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사망
1899. 11. 9. ~ 1931. 7. 23.
조선의 소년 소녀 단 한 사람이라도 빼지 말고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자.
- 방정환 -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운동의 창시자,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방정환에 대한 연구는 주로 어린이운동과 문학이라는 측면에 주목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의 민족운동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따라서 방정환의 삶을 정리하면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의 삶의 다른 측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야 하며 이 글을 통해 방정환의 삶을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해 보려고 한다.
출생과 성장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음력 10월 7일) 서울의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출생하였다. 족보 및 방정환이 자신에 대해 남긴 기록들을 보면 방정환은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의 방정환은 증조부, 증조모, 조부, 조모, 큰고모, 작은 고모, 삼촌 등과 4대가 함께 거주하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5세 때인 1903년부터 7세 때인 1905년까지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는 한편 1905년 두 살 위인 삼촌을 따라 보성소학교에 갔다가 교장 김중환(金重煥)의 눈에 띄어 머리를 깎고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이후 방정환은 1909년 사직동에 위치한 매동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사직동에서 근동으로 이사하여 12살 때인 1910년 10월 미동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였으며, 1913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민족운동에 투신
방정환의 민족운동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물론이고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 활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천도교가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었으나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의 활동은 천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공부에는 뜻이 없었고, 신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독서에 주력하였다. 14살 때인 1914년을 전후로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 『붉은저고리』, 『새별』 등을 탐독하였다.11) 그러던 중 방정환은 졸업을 1년 앞 둔 시기에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였다.
이후 그는 토지조사국에 사자생으로 취직하며, 독학할 것을 결심하였다.
박래홍, 손재기, 이돈화, 황경주, 최혁, 박용회와 함께 간의원으로 선출되어 교리강연부의 지도부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교리강연부는 1920년 4월에는 보다 구체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천도교청년회라 개칭하였다. 천도교청년회는 1920년 6월에는 개벽사를 설립하여 이돈화, 박달성 등이 중심이 되어 월간지 『개벽』을 발간하였다. 방정환도 『개벽』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1년 일본 유학을 위해 동경에 도착한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동경지회는 1921년 1월 10일 발기인 대표 방정환을 비롯하여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박달성 등이 발기한 후 1월 16일 오후 1시 조도전(早稻田) 학권정(鶴券町) 302호 대선관(大扇舘)에 모이라고 광고하였다. 여기에는 방정환,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이태운, 박춘섭, 김광현, 박달성 등 10여 명이 모였고, 5~6명은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주소와 성명을 통지하였다.
한편 경성청년구락부 조직 이후 방정환은 천도교주 손병희의 사위로서 교내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방정환은 손병희가 기독교세력과 3․1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의 민족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젊은 지식인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다.
1919년 1월 유광렬이 방정환을 방문하였을 때 방정환은 유광렬에게 경성청년구락부의 민족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청년구락부를 동원하여 한번 소리쳐 보자고 한 것은 어른들이 아무 소식이 없으니까 답답하여서 우리들로라도 무엇이나 하여 보려 하였던 것인데 손선생님은 벌써 지난해 여름부터 세계적 대조류인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지하여 조선민족도 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여러 수제자들과 지방 두목에게 지시하여 지금 모든 준비가 집행 중이니 우리 청년들이 섣불리 하는 것보다 어른들이 하는 일에 심부름이나 힘써 하자는 것이었다.”
방정환의 소년운동은 잡지 『어린이』의 창간 및 그와 관련된 활동,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 활동, 그리고 색동회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동화, 동요 등의 창작과 번역, 번안 등의 활동도 있다.
방정환은 1921년 무렵까지 강연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방정환이 강연보다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구연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강연이라 하더라도 1922년 이후의 주제는 주로 어린이와 관련된 것이 많았다. 특히 1925년 3월 20일부터 30일까지 『어린이』 창간 2주년 기념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구, 마산, 부산, 김천, 인천 등지에서 ‘소년소녀대회’를 열었을 때 그 선전포스터에 ‘방정환씨 출장 참석합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광고 효과를 얻었다. 또 그가 천도교당에서 동화회를 열 때 입장권을 1,000매 발행했으나 늘 2,000여 명씩 와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그의 동화회는 각지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상에서 방정환의 민족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삶을 정리하면, 첫째, 그는 상인집안의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9살 무렵 가세가 몰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는 한편 보성소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매동보통학교를 거쳐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하였고, 손병희의 사위가 된 이후에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각종 강연회의 연사로서 참여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강연주제는 크게 천도교와 관련된 주제, 소년 혹은 어린이와 관련된 주제, ‘잘 살기 위하여’와 같이 삶의 방향성에 대한 주제로 나눌 수 있다. 강연주제는 크게 천도교와 관련된 주제, 소년 혹은 어린이와 관련된 주제, ‘잘 살기 위하여’와 같이 삶의 방향성에 대한 주제로 나눌 수 있다.
1931년 7월 10여년에 걸쳐 소년운동 뿐만 아니라 청년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였던 그는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만 31세의 짧은 삶을 마감 하였고, 대한민국정부는 1990년 방정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방정환 [方定煥] - 어린이의 영원한 벗, 건국훈장 애국장 1990 (독립운동가, 조성운,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