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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조선신보》 기자 webmaster@minjog21.com">webmaster@minjog21.com
전남 강진이 고향인 북의 대표적 시인 오영재. 김일성상계관인이자 노력영웅인 그는 6·25 당시 의용군으로 참전 후 북에 남았다. 2000년 8월 첫 이산가족 상봉단으로 서울 땅을 밟기도 했던 그를 《조선신보》 평양특파원이 만났다. 정전 50년을 맞은 북의 참전 시인 오영재의 절절한 ‘전쟁과 평화론’.
김지영 / 《조선신보》 평양특파원
2003년은 정전협정이 체결되여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북의 저명한 시인 오영재 씨는 올해
들어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한 시작품을 여러 편 썼다.
“전쟁참병으로서의 사명감입니다.”
시인을 만나 작품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작품에 반영된 전쟁체험에 대하여 말하는 로시인도 흘러간 과거를 회고하면서 오늘의 조선반도
정세를 론하고 있었다.
한 여병사에 대한 추억
소년의 때를 채 벗지 못한
열여섯 어린 시절에 나는
남해바다가에서
총을 메고
어려운 싸움길에 들어 섰던 몸
진공과 적후의 준엄한 불비속에서
언제 한번 제 얼굴
비쳐 본적 있었던가
그런 짬인들 없었고
나에겐 또한 한쪼각 거울도 없었으니
〈작별〉이란 작품의 한 구절이다. 오영재 씨의 고향은 전라남도 강진군. 어린 시절에는 마을의 뒤동산에 자주 올라 제주도 한나산을 보았다.
인민군이 진격해 왔을 때는 중학생이였다. 의용군으로 참전, 락동강 계선에서 전투를 벌렸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북녘 땅으로 일시적으로
후퇴, 1950년 12월 평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며칠간 휴식을 얻게 되였다. 그때에야 그는 폭풍에 반나마 깨여 진 쪽거울에 자기의 얼굴을
처음 비춰 보았다.
솜털이 보시시했던
내 얼굴은 어디 가고
웬 낯 선 청년이 넌 누구냔듯
의문을
가득 품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돋아 났는가
거밋거밋한 수염들
없어야 할것이 생겨 난듯
그
수염을 허거프게 쓸어 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나니
아 이젠 가버렸구나 영영
나의 소년시절이
“전쟁터에서는 자기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날을 살아서 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의 전투가 치르어지면 동지가 희생되고
피를 보게 되고. 내가 래일이면 이런 희생을 당하지 않을지. 적의 탄알이 사람을 가려서 맞추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오영재 씨는 전투에 참가하여 힘들었던 기억은 없다고 한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고통은 가장 큰 문제가 아니였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이외에 더 첨예한 문제가 있습니까. 물론 행군을 하면 피곤하고 상처를 입으면 아픈 것도 있어요. 그러나 막상 전투에 들어가서 고지를 오르 내리면 힘이 든다라기 보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나는 죽은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법입니다.”
병영의 ‘꼬마시인’
지난 2000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북측 이산가족의 신분으로 서울을 방문한 오영재 시인이 호텔에서 가족들과 상봉한 후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을
영정 앞에서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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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격이 멎자 총탄을 쏘아대며 그에게로 향해 오는 검은 물체들이 있었다. ‘무섭다.’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면 그는 이미 죽은 몸이다. 소대장의 사격 구령소리가 울리자 그는 달려드는 검은 물체를 조성 우에 놓고 방아쇠를 당겼다.
“내가 작품에 썼던 것처럼 그것은 어린 시절 패를 갈라 벌리는 전쟁유희도 아니고 무대에서 쓰러진 배우가 막이 닫히면 털고 일어 나는 그런 연극도 영화도 아니였단 말입니다. 적이 나를 죽이려 달려 들기에 내가 먼저 적을 쏜다. 죽으면 지고 살면 이기는 판가리 결전의 소용돌이. 바로 그것이 전쟁이였습니다.”
죽음과 삶이 엉켜서 딩구는 전쟁터에서 그는 수많은 희생을 목격하였다. 〈녀병사들〉은 희생된 한 녀병사에 대한 그의 추억을 담은 작품이다.
격전이 벌어 진 고지우
부상병을 응급처치하던
위생병처녀
적탄이 그의 가슴을
뚫었다
다섯 번째로 적들을 물리친 고지우에
그는 자는듯이 누워 있었고
우리는 공병삽으로 땅을 팠다
전호에서
전호로
제비처럼 날아 다니며
부상병들을 찾던 처녀
서울의 숙명고녀를 다니다 나왔다는
말씨도 상냥하고 부드럽던
처녀
병사들 누구 하나 말이 없었고
피발이 선 눈들은 묻고 있었다
누가 죽였느냐
누가
죽였느냐
오영재 시인은 병사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리상으로 삼은 직업은 없었다고 한다.
“평범한 날에는 감정변화가 별로 없어도 전쟁시기는 분노와 슬픔, 눈물과 증오, 그러한 감정이 교차하는 나날입니다. 무엇인가 웨치고 싶고 무엇인가 호소하고 싶은 감정이 자꾸만 치밀어 올라 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당시는 작가가 되자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정열이 북받치는대로 글을 적어 나갔다. 부대에서는 나이가 어린 그를 ‘꼬마시인’이라고 불렀다.
“전쟁시기 시를 쓰는 병사들이 많았어요. 정신적으로 앙양되니까 평범한 젊은이들이 시를 쓰고 시 랑송도 했어요. 그게 아주 큰 힘이 되였습니다. 어려운 행군길에서 걸음을 떼지 못할 때는 병사들이 시를 랑송하면서 일어섰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후날 시인이 될 결심을 가다듬게 된 것 같습니다. 작품으로 인민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작품으로 그들을 고무하는 역할을 놀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부추긴 게 누구냐”
정전에 의하여 총포탄 소리가 멈춘 이후도 오영재 씨는 군사복무를 계속하였다. 그는 부대에서 자체로 작가수업을 하였다. 시집과 소설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자기가 쓴 작품을 《인민군신문》이나 《인민전사》와 같은 잡지에 투고하였다.
1957년, 22살 나이에 제대되였을 때는 확고하게 작가의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는 처음에 건설현장에 배치되여 로동을 하였다.
“전후복구건설시기였으니까요. 내가 1950년 12월에 평양에서 본 광경이 생생합니다. 나는 처음 보는 평양이였는데 도시의 폭격피해란 말이 아니였습니다. 어디를 가나 재더미요, 남은 게 오늘의 제1백화점 자리에 일제시기에 세운 건물 하나뿐이였습니다.”
수도의 주택건설에 종사한 후 오영재 씨는 조선작가동맹 직속의 작가학원에서 2년간 배웠다. 학원을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기자활동을 하다가 1965년부터 전문작가로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의 칭호를 지닌 유명작가로 성장하였다.
병사시절에도 전쟁에 대한 시 작품을 썼지만 “당시의 작품은 너무 어린 것이였다”고 본인은 평가한다. 정전협정체결 50주년을 맞으며 그는 전쟁 로병의 한 사람으로서 작품을 썼다. 작품은 《조선문학》 2003년 4월호에 실렸다.
오늘의 시점에서, 전문작가의 관점에서 그 전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로시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3년간의 전쟁은 동족상쟁이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미국과 맞서 싸웠지만 적지 않는 전투력량이 남측의 군대였습니다. 조국이 광복되여 5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당시는 우리 민족의 각성 정도가 높지 못했고 조그마한 차이점을 문제삼아 서로 다투는 우를 범했지요. 전쟁 시기는 남측 군대를 직접 대상하면서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인다는 관계로 적대의식을 가졌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다른 결론이 나와요.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을 부추긴 게 누구냐는 거지요.”
정전 50주년을 맞으며 창작한 작품에서 로시인은 희생된 한 녀병사를 땅속에 묻은 그날을 회고하였다. 병사들은 말이 없었지만 피발이 선 눈물은 묻고 있었다고 그는 썼다.
“누가 죽였느냐”
작품에는 병사들의 물음에 대답을 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그러나 로시인이 제시하려던 대답은 총을 겨누고 싸운 남측의 동족이 아니였다.
서울에서 얻은 확신
오영재 시인이 2000년 이산가족 상봉 당시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북에서 만든 부모님 영정 돌사진 앞에 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로 받은 술잔에 술을 따라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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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치할 수 있다면 과거를 백지화하여야 한다. 6·15공동선언이 그 전제를 마련했다는 것이 오영재 씨의 신조이다. 우리 민족끼리, 그
리념대로 하면 평화와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 오영재 씨의 경우 그것은 단순한 정치술어가 아니라 실체험에 기초한 말이다.
그는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두 달 후, 제1차
흩어진 가족, 친척 교환방문단의 한 성원으로 서울을 방문, 친형제들과 반세기만의 상봉을 이루었다.
고향을 떠난 그때로부터 오영재 씨는
부모들과 두고 온 여섯 형제자매들의 생사여부조차 알 길 없이 괴로운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였다. 그런데 10여 년전에 해외에 사는 친척을
통해 뜻밖에도 남에 있는 혈육들의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의 편지도 받아 보았다. 어머니는 편지에 네가 북에서 살아 있고 시인이 되였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너를 만날 때까지 나는 죽지 않고 너를 기다리겠다고 적어 보내 왔었다.
그러나 세월은 무정했다. 1995년 4월 친척이 보내온 편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전했다.
2000년 8월, 서울을 방문한 오영재 씨는 반세기 만에 만나게 된 형제들과 얼싸안고 왜 어머니는 이 자리에 없는가고 눈물을 터뜨렸다. 곁에 있던 삼촌이 어머니는 안 계셔도 형제들이 이렇게 다 살아 있지 않는가고 오영재 씨를 달래여 줄 때 그는 말했다. 수백개의 별을 다 모은들 어떻게 해를 대신할 수 있는가고.
“나는 서울 쉐라톤 호텔 앞마당에서 형제들과 다시 헤여질 때 말했습니다. 눈물을 보이지 말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것이라고. 나는 서울에서 우리 민족이 화해하고 하나가 될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런 변화를 많이 느꼈어요. 형제들은 물론이고 나를 취재하러 온 남측 기자들도 모두 전후 세대인데 월북한 나에 대하여 그 어떤 적대의식을 가지고 대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북에서 내려 온 가족들을 태운 뻐스가 서울 시내를 달릴 때면 시민들이 손을 흔들어 환영의 뜻을 표시해주었다. 오영재 씨는 한 피줄기를 확인한 감격의 정에 휩싸이면서 50년 전의 그 광경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희생된 녀병사에 대하여 쓴 작품에 그 내용이 있다. 시인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내 흩어 진 가족친척방문단으로
서울에 가서
뻐스에 몸을 싣고 거리를 달릴 때
문득 그 처녀의 얼굴이 떠올랐거니
어디냐
그가 어린 시절 뛰놀던 그 골목은
녀학생교복을 입고
동무들과
천진하게 웃으며 걷던 그 길은
그렇게 부드럽고 곱던
아 50여 년전 녀병사
전쟁은
그를 어디에 묻히게
하였는가
우리가 반전평화문학 하지 못하는 이유
전쟁을 겪어본 로시인은 또다시 이 땅에 전쟁의 참화가 들씌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가 정전 50주년을 맞으며 작품을 쓰게 된 동기이다. 〈나는 평화를 사랑한다〉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얼마나 많은 생명을
전쟁은 앗아갔던가
얼마나 많은 집을 불 태우고
아름다운 이 강토를 파헤쳐 놓았던가
50여년 세월이 흘러
눈에 보이는 그 흔적은 지워 졌다 해도
사람들 가슴에 남은 보이지 않은 그 상처는
그
무엇으로 지울수 있을것인가
작품이 이채를 띠는 것은 평화를 주제로 삼으면서 전쟁에 대한 각오를 동시에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바라지 않노라
이 땅에 또다시
전쟁의 참화가 들씌워 지는것을
나는 평화를
사랑한다
허나 구걸하지는 않노라
평화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작품의 사상은 제3자들에게는 선뜻 리해되지 않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북의
핵 억제력 주장에 대한 비난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들의 의문에 대한 로시인의 해명은 이렇다.
“대체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나라 작가들이 반전문학이라 불리우는 작품을 썼는데 우리는 그들과 놓여 있는 환경이 다릅니다. 우리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일시 중단됐을 뿐입니다. 우리의 전후문학이 반전문학이 될수 없는 것은 만약 정전상태가 깨진다면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지만 평화가 실현되자면 전쟁의 근원이 제거되여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마지막 결판을 내야 되겠다는 립장입니다.”
북에서는 유럽이나 구쏘련에서 있었던 전쟁 그 자체를 반대하는 문학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전쟁이 고통과 불행을 가져왔다는 인식에는 공감하지만 덮어놓고 전쟁을 반대한다는 립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전쟁을 취급한 소설이나 시에서 평화지향적인 것을 별로 장려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우리를 고립, 압살하기 위하여 갖은 책동을 벌리는데 우리가 평화란 말을 다른 나라가 쓰는 식대로 쓰지 못하지 않습니까. 내 생각은 그렇습니다. 덮어놓고 평화, 그건 바라지 않는다. 공고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우리는 바란다. 이건 오늘의 정세 속에서 우리 인민들이 간직하는 감정의 표출입니다.”
워싱턴에 조선대사관 서는 날
6·25 참전세대인 오영재 시인의 평화관은
구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6자회담을 비롯한 한반도 정세의 본질이 “조미대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하는 문제라고
진단한다. 사진은 지난 8월 29일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마지막 날 열린 참가국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접견장으로 향하는 북측
대표인 김영일 외무성 부상(왼쪽에서 두 번째).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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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 가는 우리 인민들의 사상의식구조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같을 수 없지요. 나는 중국에도 쏘련에도 가보았는데 아주 평화로운 기분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인민들은 준전시상태, 언제든 전쟁에 림할 수 있는 그런 비상사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북측 인민들에게 있어서 오늘의 조미 핵대결은 조선전쟁 이래의 대결구도가 격화되여 산생된 하나의 극한점이다.
“우리 인민들도 힘듭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안고 있는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다는 리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50년간이나 긴장상태를 유지한다는 게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고통은 하루 빨리 끝장내야 합니다.”
오영재 씨도 북측 인민들이 다 그러하듯이 대화를 통한 핵문제의 해결에 기대를 걸고 있다. 6자회담의 추이와 유관국들의 움직임에도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구걸하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대화 역시 덮어놓고 대화를 하여야 한다는 립장은 아닌 것 같다. 조미 대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가 어떤가가 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평화에 대하여 말하지만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여 있는 오늘의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을 왜 못합니까.”
북의 인민들은 50년간 지속되여 온 ‘총포성 없는 전쟁’의 종결을 바라고 있다. 전쟁의 위험을 느끼며 사는 긴장감에서의 해방이다. 너희들 체제를 인정해 줄 수 있다는 구두 약속이 아니라 ‘검증가능하며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방법’으로 미국의 적대시정책 포기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북측 인민들에게 있어서의 최대의 초점이다.
로시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호실의 창문 밖에서는 륜전기계의 동음이 울리고 있었다. 평양에서는 작년부터 시내 주요거리의 대대적인 보수, 개건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전후복구건설시기에 세워진 건물들을 50년 만에 새로 단장하고 있는 것이다. ‘먼 후날에도 손색이 없이’. 공사장에는 그런 글발이 새겨진 구호판이 걸려있다.
변모되는 수도의 모습은 북이 긴장과 대결을 더는 바라지 않는다는 확고한 증거가 아닌가 싶다. 재더미가 된 평양을 기억하는 로작가도 기계의 동음을 들으니 전후복구건설시기 땀 흘린 나날이 생각난다고 하였다.
“이제는 력사에 매듭을 지울 때가 되였습니다.”
흘러간 50년이 되풀이되여서는 안된다. 바로 그것이 북측 인민들의 한결같은 마음이라고 한다.
로작가는 ‘핵대결전’의 결말이 가져다 주는 앞날을 이렇게 내다보았다.
“조미국교가 수립되면 평양에 미국대사관, 워싱톤에 조선대사관이 일떠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결의 청산, 자주권의 고수. 그것이 공고하고
완전한 평화, 갈라진 민족이 하나되는 길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2003년 11월호]
첫댓글 에고 부러워라. 이렇게 말만 하면 척척 해결을 해주시니.
부러울 일이 또 있죠. 냉장고 님도 부탁만 하면 알아서 척척 해결을 해주시니~ ㅋㄷㅋㄷ 메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