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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79코스 2부 노선은
김적 및 김홍욱 묘역에서 ㅡ 롯데케미칼사택 ㅡ 대산5리마을회관 ㅡ 대산버스터미널까지 입니다
구간 거리 12.2km인 79코스를 끝마치고
이벤트 트레킹으로 황금산 정상에 오른 후 코끼리 바위와 몽돌해변을 탐방 한답니다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현 위치)에서 앞쪽 나즈막한 고갯마루를 넘어서자마자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의
먹수지마을 뒤편에 솟은 옥녀봉(진행 방향) 아래쪽 경사면에~
김적, 김홍욱(김적의 막내 아들)의 묘역 문화재가 있습니다
김홍욱 신도비는 지금(2023년)으로부터 251년전인 1772년 김홍욱의 5세손 김귀주(金龜住)가 세웠다고 합니다
비명(비석에 새긴 글자)은 1674년에 장자 김세진( 金世珍)이 덕원에 유배 중이던 우암 송시열을 방문하여
받아두었다가 1746년 박필주(朴弼周)가 묘지명(묘지에 기록한 글)을 완성하고
이재(李縡)가 신도비명 후기를 찬(글을 쓰다)하다.
김귀주(金龜住)는 서산 출신으로 김두광(金斗光)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김선경(金選慶)이고,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이며,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오빠이다.
김적(金積,1564~1646)은 1609년(광해군 1) 사마생원시에 급제한 뒤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을 거쳐
1613년(광해군 5)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을 지냈다.
광해군(조선 제15대 왕)의 난정이 계속되자 탄식하고 사직한 뒤 가족을 이끌고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이곳에서도 후학을 양성하며,
주변의 유학을 신봉하는 사림들과 교유한 흔적인 단구대(丹丘臺)와 용유대(龍遊臺) 등의 유적이 있다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의 먹수지마을 뒤편에 솟은 옥녀봉 아래쪽 경사면에 김적선생 묘
김적이 낙향하여 풍류를 즐겼다는 용유대는 도당천과 홍천천이 합류지점의 도당천에 위치한 화강암이며
단구대는 용유대 하류에 있는 암반이다.
용유대 ㅡ 단구대 ㅡ 정순왕후 생가 위치를 위성지도로 그래픽하여 보았습니다
정순왕후 생가는 조선 효종(孝宗 조선 제17대 왕) 때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을 때, 김홍욱이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에게 왕이 내린 집으로
효종의 하사금으로 재위 기간인 1650년경 건립한 집으로 이 가옥에서 1745년(영조 21) 태어나
1759년(영조 35)에 왕비가 된 김홍욱의 4세손인 김한구(金漢耉)의 맏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생가이다.
광해군(조선 제15대왕) ㅡ 인조(조선 제16대 왕) ㅡ 효종(봉림대군, 조선 제17대 왕. 소현세자의 친동생)
정순왕후 생가(貞順王后 生家)
조선 영조(조선 제21대 왕)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출생한 곳으로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년(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정순왕후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1759년 15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는데 당시 영조의 나이는 65세였다.
☆ 승지 : 조선시대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으로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 예조참의[(禮曹參議 ) : 조선시대 예조(禮曹)에 둔 정삼품(正品) 당상관(堂上官)
☆ 효종(孝宗, 봉림대군) : 인조의 둘째 아들로 조선의 제17대 왕(1619~1659), 재위 기간은 1649~1659년이다.
김홍욱선생 묘와 신도비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의 서해랑길 79코스 노선과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의 서해랑길 79코스 노선은 김홍욱선생 묘 곁을 지나갑니다
인조는 1595년(선조 28)에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定遠君, 원종으로 추존)과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연주군부인 구씨(인헌왕후로 추존)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나, 1607년(선조 40)에 능양군에 봉해졌다.
1623년 3월 13일 서인 세력이 무력 정변을 일으켜 제15대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은 능양군(16대 인조)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능양군은 이복형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막내동생 능창군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 정원군은 그 일이 있은 후 화병으로 죽었던 것이다.
거사 당일의 행적을 보자.
상(인조)이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나아가 연서역에 이르러서 이서의 군사를 맞았는데, 사람들은 연서를 기이한
참지(讖地)로 여겼다. 장단의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김류,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金自點) 송영망(宋英望)
신경유(申景裕) 등이 거느린 군사가 또한 6, 7백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선전관으로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만나 전군(前軍)이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해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 이흥립은 궐문 입구에 포진해 군사를 단속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초관(哨官) 이항(李沆)이 돈화문을 열어 의병이 바로
궐내로 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는 후원 문을 통해 달아났다.
《인조실록》 권 1, 인조 1년 3월 13일
참고 : 김자점(金自點)은 친청나라파로 친명나라파인 임경업 장군을 역모 사건에 모함에 빠뜨리게 하여
장살(杖殺=매를 쳐서 죽이는 일)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김자점(金自點)은 임경업 장군 역모 사건에 거짓으로 밣혀저 사사하게 된다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세거지로 삼은 경주김씨의 입향조(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의 조상)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낸 김연(1494년~?)이 명종(조선 제13데 왕) 때에
서산 유계리 정착함으로써 연고를 맺게 되었다
김연은 관직에 있는 동안에는 한성에 살았는데 관직에 물러난 후 서산 덕지천에 정착했다가
유계리(한다리) 이곳으로 이주했다
김연의 큰아들 김호윤과 그의 아들 김적, 김호윤의 사위 김지남, 그리고 차남 김호열 이들의
자손이 대를 이어 유계리에 살게 되었다.
1619년에 발간된 서산지역 사찬 읍지인 호산록에는 김연의 차남인 김호열의 행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호산록>에 따르면 김호열은 임진왜란 때
지역의 유력 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김연의 4세손 김홍익(1581~1636)은 1614년(광해군 6)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의금부도사, 장악원직장, 사헌부관찰, 공조좌랑 등을 거쳤다.
외직으로 연산현감으로 있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적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순절하였다.
그 공으로 1741년(영조 17)에 충신 장려를 하사받았고 1794년(정조 18)에는 충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안주(安州)황해도 재령군의 옛 이름.
◈ 목사(牧使) : 조선시대 지방의 고을에 설치한 목을 관할하던 정3품의 지방 장관
인렬왕후(仁烈王后)는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1610년(광해군 2)에 당시 능양군이던 인조와 혼인했다.
인조의 자식은 6남 1녀로 그중에서
인렬왕후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조선 제17대 왕>)을 비롯해 4명의 아들을 낳았다
인조와 서인 정권이 들어선 후 조선의 외교 정책은 광해군이 고수한 중립외교 정책을 버리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바뀌자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후금은 1636년(인조 14)에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12월, 청나라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왔다.
후금은 여진족이 만주에서 일으킨 나라로 그 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고쳤다
명나라 때에는 만주족을 여진인(女眞人)이라고 했다. 누루칸도사(奴兒干都司)의 관할 하에 있었는데 당시의
이 지역은 해서(海西), 야인(野人), 건주(建州) 등 3부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그중 건주부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각 부의 여진을 통일하여 금(金)을 건국하였다. 이를 역사상 후금(後金)이라고 한다.
여진족은 만주동북부에 살던 퉁구스계의 민족으로 10세기(서기 901년~1000년)이전에는시대에따라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로 불리었으며, 뒤에 만주족(滿洲族)으로 이어졌다.
누르하치(奴爾哈赤)는
생몰 1559년 2월 21일 ~ 1626년 9월 30일,
건주여진 재위 : 1583년 ~ 1616년,
후금 재위 : 1616년 ~ 1626년)
후금의 초대 황제로, 뒤에 청나라의 초대 황제인 태조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명나라 멸망하다
만주족을 통일한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건국한 후 세력이 차츰 커지자 명나라 동북 지방을 침략하기 시작할 때
명나라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은 1641년에는 낙양을 함락시키고, 1642년에는 개봉을 점령했으며,
1643년에는 양양에 궁전을 짓고 스스로 신순왕이라 칭하고 국가체제를 갖추어나갔다.
1644년 3월 17일 반란군의 지도자 이자성(李自成) 북경을 점령한다.
북경(베이징)은 명나라의 수도이다.
1644년 3월 18일 저녁 무렵,
명나라 숭정제 황제가 가장 믿고 있던 신하가 성문을 열고 이자성 반란군을 불러들였다.
황제가 머물고 있던 자금성 주변에는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의 함성이 들리고 북경 시내는 반란군이 방화한
불길이 여기저기서 번지고 있었다. 황제 숭정제는 최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금성안까지 이자성 반란군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때
숭전제는 명나라의 맥을 잇기 위해 세 아들을 피신시킨 후 왕비와 후비들에게 자결을 명한 다음,
그의 딸들은 직접 죽였다.
1644년 4월 25일 황제 숭정제는 의관에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1628년 왕위에 오른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
숭정제는 이자성의 반란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자결로 생을 마감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나는 죽어 지하에 가도 선황들을 뵐 면목이 없어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내 시신은 도적들에게 갈기갈기 찢겨도 좋지만 백성들은 한 사람이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
숭정제가 이렇게 서른넷의 생애를 마감함으로써 명나라의 운명도 다했다.
반란군 지도자 이자성(李自成)이 자기의 애첩을 빼앗아간 일로 화를 품고 있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吳三桂)는
만주족 황제 도르곤(누르하치의 아들)을 끌어들여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했다.
1644년 만주족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만리장성의 산해관(山海關) 문을 열었고,
만주족은 1644년 6월에 북경을 점령했다
이자성(李自成) 반란도 산해관을 지키던 장군 오삼계가 청군과 연합하여 공격해 오자
북경을 탈출하여 도주하던 중 1645년 향촌 자위 집단에게 피살당했다.
인조(조선 제16대 왕) 시대 때 옛날 두만강 일대 만주지역에 살던 민족들을 미개한 종족이라는 뜻으로
오랑캐라 여기며 멸시와 업신여겼던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건국한 후금(후에 청나라로 국호를 변경)
1616년부터 ~ 1911년까지 295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게 된다.
오랑캐였던 청나라가 두 번에 걸처 조선을 침략해 왔다. 첫 번째는 1627(인조 5)년에 만주에 본거지를 둔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한다.
두 번째는 1636(인조 14)년 12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중국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2차 침입으로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난갔다
1637년(인조 15) 1월 30일, 인조는 45일 만에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몸소 삼전도(三田渡)에 나가 청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의식을 치렀다
(삼전도(三田渡) : 서울과 광주를 잇는 한강에 있던 나루. 지금의 송파구(松坡區) 삼전동의 위치에 있었다.
조선의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중국 청나라에 굴욕적 항복을 하였던 곳으로
그 기록이 새겨진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서 있다)
(나루터와 삼전도비는 지도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삼전도비(三田渡碑)
서울시 송파구 잠실동 47번지 석촌호수 서호에 위치한 삼전도비(三田渡碑)
항복과 더불어 조선은 청나라에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치고 수많은 인질을 보내야 했다
인질 중에는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양의 청나라 황궁
인질로 보내진 심양(瀋陽)에서 그는 조선과 청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청의 고관들에게 줄
뇌물과 조선인 노예를 구출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리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인조는 이런 소현세자의 활동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굴욕적인 삼전도 항복 이후 반청의식(反淸意識)
이 더욱 고조된 상황에서 인조는 청나라가 혹여 자신을 내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대신 세울 것을 걱정했다.
누루하치(努爾哈赤)로부터 왕위를 이어 받은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
(홍타이지(皇太極)는 누루하지의 8번째 아들)
홍타이지는 1636년에 왕위에 올라 국호를 청(淸)이라고 하였다.
그가 곧 청(淸) 태종(太宗)이며 종족의 명칭을 만주(滿洲)로 바꾸었다.
청나라 2대 황제인 태종이 인조(조선 제16대 왕)에게
만일 너(인조)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청 태종)이 인질로 삼은 아들(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 것이다.
1645년(인조 23),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8년 만에 귀국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학질이라는 진단을 받고 침을 맞았으나 사흘 만에 갑자기 죽어 버렸다.
인조실록(인조 23년 6월 27일)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은 아닌지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러한 사실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던 종실 이세완(李世完)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나 인조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서 조사조차 하지 않았거니와 침을 잘못 놓아 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를 받은
의원 이형익(李衡益)에 대해서도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은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오다 사약을 받아 죽었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소현세자의 두 아들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김홍욱의 맏아들 김세진의 손자 김흥경(1677~1750)은 1699년(숙종 25) 과거에 급제하여
삼사의 요직을 거처 영조 때 분무공신에 책록되고 영의정을 지냈다.
김흥경의 차남 김한신(1720~1758)은 영조(조선 제21대 )의 서녀 화숭옹주의 부마가 되어
왕가와 혼인함으로서 궁가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김한신의 증손이다
김계진의 증손자는 김한구이며 김한구의 딸이 1759년 왕비로 책봉된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1745~1805)를 배출함으로서 명문가로 급부상하였다.
1803년 순조(조선 제23대 왕)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에 사망하였다.
김홍욱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5대조이자,
영조 때의 영의정 김홍경의 고조부이며,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다.
김적의 막내아들 김홍욱은 황해도관찰사로 재임중에 소현세자의 빈 강씨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다가
효종(인조의 둘째 아들로 조선 제17대 왕(1619~1659)의 분노를 사서 친국(親鞫)을 받던 중
장살(杖殺, 형벌로 매를 쳐서 죽임)되었다
김홍익의 동생 김홍욱은 1635년(인조 13년)에 증광 문과 을과에 급제(합격)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사간원정언, 예조참의 등 요직을 거쳤고
외직으로는 공충도관찰사, 홍주목사, 황해도감사 직무를 맡게 되었다.
1638년(인조 16) 김홍욱(37세 때)이 당진 현감으로 부임하여 7개월의 짧은 재임 기간에
당진현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지만 충청도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고
1646년(인조 24) 이조 좌랑이 되었으나 권신 김자점(金自點)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효종 즉위 후 사헌부집의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
1649년(효종 즉위) 김자점의 사치와 사리사욕을 탄핵하고 사직했으나, 주변의 변호로 복직하였다.
1649년 인조의 만장을 쓸 때 "어찌 오랑캐(후금 → 청)를 섬기겠는가.(何必事戎氈)"
"입을 다문 신하의 죄가 크다.(口緘臣罪大)"는 구절이 대신을 조롱, 풍자했다는 이유로 8월 25일 파면되었다.
1654년(효종 5)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전임되었는데, 효종이 구언교(求言敎)<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왕이
신하들에게 해결책을 구하는 교지>를 내렸다.
김홍욱은 8년 전(1646년)에 사사(賜死)된 민희빈 강씨(소현 세자의 빈)의 억울함을 말하고
사면, 복권으로 그 원한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다.
효종의 종통(宗統)에 관한 것이었다. 크게 노한 효종은 김홍욱을 하옥하였고,
친국(親鞫)이 진행되던 중 김홍욱은 매를 못이겨 사망하였다.
김홍욱 그가 죽자 송시열, 송준길, 남인의 당원 허적, 홍우원 등도
그의 사면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여러번 올려 복권되었다. 1719년(숙종 45)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순왕후 생가 앞에는 <한다리 김씨 세거비>가 있는데 비문에 따르면 왕비 1명, 부마 1명, 국구(임금의 장인) 1명,
상신 1명, 대과 급제자 27명, 무과급제자 37명, 소과 급제자 64명, 2품관 이상의 고관이 37명,
시호<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 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받은 사람 11명 등을 배출한 가문이다.
상신(相臣)이란 조선시대 최고의 중앙관청인 의정부(議政府)의 최고관직인 정1품이며,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庶政)을 감독하며 경국(經國)하는 영의정(領議政)과 좌의정(左議政)과 우의정(右議政) 등 모두를
일컬는 말로 정승(政丞) 이라고도 불리우며, 오늘날의 관직으로는 국무총리와 부총리에 해당되는 관직이다.
(소현세자 가례도감의궤)
소현세자빈으로 간택된 강씨가 가마를 타고 혼례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영회원(永懷園)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원자인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1611~1646)가 잠든 능원이다.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357호로 지정되었다.
민회빈은 병자호란의 패배로 청나라에 소현세자와 볼모로 갔을 때 진취적인 기상과 지혜로운 처신으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조선 궁궐의 여성상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귀국 후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왕을 독살하고 왕실을 저주한다는 모함을 하여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 44년(1718년)에 죄가 없음이 밝혀져 복권되었고 고종 7년(1903년)에는 무덤을 영회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궁 조씨는 후궁 시절
1637년 12월 종4품 숙원(淑媛)
1638년(인조 16년) 정4품 소원(昭媛)
1640년(인조 18년) 정3품 소용(昭容)
1645년(인조 23년) 정2품 소의(昭儀)
1649년(인조 27년) 종1품 귀인(貴人)에 책봉되었다
소의에 책봉될 무렵 그녀는 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후궁 조씨는 성품이 매우 응큼하고 간사하며,
그녀의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왕 앞에서 자주 모함하여 궁궐 안에서도
그녀를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소현세자의 안해인 민회빈 강씨를 유독 미워하였다.
조씨는 소용 시절 밤낮으로 인조의 앞에서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고, 세자 내외에게 누명을 씌우는 등
항상 둘을 모함하기 일쑤였다 한다. 훗날 세자빈 강씨는 귀인 조씨에 의해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나아가 인조까지 독살하려 했다는 무고를 받아 사사되었다.
1651년(효종 2년) 음력 11월 23일 그녀가 사돈 김자점과 함께 장렬왕후와 영풍군부인 신씨를 저주한
사건이 밝혀져 관련자들을 처형해야한다는 요청으로 조씨를 폐서인(廢庶人)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효종은 부왕 인조가 그녀를 총애하던 것을 생각하여 자진케 하되 작호를 폐하지 않고 사약을 통해 자결케 하였다
김홍욱의 신도비와 김홍욱 행적에 관련된 비석
학주 김홍욱선생 연보와 비석
학주 김홍욱선생 연보
학주 김홍욱선생 시비
김적, 김홍울 묘역 안내문
김적선생 묘와 김홍욱선생 묘
뒤돌아 보고~
서산시 대산읍 정자동에 위치한 <한성필하우스아파트>가 조망되는군요
한성필하우스아파트에서 110m 거리에 서해랑길 79코스 종점인 대산버스터마널이 있습니다
걸어왔던길 뒤돌아 보니 롯데케미칼사택아파트가~
서산 망일산 군부대
망일산 군부대
지나왔던 삼호아파트를 뒤돌아 보고~
서해랑길 79코스 역방향 종점 안내판
오후 2시 02분
서해랑길 79코스 12.2km 트레킹을 대산버스터미널에서 종료 합니다
오후 2시 40분 대산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여
12km 떨어진 서산시 대산읍 독곳리 해안가에 위치한 황금산으로 갑니다
황금산 정상에 오른 다음 코끼리바위와 몽돌해변을 둘러보는 트레킹 시간은 1시간 30분 주어졌습니다
현위치 주차장에서 A코스 등산로 따라 황금산 정상에 오르기에는 1시간 30분이 너무나 짧습니다.
안부 쉼터에서 끝골로 가서 해변따라 굴금으로 이동하기에도 시간상 부족하여 포기 합니다.
황금산 주차장에 설치된 등산 안내도 입니다
오늘의 황금산 트레킹 코스는
현위치(주차장) ㅡ B코스 등산로 ㅡ 안부 쉼터 ㅡ 황금산 정상과 임경업 사당 ㅡ
갈림길 쉼터 ㅡ 굴금 ㅡ 몽동해변 ㅡ 코끼리바위 ㅡ 쉼터 ㅡ 현위치(황금산 주차장)
서해랑길 79코스 트레킹을 마치고
특별 이벤트로 황금산 트레킹이 3부에 올려 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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