 750년의 세월이 흘러 고려 패망-조선-일제-광복-한반도 2개의 정부로 이어지고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에 도약하여 한민족 정통임을 내세우고 있으며 대한민국은 1990년 3월 몽골공화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대신 몽골과 북한은 외교관계를 끊었다. 세상은 이렇게 변화하며 인간은 그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서해랑길 7코스는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에서 철천산 능선의 성재를 넘어서 고군면 도평리로 들어가 드넓은 평야를 가로지른 뒤 군내면 오일시마을로 이어진다. 용장마을에서 여몽연합군과 삼별초 군사들이 대전투가 벌어졌다는 대투개골을 선황산 자락에서 어림하였다. 그곳은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의 한 지점이 되는 곳인데, 벽파진에서 대투개재를 넘어 용장리 대투개골로 들어온다고 한다. 아마도 대투개재를 넘어서 용장리로 넘어온 여몽연합군을 상대하여 삼별초군이 일전을 벌였지만 패퇴하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용장마을에는 삼별초정자와 용장정자가 있는데, 삼별초정자는 대투개골로 이어지는 용장마을 입구에 있으며 용장정자는 마을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데 용장정자의 오랜 연륜의 팽나무들은 마을의 연륜을 증거하는 것 같다. 용장정자에서 왼쪽으로 꺾어 마을을 벗어나는 길에 '오호순국지혼비(嗚呼殉國之魂碑)'가 주민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내 버려진 채 볼 품 없이 서 있다. "슬프도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넋들이여!" '오호순국지혼비(嗚呼殉國之魂碑)'는 언제 무엇을 목적으로 세워졌는지 길손은 알지 못한다. 순국지혼(殉國之魂)은 어느 시대의 넋들일까? 이 땅 모든 시대에 걸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넋들을 위로하는 석비라고 생각하고 싶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지금 이때까지 진도 지역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넋들이라고 생각하자. 대투개골 전투에서 죽은 고려정부군과 삼별초 군인들의 넋들 또한 순국지혼(殉國之魂)이 되어 용장성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용장산성길을 따라 성재로 가는 길은 여러 문중의 사당이 세워져 있는데 용장마을은 밀양 박씨의 집성촌이어서 밀양 박씨의 문중 사당이 가장 의젓한 것처럼 보였다. 이미 폐허가 된 사당의 모습은 후손들이 흥하지 못하거나 관심 부족 탓일 것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이 부질없음을 보여주는 증거 같기도 하다. 용장산성길은 예전에 진도읍성으로 가는 제1의 교통로였다고 한다. 해남에서 바닷길로 벽파진에 도착하여 용장리로 들어온 관원들이 성재를 넘어 현재 정유재란순절묘역 앞과 오일시마을을 거쳐 진도읍성으로 들어가는 가장 손쉬운 교통로였다.
성재를 넘었다. 드넓은 평야가 푸르게 펼쳐져 있다. 가을의 결실을 위하여 벼들은 이삭이 패어 알곡이 여물어가고 있다. 추석 무렵에 수확하여 조상님들께 수확한 쌀로 차롓상을 올릴 수 있을까? 길손은 농사에 무식하여 이 알곡의 상태와 여무는 시기를 판단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예상한다. 이 평야에서 풍년의 결실을 맺은 벼를 수확하여 농부는 웃음 가득한 얼굴은 그 쌀로 올해의 한가위 차롓상을 차릴 것이라고 믿는다.
오일시마을 지명이 아주 낯설게 새롭다. 무슨 뜻일까? 오일시, 기름의 도시? 알아보니 오일시마을은 오일시장이 열리는 마을, 五日市場마을, 오일장터마을이 이렇게 굳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일시마을은 산에 에워싸인 곳이지만, 경제 교류의 중심지, 물산의 집합지로서 다양한 점포들이 즐비하게 거리를 채웠다. 서해랑길을 걷는 동안 번성한 거리를 마주하기가 어려운데, 오일시마을은 농촌마을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문화 시설이 고루 갖춰져 있었다. 또한 고군농공단지가 조성되어서 이 지역의 경제활동의 주축이 되는 것 같았다. 서해랑길은 오일시마을로 들어오는데 고군면 도평리 들녘과 군내면 송산리 들녘을 빙 돌아서 오일시서쪽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정유재란순절묘역을 거치지 않고 오일시 중심거리로 바로 들어가게 된다.
정유재란순절묘역은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인 1597년경에 건립된 것이라 한다. 순절묘역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국한 무명용사와 이름 없이 종군했던 현지 향민들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이 순절묘역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도평리 도론마을 입구를 거쳐 와야 한다. 오일시1길 도론마을 입구에는 도론마을이 800m거리에 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도론마을은 경주 이씨 집성촌으로 예전에 용반리라는 지명으로 불렸는데 도룡농을 닮았다고 하여 도룡마을로 불리다가 도론마을이 되었다고 하며, 일설에는 '길 옆에 논'이라는 의미가 한자화하여 '도론(道論)'으로 변하였다고도 한다. 마을에는 진도 출신의 소전 손재형 서예가가 쓴 '도룡동(道龍洞)' 표석이 세워져 있다고 하지만 길에서 멀리 도론마을을 바라만 보았다. 소전 손재형 서예가의 글씨는 벽파항에서 벽파진이충무공전첩비 비문에서 그의 독특한 글씨를 보았으며, 진도읍 성내리에 있는 소전미술관을 예전에 탐방했던 추억을 안고 있다.
정유재란순절묘역을 멀리 바라보며 오일시마을로 올라갔다. 상가들이 줄지어 서 있지만 여름날 뜨거운 대낮에 사람들 발길은 뜸하였다. 오일시2길 남쪽 거리가 5일시장이 열리는 곳이라고 하지만 들러볼 마음을 버리고 오일시2길을 따라 오일시1길과 오일시2길이 교차하는 교차로를 지나 오일시2길을 계속 따라간다. 보배의 섬 진도(珍島)의 옛 지명이 기름진 땅이라는 '沃州', 이 지명을 사랑하는 지역민의 주택 '옥주원앙빌라' 앞을 통과한다. 장등교회, 장등골장등문화센터, 북카페 장등골소통하우스 등 장등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장등, 장등골이 무슨 뜻일까? 밤새도록 등불을 켜 둔다는 '장등(長燈)'의 의미일까? 기선의 돛대 끝에 달아 앞을 비추는 흰빛의 항해등인 '장등(檣燈)'을 뜻할까? 진도의 장등과 장등골의 의미를 알아낼 수가 없다.
서해랑길은 새마을이라는 지명을 뜻하는 新里들녘으로 나간다. 신리는, 고성리(古城里) 지역에 통합된 지역으로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新里라는 지명을 얻었으며 예전에는 당사골로 불렸다고 한다. 주황색 황화코스모스가 화사하게 빛나는 오후의 들녘길, 고성초등학교 뒤뜰의 아름다운 팽나무를 보면서 길손은 죽제산 자연휴양림 임도를 향하여 걸어나갔다. 첨찰산 서쪽의 한 산줄기인 수리봉-제봉 능선이 벋어내리는 곳 기슭에 자리한 고성마을은 가까이 있지만 그냥 통과하여 장흥 임씨 세장비 앞에 이른다. 걸어온 오시리마을과 거리를 뒤돌아보며 서해랑길 7코스 출발지인 용장성터를 가늠한다. 고성초등학교 남동쪽의 산봉 출일봉과 그 동쪽에 상봉이 보인다. 상봉 뒤에 용장성터가 있을 것이다. 만약에 산줄기를 타고 진도 지역을 이어간다면 용장성터에서 용장봉과 상봉, 출일봉을 거쳐 죽제산과 첨찰산으로 이어질 것 같다. 기회가 있을까? 저 산봉을 이어서 첨찰산으로 이어가는 산행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서해랑길 걷기도 벅찬데 뜬금없는 진도 산줄기 산행에 호기심이 일어난다.
제2부로 이어짐
2.탐방 과정
늠름한 후박나무 옆 서해랑길 7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곳에서 출발한다.
오른쪽에 용장사, 중앙에 용장성 홍보관, 왼쪽에 고려항몽충혼탑과 배중손 사당, 배중손 동상이 있다.
13세기로의 여행, 삼별초의 탄생, 1270년 한반도에서, 또 다른 고려왕국의 건설 등 설명안내 패널이 전시되어 있다.
여몽연합군은 중군의 벽파진, 좌군의 노루목(고군면 원포리 해변), 우군의 군직기미(고군면 마산면 뒷산), 세 곳으로 상륙한다.
1270년 8월 19일 삼별초군 진도 상륙, 용장성을 쌓고 관부 설치. 1271년 5월 여몽연합군 진도 삼별초 공격, 진도 삼별초 패망, 김통정 장군이 잔류군을 이끌고 제주도로 탈출. 1272년 5월 제주의 삼별초는 항파두리에 내성과 외성을 쌓음. 1273년 4월 여몽연합군 제주의 삼별초 공격, 붕괴시킴. 삼별초의 4년 항쟁이 끝남.
진도의 고려 정부가 정통 고려 정부임을 표방하고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냄.
1270년 6월 3일 삼별초군은 강화를 떠나 8월 19일 진도 벽파진에 상륙, 용장성에 거점 확보.
배중손 장군 사당 출입구인 삼문 '숭의문(崇義門)'과 사당 '정충사(精忠祠)'를 중심으로 하여, 그 오른쪽에 배중손 장군 항몽순의비, 그 왼쪽에 배중손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다. 뒤쪽에 선황산 능선이 벋어 있다.
오른쪽 위에 용장성 터와 서해랑길 7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용장성 터, 용장성 홍보관, 고려항몽충혼탑, 배중손 장군 사당을 거쳐 빙 돌아 이곳에 오니 15분이 걸렸다.
서해랑길 6코스에서 선황산 임도를 걸어 고개를 넘어 용장성 터로 오는 길이 한눈에 보인다. 오른쪽 위에 용장사가 있다.
왼쪽 선황산에서 오른쪽으로 부드러운 곡선이 이어지는 능선이 아름답다.
서해랑길 7코스를 출발한다.
대투개골 1.25km 날개판이 떨어져 있다. 대투개골(大鬪岕谷)은 삼별초와 여몽연합군이 큰 싸움을 벌였던 골짜기, 대투개재는 대투개골에서 고군면 벅파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이른다고 한다.
삼별초정자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용장마을로 이어간다.
오랜 연륜의 팽나무가 용장정자에 그늘을 드리운다. 서해랑길은 용장산성길 끝에서 좌회전하여 올라간다.
앞에 용장편의점이 있다.
용장정자 앞 용장의 사계를 거쳐 왼쪽으로 꺾어 올라간다.
1960~70년대의 구호가 벽에 적혀 있다. "나도 한 짐, 너도 한 짐, 퇴비 모아 식량 증산", "반공 방첩"
슬프도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넋들이여! 순국지혼(殉國之魂)은 어느 시대의 넋들일까?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지금 이때까지 진도 지역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넋들이라고 생각하자.
밀양 박씨 사당 영추사가 위쪽에 있고, 그 아래는 무너진 사당이 있다.
삼별초군과 여몽연한군의 대전투가 있었다고 하는 대투개골은 선황산 능선이 내리벋은 왼쪽 골짜기인 듯.
서해랑길은 갈림길에서 왼쪽 언덕길로 올라가 오른쪽 철천산 능선의 고개인 성재를 넘어 이어간다.
용장성의 남쪽 봉우리 상봉 능선이 왼쪽에서 내리벋고 있다.
이 지역에는 숭효사, 은모사 등 문중 사당을 곳곳에 세워 놓았다. 폐허처럼 버려진 곳도 있다.
숲으로 들어가 철천산 능선의 성재를 넘어 고군면 도평리로 넘어간다.
성재를 넘으면 군내면 용장리에서 고군면 도평리로 들어가게 된다.
멀리 중앙에 고군면 고성리 오일시마을이 보인다.
고군면 도평리 평산마을이 왼쪽에, 건너편에 고군면 고성리 오일시마을이 보인다.
왼쪽 직선으로 뻗은 농로를 따라 이어간다.
도평리 농로를 따라 오일시1길과 만나는 지점까지 이어간다.
추석 무렵에 수확이 가능할까?
고군면 도평리 평산마을. 담배밭의 담배풀을 수확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서해랑길은 좌우로 이어진 오일시1길을 가로질러 비닐하우스 오른쪽 농로를 따라간다.
왼쪽 성재를 넘어서 도평리 농로를 따라왔다. 중앙 뒤쪽에 상봉이 우뚝하다.
서해랑길은 길 맞은편 왼쪽 농로로 진입한다. 건너편에 군내면 송산리마을이 보인다.
군내면 송산리 농로를 따라 거의 끝 지점까지 따라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오일시마을을 빙 돌아서 왼쪽 끝 산봉인 죽제산 자연휴양림 방향으로 이어간다.
군내면 송산리 농로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진 곳에서 좌회전하여 군내천을 건넌다.
7코스 종점 8.8k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오일시2길을 따라 오일시마을로 올라간다.
앞에 오일시마을 하수처리시설이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오일시2길을 따라 올라간다.
왼쪽 성재 고개를 넘어 고군면 도평리 들녘과 군내면 송산리 들녘을 거쳐 이곳으로 왔다. 오른쪽에 상봉이 우뚝하다.
선진농협 경제사업장&미곡종합처리장 왼쪽 산기슭에 정유재란순절묘역이 보인다. 그 오른쪽으로는 고군농공단지가 있다.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와 오일시장 사이의 산기슭에 있는 이 묘역은 벽파진이나 명량진에서 15리 거리이며, 진도 설군 당시인 1440년대는 토반인 창녕 조씨와 김해 김씨들에게 하사된 땅이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인 1597년경부터 이 묘역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묘역의 면적은 50,553㎡이고, 232기의 무덤이 있다. 이 묘역의 많은 봉분 중 창녕 조씨나 김해 김씨 등 진도 토반씨족 인물들 16기 이외에는 주인 없는 무덤들이다. 진도 군내 사족인 조응량(曺應亮)[선무원종공신], 그의 아들 조명신(曺命新)[선무원종공신], 박헌(朴軒)[병조참판 증직], 김성진(金聲振)[선무원종공신, 남원전투 순직], 김홍립(金弘立) 등의 무덤도 있지만, 나머지는 이름 없이 종군했던 현지 향민들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진도군은 1995년부터 이곳 묘역을 다듬고 봉분을 손질해 보호하고 있다. 전라남도는 2001년 9월 27일 이 묘역을 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지정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437년(세종 19)에 왜적의 침입을 피하여 남해현으로 옮겼던 진도 고을을 이곳으로 옮기고 새성[新城]이라 하였다. 그 뒤 ‘무냄기’, ‘무넘기’, ‘무내기’로 변천되어오다가 오일시장이 열리면서 무내미는 사라지고 ‘닷새장터’로 불리다가 ‘오일시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뒤는 죽제산, 중앙은 수리봉-제봉 능선인 듯.
중앙 오른쪽 뒤 성재 고개를 넘어 들녘의 농로를 가로질러 이곳에 온 길이 한눈에 가늠된다.
첨찰산(尖察山)[485m]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이어진 산록을 따라서 제봉[303m]을 따라 내려오는 산줄기는 석현리와 고성리를 나누는 산릉이면서 오일시리의 주산이다. 이 산릉 끝자락에 오일시리가 자리하고 있다. 오일시리는 고성리의 곡저와 석현리의 내륙분지가 교차하는 곳이며, 또한 오일시리 앞 97m의 산자락으로 연결되는 안부에 위치하고 있는 길목이다. 장시기능으로 평야보다는 구조선이 통과하는 길목에 발달한 촌락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내리벋는 능선이 제봉 산줄기라고 가늠한다.
오른쪽 골목길로 진행한다.
이 길 건물 뒤쪽에 고군5일시장이 있는 것 같다. 서해랑길은 건너편 오일시2길 왼쪽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이 길을 따라 계속 직진한다.
좌우는 오일시1길, 전후가 오일시2길, 서해랑길은 오일시2길을 따라 계속 직진한다.
진도의 옛 이름이 옥주(沃州)이다. 원앙빌라 왼쪽 길은 신리마을 출입로인 신리길이다.
당사골로 부르다가 한자명으로 표기하면서 고성보다 나중에 설립되었기에 신리(新里)라 하였다. 신리가 있는 고군면 고성리는 본래 진도군 고이면의 지역으로서 옛 진도읍성이 있어서 고성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리와 모산리, 평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고성리(古城里)라 했다. 현재는 행정리 오일시, 고성, 신리를 합쳐서 법정리 고성리로 해서 고군면에 편입되었다.
신리마을 배후에 첨찰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으며, 봉과 봉 사이에 맷골이라는 골짜기가 마을 끝자락이면서 시작되는 곳이다. 고성리와 함께 분지에 속하며 마을은 주로 북동산록에 입지하고 있다. 고성리의 고성저수지는 신리의 우측 편의 농경지의 관개에 함께 이용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일시마을을 오른쪽 끝에서 빙 돌아서 오일시2길을 따라 이어왔다.
오일시2길에서 오른쪽 성안들길로 들어간다.
왼쪽의 들을 '성안들'이라 이르는 듯. 중앙에 솟은 산봉이 제봉이며 왼쪽 맨 뒤에 솟은 산봉은 죽제산인 듯.
오른쪽 맨 끝에 죽제산이 솟아 있다. 서해랑길은 성안들길에서 죽제산 임도를 따라 죽제산 산림욕장으로 오른다.
서해랑길은 성안들길을 빙 돌아서 죽제산 임도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은 성안들, 오른쪽은 당사갈들이라 이르는 듯. 서해랑길은 성안들길 끝까지 간다. 오른쪽 능선은 제봉 능선이다.
오일시2길에서 성안들길로 들어와 비닐하우스 앞을 거쳐 성안들길을 따라오고 있다.
이 왼쪽 골짜기를 예전에 '당사골'이라 이르렀는데 한자 지명으로 쓰면서 신리(新里)가 되었다고 한다.
황화코스모스가 멋지게 피어있는 들길을 걸어 올라간다. 오른쪽 마을은 고성마을인 듯.
고성초등학교의 나무 2그루가 멋지다. 지도에는 고성(古城)마을회관이 초등학교 오른쪽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죽제산 자연휴얌림으로 오른다.
앞산은 출일봉, 오른쪽 뒷산은 상봉인 듯. 상봉 뒤에 용장성이 있다.
서해랑길은 앞의 장흥 임씨 세장비를 거쳐 오른쪽으로 돌아 죽제산 임도를 따라 오른다.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1109~1146)의 왕후인 공예왕후 임씨(1109~1183)가 장흥 임씨이며, 공예왕후는 세 아들을 고려 18대 의종, 19대 명종, 20대 신종 왕으로 등극시켰다.
종점 6.4km 지점이다.
서해랑길 이정목 앞에서 오일시마을에서부터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제2부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