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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군(天安郡)
동쪽으로 목천현(木川縣)과의 경계까지 13리, 남쪽으로 공주(公州)와의 경계까지 48리, 전의현(全義縣)과의 경계까지 33리, 서쪽으로 온양군(溫陽郡)과의 경계까지 11리, 아산현(牙山縣)과의 경계(境界)까지 16리, 북쪽으로 직산현(稷山縣)과의 경계까지 20리, 평택현(平澤縣)과의 경계까지 6리, 서울과의 거리가 2백 1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동서도솔(東西兠率)의 땅이었다. 고려 태조 13년에 동ㆍ서의 도솔을 합쳐서 천안부(天安府)로 하고 도독(都督)을 두었다. 이첨(李詹)의 문집을 살펴보니, “왕씨의 시조가 예방(倪方)의 말을 듣고 탕정(湯井)ㆍ대목(大木)ㆍ사산(蛇山)의 땅을 나누어서 천안부를 설치하였다.”고 했는데 옳은 듯하다. 성종 때에 환주도단련사(歡州都團鍊使)로 개칭하였고, 목종(穆宗) 때에 폐지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다시 천안이라 일컫고 지부사(知府事)를 삼았으며, 고종 43년에 몽고의 군사를 피하여 선장도(仙藏島)로 들어갔다가 뒤에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왔다. 충선왕(忠宣王) 때에 영주(寧州)로 개칭하였고, 공민왕 때에 다시 천안부로 하였다. 본조(本朝)에 와서는 태종 13년에 영산군(寧山郡)으로 고쳤다가 1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도솔(兜率)ㆍ환주(歡州)ㆍ임환(任歡)ㆍ영주(寧州)ㆍ영산(寧山)
【성씨】 본군 신(申)ㆍ장(張)ㆍ전(全)ㆍ하(河)ㆍ심(沈)ㆍ노(盧)ㆍ경(敬)ㆍ전(田) 모두 촌성(村姓)이다. 왕(王)ㆍ맹(孟) 모두 속성(續姓)이다. 풍세(豐歲) 방(方)ㆍ서(徐)ㆍ경(敬)ㆍ화(花)ㆍ하(河) 돈의(頓義) 이(李) 모산(毛山) 박(朴)ㆍ이(李)ㆍ현(玄)ㆍ김(金) 신종(新宗) 방(方) 덕흥(德興) 상(尙)
【형승】 삼국(三國)의 중심이다 《 고려사》 세속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술사인 예방(倪方)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삼국의 중심으로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3천 호의 고을을 설치하여 그곳에서 군사를 조련하게 되면 백제가 저절로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므로, 태조가 산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 비로소 천안부를 설치하였다. 한 방면의 요충지대이다. 강호문(康好文)의 《대소원기(大召院記)》에 있다.
【산천】 왕자산(王字山) 고을 동북쪽 1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곳에 머물러 두었을 때에 윤계방(尹繼芳)이 이곳을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라고 아뢰어 보루를 쌓고 군사를 조련하며, 왕자성(王字城)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왕자는 바로 그 산의 모양이다. 화산(華山) 풍세현(豐歲縣)에 있으며, 고을에서 43리의 거리이다. 유려왕산(留麗王山) 고을 동쪽 11리 목천현(木川縣)의 경계에 있다. 수조산(水潮山) 고을 동남쪽 2리에 있다. 쌍령고개[雙嶺峴] 고을 남쪽 40리이며, 公州와의 경계에 있다. 차현(車峴)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공주 조에 있다. 대천(大川) 풍세현 북쪽에 있으며, 고을과의 거리는 9리이다.
【토산】 사기그릇[磁器]ㆍ오지그릇[陶器]ㆍ숭어[秀魚]ㆍ조기[石首魚]ㆍ지황(地黃)ㆍ산무애뱀[白花蛇]ㆍ준치[眞魚]ㆍ게[蟹].
【봉수】 대학산(大鶴山) 봉수 고을 남쪽 18리에 있다. 남으로는 공주의 쌍령(雙嶺)에 호응하고, 북으로는 아산현(牙山縣)의 연암산(燕巖山)에 호응한다.
【누정】 선화루(宣化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돌아오는 길에 잠깐 옛 영주(寧州) 땅에 쉬니, 객관 동쪽 모퉁이에 작은 누각이 있네. 구름 밖의 푸른 멧부리 상투를 드러낸 듯, 나무 사이의 서늘한 바람 가을을 알리네. 우연히 대자리에 누워 돌아가는 꿈을 꾸니, 이리저리 하염없이 나그네 되었네, 어버이 그리운 마음에 누각에 올랐건만 이 근심 가실 길이 없네.” 하였다.
★ 삼탄집 > 三灘先生集卷之四 > 詩 > 李承召
三灘先生集卷之四 / 詩
次天安宣化樓韻
歸來暫憩古寧州。客館東隅有小樓。雲外碧岑如露䯻。樹間涼吹解生秋。偶成籧栩還家夢。不覺龍鍾作客遊。只爲思親心最苦。登臨無地可消憂。
五雲迢帶隔神州。遙憶層城十二樓。畏景人間雖逬火。水精宮裏別藏秋。曾於禁署承殊渥。却向郵亭賦遠遊。宣化棠陰深造次。若爲能副九重憂。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천안에 있는 선화루의 시에 차운하다〔次天安宣化樓韻〕
돌아오는 길에 잠깐 옛 ①영주서 쉬거니와 / 歸來暫憩古寧州
객관 동쪽 모퉁이에 작은 누각 서 있구나 / 客館東隅有小樓
구름 밖의 푸른 산은 맨상투를 드러낸 듯 / 雲外碧岑如露䯻
숲 사이의 맑은 바람 가을 왔음 알리누나 / 樹間涼吹解生秋
대자리에 누워 집에 돌아가는 꿈을 꾸니 / 偶成籧栩還家夢
몸 쇠하여 나그네로 떠도는 줄 몰랐다네 / 不覺龍鍾作客遊
어버이가 그리워서 마음 몹시 괴롭기에 / 只爲思親心最苦
누각 위에 올라봐도 근심 녹일 길 없구나 / 登臨無地可消憂
②오색구름 아득 멀어 신주 땅이 격했으니 / 五雲迢帶隔神州
아득 멀리 층성 있는 ③열두 누대 생각하네 / 遙憶層城十二樓
뙤약볕의 인간 세상 비록 불길 거세지만 / 畏景人間雖逬火
수정궁의 궁궐 안엔 따로 가을 간직했네 / 水精宮裏別藏秋
내 일찍이 ④금서에서 큰 은혜를 받았는데 / 曾於禁署承殊渥
되레 우정 향해 가며 ⑤〈원유부〉를 읊는구나 / 却向郵亭賦遠遊
⑥당음에서 편 교화가 잠깐 새에 깊어지니 / 宣化棠陰深造次
구중궁궐 걱정 능히 부응하는 것 같구나 / 若爲能副九重憂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8
구중궁궐 걱정 능히 부응하는 것 같구나 / 若爲能副九重憂
① 영주(寧州) : 천안의 고호(古號)로,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이렇게 칭하였다.
② 오색구름 …… 격했으니 : 임금이 있는 서울이 멀리 격해 있다는 뜻이다. 오색구름은 다섯 가지 빛깔의 상서로운 구름으로, 흔히 임금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신주(神州)는 본디 중국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서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③ 열두 누대(樓臺) : 선경(仙境)에 있다고 하는 구슬로 꾸민 열두 개의 누대를 말한다.
④ 금서(禁署) : 한림원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홍문관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⑤ 원유부(遠遊賦) : 먼 곳을 유람하는 것을 읊은 부로, 대표적인 부로는 전국 시대 초나라의 충신 굴원이 지은 〈원유부〉가 있다.
⑥ 당음(棠陰) : 감당나무 아래의 그늘이란 뜻으로, 어진 관리의 아름다운 정사를 말하는데, 흔히 감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나라 때 소공(召公)이 북연(北燕)에 봉해져서 감당나무 아래에서 어진 정사를 펼쳤는데, 소공이 죽은 뒤에 백성들이 소공을 그리워해 감당나무를 감히 베지 못하면서 〈감당(甘棠)〉 시를 지어 기렸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詩經 甘棠》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8
【학교】 향교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역원】 신은역(新恩驛)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금제역(金蹄驛) 고을 남쪽 23리에 있다. 영풍원(寧豐院)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대평원(大平院) 고을 남쪽 35리에 있다. 삼기원(三岐院)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안정원(安定院) 풍세현(豐歲縣)에 있다. 가을원(加乙院)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남원(南院)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 강호문(康好文)의 누기(樓記)에, “영주(寧州)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옛날 우리 성조(聖祖)께서 견훤(甄萱)을 칠 적에 군사 10만을 주둔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위엄을 드날렸으니, 그 군영을 설치한 곳을 고정(鼓庭)이라 하고, 그 성을 왕자(王字)라 하였다. 이 고을의 설치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며 사당의 모습이 온 고을을 비추어 고을 백성들을 복되게 하기 거의 5백 년이다.
지난 계축년 봄에 내가 조정의 명령으로써 이 고을을 지키게 되었는데(천안부사), 태조의 사당을 배알하고 물러나와 아전과 백성들과 함께 지도와 호적 등을 펼쳐 놓고, 이 고을의 옛일을 물어 보았더니, 이 고을이야말로 삼국의 중간에 위치하여 참으로 한 방면의 요충지대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전사(傳舍)ㆍ주막ㆍ여관 등의 시설이 다른 고을에 견주어 더욱 시급하였다. 예전에 고을 남쪽에 원(院)이 있어서 길손들을 접대하였으나, 그것이 왜구에 의해 불타버린 뒤 다시 짓는 이가 없어 길손들이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내가 이 일을 계획하여 재목과 기와를 모았으나 마침 나라에서 탐라(耽羅)의 역사(役事)가 있어 이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군수 임군(任君)이 후임으로 와서 정사가 화평하고 은혜가 미치니, 백성들이 즐겁게 명령을 따라 주어 높이 솟은 원이 한달 남짓 만에 완성하였다. 길손들이 제집에 돌아간 듯 비바람이나 춥고 더움의 괴로움이 없어졌으니 참으로 잘된 일이라 하겠다. 원이 예전에는 동쪽으로 향하였고 누각이 매우 높았던 것을 임군이 풍수(風水)를 보고 지면의 형세를 따라서 남향으로 고쳐 지었는데, 길거리를 가로질러 놓여 있다. 또한 건축이 오래 가도록 하였으니, 대개 누각이 너무 크고 높으면 바람과 비를 지탱할 수가 없어서 기울고 퇴락하기 쉬우므로, 이 누각을 지을 적에 높지도 낮지도 않게 하여 그 규모와 체제를 고을에 알맞게 하였다.
여름철이 되면 뜨거운 구름이 내려 쪼여 돌과 쇠를 녹일 듯하고 더위와 장마로 무덥고 습기가 차며, 수렁길이 잇달아 부역으로 왕복할 때에 이고 지고 다니자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목마른 목구멍에서는 먼지가 날 지경이다. 이렇게 지치고 답답할 적에 이 누에 오르면 맑은 바람과 시원한 기운이 저절로 일어나 정신이 넓어지고 시원해지고 상쾌함이 마치 때묻은 옷을 빨래한 듯, 뜨거운 것을 식히는 듯, 한없이 넓은 곳에서 노니는 듯하다. 북풍이 울부짖고 찬 기운이 매섭게 살을 에는 듯하고 눈보라가 하늘을 덮고 해는 지고 갈 길은 먼데 아득히 사람 사는 집이라곤 없고, 고드름이 수염에 달리고 혀는 오그라들고 손은 시리며, 마소도 얼어서 쓰러질 적에 이 누에 들어오면 땔나무가 쌓여 있어 더운 물로 녹이고 불로 데워서 몸이 녹고 기운이 따뜻해지는 것이 마치 두꺼운 솜옷을 입고 양지에 앉아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절에 남북으로 장사를 다니는 사람이나 동서로 다니는 행인들이 서로 보면서 말하기를, ‘아, 이 원루(院樓)는 임군수가 지은 것이라.’ 하여, 이 원루로 말미암아 그 지은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면 그의 정사를 사모하게 될 것이니, 이리하여 임군의 은혜는 당시에 더해졌으며, 후세에까지 길이 미칠 것이다. 사관의 붓을 빌리지 않더라도 훌륭한 명성을 남기게 될 것이니, 이 누를 지은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로다.
근래에 풍속이 점점 각박해져서 교대하는 관리들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공적과 재능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진실로 세상에 유익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내가 한 것처럼 기뻐할 따름이다. 내가 이번에 전라도의 막영(幕營)으로부터 영주(寧州)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이를 위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누에 올라 거닐며 오래도록 관람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른바 고정(鼓庭)과 왕자성은 완연히 예전과 같아서 왕씨를 일어나게 한 공적은 오늘에 있어서도 힘입음이 있다고 하겠다. 진실로 성조(聖祖)의 창업이 어려웠음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수령이 된 사람은 그 흥망을 책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 마음에 걸려서 하루도 편안히 지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제 임군이 나의 뜻을 잘 이어받아 마침내 이룩한 업적이 있으니 이는 기록할 만한 일이다. 뒤이어 군수가 되는 사람은 나로써 경계를 삼고 임군으로써 모범을 삼는다면 또한 영주 백성들의 행복이 되겠다. 임군의 이름은 군석(君碩)이요, 벼슬은 봉상대부(奉常大夫)이며, 아무 고을 사람이다. 원루를 낙성한 때는 을묘년 가을이요, 기문을 쓴 때는 정사년 봄이다.” 하였다. 대소원(大召院)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풍천원(楓川院) 고을 북쪽 6리에 있다.
【불우】 광덕사(廣德寺)ㆍ개천사(開天寺)ㆍ만복사(萬福寺)ㆍ대학사(大鶴寺) 모두 화산(華山)에 있다. 유려왕사(留麗王寺) 고려 태조가 유숙하였으므로 이 이름이 되었다. 성불사(成佛寺)ㆍ마점사(馬占寺) 모두 왕자산에 있다. 고려 태조의 말이 머물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점이라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고을 동쪽에 있다. 여단(厲壇)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고려 태조묘(太祖廟)ㆍ왕자성(王字城)ㆍ고정(鼓庭) 모두 왕자산 밑에 있다. 지금은 옛터만 있다. 豐歲縣 고을 남쪽 27리에 있으며, 자천(秭川)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이었으며, 신라 시대에 순치(馴雉)로 개칭하여 대록군(大麓郡)의 속현이었던 것을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顯宗9년에 이 고을에 예속시켰다. 회고정(懷古亭) 고을 서쪽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기축년 윤달에 내가 한(韓)으로부터 영주를 거쳐 서울로 가게될 때에 군수 성(成)군이 고을의 정자 이름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태조께서 백제를 치려 할 때, 술자의 말이, 왕자성은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의 땅이니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를 조련하면 삼국을 통합하여 왕이 되는 것을 당장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여, 풍수를 살펴 이 성을 경영하고 군사 10만을 주둔하여 마침내 견훤을 항복시켰는데, 그 진영을 쳤던 곳이 고정(鼓庭)이라고 군의 문헌[郡乘]에 이렇게 실려 있습니다. 예전에 정자가 고정에 있어서 거기에서 관도(官道)를 내려다 보면 이른바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라는 왕자산의 산 밑인데, 왕자는 산의 모양입니다. 내가 그 정자가 퇴락하고 좁으며 또 이름도 잃어버렸음을 안타깝게 여겨, 이제 옛 것을 헐어 버리고 새로 확장하여 지었으니, 이제 이름을 지어 주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정자의 지음이 우연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나의 고향이 이곳에서 3백 리 남짓한 거리이므로 내가 여기를 지나 다닌 것도 여러 차례이기에 영주의 일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백성들이 일정한 직업이 없고, 관리가 일정한 거처가 없다면 어느 겨를에 정자를 중축하였겠는가. 병술년 봄에 내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는 이귀을(李龜乙) 군이 군수로 있었는데, 풀밭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가 참으로 훌륭한 관리임을 알았다. 지난해 가을에 근성(覲省)차 돌아올 때는 지금 성군이 군정을 맡은 지 반년쯤인데 이군의 치적보다도 더 낫다고 하였다. 부임한 지 두어 달 동안에 민정을 모두 알아서 이로운 일은 일으키고, 해로운 것은 힘써 없애버리고, 농사를 권장하고 학문을 힘쓰게 하며, 과세를 고르게 하고 흉년을 구제하는 등 질서 있게 행하므로 백성들이 모두 기뻐 복종하였다. 곧 명령을 내리기를, ‘너희들은 이곳에 살게 된 유래를 알고 있느냐. 이곳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서 태조의 신궁(神宮)이 있다. 이제 그 건물들이 허물어져서 위로는 비가 새고 벽에 구멍이 뚫려 신령을 모실 수가 없는데도 신령께서 돌보고 흠향하신다고 하겠느냐. 사람이 근본에 보답할 줄을 모르면 이는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또 관사(館舍)와 공해(公廨)는 손님을 받들고 관부(官府)를 위엄 있게 하는 것인데, 이제 모두 황폐하고 수리되지 않았으니 이는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경하지도 않고 게으른 데 대해서는 적용시킨 떳떳한 법이 있으니, 이는 수령만의 책임이 아니라 너희 백성들도 어찌 벌을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지체 높은 집안도 막론하고 집집마다 골고루 부역을 책정하고 재목을 다스리고 기와를 구워서, 먼저 신궁의 예전(禮殿)과 재방(齋房)을 새로 지어 건물을 모두 다 웅장하고 아름답게 한 뒤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엄숙히 지냈으며, 다음은 관사와 공해를 수리하여 짓고 백성들을 격려하고 감독하여 금년의 농한기에는 반드시 공사를 끝내어 일체 완성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나라에서 정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 먼저 관리를 임명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가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일단 공사를 중지하라.’ 하고, 그 재목과 기와의 수량을 조사하여 기록해 두게 하고, 주관하는 이에게 주의시키기를, ‘잃어버리지 말고 새로 오는 원[新官]을 기다려 나의 뜻이 달성되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이 정자는 한 고을의 명승지를 차지하였으며, 사방으로 통하는 요지에 놓여 있으니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날을 서둘러 성취하였다. 아, 성군(成君)이 이 고을을 조왕(祖王)의 남은 은덕이 있는 곳이라 하여, 나아가서는 태조의 초상은 뵙고 엄연하신 창업의 자세에 대하여 극히 공경하고 황송히 여겼으며, 물러나서는 고정(鼓庭)에 노닐면서 아득한 행군(行軍)의 자취를 길이길이 사모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옛 것을 회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았었는가. 그의 행실이 이러하므로 내가 정자의 이름을 회고(懷古)라 하였다. 정자가 작아서 기문을 쓸 만한 것이 못 되지만,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 나머지를 볼 것이므로 아울러 기록하노라. 성군의 이름은 원규(元揆)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요, 동한(東韓)의 이름난 집안 동암(東庵)의 외손이다.” 하였다. 모산부곡(毛山部曲) 고을 북쪽 36리에 있다. 이곳을 지나서 아산현(牙山縣) 북촌(北村)에 들어간다. 신종부곡(新宗部曲) 고을 서쪽 80리에 있다. 지나서 예산현(禮山縣) 북촌에 들어간다. 덕흥부곡(德興部曲) 고을 서쪽 69리에 있다. 지나서 신창현(新昌縣) 서촌(西村)에 들어간다. 돈의향(頓義鄕) 고을 서쪽 62리에 있다. 지나서 아산현 서촌에 들어간다.
★가정집 > 가정집 제6권 > 記 > 李穀
영주(寧州) 회고정(懷古亭)의 기문
지정(至正) 기축년(1349, 충정왕 1) 윤달에 내가 한주(韓州 한산(韓山) )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영주(寧州 천안(天安) )를 경유하였다. 그 고을의 수재인 성군(成君)이 정자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옛날 우리 太祖가 百濟를 정벌하려고 할 적에, 어떤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만약 왕(王) 자(字) 형태의 성에서 세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는 땅에다 보루를 쌓고 관병(觀兵)을 한다면, 三韓을 통일하여 왕이 되는 것을 바로 기대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풍수의 형세를 관찰하여 이 성에다 군영을 차리고는 10만 군대를 주둔시켜서 마침내 견씨(甄氏 견훤(甄萱) )의 後百濟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군대를 주둔시킨 군영의 장소를 고정(鼓庭)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고을의 역사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 이와 같습니다. 옛날부터 정자 하나가 고정에 우뚝 서 관도(官道)를 굽어보고 있는데, 이른바 용이 구슬을 다툰다고 하는 형세가 실로 그 정자 아래에 펼쳐지고 있으며, ‘왕’ 자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 산의 형태를 가리킨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정자가 황폐해진 데다가 그 이름까지 잃어버린 것이 가슴 아프게 느껴지기에, 이번에 옛 건물을 철거하고 확장해서 새로 지었습니다. 그러니 이 정자에 이름을 붙여서 이 정자를 지은 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의 고향은 여기에서 겨우 300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곳을 경유하여 지나간 것도 여러 차례나 된다. 그래서 영주가 어떤 고을인지는 내가 잘 알고 있는 터이다. 백성은 일정한 생업이 없고 관리는 일정한 주거가 없으니, 정사(亭榭) 등을 관리할 겨를이 어디에 있겠는가. 병술년(1326, 충목왕 2) 봄에 내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에는 이군 귀을(李君龜乙)이 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황무지를 가꾸어 밭으로 만들고 가시덤불을 베어 길을 개통하였으므로, 나는 그가 훌륭한 관리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에 내가 어버이를 뵙기 위해서 다시 이곳에 돌아와 보니, 지금의 성군이 거의 반년쯤 정사를 행하고 있었는데, 이군이 다스리던 것과 비교해서 자못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는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백성의 사정을 모두 파악하고는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행하고 해가 되는 일은 반드시 제거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농사를 권면하고 학문을 장려하고 부세(賦稅)를 균등히 하고 흉년에 구휼하는 일 등을 차례로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일단 마음속으로 복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자, 명령을 내리기를 “그대들은 지금 그대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의 유래를 아는가? 이곳은 바로 왕업을 일으킨 곳이다. 그래서 태조의 신궁(神宮)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전우(殿宇)가 퇴락한 나머지 지붕이 새고 벽이 뚫려서 혼령을 편히 모실 수가 없으니, 제사를 흠향하시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이 되어서 그 근본에 보답할 줄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경건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관사(館舍)와 공해(公廨)는 빈객을 접대하고 관부(官府)를 존엄하게 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 모두 황폐한데도 수리하지 않는다면, 이는 태만함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경건하지 못하거나 태만할 경우에는 여기에 적용하는 일정한 법이 있다. 이는 이 땅을 맡은 나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 인민들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그 처벌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명령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을 동원하되 호강한 자들을 불문하고 집집마다 일을 시키며 균등하게 배정하였다. 그리고는 재목을 마련하고 기와를 구워서 우선 신궁과 예전(禮殿)과 재방(齋房)을 신축하였는데, 모두 한결같이 규모가 크고 아름답게 꾸며서 신령의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제사를 엄숙하게 올릴 수 있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이번에는 관사와 공해를 보수하기도 하고 또 새로 지을 작정을 하고는 이를 권면하고 감독하면서 금년 농한기까지 기필코 공사를 마무리하여 하나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게끔 하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국가가 새로 정사를 펼치면서 먼저 관리를 교체할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는 말하기를 “내가 장차 이곳을 떠날 것이니, 그대들도 잠시 공사를 중단하는 것이 좋겠다. 재목과 기와의 수량을 합산해서 이를 기록하여 보관해 둘 것이요, 또 주관하는 자에게 당부하여 이를 잃어버리지 말고 새로 부임하는 관원을 기다려서 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또 이 정자야말로 한 고을의 승경을 차지하고서 (四通八達하는 요지에 있는 만큼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시한을 정해 공사를 시작해서 마침내 낙성하였다.
아, 성군은 이 고을에 조왕(祖王)이 후세에 끼친 사랑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아가 초상을 우러러 볼 때면 엄연히 창업의 자취를 떠올리면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녔고, 물러나 고정(鼓庭)에 노닐 때면 아득히 행군(行軍)의 자취를 떠올리면서 길이 생각하고 사모하였다. 그러니 어찌 감히 심력(心力)을 다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옛 자취를 회복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그가 거행한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니, 내가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이 정자의 이름을 회고(懷古)라고 하였다. 이 정자를 지은 것이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서 쓰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를 통해서 다른 것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아울러 기록하였다. 성군의 이름은 원규(元揆)요 창녕(昌寧) 사람이니, 동한(東韓)의 명가인 ①동암(東菴)의 외손이다. 이달 9일에 기록하다.
① 동암(東菴) : 이진(李瑱)의 호이다. 그는 이제현(李齊賢)의 부친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
【명환】 고려 제궁(弟弓)ㆍ엄식(嚴式) 태조 13년에 대승(大丞) 제궁으로 도독부사(都督府使)를 삼고, 원보(元甫) 엄식으로 부사를 삼았다. 손변(孫抃) 판관에 등용되었는데, 정사를 가장 잘하였으므로 승진하여 공역서승(供驛署丞)에 임명되었으며, 고종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우거】 고려 ★전신(全信)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일을 처리할 적에 엄중하여 청탁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여러 차례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백성들이 자기들을 버리고 갈까 염려하였다. 평생 살림살이에는 마음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년에 스스로 호를 백헌(柏軒)이라 하였다.
★전신 (全信) : 1276년(충렬왕 2)~1339년(충숙왕 복위 8).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이립(而立), 호는 백헌(栢軒). 밀직사를 지낸 전승(全昇)의 아들이다.
음서로 관직에 나아간 뒤 내의직장(內衣直長)으로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하고, 다음해 숭경부승(崇慶府丞)이 되었다.
이어서 정방관(政房官)에 발탁되었고, 비서랑(秘書郞)에 올랐다. 1304년 국학직강(國學直講), 1307년 안동부판관, 1309년(충선왕 1) 전의부령(典儀府令), 1311년 김해부사, 1314년(충숙왕 1) 사헌장령·선부의랑(選部議郎)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317년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에 오르고 1319년 계림부윤, 1321년 복주목사(福州牧使)를 지낸 뒤 면직되었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감찰대부 진현관대제학 상호군(監察大夫進賢館大提學上護軍)에 올랐고, 다음해 동지밀직사사 상의 회의도감사(同知密直司事商議會議都監事)가 된 뒤 1332년(충숙왕 복위 1) 은퇴하였다. 성품이 엄격하고 근면하였으며, 집이 가난하였으나 산업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백이정(白頤正)·김제안(金齊顔)·이제현(李齊賢) 등 현사들과 교의(交誼)가 두터웠으며, 또한 최해(崔瀣)와도 친교가 있었으므로 전신의 묘비문을 썼다. 충청남도 천안의 검계서원(儉溪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효자】 고려 ★양호(梁好) 젊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에 그 대변을 가져다가 병의 차도를 알기 위해 달고 쓴 것을 맛보았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아버지가 일찍이 막내아들 순(純)이 토지와 집이 없음을 불쌍히 여겼으므로 양호가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자기의 몫을 아우에게 주었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 양호(梁好) : 본관은 천안(天安). 영릉직(英陵直)을 지낸 양구화(梁九和)의 아들이다.
『영성지(寧城誌)』에 의하면 양호는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4품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직(辭職)하고 귀향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모가 질병에 걸리자 대변을 맛봐 병세를 살폈으며,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삼 년 동안 시묘 살이를 하였다. 아버지가 일찍이 막내아들이 재산이 없는 것을 근심하자 양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의 소득을 동생에게 주었다. 그의 효우(孝友)가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내렸다.
양호의 효행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찬(贊)이 있다.
어느 누가 자식이 아니겠는가만 어버이 뜻에 순종할 이 드물고,
어느 누가 효도하지 않으리오마는 어진 마음을 다할 이 드물구나.
양씨 가문에 아들이 있으니 효성이 천성에서 나왔어라.
나이 어린 때부터 혼정신성(昏定晨省)에 부지런하였으니
매섭게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 계절에 따라 덥거나 서늘하거나
몸으로 먼저 행하여 그 따듯함을 알맞게 하였네.
음식을 공양할 적에도 간이 맞지 않을까 염려하여
몸소 먼저 맛을 보아 음식에 알맞게 맞추었네.
일찍이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군사(軍事)에 이르렀지만,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어버이 섬김을 기쁨으로 여겼네.
병환이 근심되어 상분을 하였고 상례를 치르면서 슬픔이 극진했네.
아비가 말하기를, 너의 막내는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
내가 죽은 뒤에 어디에 귀의할까나
양호가 대답하기를, 제 아우는 제가 마땅히 양육하겠습니다.
하물며 아버지가 염려하는 뜻이 있으니 제가 어찌 감히 거역하리오.
자기의 소유물을 다 주어서 아우 자기의 물건으로 하였네.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과 아우는 남들이 그 말을 흠잡지 못하였네.
지극하구나, 이 사람이여! 백행의 근원에 돈독하여라.
【네이버 지식백과] 양호 [梁好]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영】 빈 뜰 고요하여 만뢰(萬籟)가 쥐죽은 듯한데 원나라 절동(浙東)사람 계명숙(季明叔)의 시에, “말탄 길손이 저물녘에 천안에 와서, 문 안으로 들어가 말에서 내려 한가로이 서성거리네. 빈 뜰 고요하여 만뢰가 쥐죽은 듯한데, 낙엽만이 쓸쓸히 난간을 울리네. 푸른 하늘엔 구름 없어 맑게 씻은 듯하고, 밤빛에 맺힌 이슬 반짝이는데, 호상(胡床 큰 걸상)에 홀로 앉아 잠 못 이루니, 달은 날아 오고 바람이 차갑구나.” 하였다. 발[簾]에 뿌리는 비바람이 봄 추위를 돌리네 이곡의 시에, “허물어진 옛 성에서 비에 막히니 마음이 답답하고, 가려하나 갈 수 없어 공연히 서성거리네. 군수는 백성 생각에 밥 먹을 겨를도 없다 하니, 지나는 길손이 어지러이 간여함을 감당하기 어려우리. 하물며 지난해에는 서리가 일찍 내려, 가을 곡식이 이슬 맛도 못 보았다 하네. 조용히 읊조리느라 해 지는 줄도 몰랐는데, 발에 뿌리는 비바람이 봄추위를 돌리네.” 하였다. 달이 밝아 맑은 이슬이 빈뜰에 반짝이네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계공(季公)의 고향이 신안(新安)에 이웃했는데, 가정(稼亭)[이곡(李穀)]의 기상은 아직 꿋꿋하구나. 지금까지 50년 전의 일인데, 웅장한 문장과 어려운 운자를 뉘라서 간여하리. 내 와서 읊조리며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달이 밝아 맑은 이슬이 빈뜰에 반짝이네. 고금의 재주와 힘이 멀리 미치기 어려운데, 푸르고 푸른 만 리 옛 하늘 바람이 차기도 하구나.” 하였다. 밥 짓는 연기는 두서너 집뿐일세 강호문의 시에, “늘그막에 황폐한 고을을 얻으니, 밥 짓는 연기는 두서너 집뿐일세. 백성들은 흩어지고 마을은 없어지고, 왜구의 침략 바다가 멀지 않구나. 보통 방어조차 고생스러운데, 남북으로 전송하고 영접하는 일이 잦구나. 뉘라서 이 고을 원님되기 즐겁다 하리, 시름 깊어 귀밑털이 희어지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풍세(豐歲) 서남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인데 후에 제천(稊川)으로 고쳤고,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에 순치(馴雉)로 고쳐 대록군(大麓郡)의 영현(領縣)으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 23년에 풍세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예속되었다.
【방면】 상리(上里) 동쪽으로 끝이 5리이다. 하리(下里) 서쪽으로 끝이 5리이다. 군남(郡南) 끝이 10리이다. 대동(大東)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소동(小東)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일남(一南)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이남(二南)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내서(內西)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일(北一)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북이(北二) 처음이 5리, 끝이10리이다. 신종(新宗) 본래는 신라의 부곡(部曲)인데, 예산(禮山)의 북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쪽으로 끝이 80리이다. 덕흥(德興) 본래는 덕흥부곡이다. 신창(新昌)의 서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쪽으로 끝이 68리이다. 모산(毛山) 본래는 모산부곡이다. 아산(牙山)의 동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북쪽으로 끝이 40리이다. 돈의(頓義) 본래는 돈의향(頓義鄕)이다. 아산 서쪽 경계 너머에 있다. 끝이 62리이다. ○ 신종ㆍ덕흥ㆍ모산ㆍ돈의는 모두 좁은 갯가[浦]의 들판이다.
【성지】 왕자산 고성(王字山古城) 군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보루(堡壘)를 쌓아 관병(觀兵)하였다. 산 밑에 유적이 있다. 도리치 고루(道理峙古壘) 도리치에 있다. 고성(古城) 북쪽 10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은 유적이 있다.
창고 읍창ㆍ모산창(毛山倉) 아산 시포(市浦)에 있다. 신종ㆍ덕흥ㆍ둔의에는 모두 창이 있다.
【토산】 감ㆍ대추ㆍ붕어.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오 (역) |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