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1. 이름:
히브리어 ‘이르메야후’로 ‘주님께서 들어 높이시다’ 라는 뜻이다. 레위 지파 사제 가문 힐키야의 아들로 벤야민 땅 아나톳에서 645(650)년경 탄생하였다(예레 1,1). 아나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km가량 떨어진 곳으로, 이 지명은 솔로몬 왕에 의해 축출된 실로 출신 엘리가문 사제 에브야타르의 유배지였다. 이 지명으로 예레미야는 그의 후손이라는 이론이 제기되기도 한다.(1열왕 2,26-27). 예레미야의 조상 ‘에브야타르’는 다윗 왕실의 대사제였으나(2사무 8,17 참조), 솔로몬과 왕위를 두고 경쟁한 아도니야 편에 섰다가 축출되어 ‘아나톳’으로 쫓겨 갔다(1열왕 2,26-27). 예례미야는 요시아왕 치세 13년인 626년에 예언 소명을 받았다. 이후 유다왕국의 마지막 왕 치드키야 11년인 기원전 587까지 23년간 조국이 멸망하는 비참한 시대에 활동한 비운의 예언자이다.
예레미야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부딪혔다. 하난야 같은 예언자들만이 아니라, 임금과 관료들, 사제들, 백성들 모두가 그의 반대편에 섰다. ‘주님의 집 총감독’(성전 책임자) 파스후르는 그를 체포해 매질하고 기둥에 묶어 놓았다(20,1). 성전에서 행한 설교를 들은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그를 붙잡고 사형에 처하라고 난리를 쳤다(26장). 임금은 그가 적어 보낸 하느님의 말씀을 화톳불에 태워버렸다(36장). 그는 여러 번 체포되었고, 지하의 저수조 동굴에 갇히기도 했다(37,16; 38,6). 사람들은,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11,19)며 음모를 꾸미고, 고향 아나톳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우리 손으로 너를 죽이겠다.’(11,21)며 협박했다. 형제들과 아버지 집안사람들은 그를 배신했습니다(12,6). 예레미야의 생애는 철저한 고독과 매서운 위협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말씀을 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말과 글로만이 아니라, 여러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전했다. 아마포 띠를 묻었다가 찾아오기도 하고(13,1-14), 옹기장이 집에 찾아가기도 합니다(18,1-17; 19,1-11). 멍에를 메고 대중 앞에 나서기도 하고(27-28장), 이집트에서는 큰 돌을 묻기도 합니다(43,8-13).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32장이다. 바빌론 임금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항복하자고 말하던 예레미야는 유다인에 의해 체포되어 갇힌다. 그런데 이 위기의 때,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가 온 땅을 덮고 있을 때, 그는 친척의 땅을 산다. 지금은 이러한 고통을 겪지만 주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자유로이 땅을 사고파는 시대가 다시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유배자들의 귀환(24,5-7), 새로운 계약의 약속(31,31-34), 새로운 임금에 대한 약속(23,5; 30,21; 33,15) 등 그는 절망의 때에 주님께서 이루실 새 역사에 대한 희망을 선포했다. 예루살렘이 멸망 뒤, 친 이집트 세력에 의해 이집트로 강제 연행되었지만 예언자 사명을 멈추지 않고 수행하였으며(예레 42-44장), 그곳 이집트에서 생을 마쳤다.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예레미야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
2. 시대 배경
‘끓는 냄비’ 환시는(1,13-14) 당시 국제 정세를 드러내는 것으로 바빌론의 부상을 의미한다.
요시야 왕 시대 강대국은 아시리아 제국이었고 이집트는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요시아왕은 성전 보수중 발견한 율법서에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종교와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는 이집트 왕 느코에게 패하여 기원전 609년 므기또에서 전사하였고, 이후 급격하게 세력이 약화되었다. 요시아 아들 여호아하즈 2세의 왕위는 이집트의 국정개입으로 폐위되고, 여호야킴이 왕이 되었지만 이집트의 하수인으로 통치를 했다. 이사야는 여호야킴의 정책과 사회상을 비판하면서 통치자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된다. 여호야킴 왕은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여호야킨이 추대되었다. 이후 아시리아는 급격히 국력을 상실하고 쇠퇴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605년 카르크미스 전투에서 바빌론에 정복당하였다. 이리하여 중동 일대는 바빌론 제국에 장악되었다.
아시리아를 정복한 강대국 바빌론에 대해 유다 지배층의 의견은 친이집트와 친 바빌론 두 파로 나뉘었다. 바빌론은 기원전 598년에 예루살렘 주민 일부를 포로로 끌고 갔다. 그리고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많은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다. 예레미아는 친 바빌론 입장이었으며, 멸망 후 바빌론 제국은 그를 정중히 대우하였다. 후에 친 이집트 파에 의해 이집트로 강제 연행 되어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기원전 582년 바빌론 제국이 유다지역 총독으로 임명한 그달리야가 피살되자 유다 백성들은 세번째로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 갔다(예레 52,28-30).
바빌론 유배를 겪으며 유다 지식인들 특히 사제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모두 현실이 되었음을 보고 예레미야를 참 예언자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예레미야서를 엮었다.
3.예레미야의 활동
예레미아서에 나타나는 그의 활동은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가) 첫째 시기:
예레미아 활동시기는 626-605년으로 요시야 왕의 개혁정치 아래 개혁과 안정과 영토 확장(이때는 앗시리아 세력이 약화되고 바빌론이 발흥하였다. 요시아왕은 조부인 아하즈와 아버지 므나쎄가 악정을 실시한데 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데 605년 이집트 느코와 전쟁에서 패하고 사망한 후(2열왕 23,29) 우상은 성전까지 들어오고 이교의 제의(자식을 희생제물로 불태우는 제사)가 행해지며 야훼 신봉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요시아 왕이 이집트의 전쟁에 패한 후, 백성은 거의 죽음을 앗시리아 신의 벌로 생각하여 백성들은 한층 더 우상숭배에 열을 올렸다. 유다왕국은 이집트의 지배에 들어가고 예레미아는 운문 형식으로, 북쪽 세력에 의한 침공을 전하며 그 이유는 유다의 반역과 불충으로 본다.
하느님은는 8세기 앗시리아를 당신 진노의 채찍으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치셨듯이,이제는 바빌론을 당신 분노의 지팡이로 삼아 유다 칠 것을 전한다(4-6장). 예레미야의 그 유명한 성전설교를 7,1-8,3절과 26장을 들을 수가 있다. 그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헛된 성전 경신례나 형식적인 신앙 행위를 책망한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 뜻에 순종하고 일체를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성전을 과신하고 생활은 부도덕하면서도 성전을 드나들며 속죄를 바란다면 성전이 모든 해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마술적인 능력을 지닌 것처럼 생각하여, "이것은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7,5-7)라고 외치며 스스로 기만하였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고쳐야 할 죄악을 매우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형식적인 성전 경배가 정직 인간 생명의 존중 성적 순결,야훼께 대한 충성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예레미야가 임박한 심판을 선언하며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데도 거짓 예언자들은 다른 메시지를 선포하면서(5,30-31), 불의와 속임수를 탐하고(8,10)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라고 거짓을 외쳐대며 백성을 미혹했다(23,9-40).
예레미야의 심판과 명망은 회개와 더불어 동시에 미래의 희망과 비젼에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다윗의 후예 메시아에 대한 예언하고 70년의 후배 후 남은자들을 통해 옛 계약이 파기되고 새 계약을 체결한 날이 올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악과 하느님의 심판 백성들의 멸망과 유배를 넘어서 예루살렘의 재건 즉 새 날 새 백성 새 다윗과 새로운 약속을 보았던 것이다(예레 33,6-9.14-22절). 그들은 안일무사하게 처신하며 유사시에 최후의 피난처요 세속이 힘이 미치지 못하는 성전에 피신하면 된다고 확신한다(7,4.10).
나) 둘째시기:
605-587년 느부갓네살의 즉위와 예루살렘 파괴까지이다. 유다는 친 이집트파와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어 항전파와 바빌론을 종주국으로 받들자는 화의론자들로 나뉘었다. 예레미야서 덕분으로 친 바빌론파 명단들을 알 수 있다. 즉 예레미야의 강력한 보호자인 아히캄(26,24). 그달리야. 예레미아 신탁을 기록한 네리야의 아들 바룩(유다의 서기관직 역임, 예레미야의 신탁을 부추긴 자, 43,3참고)등이다. 예레미아의 친바빌론적 행보는 정치적이 아닌 종교적 성향으로 바빌론 세력안에서 하느님의 섭리와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세째 시기
587년 예루살렘 함락 후부터이다. 소수의 바빌론 유배자들과 다수의 남은자들로 구성되어 유다의 정세는 세 가지 유형으로 전개되었다. 그달리야를 중심으로 한 친바빌론파는 바빌론 보호 아래 재건하고자 하고(예레미야도 여기 속했다) 이스마엘은 암몬 임금에게 의존하면서 독립을 취하고자 했다(41,1-10)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은 이집트에 망명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 망명을 말리는 예레미야의 신탁에도 아랑곳없이 실천에 옮겼고 이 과정에서 예레미아를 인질로 끌고 갔다. 예레미아의 연대와 활동은 이 망명길에서 끊어진다.
4.구조
1장: 예레미야의 소명
2~25장: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에 대한 예언
26~45장:예레미야의 활동/ 유다를 향한 구원의 말씀
(여호야킴과 시드키야 시대(34-36장)에 관한 내용 삽입)
46~51장: 주변 민족들을 향한 심판
52장:부록으로, 2열왕 24,18-25,30에서 가져온 역사적 문헌(새 자료 첨가)이다.
바빌로니아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5. 예레미야서에 대해
예레미야서는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게 편집된 책이다. 연대 •주제별로 엮은 책이 아닌 모음집이다. 자료는 운문형 신탁의 고백록과 산문형 설화와 담화로 되어 있다. 시기는 유배전부터 유배후까지를 담고 있는 내용이 순서도 없고 수신 송신자의 구별도 없다. 곳곳에 반복되고 연대기적 혼란 문체의 변경 등도 있다. 전수 과정도 복잡하다. 쿰란 넷째 동굴에서 발견한 히브리어 사본 예레미야서의 경우, 어떤 것은 마소라 본문에 가깝고, 어떤 것은 그리스어 역본에 더 가깝다. 따라서 여기에 적용된 이론이 바로 ‘세 출전가설’이다 즉 첫째 사료는 초반부(1-25장)의 이사야의 운문 예언이고, 둘째 사료는 예레미야의 제자이며 궁정 서기관이었던 ‘바룩’이 기록해 둔 ‘이사야의 전기 설화로 후반부 26-29장과 34-44장’이며, 셋째 사료는 후대의 신명기계 저자가 작성한 산문체 설교와 수사학적 담화집으로 예레미야서 전체에 흩어져 있다. (7,1-8,3;11,1-5;9,14;18,1-12). 그리고 최종 편집은, 신명기계 저자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몇 가지 약점이 있다.
첫째 예레미야의 고백 (11,18-12,6;15.10-21; 17,12-18;18,18023;20,7-18)은 위의 세 사료로 분류하기 난해한 문학 양식이다. 둘째 이 가설은 구두 전승을 소홀하게 다룬다. 셋째 신학 사상, 집필동기, 문체나 어휘의 유사성을 간과한다. 따라서 세 가설은 수용하면서도 이런 약점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튼 친저성과 관련한 두 가지 상반된 이론이 있다. 하나는 운문과 산문과 전기 모두 친저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친저성을 철저히 부인하며 산문은 유배 후 무명의 신명기계 저자의 편집으로 인정한다. 운문은 유배시절의 무명인이 편집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이론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첫째 이론이 맞다면 이 책은 유배 이전 유다인들을 위해 집필된 것이고 둘째 이론이 맞다면 유대 뒤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을 위해 집필된 것이다.
정태현 신부는 다음과 같이 절충하여 설명한다. 운문은 유배 전에 예루살렘이 유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위한 말씀을 반영하고, 산문은 유배 기간 또는 이후에 유다 공동체를 위해 예레미야가 생애 말기나 사후에 바룩을 비롯한 제자나 추종자들이 그리고 신명기계 저자들이 작성한 전기 설화와 교화적 설교와 수사학적 담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운문과 산문의 어휘와 표현 형식과 구조가 큰 차이를 드러내는 데서 얻은 결론이다. 운문의 신탁들은 아모스 호세아 제 1이사야. 미카 스바니야등 유배 이전의 내용들과 유사한 문학 양식을 나타낸다. 산문의 경우는 유배 중의 유다인들을 겨낭한 에제키엘 설화와 설교에 가깝다. 다른 일부는 유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신명기계 문헌의 내용과 문체를 반영한다. 이상의 고찰에 의해 예레미야는 서로 다른 시대에 작성된 세 가지 사료에 바탕을 둔다. 즉 유배 이전의 자신의 운문 신탁과 예레미야 생애 말기나 생애 후에 바룩이나 다른 추종자들에 의한 전기적 설화가, 그리고 유배 이후에 신명기계 저자들이 첨부한 설교와 담화집이다. 편집 과정은 예레미야의 예언활동-예레미야의 언행 수집하고 기록-신명기계 저자가 자신의 신학에 따라 설교 담화를 추가하고 내용을 완성 했을 것이다.
입력:최마리 에스텔 수녀; 2024년 05월 23일; PM 22시 20분
참고:성서백주간 도움책 예언*교훈서 예례미야서에 대하여;
굿뉴스 성경 자료, 이용권 신부,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예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