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노 복 래
입동이 지나자 낙엽들의 갈 길이 바빠진 듯하다. 제법 서늘한 바람이 사람들의 설익은 마음을 재촉하고, 새들도 따듯한 시선을 찾아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그 따듯한 시선 속에 나의 아버지가 서 계시다.
지난 2013년 3월 12일,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지인 등 평소 아버지를 사모하는 분들이 아버지의 영정 앞에 모였다. 유명을 달리하신 아버지께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시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고인께서 안락한 천상의 세계로 극락왕생하시기를 비는 간절한 마음으로 모였다.
아버지의 생을 돌이켜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 도전하고 헌신하며 사신 삶이었다. 아버지는 1934년 식민지 시대에 가난한 집안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가난을 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아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할아버님의 의지와 선견지명, 그리고 아버님의 높은 학구열로 주경야독하시어 당시 명문이었던 공주사범대학에 합격하셨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교육계에 몸담으시어 40여 년간 교육에 헌신하신 숭고한 삶을 사신 분이시다.
아버지는 대학졸업 후, 나주로 첫 발령을 받으셨으나 탁월한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받아 목포해양고등전문학교로 영전하셨고, 다시 그곳에서 제주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 요청이 있었다. 그럼에도 효자이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고향인 예산농전으로 전근 오셔서 현 공주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시다가 40여 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셨다. 그 공로로 국가로부터 황조근정 훈장까지 받으셨다. 이러한 아버님의 생을 회고할 때마다, 나는 할아버님에게도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달밤에 남의 집 논에서 일하시면서도, 아들을 대학에 보내 성공시켜 일가의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희생정신이 각별하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먹고 살 끼니를 걱정하는 주제에 아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킨다”는 친구분들의 손가락질에도 ‘내 무릎이 부서지고 잘라져도 꼭 아들을 출세시키고 말겠다.’는 의지로 생활하셨던 분이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헌신이 있었기에, 아버지도 예산 읍내에 있던 농고까지 왕복 80리 길을 걸어 통학을 하면서 공부와 일을 병행하셨던 것이다.
나는 이따금 대전에서 예산에 있는 집에 갈 때, 편리한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구도로인 차동고개로 다닌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늘 다니시던 길이기에, 그분의 체취가 남아 있는 도로이기 때문이다. 높은 고개를 넘나들 때, 아버지에게는 많은 인내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학구열이 높으셨던 아버지는 지천명이 넘은 나이에도 서울의 건국대 대학원에 진학하시어 국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셨다. 이러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성실함은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인내와 끈기, 효, 검소함을 체득하게 했다.
연세가 드신 아버지는 고혈압과 당뇨가 있긴 했지만 엄격하게 건강관리를 하고 계셨다. 우리 가족 모두는 100세까지 장수하시리라 생각했고, 또 그러시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하늘은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새해 첫날, 전화로 인사를 드렸을 때 건강한 목소리를 전하시던 분이, 일주일 후에는 아우로부터 예산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아내와 함께 병원을 방문했을 때도 아버지는 비교적 건강해 보이셨다. 며칠 후 갑자기 천안병원으로 모셔야 한다는 아우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수술실에 계셨다. 잠시 후, 주치의가 나왔고 아버지는 의식을 잃은 채 중환자실로 급히 옮겨졌다. 우리 가족 모두는 물론, 주치의까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주치의의 말로는 “환자께서 갑자기 폐에 물이 차고 혈압 수치와 당 수치가 너무 많이 올라가는 동시에 저산소증 등으로 갑자기 합병증이 와서 의식을 잃으셨다”고 했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10여 일을 무의식 상태로 사경을 헤매시다가 끝내는 우리 곁을 떠나시고 말았다. 우리 가족 모두는 지극정성으로 아버지의 회복을 기원했지만, 그런 간절한 마음도 모르시고 허망하게 먼 길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영면에 가장 당황하고 슬퍼하셨던 분은 아버지께서 평생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셨던 어머니이셨다. 노환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아버지가 누워계신 중환자실을 한시도 비우지 않으셨다. 의사에게 떼까지 써가면서 “이분은 정말 많이 배우고 훌륭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가셔서는 안 된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시던 분이셨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의식이 들었을 때, 어머니 손을 꼭 잡으며 “그동안 고생 많았네”라고 하시면서 감사 인사를 나누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팔순이 되시는 날에, 나는 기념으로 멋진 구두와 양복을 맞춰드리고 싶었었다. 그리고 설날에는 가족들이 모여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고스톱도 치고, 아버지의 경륜과 인생철학이 담긴 주옥같은 말씀을 들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고 싶었었다. 그러나 이젠 희망 사항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계셨던 믿음의 자리가 크고 넓었음을 느끼게 된다. 또한, 학창 시절에 아버지가 가르쳐주셨던 ‘부자유친’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이제야 깨닫게 된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게 되자 가족들은 무엇보다 어머니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슬픔을 가슴에 묻으시고 의연하게 잘 버티시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의 강인하신 의지를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지난해에 ‘효(孝)지도사’ 과정 공부를 하면서 중국 노(魯)나라 시대 ‘노래자(老萊子)’라는 효자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구십이 되신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나도 어머니에게 응석 아닌 응석을 부리며, 홀로 되신 어머니를 잘 받들어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실행하고 있다.
아버지의 육신은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지니셨던 고귀한 정신, 맑은 영혼, 가족애와 제자애는 후손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공직의 박봉 속에 4남 1녀를 양육하시며 고단했던 이승의 땅은 이제 우리에게 맡겨 주시고 왕생극락하시기를 기원한다.
시린 바람 속에 훈훈한 입김이 귓불을 매만지고 지나간다. 아마도 아버지가 잠깐 다녀가신 듯하다.
일상의 소중함
지난해 2월 초순부터 전 세계가 바이러스 코로나19로 지구촌 사람들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전 세계 인구 중 1억 명 이상이 감염되었다. 사망자도 2백6십여만 명으로 지난 제2차 세계전쟁 시 발생한 사망자보다 규모가 크다. 특히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에서 많이 발생하였고, 중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국지적인 통제를 하는 등 엄격한 방역으로 대응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정부의 선제적 대응과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생활 속의 큰 불편과 공포 없이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한다.
지난 2월 설 명절 때, 우리 집에도 작은 소동이 있었다.
예년 평상시 같으면 어머니와 동생들 내외 조카들까지 우리 집에 와서 묵고, 소란 법석일 텐데 이번 명절에는 코로나19 전염병의 영향으로 정부의 시책에 따라 우리 직계가족끼리 모여 간소하게 조상님께 차례를 모시게 되었다.
예산에 사시는 어머니 댁에 가끔 들러 동생을 만나 서로의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지만, 명절에 못 만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차례를 지내고, 그 이튿날 큰 아들 내외와 손자와 함께 예산 집에 들러 어머니를 뵙고 세배도 드리며 산소에 가 조상님들께 성묘하러 집을 나섰다. 명절 끝이라 힘들 텐데도 아내는 밤잠을 설쳐가며 어머니께 갖다 드릴 음식을 준비하였고, 큰애기는 싫은 내색 없이 내 의견에 따라 동행해주어 무척 기분이 좋았다.
집에서 출발하여 당진 고속도로에 들어서는데 앞 좌석에 앉아 있는 큰아들 내외가 서로 주고받는 근심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대화 내용인 즉, 이번 명절에 우리 집에 올 때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큰애기 친구한테 맡기고 왔는데 그 친구가 고열이 나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간다는 걱정스런 대화였다. 순간 머릿속에 “아, 큰애기 친구가 혹시 코로나에 감염되었으면 그를 접촉한 큰아들 내외도 코로나에 감염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잖아도 오지 말라고 걱정하시던 어머니한테 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퍼뜩 들어 깜짝 놀란 나는 어머님께 즉시 전화를 드려 다음 주에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 후 예산 집으로 가지 말고 다시 대전 집으로 가자고 핸들을 돌리라고 하였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후, 큰아들 내외와 손자에게 우리 집에는 들리지 말고 너희들 집으로 곧장 가라고 이르고 나만 집으로 들어왔다.
아내가 밤잠을 설치고 바리바리 준비한 음식을 도로 가지고 나만 혼자 집에 들어오니 영문도 모르고 있던 아내가 깜짝 놀랐다. “왜 혼자서 돌아왔느냐? 점심때가 됐는데 애들은 집에 들러 점심도 안 먹고 갔느냐”며 성화다. 며느리에게 집에 들러 점심이나 먹고 가라고 전화를 한 후, 아내는 며느리에게서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아내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우리 가족도 혹시 코로나에 감염될 수 있으니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당장 마스크를 쓰고, 같이 있지도 말고, 방에서 나오지 말고 밥도 따도 먹자”고 제안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비상사태가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전염병 예방을 위한 방송 언론의 힘이 정말로 크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TV와 신문 등, 언론 매체에서 매일 매일 코로나 전염병 발생 상황을 보도하고 있으나, 그 일이 남의 일이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실제로 나한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큰애기 친구가 오후 5시에 검사를 하고, 그 결과가 내일 아침에 나온단다. 만약 큰애기 친구가 감염되었으면 그와 접촉한 큰아들 내외 등 우리 가족 모두가 검사를 받아야 하고, 검사 결과 양성으로 나오면 격리 수용하여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였다.
그 이튿날 8시경, 큰애기로부터 전화가 올 동안 마음이 긴장되었고, 불과 20여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생각을 하였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마음의 정리를 하였다. ‘태어나서 수많은 사건과 일들을 겪으면서도 잘 버티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코로나19쯤 못 이길소냐’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내는 두문불출이었다. 평소 당뇨 심장질환 등 기저질환이 있는 남편을 항상 걱정하고 사는 사람이 나의 아내이기에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를 살 수 있음에 감사하고, 맑은 공기 마시고 숨 쉬며, 신문 읽고 걷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이런 일상에 감사함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튿날 아침, 8시가 조금 지나자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큰애기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해요.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음성이래요!”
친구가 명절 음식을 많이 먹은 탓에 장에 염증이 있어 체온이 높았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 그래 다행이구나! 네가 걱정 많이 했겠구나, 고맙다! 이제 편히 쉬거라.”
불과 20여 시간으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사이 나를 되돌아보고, 일상의 모든 일에 새삼 감사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는 좋은 기회였다.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어 현재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접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올가을에는 정상적인 일상을 할 수 있길 기대해 보며, 의료진과 방역에 힘쓰고 계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나의 할아버지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일제 치하인 1907년 5월 6일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부모님 두 분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불우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셨다고 한다. 그러나 불굴의 도전정신과 근면, 성실함으로 시대를 앞서 살아가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 할아버지께서도 끼니를 이을 양식이 없어 보리죽으로 연명하셔야 했다. 그럼에도 자식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낮에는 물론, 밤에도 남의 집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친구들이 비아냥거려도 오로지 “가난을 자식에게까지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아버지를 대학 교육까지 시키신 분이다.
아버지께서는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하신 후, 전라남도 나주로 교직 발령을 받으셨다. 장손인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성실과 검소를 몸에 익히며 자랐다. 할아버지는 주로 논농사를 지으셨는데,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방과 후에 농사일을 도와드렸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어느 가을밤, 할아버지를 도와 볏짚가래를 정리할 때 굽은 허리를 펴시며 그분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10년만 더 젊었어도, 이 고생을 않고 도회지로 나가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몸은 농촌에서 사셨지만, 마음만은 더 큰 꿈을 향해 도시 생활을 동경하며 사셨던 것 같다.
여름철 농한기에는 시원한 대청마루에 앉아 긴 담뱃대를 물고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라는 시조창을 하시기도 했다. 나는 그 시조의 의미도 모르면서 장단을 맞추며 듣기를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그 시조는 희대의 명기 <황진이>가 세종대왕의 증손자 벽계수를 유혹하기 위해 지어 부른 시조라는 것을 알고 새삼 놀랐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께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학을 배우시고 풍류를 즐기는 멋진 삶을 사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가을날, 저녁 무렵의 일이 생각난다. 아내와 나는 합덕 장터에 다녀오시는 할아버지를 마중 나간 적이 있었다. 아내와 내가 반갑게 인사를 했음에도 할아버지께서는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셨다. 나는 걱정되어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세요?”라고 여쭈었더니 당신께서는 그저 미소만 지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점심을 잡수시지 않고 그 돈으로 온 식구가 같이 먹으려고 명태를 사 오신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몸보다 가족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신 분이셨다,
우리 집에서 합덕 장터까지 나가려면 10km나 되는 자갈길을 걸어야 한다. 허기진 배를 참아 가며 그 험한 길을 다녀오신 할아버지의 가족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온다.
할아버지께서는 평소, 가훈으로 ‘성실, 근면, 감사’를 강조하셨다. 이를 몸소 실천하신 할아버지께서는 87세까지 치열하고 숭고한 삶을 사시다가 1994년 1월 15일 소천하시어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다. 지금은 뵐 수 없는 곳에 계시지만, 할아버지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무한한 사랑에 감사드린다. 또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족애와 교육열로 건강한 일가를 이룬 할아버님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내 삶의 이정표로 삼으며 살고 있다.
수상소감
노복래 • 충남 예산 출생 • 한밭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 전)논산시 수도사업소장 • 전)한밭대 외래강사 • 현)동양엔지니어링(주) 부회장 |
낙엽이 허우적거리며 도시를 벗어날 때,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공직에 근무할 때 도지사, 장관, 국무총리 표창 등 각종 상을 받았지만, 이번 신인문학상 소식은 어느 때보다도 저를 기쁘게 했습니다. 문득, 초등학교 때「소」라는 수필로 상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잠들었던 감각의 부활이었습니다.
퇴직 후 논어를 공부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 늘 글을 써왔습니다. 글쓰기 과정이 능력의 한계와 소양의 부족을 절감하는 다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문우들과의 교류는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부끄럽지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맑습니다. 그동안 합평회를 통해, 저를 다듬어 주신 모든 문우님께 감사드립니다.
추천사
수필의 가치를 평가하는 여러 기준이 있지만, ‘진솔성’ 만큼 글을 빛나게 하는 것은 없다. 화려한 수사로 문장을 아름답게도 하지만, 그것은 화려함에 머문다. 감동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문장의 힘은 진솔성이다.
노복래 수필가의 작품은 바로 이 진솔성이 문장의 행간을 떠받친다. 그의 수필 소재는 주로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번에 추천하는 수필 「아버지」, 「일상의 소중함」, 「나의 할아버지」도 예외는 아니다. 가족은 개인의 장소인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 세우는, 그리고 인간을 사회로 내보내는 중심축이다. 그러기에 작가들은 사고의 기저에 자리한 기억의 언어들을 불러세워 작품을 만들곤 한다. 여기에 가족의 역사와 사회사가 담기기에 작품의 의미가 더해진다.
노복래 작가의 수필을 읽노라면 우리가 잊었던, 혹은 버렸던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여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게 된다. 앞으로 작가의 수필이 훈훈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기를 기대해 본다.
이대영(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