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7:20~26(235)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2022.3.13.
유대인들이 즐겨 읽는 경전 미드라쉬 (Midrash)에 보면,‘다윗의 반지’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반지 세공사를 불러 말하였습니다. “나를 위해 반지를 만들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시련에 처할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그 반지에 새기어라.” 세공사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멋진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이 말한 두 가지 의미를 지닌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마땅한 글귀가 떠오르지 않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찾아가서 지혜를 구했습니다. 솔로몬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This too shall pass away)”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을 당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해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도 인내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소망때문입니다. 고난의 끝이 있고 고난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이란 없습니다. 소망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소망으로 인내하여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성가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을 부릅니다.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 내겐 두려움 전혀 없네 생명 주신 주 나의 하나님 내 영혼에 기쁨 넘치네. 은혜 주신 나의 하나님 내 눈물을 씻어주시네. 평화 주시는 주 나의 하나님 모든 염려 물리치시네.
주는 나의 소망이시고 나의 전부 되시니 이 세상의 모든 것 내겐 의미가 없어. 주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내겐 부족함 전혀 없어라. 좋으신 주 여호와 하나님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 주는 나를 감싸주시고 나를 지켜주시니 나의 생명을 다 바쳐 주님만을 사랑하리라.
본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 황제에게 탄원하여 로마로 재판을 받으러 가던 도중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백부장의 호송을 받으며 행선하던 중 그레데에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습니다. 선원과 승객들은 열나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구원의 희망이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기의 ‘나는 믿노라’는 원어로 ‘피스튜오’인데 ‘신뢰하다’라는 뜻입니다. 극한 상황 가운데도 바울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사람들에게 소망을 선포하였습니다. 풍랑 가운데도 바울이 안심하라고 외쳤던 근거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고 외치는 당당한 바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세상에게 소망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담대하게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고 외쳤던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믿음대로 되리니
캐나다 출신 스코필드 (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는 ‘3.1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리우는 선교사입니다. 1919년 2월 5일 저녁, 세브란스 학교의 직원 이갑성이 스코필드를 찾아가 부탁하였습니다. 독립선언문 사본을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백악관에 보내 줄 것과 평화시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스코필드는 한 손에 사진기를, 다른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파고다 공원에 갔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총칼을 들고 진압하는 일제의 모습과 거기에 굴하지 않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3.1운동 사진의 대부분은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것입니다. 그는 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서 당한 고문을 사진과 글로 세계 언론에 알렸습니다.
해방 후 영구 귀국한 스코필드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고,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 유일한 외국인이 되었습니다. 스코필드는 두 번이나 일제가 사주한 사람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였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힘이시요 피난처시요 요새가 되심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여기의 ‘안심하라’는 원어로 ‘유뒤메인’인데 ‘담대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두려움과 불안에 빠져 있기보다 오히려 믿음으로 담대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불안은 상황이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에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 가운데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배에 탄 사람들의 목숨을 부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바울처럼 믿음대로 되리라는 확신으로 구원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명대로 되리니
인도의 시인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는 ‘죽음의 신이 당신의 문을 두드릴 때, 당신은 생명의 광주리에 무엇을 담아 그 앞에 내놓을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빈손으로 와서 평생 무엇인가 움켜쥐기 위해 애쓰며 살다가 죽을 때 꼭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하나님 앞에 생명의 광주리에 무엇인가 담아서 가야 합니다. 생명의 광주리에서 내놓을 것이 없는 인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사명은 생명의 광주리를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미 카터 (Jimmy Carter)는 대통령이 된 후 주일마다 교회학교 교사로 섬겼습니다. 퇴임 후 세계 각처에서 봉사하다가 주말에 돌아옵니다. 교회학교 교사로 섬기기 위해서 입니다. 그는 ‘대통령 임기는 4년이지만 교회학교 교사는 하나님 안에서 얻은 평생의 사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카터는 대통령 임기 때보다 퇴임 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예배드리며 교사로 섬기는 모습을 보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온다고 합니다. 사명대로 되는 모습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자신에게 는기쁨이 됩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여기의 ‘서야 하겠고’는 원어로 ‘데이 파라스테나이’인데 ‘반드시 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사명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가이사 앞에 서야 하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입니다. 바울은 사명이 있는 한 죽지 아니하고 로마 황제 앞에 반드시 서리라고 믿었습니다.
루터(Martin Luther)는 종교 개혁의 풍랑이 심할 때 동료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끝내기 전에 절대로 나를 데려가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결단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다하기까지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명대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담대하게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말씀대로 되리니
전도자 무디 (D. L. Moody)가 런던 집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습니다. 대서양을 건너가던 배가 큰 암초에 부딪혀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배 안에 있던 칠백명의 선원과 승객들은 절규하였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무디는 선실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소란하냐?” 아들은 배가 암초에 부딪혀 배 안에 물이 들어오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무디는 갑판 위로 올라가서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시편 91편 9절부터 11절을 읽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리고 배에 있는 사람들과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무디는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고 잡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잠을 잔 사람은 무디 혼자뿐이었습니다. 얼마 후 구조선이 나타나 승객 전원을 구조하여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기의 ‘말씀하신 그대로’는 원어로 ‘후토스 렐라레타이’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바울은 말씀대로 되리라고 믿는 믿음의 계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믿노라’를 현재형 시제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풍랑을 바라보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말씀대로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두려움을 말씀으로 극복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이 운명을 결정짓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중세 사람들은 포르투갈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때 스페인 영(嶺)이었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항구 도시였습니다. 해안이 끝나는 곳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에 이런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여기가 끝이다.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This is the end. There is nothing behind)” 그러나 1492년, 항구에서 한 젊은이가 배에 오르며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저 너머에는 위대한 세계가 있다.” 그는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였습니다. 콜럼버스는 항해에 인생을 걸었고 마침내 미국 신대륙을 발견하였습니다. 15세기 말 커다란 지진과 콜레라와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콜럼버스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항해를 시작하여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까? 평안은 믿음을 통해 얻어집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역경과 고난이 있어도 평안을 누릴 수 있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안전한 가운데 있어도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여전히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다면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능히 건져내실 것을 믿지 못하기에 생깁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조금도 의심치 않는 확실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환난과 역경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과 함께 배에 탄 276명 가운데 오직 바울만이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빛은 멀리까지 빛납니다. 믿음은 역경 가운데서 꽃이 핍니다. 풍랑은 절대로 우리를 삼킬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차질이 없으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의 믿음에 찬 외침이 곧 우리의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부디 믿음대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사명대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믿노라'고 선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