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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1:12~14(337) 나를 충성되이 여겨 2023.3.19.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가슴을 짠하게 만드는 결혼식 하나를 보았습니다. 총알이 어디서 날라올지 모르고 하늘에서 난데 없이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치루어진 결혼식입니다.
사진을 곰곰이 보시지요. 사진에 보여지는 신랑신부의 이름은 신부 에브레니아 에메랄드와 신랑 에브헤니 스티파니의 결혼식이 전 세계인들이 이목을 집중 받았습니다. 신부가 들고 있는 부케는 꽃으로 만든 부케가 아니라 밀가루를 만드는 밀을 꺾어서 부케로 만들었습니다. 신부는 겨우 결혼식 힌드레스는 입었지만, 신발은 아름다운 신부신발이 아니라 군화입니다. 신랑은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신부를 껴안고 키스를 하면서 오른손에는 자동소총을 들고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를 등지고 군인 한 명이 자동소총을 들고 전방주시를 하면서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전쟁터 한가운데서 이루어진 결혼식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신부의 얼굴에는 기쁨과 행복이 가득 차 있습니다. 결혼서명을 한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하루가 우리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우리 부부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에게 맡길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며 사랑할 것이다”
일 년 동안 전쟁이 이어지면서 수 십만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전쟁에 동원될 것을 두려워한 젊은이들과 징집대상자들이 해외로 도망을 다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와 비교조차 하지 못하는 우크라이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대부분의 남자들이 자원 입대를 합니다. 남자만 입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입대를 하면서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루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작년 3월 전쟁을 일으킬 때 빠르면 3일, 늦어도 일주일이면 우크라이나를 정복한다고 세계 모든 군사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1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크라이나 병사들도 많이 죽었지만, 러시아는 회복 불가능한 숫자의 병력이 죽었습니다.
미국과 어깨를 겨루면서 세계 2위 군사라고 말하는 러시아가 왜 이리 졸전을 벌이고 참패를 당하는 것일까요? 그 원인을 두고 한결 같이 하는 말이 ‘무기는 세계 최고이지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정신력은 꼴지’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해외로 도망쳐 버립니다. 군인의 숫자가 모자라자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동원해서 군대를 만들어 최전선으로 보내는 실정입니다. 이런 죄수들이 나라에 대해 충성하겠다는 다짐이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설교 초두에 보여 드렸던 결혼식의 신랑신부역시 우크라이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나라를 지키고 충성하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있었기에 최전선 전투에 나선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결혼을 앞 둔 커플에게 주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두 부부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두 분은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이 하나님을 멀리하면 두 분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충성과 사랑은 다른 단어이지만 그 의미는 같습니다. 다가서면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만 뒤로 물러나면 금방 멀어지게 됩니다”
참 의미심장한 내용이지요. 부부가 서로 가까이할 때는 사랑이 차고 넘치는 때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합니다. 밥을 먹어도 가까이 다가가고 대화를 해도 가까이 다가갑니다. 서로 사랑하는 젊은 연인들 보십시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흉보는 것은 관심도 없습니다. 자기들이 서로 좋아하니 꼭 껴안고 난리부루스를 칩니다.
그런데 서로 미워하면 어떻게 되나요? 슬슬 간격이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한여름에도 딱 달라붙어 있던 사이인데 그 사이에 공간이 점점 늘어납니다. 문자나 대화도 줄어들고, 서로 얼굴을 보는 시간도 줄어들고, 그러다가 남남이 되어 버립니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성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려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가까이 합니다. 그래서 젊은 청년들이 군대에 가서 모진 훈련을 받고 군 생활을 합니다. 유사시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들과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먼저 징집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일선에 배치가 됩니다. 이것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충성의 모습입니다.
병역기피를 하기 위해 신체를 훼손하는 사람들, 해외로 도망가는 사람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나라사랑과 충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부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면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표현합니다. 힘들어도 어려울 때도, 좋을 때도 기쁠 때로 항상 함께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도 단어만 다를 뿐이지 동일하게 한 가지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우리 덕민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는 생활을 이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예수를 가까이하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와 멀어지면 모든 좋은 것이 떠나간다’는 사실입니다. 돈 더 벌겠다고 교회 멀리 한 분들치고 돈 많이 버신 분들 보셨나요? 아마도 여러분들은 들어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5살에 교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니 꼬박 60년을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철이 들고 사리판단을 한 뒤로, 하나님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하고 사업하고 돈 번다고 세상 나간 분들 중에 성공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돈 만이 아닙니다. 더 좋은 지역에서 자녀 교육 시키겠다고 교회를 멀리하는 분들도 결국은 신앙과 자녀 두 가지 모두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다들 자기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합리화합니다. ‘돈 많이 벌어서 주를 위해 더 크게 봉사하겠다. 더 좋은 환경과 여건 속에 있으면 나의 신앙이 더 빨리 크게 자랄 것이다’이렇게 자기합리화를 시키지만, 결국은 내가 편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교회를 이용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므로 어떤 것 보다 주님을 더 가까이하고 교회를 더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돈을 좇아가면 돈도 도망가고 신앙도 달아나 버리지만, 내가 주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물질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주님과 멀어지면 모든 돈이 나를 피합니다. 물질이 모두 다 나를 떠납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더라도, 그 기회가 막혀 버립니다. 도리어 나에게 고통을 줍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면 모든 사람이 나를 가까이 하고, 나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데, 주님과 멀어지면 사랑하는 아내도, 부모도, 자녀도 나와 멀어집니다.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과 가까워지고 교회와 가까워지면 됩니다.
부부사이에도 마음이 멀어지면 남편과 아내를 위해 사용되어지는 작은 돈 하나도 아까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멀어지니 교회도 멀어지고 마음이 멀어지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더하기 빼기를 배운 아이가 교회에 와서 십자가를 보고 “엄마! 저 위에 덧셈(+)이 있네.”라고 말합니다. 덧셈이 무엇이에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더하기 모양’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기독교 신앙의 진리 하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덧셈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빼고 삭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덧셈의 종교입니다.
주님에게 나오면 사랑이, 기쁨이, 은혜가, 축복이, 영광이, 거룩함이 더 해집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말씀을 중심으로’생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해 줍니다. 1+1로 더할 뿐 만 아니라 곱하기도 합니다. 곱셈의 표기모양(X)을 보세요. 곱셈도 덧셈에서 나왔습니다. 곱셈의 기호는 덧셈의 방향만 틀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면 모두가 폭발적으로 더 해지고, 곱해진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본문은 사도바울이 아들과도 같은 디모데를 향한 부탁과 신앙고백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나이 드신 부모님이나 어르신들이 하는 모든 말이 다 잔소리로 들렸습니다. 자식 생각하고 자식 잘 되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지만, 잔소리라고 생각해서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대충 건성건성으로 듣는 흉내만 내다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 버립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피로 이어진 부자지간이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신앙 안에서 믿음의 아들로 생각하며 충고를 하였고, 늙은 바울의 이런 말에 대해 디모데는 귀를 열어 경청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바울과 디모데의 아름다운 관계를 설명해 주는 내용이 됩니다.
12절 보세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한다고 먼저 말합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는 주 예수께서 나를 능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셨다는 말은 ‘나에게 힘을 주었다(who has given me strength)’는 말입니다. 주 예수께서 바울에게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갈 힘을 주셨습니다. 유대주의자들과 복음을 반대하는 수많은 자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고 모진 박해를 가했지만, 바울은 물러서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바울을 능하게 하였고, 바울에게 힘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살아 있는 인생을 통해 깨달은 바울이었기에 감사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 예수님에게 그냥 감사한다는 것을 끝나 버린 바울의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은 감사한다는 말을 이어서 예수께서 나를 충성되게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의 ‘충성 되이 여겨’라는 원어(피스톤 메 헤게사토)의 의미는 “믿을 만한 존재로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해도 다 같은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랑은 목숨을 던지는 사랑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랑은 상대방을 기만하고 이용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본문의 내용처럼 ‘하나님이 믿을 만한 존재’입니다. 반대로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충성하는 모양새만 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은 하나님이 믿을만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충성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인가요? 내가 하나님의 직분을 맡고 사명을 맡은 자로서 어떠한 행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그저 감사해야합니다.
14절 상반절을 보면,“우리 주의 은혜”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우리 주의 은혜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13절에 기록된 바울의 부끄러운 과거 모습 때문입니다.
13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과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였던 때에 복음의 반대자로, 그리고 핍박자로서 황동하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말입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을 건져 주셔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불러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충고해 줄 말이 없습니다. 자신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법을 어긴 죄인이라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 잘 났다고 교만해서 안 됩니다. 내가 모든 것을 충분하게 콘트롤 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성령의 이끄심을 거부해서 안 됩니다. 내 판단과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을 부정하고 교회를 흔드는 모습도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묵묵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내가 힘들어도, 내가 어렵고 눈물이 나고 고달픈 것이 있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직분을 묵묵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아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흔드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모쪼록 바랍니다.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이 주신 은혜를 깨닫고, 나처럼 부족하고 못난 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큰 복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에게 더 감사하면서 충성으로 하나님에게 다가 서야 합니다. 내가 얼굴을 들고 서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가 은혜안에 있는지만 살펴 봅시다.
2. 믿음과 사랑의 풍성함으로 드러내는 충성입니다.
14절,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이 넘치도록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믿음이 든든하고 그리고 사랑이 넘치도록 풍성한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식당에 가게 되면 조그만 그릇에 음식 몇 점 올라오는 것 좋아하지 않습니다. 큰 대접에 한가득 풍성하게 음식이 담겨있는 식당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좋아하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믿음과 사랑의 그릇에 몇 개만 담아서 하나님에게 드린다고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믿음과 사랑이 차고 넘치도록 풍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을 하나님에게 드리면서 세상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앞날을 놓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준비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장만해 주시는 은혜가 더 풍성하고 완벽하다는 점입니다. 고로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며 하나님과 몸 된 교회에 충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다 이끌어 주신다는 점입니다.
레이 스테드먼 (Ray C. Stedman 1917-1992)의 ‘아버지와의 친밀한 대화, 내면의 기도(Talking with My Father)’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이 지긋한 선교사 부부가 은퇴를 하고 아프리카에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노후를 살아갈 연금도 없고, 미국에 있는 재산도 없으니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뉴욕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들이 탄 배에 아프리카에서 사냥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루즈벨트 대통령 일행이 있었습니다. 배가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 뉴욕 항구로 들어서자 선착장에서 울려 나오는 군악대 연주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하여 군중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백발의 선교사가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무엇인가 잘못되었소. 대통령은 아프리카에서 단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데도 사람들이 환영하고 있는데, 아프리카에서 평생토록 하나님을 섬기며 삶을 바친 우리를 환영하러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네요. 이는 공평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정말로 불공평한 분이라는 생각이 지금 들어요”
그날 밤 마음이 크게 아픈 늙은 선교사가 하나님에게 신세한탄을 하면서 기도합니다. “한평생 주를 위해 헌신했는데 제게 남아 있는 것은 아픈 몸과 늙은 나이 뿐이네요”그때 마음에 음성이 들리기를 ‘실망하지 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Don't be disappointed. It's not over yet)’말 뜻을 이해하시겠지요?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상급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눈 앞에 있는 현실만 보지 마십시오. 앞에 있는 현실만 보면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도하심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그저 묵묵하게 믿음으로 충성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다 이끌어 주시고 채워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내가 보는 하나를 잡으려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전부를 놓쳐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