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目次)
문둥이 시인(詩人) 한하운(韓何雲)
인당(仁堂) 손흥섭(孫興燮)-한하운문학관지기
가. 한하운(韓何雲) 시인에 대하여
한하운(韓何雲)의 시인의 生涯(생애)
한하운(韓何雲)의 시인의 業績(업적)
한하운(韓何雲)의 시인의 著書(저서)
나. 한하운문학관(韓何雲文學館)에 대하여
1. 한하운문학관(韓何雲文學館) 소재지 및 규모
2. 한하운문학관(韓何雲文學館) 건립 배경
3. 한하운문학관(韓何雲文學館) 활동사항
다. 인당(仁堂) 손흥섭(孫興燮)은 누구인가
1. 손흥섭(孫興燮)의 간단 약력
2. 손흥섭(孫興燮)은 한하운(韓何雲)을 어떻게 알게 됐나
3. 손흥섭(孫興燮)의 장래 계획
라. 맺는말
가. 한하운(韓何雲) 시인에 대하여
1. 한하운(韓何雲) 시인의 生涯(생애)
1) 한하운(韓何雲) 시인의 탄생배경
1919년 음력 3월 10일(양력 4월 10일)로서 한하운 시인이 37세에 기록한 한하운 시인의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20page에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푸른 하늘 구름 너머의 함경남도의 赴戰嶺(부전령) 산맥과 咸關嶺(함관령)이 맞서는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咸州郡 東川面 雙峰里)가 나의 출생지이며 선조 대대로 살아온 고향땅이다. 지금부터 서른일곱 해 전 북위 사십 도에도 음력 삼월이면 봄이 오고 진달래가 피는 초열흘날 나는 산천초목의 축복을 받으며 고고의 울음을 이 세상에 소리 높이 울렸다. -중략- 아버지는 기미년 독립운동 때 학교 재학 중에 만세를 부르다가 퇴학을 당하셨다. 나는 바로 이 기미년에 이 세상에 태어났었다. 어머니는 함경남도 굴지의 대부호의 이남일녀의 망내 귀염딸로 자라났고 어머니가 열일곱 살 때 아버지는 열두 살 어린 나이로 말 타고 오셨다고 어머니는 옛말 같은 말을 우리들께 들려주곤 하였다. 나는 이러한 부유한 환경의 이남 삼녀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네 살 때부터 양복을 입고 (당시 양복을 입는다는 것은 함경남도에서 좀처럼 부유한 집이 아니고는 입을 수 없었다) 어린것들 중에서 으스대며 자라났다고 한다.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咸興(함흥)에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터넷이나 수많은 기록에서는 생년월일과 태어난 지명에 대하여 구구한 추축기록이 많이 있으나 오해 없기 바란다. 다만, 호적상 기록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또한 이리농림학교 학적부에는 “大正(대정) 10년 2월 24일생(1921년 2월 24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아울러 밝혀둔다. 한하운 시인은 1975년 2월 28일 지병으로 안식에 드셨다.
2) 한하운(韓何雲) 시인의 학력 및 경력
1926년 함흥제일보통공립학교 입학하여 “보통학교 때 학교 공부는 내내 우등생으로 특히 음악과 미술이 남보다 뛰어났었다.”라고 자서전 21page에 자술하고 있으며, 1932년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과에 입학하였는데, 자서전의 기록을 보면 “함경남도청에서 십구 명의 수험자가 있었는데, 합격한 자라고는 나밖에는 없었다. 열네 살 때 봄이었다. 호남땅 裡里(이리)로 공부하러 갔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명석한 머리를 가졌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1937년 일본 성계고등학교 입학 후 나병 발병으로 2년 수료 후 귀국하여 금강산 온정리 온천욕으로 치료 후 1939년 10월 북경으로 가 북경어학원에서 수업하여 일본대사관에서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여 1941년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 입학하여 1942년 졸업 후 귀국하여 먹고 놀고 있어 아버지의 주선으로 함경남도청에 취직하였으나 동향에서 근무하는 것이 부담되어 경기도 용인군청으로 전근하여 근무하다가 나병의 발병으로 퇴직하고 귀향하여 치료에 전념하면서 문학공부에 매진하였다 한다.
3) 한하운(韓何雲) 시인의 越南(월남)
1946년 3월 11일 함흥의과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우리에게 쌀을 달라고 벌인 시위장에 구경 갔다가 시위대로 몰려 1달간 구금되어 고초를 겪은 후 문둥이라는 이유로 가석방되었는데, 1947년 남한으로 나병약을 구하러 월남했다가 다시 돌아가던 중 검문에 걸려 원산 형무소에 감금되던 날 파옥을 하고 재차 도보로 월남을 하게 되어 명동성당 방공호에서 거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생명의 자학과 편력>의 글에서 “1947년 8월 나는 원산 형무소를 破獄(파옥)하고 원산에서 38선 동두천까지 걸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2. 한하운(韓何雲) 시인의 業績(업적)
문둥이라는 멸칭으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고 인권 사각지대의 당사자로서 해방 이후 열악한 사회의 혼란 속에서 창궐하는 나병으로 인하여 남한 전역에 수백 곳의 나병수용소가 형성 됐고, 한하운 시인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서울 경기 강원지역의 나병환자들을 인천 부평동 공동묘지 인근에 나병환자들을 수용하는 정책에 따라 한하운 시인도 수원 세류천 나환자촌에서 70명을 이끌고 합류하여 600명의 총무로 선임되어 성계원이라는 자립단체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한하운 시인의 산문 <운명의 반항>을 살펴보면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후로 그의 전공인 수의축산과 경험을 살려 양계장과 양돈장을 활성화하여 자립의 길을 닦았다 할 것이다. 또한 육영수 여사와 함께 헬기를 타고 전국 나환자촌을 방문하며 씨돼지와 옷가지와 책 보급 사업을 함께하기도 했다. 더하여 나병에서 완치된 사람을 위하여 용인에 <동진원>을 설립하였고 안성에는 <안평농장>을 설립하여 완치된 나환자에게 자립의 길을 터 주었다. 그 외에도 전국의 나병환자들을 한 곳으로 수용하여 자립할 수 있는 <무하공화국> 계획까지 수립하여 정부에 제안을 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한하운의 산문 <天刑(천형) 시인의 悲願(비원)>에 보면 <무하공화국>의 구체적인 계획을 확인할 수 있다. 한하운 시인의 산문 <운명의 반항>을 살펴보면 “救癩事業(구나사업)을 위해서 나환자 자신의 교양 향상과 일반 사회의 나병에 지나친 공포감에 대한 올바른 계몽이 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낀 나머지 <新黌藝術院(신횡예술원)>을 창설하기로 하였다. 정부에다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고 서울시장의 허가를 얻어 대방동에 약 2만 평의 땅을 얻었다. 빛나는 나환자의 예술의 광채를 아롱지게 하며 나환자 문제를 연구하려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한하운의 원대한 꿈을 엿볼 수 있다.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미감아 아동복지시설인 인천 부평소재 <신명보육원>과 서울 상도동에 있는 <청운보육원>도 한하운 시인이 창설하거나 인수하여 운영한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인종축장, 신안농업기술학교장, 한국사회복귀협회장, 한센인총연맹회장, 한미제약회사 창설 회장 취임, 1960년 7월 나병에서 해방된 후 명동에 <무하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3. 한하운(韓何雲) 시인의 著書(저서)
1949년 5월 25일 발행 <韓何雲詩抄(한하운시초)> 정음사 시 24편 수록
1953년 6월 30일 발행 <韓何雲詩抄(한하운시초)> 정음사 시 31편 수록
기록일 미상의 육필시집 시 24편 수록(한하운시초 49년과 53년 혼합 수록)
1955년 5월 10일 발행 <보리피리> 인간사 시 17편 수록
1957년 7월 15일 발행 <한하운 시전집> 인간사 시 48편 수록
1960년 3월 15일 발행 <자작시해설 황톳길> 신흥출판사 시 40편 해설
1961년 7월 25일 발행 <나의슬픈반생기> 무하문화사 한하운 자서전
1962년 10월 20일 발행 <한하운. 이항성시화집> 문화교육출판사 시. 화 54편 수록
1964년 12월 15일 발행 <정본한하운시집> 무하문화사 시 55편 수록
나. 한하운문학관(韓何雲文學館)에 대하여
1. 한하운문학관(韓何雲文學館) 소재지 및 규모
1) 주소 : 충북 충주시 앙성면 구장터길 192
2) 한하운문학관지기 : 손흥섭 연락처(010-5289-2369)
3) 문학관 부지 : 대지 470m2, 전(사과과수원) 1,084 m2
4) 문학관 규모 : 1층 72m2, 2층 54m2 = 126m2
5) 문학관용도 : 1층 한하운문학관 및 소규모 공연장
2층 도서관 및 목각 전시관
6) 문학관지기 거주용 주택 : 20여 평 규모 1채
7) 사과나무 : 50여 그루 및 각종 유실수 존재
2. 한하운문학관(韓何雲文學館) 건립 배경
한하운 시인은 대대로 지주집안으로서 경제적 여유를 맘껏 누리다가 소련의 진주와 김일성 공산당의 집권으로 전 재산을 몰수당하여 하루아침에 알거지로 전락되어 희망의 끈을 찾아 월남하였으나 세상에서 동물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문둥이 신세가 되었지만, 고난과 역경을 딛고 문학의 꽃을 피우신 한하운 시인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이며, 북에 두고 온 정인 “R”이라 칭하는 이혜경 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결혼도 마다하고 돌아가셨기에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어 뜻있는 문인들이 힘을 합쳐 숭고한 한하운 시인의 문학정신을 계승발전하고자 한하운 시인의 흔적을 한 조각씩 끌어 모아 후손에게 전할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비록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규모지만 한하운 시인의 문학 정신이 길이길이 발전하며 전해지기를 바란다. 또한 정보바다에 떠다니는 정보들이 너무나 오류가 많아 바로잡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보태자면 아직 찾지 못한 한하운 시인의 작품을 찾아내기 위한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3. 한하운문학관(韓何雲文學館) 활동사항
1) 한하운 시인의 자료를 찾아내어 널리 알리기
2)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
3) 문학꿈나무를 발굴하기-제호 <파랑새> 6월 20일 경과 12월 20일경 격 계간으로 발간
4) 한하운 시인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기-<한하운문학관TV> 유튜브 방송
5) 한하운문학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6) 출판기념식을 통해 문인 간 친목 다지기
7) 문학 세미나 개최
다. 인당(仁堂) 손흥섭(孫興燮)은 누구인가
1. 손흥섭(孫興燮)의 간단 약력
1) 충남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125 출생
2) 6남 3녀 중 7번째 세상 구경한 남자 막내둥이
3) 시골에서 중학교 졸업 후 대전에서 건축 전공 후 현대건설 입사
4) 글쓰기는 200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시 2000편에 시집 2권
5) 2018년 은퇴 후 버킷리스트로 한하운문학관 건립 추진
6) 인터넷 포털 다음 카페(http://cape.daum.net/ds1hssson)
7) 유튜브 방송(한하운문학관TV)
2. 손흥섭(孫興燮)은 한하운(韓何雲)을 어떻게 알게 됐나
45세쯤 청소년시절의 아름다운 시골의 고향추억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가두기 위하여 <어릴 적>이라는 제목에 소제목을 붙여 추억을 하나하나 산문으로 엮어 인터넷에 올리니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겨 모 문학회 회장이 자기네 문학회에서 함께 활동하자는 제안에 따라 글쓰기에 발을 내디디게 되었고, 그 문학회에 원로 시인 한분이 한하운 시인이라는 분과 교분이 있었는데, 한하운 시인의 위대함을 설파하며 기념사업회를 만들자고 하여 개인적으로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한하운 시인의 글자가 됨
3. 손흥섭(孫興燮)의 장래 계획
인생 마지막 버킷리스트로 삼은이상 남은 생을 다하여 한하운문학관을 명실상부한 문학관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가꾸어 나가는 일에 매진하고자 한다.
라. 맺는말
미천한 개인의 자본으로 초라하게 시작되었으나 초심을 잃지 않고 영속적으로 많은 꿈나무들과 기존 문인들에게 영향력을 끼쳐 제2 제3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산실이 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아직 찾지 못한 한하운 시인의 작품을 찾아내는데, 함께 동참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