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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본격적인 베를린 생활
어느덧 한국에서 출발한지 한 달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독일 행은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면서 뭔가 준비한답시고 한 달이란 세월을 보낸 꼴이었다. 해놓은 것 하나도 없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페인에 다녀오는 것으로, 이제 베를린에 도착하면 더 이상의 여유를 부리거나 머뭇거릴 여건도 처지도 아니었다.
가, 떠돌이 생활
어딜 가든 제일 급한 게 집 문제다.
이제 짐을 가지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도 지치다 못해 신물이 났고, 그런 행위 자체가 불안함과 막막함을 대변하고도 있는 꼴이라, 거기서 벗어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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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반 연착한 1시 40분쯤에 베를린 '동물원(Zoo)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서비스 코너로 몰려갔다. 나도 잠시 그곳에서 줄을 섰다가, 슬그머니 물러서고 말았다.
짧은 밤의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숙박비를 지출하고 싶지 않아서.
플랫홈으로 올라가면 조그만 대합실이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난 거기를 찾아가 한 좌석을 잡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이젠 2시도 넘긴 시각이라, 몇 시간 안에 날이 샐 것이다.
어차피 약 3주 전 바르셀로나로 갈 때도 바로 여기서 몇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낯선 장소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비가 오는 밤에 내가 어딜 갈 수 있겠나? 게다가 밤 2시에 겁에 질려 비싼 호텔을 얻어 자고 싶은 마음도 돈도 없다. 그래도 바르셀로나에는 내 몸 하나 비비고 들어가 지낼 곳이 최소한 몇 군데라도 있었지만, 여기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아직 방도 못 구했고, 날 재워줄 사람도 없으니, 오늘 하룻밤은 기차역 대합실에서 이렇게 보내야만 한다. ‘노숙자’일 수도 있고 설사 나를 ‘거지’라 부른다 해도 상관없다. 아무튼, 값싼 감상적인 생각은 접어 두자. 어차피 인생은 우여곡절의 연속이니까.’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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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가 지난지 얼마 되지 않은 밤은 길지가 않았다. 그래서 별 탈 없이 그리고 그리 구차하지 않게 밤을 새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5시가 되기도 전에 이미 밖은 밝아 있었고, 새벽 기온도 그다지 춥지 않았다.
6시가 되어 나는 무작정 S 반(Bahn)에 올랐다. 이미 티켓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뒤늦게 쏟아지는 잠을 억제하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다.
8시가 되어 이 00 선생에 전활 걸으니 받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혹시, 너무 일러서 그런가?’ 하고 아홉시까지 역의 TV를 보며 서 있었다.
그런데 스포츠 뉴스에 보니 어제 한국은 월드컵 마지막 경기에서 벨기에와 1 ; 1로 비긴 모양이었다.
결국 1승도 못한 채 조별 리그에선 탈락한 것이다.
아홉시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앞이 캄캄했다.
집 문제와 뭔가 모르지만 화랑과의 접촉 문제 등, 지금의 내 모든 것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인데......
다시 밀려드는 막막함은 곧 비참함으로 바뀌고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유스호스텔로 찾아 들어가야만 할 것이었다.
이젠, 더 이상 무거운 몸으로 역시 무겁기만 한 배낭을 짊어지고 끌고 다니기도 지친 상탠데......
그렇지만 그것 역시 쉽기 만 한 일은 아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두 시간 정도를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는데, 파김치가 되어 숙소에 들어가니, 그 너머 ‘반지(Wannsee)’ 호수에는 요트와 유람선들이 떠 있었고 윈드써핑을 위해 훈련에 열중인 한 그룹도 보였다.
그런 그들의 풍요롭게 삶을 즐기는 모습과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내 신세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샤워부터 한 뒤, 아무 생각할 것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세 시간여의 낮잠을 잔 뒤 일어나 앉아 있다.
이 방에는 아직은 나 혼자 뿐인데, 지금은 오후 5시가 되어 간다.
전화를 해야 하는데, 전화가 돼야 되는데......
아, 내 인생......
밑도 끝도 없이 세상에 던져져 떠돌고 있는 지금의 내 인생......
오늘은 비가 개었고 해도 맑지만 선선하다.
밖에 나가봐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이렇게 그냥 죽쳐야 할까......
누워 있으면 잠이 오겠는데, 그렇다면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런데 밖에 나간다 해도 흥이 나야 말이지.
게다가 난 걱정과 불안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로, 이 유스호스텔에 잠시 내 몸 하나 숨기기 위해 찾아온 떠돌이일 뿐이다. 여기 베를린에서 이 곳만이 공식적으로(돈을 지불해서) 나에게 허용된 공간이기에, 그나마 임시적으로 이리저리 뒹굴며 생각에 잠길 수도 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아,
나름대로 부푼 꿈을 안고 이곳 베를린까지 찾아왔던 내가, 처음엔 너무 막막해서, ‘함부르크’며 ‘바르셀로나’까지 찾아가 살기 위한 준비를 한답시고 허우적대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니,
지금까지는 처음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 막막한 상태다.
무엇 하러 내가 여기에 왔을까?
바다도 없는 여기는 어디 마음 달랠 곳도 마땅찮은데......
방을 같이 쓰는 애들이, 내가 이상하거나 아니면 뭔가 심상치 않은 사람으로 보이는지, 들어왔다간 눈치를 보더니 휭 나갔다.
밖에 나가리라고 생각까지는 했지만, 몸이 안 따라주고 마음도 무거워,
나는 결국 유스호스텔 침상에 남아있기로 했다.
6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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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방을 쓰던 애들도 짐을 챙겨 나갔고, 나도 아홉시까지는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도 이 선생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더 깊은 암흑세상으로 빠져드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바람은 선선한데 하늘은 엷은 구름으로 덮여있다.
그런데 다시 베를린 시내로 짐을 짊어지고 나가면, 나는 또 다시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가 된다.
그래서 나는 채 반 시간도 남지 않은 유스호스텔 체크아웃 시간에, 방 안에 앉아 창밖만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6 . 28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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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토요일이라 오후 세시에, 처음 유스호스텔에서 만났던 오스트리아 청년을 만날까 해서 그 식당 앞에서 기다려 보았다.
나와 같은 날 베를린에 도착해 며칠 동안이나마 마음의 교류를 주고받았던, 유일한 친구일 수도 있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와 헤어진지 벌써 4주가 지나서, 그러다 보니 그의 소식도 궁금하고 뭔가 대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밖에 없을 것 같은 그리움에 그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그는 베를린에 방을 구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가끔은 그 싼 식당에 밥을 먹으러 올 수도 있을 것이기에, 스페인에 가기 전에도 두어 차례 거기서 그를 기다려 보았으나 만날 수 없었고,
오늘도 허탕치고 말았다.
나는 꽤나 많은 시간을 그저 시내 중심부를 서성이거나 '빌헬름 교회'에 가서 멍하니 앉아 한 시간여 씩을 보내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교회에 앉아 있는데 밖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가까워질수록 음악이라기보다는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시끄럽기까지 했다.
처음엔 별로 움직이고 싶지 않아 그냥 앉아 있다가 그 소리가 점점 커지기에 나가보니, 웬 시가행렬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군중 틈을 비집고 살펴보니, 무지개 깃발이 펄럭이는 ‘퀴어 축제’였다.
커다란 음악과 함께 휘황찬란하게 꾸민 차량들이 사람 걷는 속도 보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것도 답답하던데, 그 행렬에 참가자들은 짙은 화장은 물론 입었는지 벗었는지도 모를 몸을 드러낸 채 부끄럽지도 않은지 도로까지 점령한 상태로 행인들 틈을 파고 들기도 했으며, 차라리 내가 민망함을 느끼며 몸을 사렸을 정도로 나에겐 거대하면서도 광적인 그러면서도 난장판 쇼로 보일 뿐이었다.
난생 처음 그런 광란의 도가니 속에서 나는 놀라움과 상이함은 물론 섬뜩한 무서움까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렬은 2 시간여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차들의 호위까지 받고 있는 걸 보고는, 내가 지금 정말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실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꽁무니에 청소차들이 뒤따라가면서 도로 청소를 하는 걸로 그 행렬이 끝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눈요깃거리로 치기엔 섬뜩한 거부감까지 들던 행렬을 피하면서도 볼 수밖에 없이 오후 시간을 보냈더니 세 시가 넘어 있기에,
‘이제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건 전화까지도 그들은 받지를 않았다.
그러니 나에게 남아 있던 희망마저도 이젠 점점 절망으로 바뀌고도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그 사람(이 선생)을 만나면 점심을 먹고 집 문제 등 현안도 심도 있게 상의해 볼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기까지 했었는데, 밥은커녕 나는 갑자기 오늘 밤 잠자리까지 걱정을 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역으로 향하다, 우선 어제의 그 유스호스텔에 전화를 거니 방이 없다기에, 인포메이션에서 알아낸 다른 유스호스텔에 전화를 걸었지만, 거기도 오늘은 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름인데다 토요일이라 방 구하기가 더 힘들 것이라는 부연의 말도 해주면서.
그러니 나는 더더욱 암울한 나머지,
‘아, 이럴 바엔 차라리 아무 기차나 타고 아무 곳이나 가면서 오늘밤을 보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유레일패스가 남아 있으니 그렇게 해도 안 될 건 없었고, 그게 역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또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 성당엘 갔다.
성당 무대에서는 미사를 준비하는지, 음악도 시험적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무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그저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아, 오늘 밤은 어디로 가나?’
그렇게 얼마를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어두워질 무렵인 것 같아,
‘차 시간을 알아보자. 어쨌든 시간에 맞춰야, 어디든 가든 말든 할 게 아닌가......’ 하면서 일어났다.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넉넉했다. 어차피 밤차를 탈 거고, 밤도 가급적 늦은 밤 기차를 타야 밤새 달려 이른 새벽에 내릴 일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계단을 오르며 마침 의자가 하나 있기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그때, 거기에 설치된 ‘호텔 상황 전광판’이 보였고, 토요일인데도 호텔이 100% 다 찬 게 아님을 알았다. 빨간 불이 들어온 게 대부분이었지만 파란 불 호텔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자세히 보니 40마르크 이하짜리 유스호스텔도 있었다.
나는 즉시 전화를 걸었고, 거기에 계약을 했다.
절망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정말 한 순간에 내 절망이 다행(행복?)으로 바뀌고도 있었는데,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걸 절감하고도 있었다.
아무리 두렵고 힘든 절망의 순간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건 비단 이 상황뿐만이 아닌,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반복되어질 수 있는 인간사이기도 할 것이었다.
아, 내가 이 보잘 것 없는 몸뚱아리 하나 들이밀며 잠잘 곳이 없어 이렇게 마음을 졸였다니...... 어쨌든 오늘 밤 잠자리 걱정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이렇게 안락하고 편할 수가 없구나.
그렇지만, 나는 눈이 쑥 들어가 있음을 거리의 유리에 투영된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예술가의 삶이 이런 거란 말인가.
6 . 28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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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방 계약할 때 내가 하루를 더 계산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오늘이 28일이고 어제는 27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며칠인가 전부터 나는 하루를 앞질러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침에도 비가 내리는 등 일기가 고르지 못하다.
그렇지만 선선해서 가을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나에겐 후텁지근한 것보다 차라리 이런 날씨가 낫다고 볼 수 있다.
어젯밤엔 조금 일찍 들어가 샤워하고 자리에 누워 개운하게 잘 잤다.
무슨 경기를 했는데 이기는 꿈도 꾸었다.
새소리에 눈을 떠보니 6시쯤이었는데, 역시 방 창문은 열려 있었고 춥지 않은 선선한 날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는 밤새도록 문을 열어놓고 잤는데도 모기에 물린 것도 없다.
아예 모기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도 ‘유스호스텔’이란 드로잉을 붙여야겠군. 그런데 이 그림은 처음엔 간단하게 연필 몇 줄로 드로잉을 했다가, 나중에 그리 크지 않은 유화로도 했는데, 여기에 두 그림을 한꺼번에 첨부하는 게 좋겠다.’ 는 생각으로,
나는 ‘독일 참고 이미지’에서 그 두 이미지를 갖다 붙였다.
아침 식사하러 식당엘 갔는데 메뉴도 ‘반지(Wannsee)’ 알베르게만 못하고 불친절했다.
억지로 아침을 먹고,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역시 받지 않았다.
‘아, 미치겠다!’ 하는 한탄과 함께, ‘그래도 오늘이 일요일이니, 그들이 이번 주말 내내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나는 어떻게 한다지? 이 오갈 데 없는 베를린에서?’ 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정말 사람 환장하겠다......
9시가 다가왔다. 빨리 결정을 해야 한다.
난 불친절을 이유로 이 유스호스텔을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짐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왔다.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지는 회색빛 날씨였다.
그리고 다시 힘들게 새로운 유스호스텔을 정해놓고, 배낭 하나를 맡겨놓고는, 오후 2시까지 청소시간이라기에 그 이후에나 들어갈 생각으로 그 근처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입안은 떨떠름하고 모든 것이 귀찮기만 하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인가.
왜 이렇게 살아가는 걸까......
6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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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날 문 닫는 교회도 있는가?
좀 쉬려고, 시간을 보내려고, 빌헬름 교회엘 갔더니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오락가락하는 날씨는 바람을 날려 짧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서둘러 옷을 걸치고 있었다. 가을 같은 날씨였다.
흘끗흘끗 건물의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최소한 스페인에서 머리를 다듬고 오지 못한 걸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깎는 것도 스페인이 쌌을 텐데......
비가 올지도 모르고, 또 햇빛을 가려줄 곳을 찾다 보니, 역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마치 어디 갈 사람처럼 역에 나와 앉아, 그렇지만 플랫홈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만 때우며 오가는 기차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으로 걸어오면서,
‘어머니께서는 내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실 텐데...... 그리고 최소한 몇몇 이들에겐 내 근황을 알릴 필요도 있는데......’ 하기도 했는데, 내 소식을 알릴 자신이 없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화가 치민다.
이렇게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사람과 연락이 닿기를 기다리며 허비하는 시간이 그 얼마인가.
내 인생의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이렇게 허비해도 된단 말인가.
아, 빌어먹을!
6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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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이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함부르크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전화번호 하나를 주었다. 그래서 그 쪽에 전화를 걸었으나 받질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유스호스텔에서 쫓겨나듯 나왔다.
이곳에서는 아침을 주지 않는단다. 그러나 나는 당연히 아침을 먹는 줄 알고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고 있었는데, 한 여자가 나타나더니,
여기는 단체손님에 한해서 아침을 제공한다며 먹는 것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미 나는 아침을 거의 끝낸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곳에선 아침을 제공한다고 했더니, 여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돈을 내야 하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니 됐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몰랐다고 말하며 내 방으로 돌아갔는데, 더 머물기가 찝찝하여 8시도 넘어 전화도 할 겸에서 다시 나왔다.
유스호스텔도 갈수록 저급(나쁜)으로 옮겨 다닌 셈이다.
그리고 다시 자유,
가까운 공원에 앉아 있다.
이렇게 잠자리를 찾아 헤매는 날들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다시 월요일이다.
최소한 모두들 생업에 종사할 것이고, 슈퍼마켓도 문을 열 것이고,
오늘은 해가 떴으니, 다시 여름이다.
6 . 29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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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방을 구할지도 모른다.
이 선생과 통화에서 알게 된 집을 찾아가 보았다.
목사의 아들이라는 그는 혼자서 ‘음향학’을 공부하는 교포 1.5세란다.
집이 자그마했으나 자신이 침실로 쓰고 있는 방을 세놓고, 거실로 가서 지낼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그도 돈이 궁해서 방을 세놓았을 터고, 그런 면에선 동병상련의 감정도 느껴졌다.
전화도 있어 그와 같이 쓰면 될 것 같고 해서,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는 했다.
외국에 와서 자란 사람들이 다 그렇듯, 순수하고 착해 보이는 그와 내가 한 집에서 어떻게 살지는 모르되, 지금 내가 그런 걸 따질 게제가 못 되고, 또 못 살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일단 함부르크의 서 00씨의 후배가 알아보았다는 방을 가보고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할 것 같은데, 그 후배는 오전 내내 전화를 걸어도 통화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오후 3시 경까지 그와 연락을 한 다음 가능하면 그를 만나 집을 본 뒤 결정할 생각이다.
좌우간 마음 정하기에 달렸다.
그래서 역시 시간 보내느라 지루한 한나절을 보낸다.
역에서, 성당에서, 거리에서...
세 시는 머지않았고, 나는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6 . 29 오후
방을 정했다. 음향학을 한다는 친구의 집으로.
서 00씨 후배는 끝내 전화 통화가 안 돼서 포기하기로 했던 것이고,
새 집에 들어와 첫 밤을 보냈다.
그렇게나마 집을 구했더니, 짐을 들고 돌아다닐 걱정이 없어진 것만도 큰 짐을 던 기분이었다.
400마르크를 지불하고 나니 나에게 남은 돈은 그 보다 적은 양이었다. 쓰고 먹는 돈도 그렇고, 다음 달 낼 돈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바로 뭔가 돈이 될 일을 찾아야 된다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렇긴 하지만 역시 사람은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 같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다.
그나저나, 이제 한국에도 연락을 해야겠다.
살아 있다고. 그리고 살 방을 구했다고......
6 . 30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