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3
시대와 공간을 결정하니 서사 구조와 캐릭터 설정이 중요했다. 인신공희와 남성 영웅의 괴물퇴치 그리고 여성 구원 서사를 완전히 뒤집어야 했다. 강인하고 야무진 해녀들이 적역이었다. 우선 탐라국의 창조여신인 설문대할망을 호출하고, 세 딸 중 막내인 호백이를 중심으로 대상군인 어멍 고만덕과 심방(무당), 잠녀 삼춘들이 연대해서 이무기를 용으로 승천시키는 서사를 창조했다. 가장 어려운 것이 몇 명의 주인공을 내세우고, 어떤 이름을 부여할 것인지, 그리고 이무기를 악의 상징 그대로 둘 것인가 문제에 봉착했다.
맨 먼저 구상한 주인공 모델은 엘리노어 아너슨의 “문법학자의 다섯 딸”이다. 세계 여성작가 페미니즘 SF 걸작선 <야자나무 도적> 중 한 편으로 오디오북으로 만났다. 남편과 사별한 문법학자 엄마를 둔 다섯 딸이 주인공이다. 명사 자루, 동사 자루, 형용사 자루, 부사 자루, 전치사 자루를 메고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모험담이다. 소설도 거의 안 읽던 내가 관심 1도 없던 SF소설에 빠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런 게 SF소설이라면 얼마든지 읽겠어! 유쾌한 동화잖아. 이런 동화를 읽으며 자랐다면, 완전히 다른 어른이 되었겠지. 이건 정말 그림책으로 만들어야 해. 더 많은 페미니즘 동화와 옛이야기들이 출판되어야만 해.” 라고 다짐한 계기였다.
막상 캐릭터 성격을 설정하려니 다섯 딸은 너무 버거웠다. 참고하느라 아르미안의 네 딸들도 읽어봤지만 안 되겠다 싶었다. 편하게 우리 자매가 모델인 세 딸로 압축했다. 재기발랄하고 호기심 많은 막내 호백이, 똑 부러지고 야무진 둘째 담백, 순하지만 위기에 강한 첫째 강백을 창조했다. 이름을 결정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강인하고 야무진 해녀에게 걸 맞는 이름을 고민하다가 강인한 기상, 기백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씩씩하고 굳센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의 기백의 ‘백’을 기본으로 강백, 담백, 호백이라 붙였다.
이무기는 원래 「백일홍설화」에서처럼 악의 대명사로, 세 딸이 힘을 합쳐 물리치는 모험담으로 그리려 했다. “용과 이무기는 둘 다 상상의 동물인데, 신성시되는 용과 달리 인간을 해치는 동물로 이무기는 배척되는 게 인간 관점이 아닐까요? 이무기를 좀 다르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라는 제안을 계기로 다시 고민했다.
우연히 제주도의 무속에서 구전되던 본풀이 중 하나인 <원천강본풀이>의 오날이(오늘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무기 사연을 발견하고 꽂혔다. 본풀이는 본(本)을 푼다는 뜻으로,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제상 앞에 앉아서 노래하는 신의 내력담, 신화를 뜻한다. 즉 원천강신화에서 오날이는 여의주를 세 개나 가졌지만, 삼천 년 동안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에게 욕심이 과하다는 처방을 내린다. 여의주 두 개를 처음 만난 사람에게 주고 한 개만 물면 용이 될 거라고 말하자 즉시 여의주를 오날이에게 주고 한 개만 물더니 이무기는 용이 되어 승천한다.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여의주 세 개를 가졌지만 용이 못 된 이무기가 탄생하고, 통달함을 마친다는 종달리까지 찾아온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돌고래 설정은 해녀의 역사와 삶을 검색하다 돌고래와 제주 해녀들이 공존하는 바다를 보며 감동받고, 집중 탐구했다. 돌고래쇼를 반대하는 영상들을 보면서 돌고래와 공존하는 생태주의자 해녀의 삶이 고귀하게 다가왔다. 돌고래 이름은 파트너의 제안을 수용해서 제주의 유명한 오름 이름인 다랑쉬, 새별, 백약이, 거문, 따라비를 썼다. 돌고래가 이동할 때는 최소 다섯 마리가 움직인다는 글을 읽고 다랑쉬 친구 돌고래들도 용궁으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