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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11)
첫 번째 사사 옷니엘
본문 : 삿3:7-11
<시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람의 실패도
거룩하게 이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데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실패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
(‘가나안의 모든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세대)를
‘시험’(test)하시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삿3:1).
그들을 유혹거리로 두고,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명령들을 잘 순종하는지 그렇지 않은지’(4절)를
그들을 통해 테스트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고
‘다른 열매는 다 따먹어도 되는데,
그 나무의 실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습니다.
‘선악과’를 그들 곁에 두고 시험하신 것입니다.
선택할 기회가 없으면
온전한 순종 또한 검증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선악과’를 그들 곁에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
인간이 범죄하지 않고
영원토록 에덴동산에서
잘 살았을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로봇’으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선택할 기회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선악과’를 통해 시험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있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타락한 문화와
우상들을 유혹거리로 두고,
과연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명령들을
잘 순종하는지 그렇지 않은지’(4절)를
그들을 통해 테스트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5-6절>
5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절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이스라엘 후손들은 이방 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그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의 며느리로 주고,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7절부터 사사기의 본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내용이 총론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각론에 해당합니다.
각 세대들의 ‘배교’와 ‘심판’과 ‘부르짖음’과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먼저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7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이 7절의 표현은 이스라엘의 배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설명입니다(삿2:11, 3:12, 4:1, 6:1).
이 표현 속에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 첫 번째는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특정한 법률(형법)을 어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것 그 자체가 ‘악’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의 실존을 말해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이 두려워 숨었지만 .....
이미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행위)과
숨은 곳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지만
모르시기 때문에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범죄는
‘여호와의 목전에서’ 이루어짐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호와의 목전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역사의식입니다.
이 의식만 가지고 있어도 타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부모’를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자기 뿌리’를 잘라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신명기에서 이 말씀이
가장 많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8:18-19>
18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배교의 시작입니다.
치매가 얼마나 무서운 병입니까?
치매가 무서운 것은 ‘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들조차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잊는 것은 ‘영적 치매’에 걸린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타락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엡2:8-9).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타락하게 됩니다.
‘영적 치매’에 걸리게 됩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는 중에 ‘여호와의 목전에’ 있음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안에 있음을
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전에’ 있음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잊은 결과는 비참합니다.
‘섬긴다’는 말은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으니 엉뚱한 대상을 섬기고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아스다롯’(Ashtaroths)을
섬겼다고 하는데(삿2:13),
여기에서는 ‘아세라들’(Asherahs)이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종종 ‘아낫’(Anat)이라는
여신도 언급됩니다.
이들은 모두 바알 종교에 등장하는 여신들입니다.
다 풍요를 추구하는 농경문화가 만들어낸
바알 종교의 우상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이 말씀이 다른 시대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여호와의 목전에’ 있음을 잊으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잊으면...
하나님 대신 다른 우상들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바라기는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
그들이 이렇게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고’,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 결과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다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에게 팔아넘기셨습니다.
앞서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옆구리의 가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팔아 넘겼다는 말은
그들의 침략을 방치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메소보다미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본래 ‘아람 나하라임’(Aram Naharayim)입니다.
‘두 개의 강’이라는 뜻입니다.
두 개의 강이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가리키는데,....
이곳은 지금의 시리아 북부 지역으로 여겨집니다.
이 아람 왕의 이름은
‘구산 리사다임’이었습니다.
‘구산’은 본래 이름이고
‘리사다임’은 ‘두 배로 악하다’는
뜻의 히브리식 별명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아람 왕 구산이
얼마나 악한 인물이었는지를 드러냅니다.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풍요의 신들을 쫓아간 결과......
오히려 두 배로 악한 왕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년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 어렵다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세상으로 달려가면
잘 살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하심만 불러올 뿐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벗어나
오히려 사탄의 먹이감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 살겠다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세상문화를 따라가면.....
오히려 세상의 종의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 기도해야 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앞에 설 때 당당할 수 있도록......
오직 말씀에 사로잡혀(순종하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르짖는 이스라엘>
그 다음 순서는 무엇이겠습니까?
예,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입니다.
9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구산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어느 시점부터 부르짖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고통 중에 부르짖었습니다.
처음부터 부르짖을 일을 만들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늦게라도 부르짖으니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부르짖음에
마음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사사 – 옷니엘>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9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하나님이 한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바로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이었습니다.
‘옷니엘’은 이미 사사기 1장에서
유다 지파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하는 이야기로
자세히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삿1:11-15).
거기에서 옷니엘은 갈렙의 약속을 믿고
드빌을 정복하러 나서는 용감한 청년으로 등장합니다.
결국 그는 약속에 따라 갈렙의 사위가 되었고.....
악사의 지혜로운 요구로 좋은 땅을
은혜의 선물로 받게 됩니다.
자, 그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을까요?
그 당시 갈렙은 85세였고
여호수아는 그보다 두세 살 쯤 아래였으니까,.....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을 때까지
적어도 27년쯤 흘렀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여호수아와 함께 하던
광야세대 장로들이 모두 죽었으니까(삿2:7).....
또한 최소한 한 20여년은 더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 후에 구산 왕이
이스라엘 침공하여 8년을 다스렸으니,....
모두 합하면 적어도
50년이 훌쩍 넘어버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만일 옷니엘이 그의 나이 30대에 악사와 결혼했다면
지금 그 장인이었던 갈렙의 나이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 나이에 최초의 사사로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중 왜 옷니엘이었을까요?
저는 변함없는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갈렙의 믿음이 변치 않은 것처럼,
그의 믿음으로 50년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한 구원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지
그 사람이 몇 살인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들어
골리앗을 쓰러뜨리신 분이십니다.
모세도 그의 나이 80세에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시고 그만이신 분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지팡이를 주셨듯이
‘옷니엘’에게도 함께 하셨습니다.
10절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제일 먼저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을 변하게 하는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술입니다.
술은 사람을 완전 딴판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술은 이성을 잃게 하고 분별력을 상실하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르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입니다.
성령도 평범한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술 취하는 것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겁쟁이를 담대하고 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며,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 성령,
‘여호와의 영’이 옷니엘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님은 노인 옷니엘에게 임하셔서
젊은 사람보다 더 강한 열정과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옷니엘은
이 전쟁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임을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장 섰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나갈 때에
하나님은 옷니엘의 손에 아람 군사들을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대승을 거두고
마침내 아람 왕 구산의
8년 압제를 끝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 40년 동안
그 땅에 평온이 임했습니다.
11절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한 사람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지도자 한 사람이 성령 충만하니
그 민족이 평온했습니다.
40년 동안,
곧 한 세대 동안 태평성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우리 시대에도 옷니엘과 같은
변함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하여 교회가 살고
이 민족이 살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 금산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명입니다.
갈렙과 같이, 옷니엘과 같이 저와 여러분도
변함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성도님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계십니다.
늘 기도로 늘 성령 충만하셔서,
내가 먼저 변화를 받아 ...
이 시대에 하나님이 보내신
‘한 구원자’로 쓰임받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