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2.1 (1457.4) 마르두스는 로마의 견유학파에서 인정받은 지도자였고, 다마스커스 서기관과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날마다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밤마다 예수의 고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마르두스와 가진 비교적 중요한 토론 가운데, 선과 악에 관하여 이 진지한 견유학자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고안된 것이 하나 있다. 내용으로 보아서, 20세기의 표현을 쓰자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초기 기독교가 견유학파의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메시지에 견유학파 사상을 많이 흡수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비 바울이 그러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입장에서 견유학파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정말로 중요했다. 현재 유란시아서의 전파에 기독교의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
132:2.2 (1457.5) 아우여, 선과 악은 관찰할 수 있는 우주에 대한, 인간이 이해하는 상대적 수준을 가리키는 낱말일 뿐이다. 네가 윤리적으로 게으르고 사회적으로 무관심하면, 현재 이용되는 사회 관습을 네 선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영적으로 게으르고 도덕적 진보적이지 않다면,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종교적 관습과 전통을 네 선의 기준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 세계에서 살아남고 영원으로 태어나는 혼은 그러한 선과 악 사이에 개인적으로 선택해야 하는데, 그 선과 악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살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보낸 신다운 영이 세워놓은 영적 기준의 참된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 사람에게 깃드는 이 영은 성격의 생존 기준이다.
▶ 선과 악의 기준 (3가지 유형)
- 일반적 기준 : 현 시대의 통용되는 사회 관습
- 종교적 기준 : 동 시대의 종교적 관습과 전통
- 참된 기준 : 조절자가 세운 참된 가치관 - 성격의 생존 기준
132:2.3 (1457.6) 진리와 마찬가지로, 선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변함없이 악과 대조를 이룬다. 진화하는 영혼들이 영원한 생존에 필수적인 선택의 개인적인 결정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선과 진리의 이러한 자질들에 대한 인식이다.
▶ 선과 악은 상대적이다. 개인적 선의 선택은 영원의 생존에서 필수 이므로 선에 대한 진리의 인식이 필요하다.
132:2.4 (1458.1) 과학의 지시와 사회의 통념과 종교의 독단을 논리적으로 따르는, 영적으로 맹목적인 사람은 도덕적 자유를 희생시키고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릴 중대한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한 혼은 지적 앵무새가 되고 사회적 자동인형이 되며 종교적 권위에 노예가 될 운명이다.
▶ 영적으로 맹목적인 사람 - 영적 자유를 잃을 중대한 위험이 따른다. 혼은 지적 앵무새, 종교적 권위에 노예가 될 운명이다.
- 대표적인 큰 단체, 신천지, 만민교회, 여호와증인...
- 개인적으로 : 나와 하나님 사이에 중간 매개자가 자리잡고 있는 사람, 절대 영적 자유를 누릴 수 없다.
132:2.5 (1458.2) 도덕적인 자아실현과 영적으로 성격을 달성하는―깃드는 조절자를 발견하고 그와 한편이 되는―자유가 늘어나는 새 수준을 항하여 선은 언제나 자라고 있다. 선의 체험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높이고, 도덕적 의지를 키우며, 진리의 분별력을 향상시키며, 동료를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능력을 확대하며, 영적 이상을 높이고 시간 세계에서 최고의 인간적 동기를 깃드는 조절자의 영원한 계획과 하나가 되게 만들 때이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려는 소망이 커지도록 직접 인도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찾아내고 더욱 그와 같이 되려는 신성한 열정을 길러준다.
▶ 자기 안에 참된 선이 성장하는 토대
- 내 안에 조절자를 발견하면, 영적 자유 시작,
- 진리의 분별력 향상되고,
- 신성한 열정 (용기)이 자라나고, 영적 이상이 높아짐.
-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게 된다.
132:2.6 (1458.3) 우주에서 인간이 발전하는 눈금을 올라감에 따라서, 선을 체험하고 진리를 헤아리는 능력과 완전히 발걸음을 맞추어, 너는 선이 커지고 악이 줄어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늘 가는 인간의 혼이 마지막 영 수준에 이르기까지, 잘못을 마음에 품거나 악한 것을 체험하는 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당신은 선이 커지고 악이 줄어드는 것을 체험하는가?
132:2.7 (1458.4) 선함은 살아있고, 상대적이고, 항상 진보하며, 변함없는 개인적 체험이며, 진리와 아름다움의 분별력과 영원히 연관되어 있다. 선은 영적 수준에서 긍정적 진리와 가치를 인식하는 데서 발견되며, 인간의 체험에서 그 반대에 해당하는 개념인 잠재적 악의 그림자와 대조를 이루어야 한다.
▶ 선이 개인적 체험 인 것에 초점을 맞추자.
- 선 : 영적 수준에서 긍정적인 진리와 가치 인식
- 악 : 물질, 지성의 수준에서만 오는 가치 인식
132:2.8 (1458.5) 파라다이스 수준에 이를 때까지, 선은 언제나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라 정복하는 것이요, 달성하는 체험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올바름을 간절히 목마르게 찾더라도, 너는 선을 부분적으로 달성하는 데 더욱 만족을 느낀다. 세상에 선과 악이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 사람의 도덕적 의지, 즉 성격이 존재하고 실재한다는 분명한 증명이며, 성격은 이러한 선악의 가치를 확인하고 또한 그 사이에 선택할 수 있다.
▶ 선은 달성이 아니라 체험이다.
- 인간은 선과 악의 가치를 확인하고 그 사이에서 선택 할 수 있다.
132:2.9 (1458.6) 파라다이스에 이를 때가 되면, 하늘가는 필사자가 참된 영 가치와 일체가 되는 능력이 아주 커져서 생명의 빛을 완전히 소유하는 결과를 낳는다. 완전해진 그러한 영 성격은 긍정적이고 최상 질의 선ㆍ아름다움ㆍ진리와 아주 온전히 신성하게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무한한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의 빛, 사람을 살피는 신성한 광원의 빛에 노출되었을 때, 그러한 올바른 영은 악의 잠재성을 가진 어떤 부정적 그림자라도 던질 가능성이 전혀 남지 않는다. 모든 그러한 영 성격 안에서 선은 이제 더, 부분적이고 반대되고 상대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선은 신답게 완성되었고 영적으로 충만하다. 선은 최상위의 순수함과 완전함에 가까이 간다.
▶ 파라다이스이 이른 선은 결국 완전함이다.
그렇다면 성격 존재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의 선과 악의 차이점은 어떠한가? 별로 크지는 않더라도, 선택의 의지는 방향을 결정한다.
132:2.10 (1458.7) 악의 가능성은 도덕적인 선택에 필요하지만, 악의 실체는 아니다. 그림자는 단지 상대적인 실재이다. 실제 악은 개인적 체험으로서 필요하지 않다. 잠재적 악은 영적 발전이 낮은 수준에 있을 때, 도덕적 진보의 영역에서 결정을 내리게 하는 자극으로서 동일하게 작용한다. 악은 도덕적 지성이 악을 자신의 선택으로 삼을 때, 비로소 개인적인 체험의 실체가 된다.
▶ 악의 가능성
- 도덕적 선택에서 기준이 된다. 악의 실체는 아니다.
- 영적 발전이 낮은 수준 (바로 우리) : 결정을 내리게 하는 기준, 즉 선택의 혼돈에서 기준이 된다.
- 도덕적 지성이 악을 선택할 때, 개인적 체험 실체가 된다.
▶ 그럼 어떻게 될까? 세상의 고통과 환란이 따른다.
▶ 예수는 서두에서 선과 악의 기준을 세워놓고 출발한다.
- 일반적 기준 : 현 시대의 통용되는 사회 관습
- 종교적 기준 : 동 시대의 종교적 관습과 전통
- 참된 기준 : 조절자가 세운 참된 가치관 - 성격의 생존 기준
* 우리가 참된 기준을 잘 분별하면 좋을텐데, 불행히도 조절자의 음성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
여기서 잠재악이 싹틀 수 있다. 결국 선택의 결과는 나에게서 열매로 나타난다.
많은 실행착오를 겪으면서, 그런 체험을 통해 참된 가치관을 발견하고, 굳건한 믿음에 서게 될 것이다.
▶ Talk (선과 악의 체험담 나누기)
누구나 한번쯤, 아니 앞으로 내 앞에 전개될 삶에서, 잠재적 ‘악’에 대면할 수 있다. 삶 속에서 악에 대한 실체를 경험한 바 있다면 나눠보자.
* 적선하는 것 : 이것은 참된 자비인가?
분명 예수님은 그 사람의 필요성을 채워주라 하셨고, 기도로 떼워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무엇이 기준인가?
* 자비 : 보통 불교에서는 자비를 적선하는 것의 개념으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사회적 통념이나 종교적 관습에 대한 생각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더 넓고 깊은 것이다.
적선 과는 다른 것, 사랑으로 베푸는 것,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것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