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탐방(‘22. 11. 15)
*南原의 廣寒樓苑 광한루원은 대한민국의 명승 제33호.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있으며, 조선 중기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여 조성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누원(樓苑)으로. 하나의 건물인 광한루의 이름을 따서 누원의 이름이 붙은 광한루원은 춘향전의 무대로 더 유명하다. 조선 제3대 태종 때 이조판서에 재직하고 있던 황희는 1418년 태종이 왕세자인 양녕대군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간하다가 진노하여서 남원으로 유배되었다. 그때 남원에는 황희의 선대가 지은 일재라는 조그만 서재가 있었는데 1419년(태종 14)에 그걸 헐고 광통루를 지은 것이 시초다. 그 뒤, 1444년(세종 26) 정인지가 전라도 순찰사로 부임하여 남원의 광한루를 살펴보고는 그 경관이 빼어남에 놀라 다시 누각을 중수하면서 설화로 전해오는 옥황상제의 월궁인 광한청허부를 본떠서 광한루라 고쳤다, 현재 남쪽에 정문을 신축하여 ‘廣寒淸虛府(광한청허부)’라는 현판을 걸어두었다. 1461년(세조 7년) 남원 부사 장의국(張義國)이 월궁을 상징하려고 근처 요천의 물을 끓이어다가 누(樓) 앞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커다란 연못을 파고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담긴 오작교를 가설하였다. 1582년(선조 15) 정철(鄭澈)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또다시 은하의 못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곳의 섬을 조성하였는데 그것이 지리산을 상징하는 방장도, 금강산을 상징하는 봉래도, 한라산을 상징하는 영주도이다. 우리나라의 4대 누각은 남원의 광한루,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개성의 부벽루를 꼽는다. 그러나 지방마다 달리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위의 네 누각 중에서 하나를 빼고 자기 지방에 누각을 넣어 4대 누각이라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 호남의 3寒樓(한루)는 남원의 廣寒樓(광한루), 전주의 寒碧堂(한벽당), 무주의 寒風樓(한풍루)이다.
남원 광한루
광한루의 오작교(烏鵲橋)하면 직녀(織女)와 견우(牽牛)의 비운 러브스토리로 유명하다. 직녀는 옥황상제의 딸이고, 견우는 소를 키우는 목동이었다. 직녀는 베도 잘 짰고, 마음씨 또한 예쁘고 고와 옥황상제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견우도 소를 키우며 성실하였기 때문에 옥황상제가 가상히 여겼다. 둘은 자라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 후, 두 사람은 하던 일을 팽개치고 마냥 놀기만 했다. 특히 견우는 직녀를 데리고 다니면서, 소를 몰아 대궐 안의 꽃밭을 짓밟아 놓기가 일쑤였다. 이에 크게 노한 옥황상제가 두 사람에게 엄한 벌을 내렸다. 곧,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는 동쪽에, 직녀는 서쪽에 각각 떨어져 살게 했다. 이토록 안타까운 처지가 되자, 두 사람은 너무나 슬퍼 마구 울었다. 두 사람이 흘린 눈물이 땅으로 떨어져 큰비가 되어 홍수를 일어났다. 그로 말미암아 땅 위에서 사는 많은 사람과 동물들이 홍수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과 동물들이 모여 의논하여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게 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해마다 칠석날이 되면, 높이 날 수 있는 까치와 까마귀가 자신들의 몸으로 은하수에 다리를 놓았다. 그 덕분에 견우와 직녀는 하루나마 즐겁게 지낼 수 있어, 다시는 울지 않게 되었다. 물론, 땅 위에서도 더 이상의 홍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직녀성(織女星)은 중국에서 비롯한 견우직녀 설화에 등장하여 한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별 이름이다. 직녀(織女)는 국제 표준 별자리인 거문고자리를 이루는 별 중에서 세 별자리 중에서 가운데 별을 직녀성 또는 직녀별로 부른다. 견우성은 견우별이라고도 하는데 서양 별자리에서 말하는 독수리자리의 가장 밝은 별을 말한다.
남원 광한루 오작교
*이도령과 성춘향 소설의 재발견 : 3백 년의 먼지 속에서 찾아낸 원작가는 남원 사람 산서 조경남 춘향전에는 한국인이 겪은 삶의 곡절과 꿈이 그려져 있기에 이 작품을 민족예술의 꽃이요, 얼굴이라 하겠다. 전 세계 10여 개국을 번역된 고전소설로 사랑받고 있지만, 그동안 춘향전의 원작가와 창작 시기를 밝히지 못한 채 문학사의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제 새천년을 시작하면서 연세 신국학의 이름으로 춘향전학의 신기원을 마련하게 됐다. 춘향전을 한국의 고전에서 아시아의 고전, 세계의 고전으로 격상시키려는 새천년 문화예술연구 사업의 하나로 출간된 필자의 『춘향 예술의 역사적 연구(연세대 출판부 펴냄)』에서는 춘향전의 원작가는 산서 조경남이고, 창작 시기는 1640년이라는 혁신적 연구 결과를 내놓게 됐다. 임진왜란 직후의 남원 부사들은 빈번히 교체됐다. 당시 남원 부사 중에 부용당 성안의 부사 등 몇몇 부사만이 제대로 임기를 채웠다. 즉, 남원 부사로 재임하면서 선정한 수령으로 평가받고, 또 승직하여 간 부사는 성안의 부사가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남원에서 4년간 재임한 후 전남 광주 목사로 승진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부사의 아들 계서 성이성은 남원에서 12세부터 16세까지의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 후 그는 출세하여 암행어사가 돼 두 차례 남원을 암행한다. 1차인 1639년 책방 도령일 때 스승인 조경남 진사와 함께 광한루에서 보내면서 춘향이와 소년 시절의 로맨스를 이야기하였고, 2차로 온 1647년에는 스승 조경남이 사망한 후였기에 조경남의 집에서 그 자제들을 만난다. 그날 밤 눈보라를 헤치고 광한루에 가서 늙은 기생 여진과 아전 강경남을 만난 후, 광한루에서 홀로 보내면서 소년 시절의 추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 추억은 스승 조경남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추억, 1차 암행어사로 왔을 때 스승 조경남과 나누었던 탐학한 관리, 사별한 스승에 대한 연모 등이었을 것이다. 이걸 보아 조경남은 1640년에 춘향전을 쓴 것으로 추증된다. 춘향전 어사출두한 대목의 ‘金樽美酒 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 라고 하는 시는 당시로는 과격한 수위의 비판을 담고 있어 그야말로 폭탄 발언의 성격을 지닌 한시다. 이 시는 그 자체로서는 과격한 내용을 지니고 있지만, 그 사건이 자리한 절묘한 위상 때문에 오히려 작품성을 높여주는 구실을 한다. 이 한시는 춘향전 미의식의 극점을 이루고 있기에 후대의 개작자가 삽입한 것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주제의 현실 비판성, 구성의 기묘함, 부패와 탐관의 의미 확산 등은 원작가의 몫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 한시는 조경남이 자신의 『속잡록』 1622년 2월 3일 기사에서 소개되었다. 광해군 15년, 명나라 장수 조 도사가 우리나라의 정치 혼란한 것을 보고 읊은 것임을 조경남은 주석에서 소개했다. 이 내용의 의미가 강력하므로 이긍익이 『연려실기술』 23권 광해난정에도 재인용하였고, 산서 조경남을 1640년에 춘향전을 창작한 대문호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경남은 춘향전의 핵심 공간인 광한루의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남원의 진사 출신 문인이다. 둘째, 조경남은 『난중잡록』, 『속잡록』을 남겼는데, 이들은 임병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에 얽힌 국내외의 사실을 57년간에 걸쳐 일기 형식의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전란사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의 제반 상황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잡록은 『조선왕조실록』의 사초로도 활용됐을 정도로 기록에서 역사적 객관성과 신빙성을 공인받았다. 셋째, 조경남의 잡록을 보면, 그는 폭넓고도 세밀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조건을 갖춘 그는 남원의 기생 춘향에 얽힌 사건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특히, 춘향 이야기가 그 이후 남원지역에서 신원설화(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원이나 한을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이 풀어 준다는 내용의 설화)로 강력하게 전승됐기에 그는 기생 춘향의 신원설화의 과정을 알고 있었다고 판단되었다. 넷째, 조경남은 이 도령 모델인 성이성과는 긴밀한 사제지간이었다. 그는 암행어사인 성이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음이 성이성의 일기에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그는 춘향전 인물 구성의 중요 인물인 이 도령 모델이 된 성이성을 가장 잘 아는 문인이었다. 다섯째, 조경남은 춘향전의 백미인 ‘금준미주’의 시에 정통한 인물로서, 이 시를 국내의 문헌에 최초로 소개하였다. 특히, 그는 이 시가 가진 주제를 광해난정을 풍자한 것으로 해석했으며, 이 기록을 광해난정의 최극점인 인조반정 직전의 일기에 담았다. 여섯째, 조경남은 상당한 문장력이 있었으며, 우국충정이 깊었던 인물이다. 그의 문장력과 인품은 그 문하에서 성장한 성이성에게 감화를 끼쳤을 수 있고, 이는 성이성이 일찍 급제하고 암행어사가 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일곱째, 조경남은 조국과 고향이 왜적에 짓밟힐 때 몸을 던져 항거한 의병장이다. 따라서 그는 누구보다 선악 포폄의 관점에서 필치를 발휘할 수 있었기에 남원에서 일어난 ‘열녀와 충신의 이야기’를 작품화하기에 적절한 문인이다.
이런 이유가 합당하다면, 이제 우리는 더는 춘향전을 ‘작가 미상’의 작품으로 버려둘 수는 없다. 조경남과 같은 탁월한 작가를 춘향전의 원작가라면, 우리는 춘향전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고, 춘향전을 세계의 고전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이 도령의 아버지 성안의는 창녕 성씨로 처가인 경북 영주로 이주하여 그곳의 입향시조가 되었고, 아들인 이 도령 성이성은 봉화 금 씨와 혼인하여 7남매를 두었고, 현재 봉화 물야면에 계서당(溪西堂)은 그의 종택이자, 성이성의 불천위로 모신 당호이다. 그러나 한 집에 불천위를 두 분 모실 수 없어 그 옆의 춘우재(春雨齋)를 지어 부친 성안의의 불천위 위패도 모셨다.
이도령과 성춘향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 남원 운봉면 전북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고려말 황산대첩의 전승을 되새기기 위해 세운 전공비로 고려 말에 양광·전라·경상도 순찰사였던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는 고려 말 황산 전투에서 1380년(우왕 6)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황산대첩비가 있다. 1376년 충남 부여의 홍산에서 최영에게 크게 패배한 왜구는 1380년 8월 금강으로 5백여 척의 배를 타고 와서 충청·전라·경상 지역을 침략하여 재물을 빼앗고 불을 지르며 사람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조정에서는 최무선, 심덕부(세조왕비의 조부) 등을 파견하여 왜구를 공격하게 하였다.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사용해 크게 승리하였지만 살아남은 왜구가 달아나 다른 무리와 합류하면서 반격을 가해 많은 고려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9월에 왜구는 남원시 운봉읍에 불을 지르고 인월리 부근에 머무르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고려군은 15세의 8척 거구인 왜구 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용맹 앞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싸울 엄두도 못 했다. 이에 조정에서 이성계를 3도 순찰사로 임명하여 왜구를 물리치도록 명하자, 이성계가 지휘하는 군대는 인월에서 왜구와 부딪치게 된다. 이성계는 왜구 장수의 용감성에 감탄하면서도 적의 예봉을 꺾기 위해 사로잡을 방법을 논의하자, 이지란 장군이 “왜구의 무리는 우리 군사 수보다 수없이 많고, 적장 또한 너무 용맹하여 사로잡기는 어려우니 활로 사살해야 합니다. 소장의 활로 적장의 투구 건을 맞추거든 장군께서는 활로 적장의 투구를 벗기십시오. 그러면 소장의 화살로 그의 목덜미를 관통시키겠습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왜장 아지발도가 화살에 맞고 쓰러지며 내뿜는 피가 근처의 바위를 뻘겋게 물들었고, 그 후, 바위를 깨면 붉은색의 바위 조각이 나온다고 하여 ‘피바위’라고 부른다. 아지발도는 원래 적장의 이름은 아니었다. 15세 정도인 적장의 이름을 모르는 고려군이 지어 부른 이름으로 아지(阿只)는 고려말로 ‘나이가 적은 어린아이’라는 뜻이고, 발도(拔都)는 몽골어로 ‘용감무쌍한’이라는 뜻이다. 그런 걸 봐서 고려의 언어는 통일 신라 때부터 발달한 한자의 음과 훈(뜻) 빌려 쓴 이두와 당시 중국을 통일한 원나라의 언어인 몽골어까지 성행하였음을 알게 하였다.
이성계는 일월 전투의 여세를 몰아 왜구의 주력부대와 황산에서 최후의 대결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 황산대첩(1380)은 고려말 왜구와 싸움에서 크게 승리한 1376년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2대 대첩이다. 황산대첩을 계기로 이후부터 왜구의 세력이 점차 쇠퇴하였고 이에 이성계는 고려의 수호신으로 떠오르면서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열열한 환호를 받으며 민심을 얻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황산대첩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에 황산대첩비를 세워 비석을 보호하도록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폭거에 의해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어 파비각(破碑閣)을 세워 깨어진 비석을 보관하고 있다.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세운 것이고, 1973년에 비석 주위의 부속 건물과 담장을 새로 조성하였다.
남원 황산대첩비지
승리한 전사를 이끌고 개성으로 회군하던 이성계는 조상의 옛 고향인 전주에 들러 오목정(梧木亭)에서 백성들과 전승 기념 연회를 베풀며 그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불렸다. 대풍가는 한 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영포의 반란을 제압한 후, 고향인 풍패(豐沛)에 들려 그곳 백성을 모아 연회를 베풀며 지어 부른 노래로 다음과 같다.
大風起兮 雲飛揚(대풍기혜 운비양) : 큰바람이 일고 구름이 높이 날아가네. 威加海內 兮歸故鄕(위가해내 혜귀고향) : 위풍은 바다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네. 安得猛士 兮守四方(안득맹사 혜수사방 ):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니 사방을 지키지 않을쏘냐.
이 광경을 지켜보던 종사관 정몽주는 이성계의 숨은 야망을 들어낸 잔치임을 알게 되자, 인근 만경대에서 국운이 쇠한 나라의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한 한시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千仞岡頭石逕橫 登臨使我不勝情(천인강두석경횡 등림사아부승정) : 천 길 산등성이 머리 돌길 돌고 돌아, 홀로 다다르니 나의 시름 이길 수 없네. 靑山隱約扶餘國 黃葉繽紛百濟城(청산은약부여국 황엽빈분백제성) : 푸른 산 뚜렷이 알지 못하니 부여국이요, 누른 잎이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네 九月高風愁客子 百年豪氣誤書生(구월고풍수객자 백년호기오서생) : 9월 소슬바람에 나그네 시름 깊고, 백 년 호탕한 기상을 서생은 그르쳤네 天涯日沒浮雲合 矯首無由望玉京(천애일몰부운합 교수무유망옥경) : 하늘가의 해는 기울고 뜬구름 모이는데, 하염없이 고개 들어 개경만 바라보네.
전주 오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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