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목이 ‘다 埋沒’했다는 것인데 埋는 묻는다, 沒은 빠진다는 뜻. 그 앞에 ‘다’를 붙여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다 없어졌다는 뜻을 강조한다. ‘松竹만’에서 ‘만’이라는 말이 더욱 도드라지게 되어 있다. 草木은 푸른 빛을 잃었고 오로지 松竹만 푸르다. ‘프르럿다’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일로 말하는 것. ‘섯거 친 제’에서도 과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푸르렀다는 것. 언제? 초목이 다 매몰한 때에. 초목이 함께 푸를 때에는 혼자서 푸르다고 할 수 없다. 風霜이 섞어 불어닥칠 때는 혹한의 겨울을 가리킨다. 초목이 다 매몰할 때인데 초목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松竹이 혼자서 푸른 것은 이례적이다. 무슨 일로 혼자 푸르냐고 묻는다. ‘혼자 푸른’이라고 중동무이되어 버렸다.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짧게 묻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짧게 묻는 것은, 예를 들어 ‘혼자 푸르십니까’라고 묻는 것과 반대되는 표현이다. 너 잘난 체하느라고 남들은 다 매몰되었는데 혼자서 푸른 것이 아니냐고 빈정대듯이 묻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일단 ‘두어라’이다. 빈정대는 말투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그것이 ‘내 性’이라고 말한다. 性은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을 대번에 떠올리게 한다. 하늘이 명한 바 그것을 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풍상이 섯거친 때에도 푸른 것, 그것은 다름아니라 하늘이 나에게 준 性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잘난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 변절하고 나만 절개를 지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나에게 준 性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사실은 가장 큰 자부심이다. 초목은 초목의 性이 있고 송죽은 송죽의 性이 있다. 그 性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