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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 (상편)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 그 일곱 번째.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요즘처럼 우리에게 절실한 때가 없는 듯합니다.
북핵문제 때문에 우리나라 안에서 전쟁 이야기로 어수선하다가
먼저 이라크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 칼럼을 쓰는 지금도 미국과 영국이 계속 이라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작전명은 ‘이라크의 자유’라는군요.
이라크 국민을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인류를 위협하는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미국과 영국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석유의 확보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엔의 승인을 받지도 않은 채 진행하는 이 전쟁으로 인해 온 세상이 떠들썩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미국의 다음 목표가 북한이다 해서, 잘 아시는 대로 한마디로 난리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얽혀서 국군의 이라크 파병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우리의 혈맹인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국군의 파병을 요청했는데,
북한의 침공을 막아주는 미국이자, 동시에 북한을 폭격할 수도 있는 미국이니
우리의 입장이 참으로 난감합니다.
참전을 하는 것이 전쟁을 막는 길인지, 반전을 하는 것이 전쟁을 막는 길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모두들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교계에서도, “평화를 위해서 전쟁은 무조건 반대다” 라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힘으로 악을 물리쳐야 평화가 지켜진다” 라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화평케 하는 길이냐 하는 것이지요.
참전을 하는 것이 화평케 하는 길이냐......
반전을 하는 것이 화평케 하는 길이냐......
한 성경책을 놓고서 교계의 목소리마저 갈라져 버렸습니다.
더욱이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크리스찬이다보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기독교는 전쟁광 집단이라고 비난하는 소리까지 듣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온 나라가 여러 가지 주장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데,
우리 회원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의견들을 갖고 계신지 궁금하군요.
제 의견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세요?
오늘 이 칼럼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의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진정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진짜 화평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들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일컬어지는 놀라운 복을 저와 여러분이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자, 이제 저와 함께 성경요절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여행이지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여행입니다.
그러면 이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화평케 하는 방법’ 이라는 곳일까요?
아닙니다. ‘화평이란 무엇인가?’ 라는 곳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화평케 하느냐?’ 를 말하기에 앞서
‘어떤 것이 진정한 화평인가?’ 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온 세상이 전쟁의 와중에서 ‘세상이 주는 평안’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요즘,
교회까지 그 대열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평안을 헌신짝처럼 내 버리고
군대와 첨단무기가 주는 평안에 목을 매달고 있는 것이지요.
교인들이 서울시청 앞과 여의도 둔치에 모여
‘미군 만세’, ‘부시 만세’를 외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까지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더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이 아니라, 군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평안’을 주신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세상이 주는 '그 평안'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 평안’, 즉 세상이 주는 평안은
첫째로, 내가 죽지 않는다는 착각과 함께 합니다.
말도 안 되는 헛된 신기루 같은 이야기이지요.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죽지 않는 평안을 찾아 헤맵니다.
내가 안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내 가족이 안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내 나라와 민족이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지 않는 것이 평안의 첫 번째 조건이지만 그런 평안은 없습니다.
모두가 신기루를 좇는 것이지요.
소경과 같은 삶입니다.
‘그 평안’은 둘째로,
내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불쌍한 삶입니다.
멸망이 코앞에 와 있는 것을 모르는 소경의 삶이지요.
(빌 3: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 평안’ 즉 세상 평안이야말로 사탄이 우리를 장악하는 수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땅의 일에서 눈을 못 떼게 만드는 교묘한 올무이지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안은,
그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평안은
우리가 요사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그 평안’이 아닙니다.
신비한 평안입니다.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바로 영생을 얻은 자의 평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들어감으로써 얻는 평안이고,
주님과 하나 되기 때문에 얻는 평안이고,
영원히 지속되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사느냐 죽느냐가 실제로 문제가 안 되는 평안입니다.
(빌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또한 주님 주시는 평안은
삶이 안락하냐 곤고하냐 하는 문제를 완전히 뛰어 넘는 평안입니다.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러분.
누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도 사람은 다 죽습니다.
전쟁 때문에 좀 일찍 죽느냐,
아니면 이 땅에서의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살다가 병으로 죽느냐 하는 차이일 뿐이지요.
기껏해야 몇 십 년의 차이일 뿐입니다.
물론 그보다 일찍 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느라고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이 땅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려고 오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의 복지를 위해 오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있습니다.
많지요. 아주 많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께 열광하는 자들이 그들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말입니다.
(요 6:27)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그 떡을 먹고 감격하여
예수님이 이 땅의 일을 위해 오신 것으로 착각하고 몰려드는 무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째 이 땅의 떡밖에 볼 줄 모르느냐고 안타까와 하시는 거죠.
그리고는 이렇게 못을 박아 버리십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도 열심히 떡을 찾아 오늘도 열심을 다해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이 바로 기복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 동기가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먹을 떡을 구하든 이웃에게 나누어 줄 떡을 구하든 마찬가지지요.
이기적인 기복신앙과 이타적인 기복신앙.....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안락한 삶은 오히려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 뿐입니다.
(잠 30:9전반)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어째 좀 긴가 민가 싶으십니까?
맞기는 맞는 말 같은데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것 같이 느껴지십니까?
자, 이제 결론에 해당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보고 계속 이어 나가겠습니다.
(마 6:30-33)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이 땅의 생명과 이 땅의 복락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복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에는 분명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와아! 그럼 좋네. 둘 다 차지하고......”
그렇지요. 좋지요.
그런데 순서가 그리 쉽지가 않은 것이 문제지요.
오죽하면 예수님이 죽으셨겠습니까?
이라크 전쟁과 북한의 핵 위협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심이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안 죽고자 하는 본능과 안락한 삶을 살고자 하는 본능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그 평안’에 목말라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을 좇는 우리의 죄악된 모습이고,
우리의 회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평안’을 구하던 자가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구하는 자로 바뀌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못하여
어처구니 없게도 기복신앙이나 금욕주의 신앙으로 빠져버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세상이 주는 ‘그 평안’을 목표로 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미국 만세”를 부르든, “하나님 만세”를 부르든 마찬가지입니다.
참전을 부르짖든, 반전을 부르짖든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죽이고 내가 평안하자고 하는 것이 저급한 기복신앙이라면,
온 인류가 함께 평안하자고 외치는 휴머니즘과 결합한 신앙생활도
고급한 기복신앙의 하나일 뿐인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세상이 주는 평안을 스스로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한 신앙생활이 금욕주의 신앙입니다.
이 또한 어리석음의 극치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안 누리겠다는 영적 교만의 극치입니다.
(딤전 4: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이 땅의 평안을 포기하고,
즉 죽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포기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복락을 누리려는 몸부림을 포기함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기쁨 가운데 살아갈 때에
이방인이 구하는 것까지 모두 누리게 되는,
즉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말입니다.
이런 화평을 누리면서 다른 이에게도 전하는 자가 바로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인 것입니다.
저들도 이제 우리로 인해
이 땅의 생명을 원하지 아니하고,
이 땅의 복락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됩니다.
당황이 되십니까? 당연히 당황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본능이 제거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이 제거되는 일이고,
탐심이라는 본능이 제거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어야 할 정도의 신비하고 신비한 일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고,
이 일이 바로 신구약을 일관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입니다.
땅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로 바뀌는 일입니다.
땅에도 속하면서 하늘에도 속하는 일은 없습니다.
어두움에도 속하면서 빛에도 속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고후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일을 이루시려고 죽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주시는 화평을 누리고,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화평을 위해 살고,
또 그 일을 위해 죽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고후 5:15-21)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팔복 일곱 번째,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 상편”을 마칩니다.
다음 하편에서는 화평케 하는 실제적인 삶을 성경요절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고,
이 칼럼을 통하여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일컬어지는 복을 모두 누리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