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년 만에 서울 집중호우로 이번 8월 한 달 내내 시민들은 불안했다. 수도 서울의 강남대로가 강이 돼 버리고 신림동 반 지하 주택이 침수되면서 3명이 참변을 당했다. 이번 집중호우는 서울지역에 극한됐으나 1987년 7~8월은 전국적으로 비 피해가 컷다.
특히 하루 400mm이상 물동이에 물을 쏟아내듯 전북 남원 순창 임실군 일원과 경남 의령군 일대에 쏟아진 장마비는 사람의 힘으론 감내할 수 없는 천재지변 이었다. 전남 남원일대는 수많은 농토가 물에 잠기고 가옥이 침수당하는 등 농민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어 근 보름여 피해현장에 머물며 군인들의 대민지원 취재를 했다.
7월27일 오전 몸은 녹초가 되어 옷을 갈아입고 출근하고자 서울 신월동 집으로 향하는데 개봉동 일대가 이미 물바다가 되었다. 전봇대 상층부까지 물이 찼다. 호남지역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회사에 연락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교통은 마비되고 군 지원보트만이 여기저기 떠다니며 구조하고 있었다.
군 보트로 취재하며 보니 저 멀리 개봉교 위에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있다. 급히 노를 저어 가보니 갑자기 불어난 흙탕물이 노도와 같이 급류를 이루는데 한 시민이 가족을 구하려 개봉천을 보트로 건너다 급류에 휩쓸려떠내려 가는 것, 마침 개봉교에 부설된 줄을 붙잡는 위기에 처하면서 장병들의 인명구조작전은 시작되었다. 고무보트로 현장에 달려간 육군9287부대 조병광 대위, 이선명 병장, 이덕주 병장은 현장의 급한 상황으로 고무보트를 포기하고 다리에 부설된 송수관에 의지해 구조를 하는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물속에 잠긴 채 간신히 줄을 붙잡고 있는 시민 박종도씨는 이미 탈진한 상태로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거동을 할 수가 없자 다리난간에 밧줄로 몸을 달아맨 3명의 군인들은 몸을 낮추어 박씨의 손이나 옷깃을 잡는데는 성공했으나 그때마다 박씨의 몸무게로 옷깃이 떨어지거나 팔이 미끄러워 놓쳤다. 그때마다 다리위 수많은 시민들은 안타까운 순간마다 비명과 한숨을 몰아 쉬었다.
장병들의 투혼으로 박씨가 송수관위로 끌어올려진것은 작전개시 20여분만인 낮 12시30분이었다. 이런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시민들은 『대한국군 만세!』를 외쳤다.
민간인 한명을 구조하던 육군9287부대 장병들이 민간인을 구조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숨 가쁘던 순간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밧줄을 내려 개봉교 다리아래서 휩쓸려가는 시민을 구조키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인을 구하느라 기진맥진한 군인들 중 한명이 급류로 떨어져 이젠 동료장병을 구조한 위기에 처했다.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것이다. 송수관에 매달린 군인들 위로 시민들이 로프를 몸에 감고 시민과 군인이 로프를 잡고 생사가 걸린 구조가 다시 시작되었다. 물에 빠진 장병의 손이 미끄러워 한손을 잡으면 한손을 놓치고 다리아래는 급류이므로 생사가 달린 숨 막히는 순간이다. 결국 동료장병은 힘이다해 구조되지 못하고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1980년 초에는 전두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국민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군인들의 대민지원사업에 박차를 가하던 차, 이 현장은 「국민위한 국민의 군대」를 입증하는 국방부 대민지원사업을 한 장의 사진기사로 극명히 보여줄 수 있는 인명구조 현장이었다.
전우신문 이상윤 편집실장에 상황을 보고했더니 지금이 강판시간인데 윤전기를 세울 테니 급히 취재해 들어오라고 했다. 이 실장님은 상기된 표정으로 보름째 수해취재로 만심창이가 된 취재부 김영수(동아일보 근무)기자와 필자를 격려하며 급히 기사송고를 지시했다.
일간지인 전우신문은 『국군만세! 대한국군 만세!』 란 제목으로 1면 통단사진과 기사(전우신문 제485호, 1987년 7월29일자)로 전국 전후방지역에 일제히 배포됐다. 필자는 물과 얽힌 특종들이 주로 많다, 수해현장 취재는 여러 위험이 수반된다, 도로사정도 그렇지만 집중호우시 우중 기상이 불변한 헬기이동 취재는 더욱 불안하다. 같이 근무하던 동료 두 명도 수해취재 중 목숨을 잃었다.
서울 풍납동 일대 수해로 3천여명이 고립된 폭우현장 취재로 국방부장관 상을 받으면서 아내는 이제 후배들에 양보하고 좀 쉬면서 하라고 타일렀지만 어차피 나의 몫인 거 같다며 이후에도 수해현장에는 단골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