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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은 바다로 흐르지 않는다 ⑮
이 대 영
❚상처
봄볕이 부챗살같이 번지자 우물을 찾는 아낙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겨우내 아랫목에서 뒹굴던 때 묻은 이불과 속옷 나부랭이들이 거친 손길에 끌려 나와 방망이로 매질을 당했다. 밭에는 나싱개, 벌금자리, 광대나물, 벼룩나물 등이 줄기를 뻗기도 전에 아이들의 칼끝에 딸려 나왔다. 밭둑에서 한파를 견디며 옹골차게 땅을 부여잡고 있던 쑥들도 하체를 허옇게 드러낸 채 바구니에 던져졌다.
일상적인 시골 풍경과는 다르게 세상은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체코슬라바키아에서는 노브트니(Antonín Novotný)가 실각하고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가 당 서기에 취임하며 프라하의 봄이 시작되고, 베트남에서는 케산(Khe Sanh) 전투와 테트(Tet) 공세로 전쟁이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국내에서는 북한 공작원의 청와대 기습사건으로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가운데 경부고속도로 기공식과 경전선 개통식을 가졌다.
우리 마을의 가장 큰 사건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기련이 삼촌이 살아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1년 전 그가 월남에 갔다는 소식을 접한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살아오지 못할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면서도 기련이 엄마에게는 귀한 핏줄이니 반듯이 살아올 것이라며 위로했다. 사실, 기련이 삼촌은 조실부모하고 독자인지라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직장생활에 환멸을 느껴 자원입대한 것이었다. 취업이 제일 잘 된다는 공업고등학교 광산과를 졸업한 그는 태백에 있는 석탄 회사에 취업하여 인력관리 업무를 맡았다. 그가 얻은 최초의 직장은 애초부터 그의 성정에 맞지 않는 곳이었다. 누나가 어렵게 마련해준 학비로 졸업한 터라 어떻게라도 버텨보려 했지만, 그의 유약한 체력과 성정은 막장 끝에 몰린 거친 사내들을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출근도 하지 않고 전표를 요구하거나 가불을 강요하고, 술에 취하면 그에게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약간 마른 체형에 깔끔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그를 술집 여자들이 그냥 둘리 없었다. 그는 결국 대폿집 주인 과부에게 잡혀 순결을 빼앗기고 말았다. 비 오는 휴일 늦은 밤에 자취방에 찾아온 강릉댁을 바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날씨가 푹푹 찌는 통에 그들은 선풍기에 의지하여 고단한 삶을 달랬다. 그녀는 인연의 끈을 잡는가 싶으면 이내 탄광촌을 떠나곤 하는 사내들의 심보를 욕하며 엉엉 울기까지 했다. 기련이 삼촌은 그녀의 처지에 동병상련의 감정이 일었다. “지금부터는 외로운 처지에 서로 잘 지내보자”는 그녀의 말에 “물론이지요!”라고 대답한 것이 사단을 불러왔다. ‘물론’이라는 말에 그녀가 사내의 손을 잡은 건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육중한 몸이 그를 덮쳐 사내의 몸을 깊은 동굴 속에 가두었다. 그러자 사내는 미로를 올라갔다 내려오지도 못하고 바르르 몸을 떨며 진저리를 쳤다.
바람은 두 사람의 밀회를 이튿날부터 탄광촌 구석구석으로 날랐다. 여자가 인부들에게 그와의 관계를 소문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야반도주하고 말았다. 그 길로 서울로 내려간 그는 중학교 동창의 자취방에 몸을 숨겼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탄광사무소에서 사내의 인적 사항을 알아낸 과부가 우리 동네를 찾아왔다. 영문도 모르는 그의 누이는 밤늦게 찾아온 그녀를 하룻밤 재워 보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여자가 나이 들어 보이고 기가 세게 생겼다고 수군댔다.
기련이 삼촌은 월남 참전을 앞두고 누이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자원입대하여 논산훈련소를 거쳐 백마부대에 배치되어 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면 모범 사병으로 선발되어 월남으로 간다고 했다. 1966년 6월 1일 국방부 지령 제3호에 의거, 제2차 파월 전투사단으로 백마부대가 지명됨으로써 자유십자군의 일원으로 9사단 파병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사실은 선발이 아니라 선임병의 구타에 못 이겨 참전을 자원한 것이었다. 탄광보다 더 모멸감을 주는 곳이 군대였다. 특히 학력이 낮은 자일수록 그를 더 괴롭혔다. 중학교를 졸업한 선임병들은 너 때문에 내가 진학을 못 한 거라며 온갖 못된 짓을 했다. 원산폭격을 시키고 발로 옆구리를 걷어차일 때는 관물대에 놓인 대검으로 그의 목을 찌르고 싶었다. 특히 동향 사람이라고 잘해주리라 믿었던 당진 출신 강 상병의 괴롭힘은 갈수록 더했다. 한 시간 동안 녹음기를 돌리라며 노래를 부르게 하는가 하면 여자 친구 소개, 안마, 심지어 월급과 담배까지 빼앗겼다. 하지만 화기 소대 소속인 논산훈련소 동기생의 위로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그는 신병이었지만 체육학과 유도선수 출신으로 체격이 다부져 선임병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어느 날, 동기에게 강 상병의 배때기에 대검을 꽂든지 탈영을 해야겠다고 울먹이자,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가 해결하겠다며 참으라고 했다.
사달은 그날 밤에 났다. 숙소 뒤편에 있는 빨래 건조대 근처에서 강 상병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신음하고 있는 것을 누군가 발견해서 의무대로 데려온 것이었다. 그것도 점호 직전에 발생한 터라 소문이 퍼져 중대원 전체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 상병은 점호 직전에 빨래 건조대 근처로 가서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도 꼭 똥 누는 자세로 쪼그려 앉아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움찔하지 않았다. 누가 물으면 제대 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설계하는 것이라 했다. 동기생은 그런 강 상병의 습관을 알고 기다렸다가 그를 군홧발로 짓뭉개고 달아난 것이었다.
당직하사의 점호 준비 복창과 함께 1소대로부터 점호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토요일이라 장교급 간부들은 대부분 외박을 나가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주임상사가 당직사관이었다. 그는 당직 하사에게 복창을 명해 점호가 끝날 때까지 강 상병과 싸우거나 그를 구타한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중대원 모두가 밤새 얼차려를 당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러면서 월남 참전 지원병에게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이 시각 이후부터 모든 훈련을 열외 시킨다고 했다.
점호는 요란하게 끝이 났다. 주임상사는 노련한 직업군인답게 각 소대를 돌며 완전군장을 꾸리고 해체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특히 동작이 느린 고참병들은 밖으로 내보내 팬티 바람으로 운동장을 돌게 했다. 그러면서도 취침 시간은 정확히 지켜줬다. 혹여 취침 후에 고참병의 횡포에 대비해 당직하사가 내무반을 쉬지 않고 순찰하게 했다.
기련이 삼촌, 즉 남 일병이 중대사무실을 찾아간 것은 마지막 불침번 시간이었다. 의자에서 잠을 자던 주임상사는 처음에는 피식 웃으며 “설마, 네가 강 상병을 때렸냐?”라고 물었다. “그렇습니다!”라는 말에 그는 껄껄 웃다가 마지막에는 “죽고 싶으면 월남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중대마다 파병 인원이 3명씩 할당된 터라 중대장이나 인사계도 골머리를 앓던 때였다. 단호한 그의 의지를 확인한 주임상사는 그 이튿날부터 그를 모든 훈련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 화기소대 동기생도 주변의 눈치가 부담스러웠는지 남 일병과 함께 월남 참전 지원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는 참전지원병들이 파월교육대로 이동하는 중간에 사단 헌병대 지프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갔다. 서울에 있는 그의 아버지가 인맥을 동원해 중간에 그를 빼돌린 것이었다. 그 자리는 또 불쌍한 그 누군가가 채워야 할 것이었다.
못난 놈들로 구성된 지원병들은 더블백을 싣고 강원도 오음리에 있는 제7 보충교육단 파월교육대로 이동하는 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부분 행정병이나 특수병과 지원병들로 100보병 참전병은 몇 안 된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그는 1대대에서 8주 동안 전투와 전쟁 규칙 등 실전 교육을 받는 내내 지원한 것을 후회해야 했다.
나는 이 행수, 즉 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집안의 장손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기보다는 도와주려 했고, 특히 할머니가 곁에 있을 때는 나를 챙기며 ’잘 생겼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춘기가 오기까지 내가 정말 잘 생겼는지 알았다. 팽이며 눈썰매도 내가 만들기보다 이웃 형이나 친구들이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그들에게 과자며 사탕을 나눠주며 보상했다.
정월 대보름을 맞아 오곡밥을 먹은 나는 아랫집 석철이 형이 만들어 준 불깡통을 들고 집을 나섰다. 사마산에서 떠오른 보름달은 들녘을 지나 마을 안길까지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삼거리 주막에는 몇몇 사람이 남아 술기운으로 던지는 윷가락이 기분 좋은 소리로 울었다. 주막 앞에 펼쳐진 논 위에는 이미 아이들이 몰려와 축제장을 만들고 있었다. 내 또래인 정일이와 상각이는 물론, 성숙이 부길이 등 여자아이들도 깡통을 들고나와 소리를 지르며 불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장터에 사는 석구와 명식이도 와 있었다.
논 한 가운데에는 탈곡하고 쌓아 놓은 큰 볏짚 가리가 마치 성처럼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그곳을 ’본부‘라고 칭했다. 아이들은 겨울에도 축구를 하곤 했는데, 옛날 강 씨 논을 운동장으로 사용했다.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오후에 본부에서 만나자고 하면 아이들은 어김없이 이곳으로 달려왔다. 볏짚 가리에는 아이들이 볏단을 빼서 만든 깊숙한 동굴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다. 아늑할뿐더러 바람을 피할 수 있어 더 좋았다. 또한 모자나 장갑 같은 휴대품을 놓고 화투를 치거나 공기놀이를 할 수 있는 쉼터였다. 그래서인지 논에 나온 아이들은 제일 먼저 본부에 들렀다가 놀이를 시작했다. 나 역시 본부로 들어가려다 상각이의 제지를 당했다. 누이하고 태성이 형이 안에 있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상각이 누나인 상순이는 우리보다 열 살 많은 열여덟 살이었고, 태성이 형은 스무 살이었다. 동굴 안을 힐끔 보자 상순이 누나가 간지럽다며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속으로 ’내복에 이가 득실거리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던지는 불깡통은 어둠 속에 원을 그리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얼마 가지 않아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깡통 사이로 새어 나온 불티는 강렬한 생명을 태우며 명멸했다. 아이들은 깡통이 떨어진 곳으로 달려가 다시 불쏘시개를 담아 입에 공기를 잔뜩 집어넣고는 호호 불어댔다. 그러면 깡통에 낸 구멍 사이로 심한 바람 소리가 일며 다시 불꽃이 살아났다. 그것을 타원형으로 돌리면 아름다운 불꽃이 여기저기서 피어났다. 장미가 되기도 하고 코스모스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놀이에 지칠 무렵 나타난 것은 기련이 삼촌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아이들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몰려왔다. 기철이와 용길이는 거수경례를 하며 ’백마!‘라고 외쳤다. 아저씨가 제일 먼저 내 머리를 쓰다듬자 나는 갑자기 으쓱해졌다. 나는 아저씨의 손을 끌어 본부로 안내했다. 이미 상숙이 누나와 태성이 형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저씨가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자, 그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타원형으로 앉았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성자가 손전등을 켜자 군복을 입은 아저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군모에는 작대기 네 개가 나란히 아래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아저씨가 모자를 벗어 내려놓으려 할 때 잽싸게 모자를 받아 내 머리에 썼다. 그러자 상각이가 ’우와!‘하며 탄성을 질렀다. 옆에 앉은 옥이가 움찔하며 몸을 젖혔다. 용길이는 흘러내리는 콧물을 팔뚝으로 닦으며 군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아저씨는 정말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네! 네!’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는 이야기는 나중에 해주고 우선 군가부터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이에 누군가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군가를 부르기 전에 그 요령부터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군가 준비!’를 외치면 우리는 오른손을 힘차게 들어올려야 했다. 그리고 아래위로 반동을 하다가 ‘군가 시작!’이라는 말이 들리면 일제히 목에 힘줄이 보이도록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는 물론 아이들의 표정에는 마치 전장에 서 있는 것처럼 비장함이 묻어났다.
이튿날부터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영자송’을 불렀다. 심지어 어른들의 입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이 노래가 새어 나왔다. 아낙들은 우물에 나와 이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서로 얼굴을 보며 피식 웃어댔다.
영~자야 내~ 동생아
몸 성히 성히 성히 잘~ 있느냐
여~기에 있~는 이 오빠~는
장교가 아~니란다
여기에 있는 이 오빠는
장교가 아니라서
월남하고도 호이안에서
뺑이 치는 쫄병이란다
야아~ 야~야~ 야아~ 야~야~
짜리 짜리 짠짜~ 짜리 짜리 짠짜
남~ 남~쪽 머나~먼 나라~ 월남의 달~밤
십~자성 저 별빛~은 어머~님 얼~굴
그~ 누~가 불어주~는 하모~니~카~냐
아~리랑 멜리디~가 향수에 젖네 가슴에~ 젖~네
정월 대보름이 지났어도 저녁이 되면 아이들은 깡통을 들고나와 불놀이를 즐겼다. 서촌 아이들은 물론, 장터 아이들까지 합세하여 인원이 늘어갔다. 아저씨는 본부에 자리를 잡고 술을 먹으며 아이들이 놀이에 지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소주를 주로 마셨는데 심부름은 주로 상각이가 했다. 상각이 아버지는 술과 노름을 좋아하는 법사였다. 그래서 상각이가 술을 사 가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두세 병씩 술을 사서 본부 안에 숨겨두었다. 가끔은 아저씨 집 아래에 사는 석철이 형이 심부름을 다녀와 한 모금씩 얻어먹곤 했다.
아저씨는 술이 거나해지면 대부분 볏단을 베개 삼아 누운 채 마냥 천장만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언젠가 상각이가 술 심부름을 다녀와 봉지를 건네며 “무슨 생각을 하시냐”고 물었더니 “몰라도 돼 임마!“라며 꿀밤을 먹였다고 했다.
그는 전역한 후에 하루도 전쟁을 잊은 적이 없었다. 특히 저녁만 되면 야간작전에 익숙해진 시신경이 살아나 공간 지각 능력을 잃고 이상한 행동을 했다. 갑자기 ‘비상!’이라고 외치며 모의총을 들고 뒷산으로 달려 들어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오는가 하면, 마을 우물에 머리를 박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곤 했다. 이런 행동을 목격한 그의 누이는 약국과 한약방을 드나들며 약을 날랐으나 효과는 없었다. 그의 영육은 오롯이 월남에 있었다.
그가 9사단 백마부대 28연대 소속으로 일병 계급장을 달고 월남 나트랑(Na Trang)에 상륙한 것은 1966년 9월 초순이었다. 이미 해병대 제 2여단 소속 청룡부대는 65년 10월부터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11월에는 수도보병사단 소속 맹호부대 기갑연대가 퀴논(Qui Nhon)에 들어왔다. 8월 말쯤 서울 중앙청광장에서 ‘이기고 돌아오라’는 환송 국민대회 현수막 아래서 시가행진을 한 후, 부산항 3부두에서 미국의 2만 5천 톤급 수송선과 연결된 다리로 올라설 때만 해도 우쭐한 기분이었다. 배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육해공군 2천여 명이 승선했다. 그들은 머리털과 손톱 발톱을 흰 봉투 속에 영혼처럼 남기며 결의를 다진 사람들이었다.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교복을 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단발머리 여학생에서부터 각 단체에서 나온 사람들이 인간 시장을 이루었다. 집안에 뒷배가 없어 파병명단에서 탈출하지 못한 병사들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꺼이꺼이 우는 병사도 있었다. 특히 이들을 떠나보내는 가족들은 통곡을 쏟아내며 무명옷에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다. 병사 곁에는 대를 잇기 위해 오음리 산골까지 찾아와 뱃속에 태아를 잉태한 처자들도 있을 것이었다. 파월군인 대부분은 모두 애국자가 되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 애썼다. 절규와 함성이 배를 밀어내자 수송선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함에서 뿜어나오는 연기가 길고 굵은 하늘길을 만들었다. 군인들은 모자를 손에 움켜쥐고 목이 터지도록 군가를 불렀다. 군가에는 슬픈 빗소리로 가득했다. 생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짐승의 포효가 이승 밖으로 울려 퍼졌다.
수송선은 그야말로 인간 시장이었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팔도 사나이들이 누렁니 사이로 온갖 사투리를 뱉어냈다. 지휘관들은 용어의 절반을 욕으로 쏟아냈지만 아무도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비품 정리가 끝난 군인들은 배의 이곳저곳을 살피기에 바빴다. 병사 대부분은 할 일 없이 갑판 위로 나와 수평선을 바라보다 불현듯 나타난 돌고래나 날치 떼가 비상하는 풍경에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세끼 밥을 먹기 위해 줄 서는 시간만으로도 하루해가 훌쩍 기울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나오는 소시지며 햄을 보며 진즉 수송선을 타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는 농을 건넸다. 24시간 스테이크, 베이컨, 소시지, 오렌지, 코코아 등 군대 짬밥과는 비교가 안 되는 A 레이션을 무한 리필 할 수 있었다. 아울러 스테인리스 통에 가득 담긴 커피는 언제든지 마실 수 있었다. 멀미만 없으면 가히 지상천국이라 할 만했다.
배에서의 생활은 멀미가 가장 큰 고통이었다. 선상 교육을 할 때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구토할 때 반드시 비닐봉지나 모자에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밀려오는 구토는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탄광에서 광차와 인차, 폭음, 로프웨이 등에 익숙한 그는 마치 오랫동안 생활한 선원처럼 금방 익숙해졌다. 뱃멀미에 시달리는 선임들을 보며 오히려 고소함을 느꼈다. 군표 내기 화투를 치다 멱살잡이하는 병사들과 해병대와 특수부대원 간의 기 싸움도 볼거리였다. 배에서 생활하는 시간도 국방부 시계 속에 포함되기에 차라리 배가 고장 나서 바다 위에서 마냥 시간이 흘러갔으면 싶었다. 집채 같은 파도가 선체를 때려 속이 울렁거려도 내무반에서의 괴롭던 시간에 비하면 세상 편할 게 없었다. 탄광촌 과부는 어떻게라도 자신의 행적을 찾아내어 부대까지 찾아왔을 것이었다. 대구역에서 기차가 잠시 머물며 가족 간의 눈물 어린 만남이 진행되는 순간에도 행여 그녀가 나타날까 봐 모자를 눌러쓰고 밖을 살핀 적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짠하기도 했지만, 그가 투덜거리며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고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예, 문이 없어 서로 마주 보며 용변을 보는 화장실도 금방 익숙해졌다. 오히려 재미를 느꼈다. 하얀 변기 위에 앉았다가 뽀송한 화장지로 일 처리를 할 때면 똥구멍도 웃는 소리를 냈다. 다만, 여기저기 뱃멀미로 토해낸 토사물과 병사들의 신음은 견디기 어려웠다.
일본 오키나와를 돌아 남지나 해로 접어들자 끈적한 냄새와 함께 더위가 몰려왔다. 남 일병은 퀴퀴한 썩은 향수 냄새와 비릿한 바닷바람에 두어 번 구토했다. 그리고는 며칠 지나지 않아 야자수가 보이더니 시체처럼 길게 늘어진 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부산항을 떠나 7일 후에 도착한 곳은 나트랑이었다. 청룡부대 소속 병사들은 북쪽의 다낭 항에서 하선하고, 주월사 및 백마부대원들은 바지선으로 옮겨탄 후 나트랑 해변으로 상륙했다. 정작 배에서 내려 백사장에 발을 디디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이 땅에 닿는 것이 아니라 땅이 발을 밀어내는 것 같아 마치 하늘에 붕 떠 있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이젠 죽기 살기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바람 속에 습기를 가득 먹은 특유의 향신료 냄새에 그도 끝내 구토를 하고 말았다. 모래사장 위에 잡풀과 함께 솟아오른 선인장 무리가 적군처럼 어지럽게 달려들어 몸을 찔렀다.
백사장에서 간단한 입국 환영식이 끝나고 거리로 접어들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야자수와 아오자이를 입고 오토바이를 탄 여성들이었다. 간혹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지만, 무심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그들의 태도가 다소 황당했다. 전쟁터라고 하지만 총소리나 포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두려움 없이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듯했다.
내일이면 병사들은 수송기를 타고 닌호아에 있는 백마사령부로 날아가 신고식을 마치고 곧 투이호아로 투입될 것이었다. 이미 이곳에는 1번 국도와 21번 국도가 교차하는 닌호아 지역에 백마부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닌호아는 인구 밀집 지역으로 남베트남 해안을 따라 부대가 길게 배치되어 길이 280km, 폭 5~30km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북단의 케산(Khe Sahn)에서 엔케까지는 미군이, 퀴넌에서 나트랑까지는 한국군이, 그리고 디엔과 사이공 주변에는 오스트레일리아, 태국, 필리핀, 뉴질랜드 등 다국적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사이공에 주월 한국군사령부와, 공군지원단 은마부대, 해군수송전대 백구부대가 자리하고, 중부지역에 청룡, 맹호, 백마, 십자성 부대 순으로 주둔했다. 월맹군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호찌민 루트를 타고 수시로 들어오는 군수물자를 무기로 정글 지대에서 매복과 기습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전후방이 따로 없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백마부대 28연대 도깨비는 투이호아(Tuy Hoa) 혼바산 일대, 29연대 박쥐는 사단사령부와 공병대대, 포병대대와 함께 닌호아(Ninh Hoa), 30연대 동보는 캄란(Cam Ranh)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중에도 투이호아 지역은 광활한 평야 지대로 베트남의 3대 곡창지대이며 식량 및 각종 물자가 풍부하게 생산되는 곳이었다. 나트랑에서 북쪽으로 약 130km, 퀴논에서 남쪽으로 약 100km에 위치하며, 인접한 뚜이안(Tuy An)과 북쪽으로 지역 경계를 마주하고 동쪽으로 약 30km가 넘는 해안선이 전개되는 곳이었다. 제28연대 전술 책임 지역에는 내륙에서 뻗은 험준한 산줄기인 다비아(Da Via)산과 장군바위로 유명한 혼바산(Hon Ba)이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고. 월남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인 1번 국도는 혼바산 능선을 넘어야 닌호아와 투이호아로 통할 수 있었다. 혼바산 남쪽엔 군수물자 보급항인 붕로(Vung Ro)만과, 북쪽으로는 투이호아 비행장을 비롯한 백마 28연대 및 연합군의 주요 군사시설을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요충지여서 베트콩은 안간힘을 다해 이곳을 사수하고 있었다. 1965년 겨울에서 이듬해 여름까지 해병 2사단 청룡부대가 주둔하며 작전을 벌였던 곳에 백마 28연대가 들어간 것이었다. 청룡부대는 미군이 고전하던 1번 국도를 사수하고 곡창지대인 투이호아 방어 임무를 맡았다. 1번 국도상에는 미 해군 ‘캡소대’가 베트남 정규군과 합동으로 주둔하고 있었는데, 적군의 공격으로 자주 전멸을 당하는 위험지역이기도 했다. 1번 국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개활지 곡창지대가 전개되고 있는 이곳은 중부지역에서 활동하는 베트콩의 식량 공급원이어서 조기에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청룡부대는 청룡 1호~2호 작전과 재건 1호~2호 작전, 돌풍 1호~2호 작전을 통해 투이호아에서 붕로만에 이르는 1번 국도의 안전을 확보하고 주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활약으로 청룡부대가 호이안 지역으로 이동할 당시 주민들이 반대할 만큼 호응을 얻은 곳이었다. 반면,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로 아군과 민간인의 피해도 컸다. 혼바산에서 낙하산으로 작전을 전개하다 바위 동굴에 은둔하고 있던 적군에게 사살되거나, 던진 수류탄이 바위에 튕겨 내려와 아군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특히, 혼바산이나 사례오산, 쑤이까이, 망망계곡 등에 은거하며 식량 조달을 나온 베트콩과 이들에게 조력하는 주민이 있어 잦은 전투가 벌어지곤 했다. 특히, 마을에 은둔한 베트콩들을 제거함에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에 마을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양민의 피해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다응우촌, 봉타우, 푸락 마을이 전소되었으며 한국군에 대한 주민의 경계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한국군의 빨간 명찰만 봐도 피하기부터 했다. 이에 백마부대가 들어가서 제일 우선시 한 것이 대민사업이었다.
기련이 삼촌, 즉 남 일병은 3대대 소속으로 혼바산 인근의 전술기지에 배속되었다. 나트랑, 닌호아를 거쳐 혼바산 아래 하오손(Hao Son)까지 오게 된 셈이다. 해발 1,574m 고지 정상에 장군바위가 서 있는 혼바산은 바위산으로 험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위로는 바위로 덥혀 있고 그 아래는 동굴과 정글을 이루었다. 연중 250여 일 비가 내리며 약 60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이 엉켜 사는 이곳은 사실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곳은 닌호아에 있는 사단사령부에서 병력 보충 및 군수품을 조달하고 붕로만(Vung-Ro Bay)에서 투이호아 미군 비행장에 무기 및 군수품을 운반하는 1번 도로로 연결되는 곳이었다. 그러기에 전략적 요충지로 끊임없이 베트콩이 출몰하여 아군을 괴롭혔다. 특히 은폐하기 좋은 지형에 매복해있다가 집중 사격을 퍼붓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비록 청룡부대가 다양한 작전을 통해 이곳을 평정했다고는 하나 매복과 수색 작전이 전개되는 날이면 피아간의 총성이 멈추지를 않았다. 백마부대의 주요임무는 1번 국도를 사수하고 혼바산 일대를 수색하거나 식량 조달을 위해 민가에 내려오는 적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직접 월맹군과 싸우기보다는 전술책임구역(TAOR)을 유지하는 것이 임무였기에 미군보다는 위험도가 다소 낮은 것은 다행이었다.
남 일병은 혼바산 북쪽 후사 면에 있는 부대에 배치받은 후,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포성과 총성은 요란했으나 일주일 동안 탈 없이 지냈다. 그는 주로 전술기지의 지형과 시설을 익히고 보초 서는 일을 했다. 다행히 소대장은 학사장교 출신이라 무식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대장은 부사관학교 출신으로 입이 거칠기로 유명했다. 전남 벌교 출신으로 ‘벌교에 와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을 녹음기처럼 틀고 다녔다. 싸움 실력은 알 수 없었으나 다부진 체격에 깡다구 하나만은 알아줬다. 그래서인지 정찰이나 매복을 나갈 때면 소대의 첨병 분대 역할을 도맡는다고 했다. 남 일병이 분대에 배치된 날, 그는 ”돈도 없고 빽도 없어 이곳까지 온 놈이니 내 뒤만 따라다니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며 껄껄 웃었다. 실제로 남 일병은 그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1분대는 분대장과 남 일병 외에 서울에서 고무신 가게를 하다 온 김 병장, 김포에서 자전거포를 하다 온 최 상병, 중학교를 졸업하고 빈둥거리다 끌려 온 서 일병, 청량리 술집 골목에서 아가씨들을 관리했다는 박 상병으로 구성되었다. 각자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1소대 1분대는 기동성과 전투력 하나만은 중대에서도 인정했다. 여덟 명으로 분대 편성이 이루어져야 했지만, 어느 소대나 분대원 수는 늘 부족했다. 허여멀겋게 생긴 남 일병이 1분대에 오자 모두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머리 좋은 놈이 한 놈쯤은 있어야 한다”며 분대장에게 언질을 준 소대장 덕분에 잡음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월남 참전병 중에 명문 공업고등학교 출신이 보병 병과에 있는 일도 드물었다. 사병은 평균 연령 만 21.6세, 신체 등급 특갑종 27%, 갑종 71%, 1을종 2%, 평균 시력 1.5로 대부분 건장한 신체조건을 갖고 있었지만, 평균 학력은 중졸이 67% 수준이었다. 최 상병이 자동소총수, 박 상병이 M203 유탄발사기를 맡고 있었다. 박 상병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사교춤에 능숙하여 담배 한 갑만 주면 지루박에서 브르스, 트로트에 이르기까지 교습했다. 심지어 중대장도 그를 불러 탱고 단계를 배우고 있었다. 소대장이나 고참들 또한 제대 후 청량리 골목에서 박 상병과의 재회를 생각해 그와 친분을 쌓는 중이었다. 박 상병은 M203 실탄이 자기의 귀두를 닮았다며 가끔 실탄을 꺼내 혀로 핥아 주변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김 병장은 돌려차기 하나만은 끝내준다고 했다. 진급한 지 1주일이 되지 않았지만, 그는 계급장을 쓰다듬으며 소장, 대장 다음이 병장이라며 흐뭇해했다. 자기가 죽지 않고 귀국한다면 남 일병에게 고무신 백 켤레를 주마고 약속했다.
주둔지라고 해야 야트막한 구릉 위에 땅을 파고 위장막을 씌운 볼품없는 진지였다. 중앙에는 통신을 위해 두 개의 높은 안테나를 세우고 그 앞에 중대 본부, 그리고 동서남북 네 곳에 기본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각 기지는 어깨높이의 교통호로 연결되어 있었다. 백마부대는 주로 혼바산을 중심으로 봉로항, 동방산(Nui Dong Bang), 망망계곡(Suoi Mang Mang), 다랑강, 방탓강(Song Ban Thach) 등에서 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남 일병은 주로 혼바산 일대로 매복을 나가거나 가끔 입산하여 수색 정찰 임무를 맡았다. 캄보디아로부터 뻗어 나온 디비아 산맥은 산세가 험하고 암석과 동굴, 그리고 울창한 관목과 가시덩굴이 뒤엉킨 정글로 베트콩의 주요 은신처였다. 혼바산 북쪽 기슭에서부터 5부 능선까지의 급경사에는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천연동굴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각종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진입이 불가했다. 고지에서 내려다보면 연합군의 군사시설은 물론 개활지를 통해 접근하는 아군의 전술을 가늠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기도 했다. 포병사격과 항공 폭격을 수시로 가했어도 난공불락의 고지였다. 청룡부대 역시 수없이 작전을 펼쳤음에도 베트콩은 끝없이 출몰했고, 밤이 되면 전술기지로 포탄이 날아오는 등 애를 먹였다. 또한, 식량 조달을 위해 투이호아 마을로 내려온 베트콩들이 양민을 학살하거나 피해를 주곤 했다. 오히려 적군은 밤마다 아군을 놀리듯이 혼바산에 불을 켜놓고 건재함을 알렸다.
남 일병의 소대에 2박 3일간의 매복 작전 임무가 하달된 것은 그가 자대에 배치된 후 두 주 째 되는 날이었다. 월맹군이 식량을 조달하러 마을로 내려온다는 정보가 있어, 1소대에 임무가 하달된 것이었다. 분대장은 혼바산으로 직접 수색 작전을 들어가는 것보다 목숨줄이 길다며 좋아했다. UH1 헬기가 착륙 지점에서 바위와 정글로 뒤덮인 혼바산을 목표지까지 수색해 나가는 일은 목숨을 내놓고 했다. 동굴에 잠복한 월맹군이 헬기가 착륙하여 수색 작전이 시작되고 있음을 모를 리 없거니와, 한국군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기에 병사들은 앞서 전진하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혼바산이 부서지도록 포사격을 끝낸 직후에 신속히 작전을 전개하곤 했다. 그러나 지형에 익숙한 월맹군들을 잡지 못하고 허탕 치기 일쑤였다.
오후에 출발시간이 되자 남 일병은 분대장이 하는 대로 따라 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하는 남 일병을 보고 분대장은 크게 웃었다. 남 일병은 단독군장을 꾸리고 얼굴에 위장약을 바른 후 모기약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양말을 두 개를 더 챙기고 두 개의 수통에 물도 가득 채웠다. 오후 4시가 되자 1소대 전원이 전술기지로 나와 인원과 복장을 점검했다. 뭔 놈의 장비가 그리 많은지 짜증이 났다. 탄약. 수류탄, 크레모아와 조명 지뢰. 조명탄과 신호탄. 연막탄. 모기약, 야전삽. 판초 우의, 전투식량, 꽂을대 총기 기름, 소금. 물 소독제, 말라리아 약, 포승줄, 담요 등 한 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술지 인근까지 트럭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소대는 GMC 군용 트럭을 타기 위해 이동했다. 월남에서는 대개 미군헬기를 지원받아 모든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마을 근처나 정글 진입로에서 매복 작전을 수행할 때는 트럭으로 이동하여 은밀히 목표지까지 도보로 이동하곤 했다. 소대원들 대부분은 상태가 안 좋은 전투복만을 골라 입고 나왔다.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오면 대부분 전투복이 찢어지기 마련이었다. 전투모나 전투복 곳곳에는 적군이 보라는 듯 별난 문구로 가득 차 있었다. 총알 접근 금지구역, 영자는 무조건 내 것, 사는 것이 사는 것 등 읽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문장 끝에는 부적이라도 붙인 것처럼 느낌표를 달고 있었다. 느낌이라기보다는 병사들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표식이었다. 남 일병 같은 초보자들만 등짝이 깨끗했다.
매복지는 혼바산 4부 능선으로 정글 사이에 있는 계곡이었다. 베트콩이나 월맹군은 보급품을 나를 때 주로 계곡이나 그 옆에 나 있는 소로를 이용했다. 적들은 주로 야간에 활동하기 때문에 정글보다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계곡을 이용했다. 적군이 매복 또는 침투로로 자주 사용하던 장소는 이미 미군이 고엽제를 살포하여 죽음의 땅이 되고 말았다. 마치 머리에 기생충을 앓고 있는 아이처럼 혼바산은 백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국군은 헬기 아래로 하얗게 쏟아지는 분말을 보고 밀가루 보급품 포대가 터졌다고 아까워했다. 그러나 뒤늦게 고엽제라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절레절레저었다.
매복지점은 적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드나드는 곳이라 피아 식별에 주의가 필요했다. 민간인이라 해도 주변을 정탐하러 가축을 몰고 오가는 베트콩이 있어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곳이었다. 경계 중에 잠시라도 졸면 여자 베트콩이 남자 불알을 베어간다며 박 상병은 출발할 때부터 엄포를 놓았다.
트럭에서 내려 목표지점까지 이동하는데 첨병 분대는 1분대가 맡았다. 최 상병과 박 상병이 좌우 첨병을 맡고, 그 뒤를 좌측에는 분대장과 남 일병, 우측에는 김 병장과 서 일병이 뒤따랐다. 그리고 나머지 소대원이 그 뒤를 따랐다. 말이 소로지 혼바산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정글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첨병 중에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 이동을 멈추는 일도 있었다. 분대장은 띨띨한 박 상병일 거라며 킥킥댔다.
목표지점에 이르자 좌측에는 1, 2분대가 우측에는 3, 4분대가 진지 구축에 들어갔다. 맨 우측에 자리한 1분대는 계곡의 양옆에 자리한 2, 3분대에 비해 적과 만날 확률이 적은 편이라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소대장은 3분대로 이동하며 1분대가 더 위험하니 경계를 소홀히 말라며 분대장에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3인 1개 조가 되어 매복하기 편하게 호를 파고 판초로 위장막을 씌웠다. 분대 전방에는 최 상병과 박 상병이 크레모아를 설치했다. 또한 호와 호 사이에 견인줄을 설치하고 신호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각 분대의 10m 전방에는 조명지뢰도 설치했다. 남 일병은 전방 사계청소를 하며 Y자로 된 나무를 베어와 분대장과 박 상병의 총구 받침대로 꽂아 주었다.
P-77를 통해 현 위치에서 저녁을 먹으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이어서 떠들지 말라는 소대장의 잔소리도 소음과 함께 전해왔다. 남 일병은 배낭에서 K레이션을 꺼냈다. 이때, 김 병장이 최 상병과 서 일병을 데리고 나타났다. 밥은 같이 먹어야 제맛이라며 나무 아래로 들어왔다. 그가 자리에 앉기 위해 낙엽을 긁어모으자 서 일병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나머지 분대원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똬리를 튼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날 곳을 찾고 있었다. 박 상병은 대검을 꺼내더니 뱀의 머리 부분을 지그시 누르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모가지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분대장이 빨리 죽이라고 괴성을 질렀다. 박 상병은 아깝다는 표정으로 대검으로 뱀의 머리를 치더니 먼 곳으로 집어 던졌다. 평소 행동과는 다르게 과하게 흥분하는 분대장을 보고 모두가 웃음을 흘렸다. 그때 2분대에서 무전이 날아왔다.
CP1, CP1! 여기는 CP2! 무슨 일 있는가?
여기는 CP1! 아무 일 없다고 보고!
여기는 CP2! 아무 일 없는데 왜 소음이 들리나 오버!
여기는 CP1! 정글 뱀 두 마리가 신혼 방을 차렸다고 알림 오버!
여기는 CP2! 오케이! 알만한 사람들이니 이해하고 부뚜막 하길 바람 오버!
무전기를 통해 2분대 병사들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뚜막 하자는 분대장의 말에 대원들은 챙겨온 K레이션을 바닥에 내놨다. 그들이 꺼낸 K레이션에는 김치는 물론 두부, 꽁치, 쇠고기 조림 등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 지급했던 C레이션은 땅콩 잼, 비스켓, 콩, 햄, 버터 등으로 구성되어 한국군 입맛에는 맞지 않아 버리기도 했다고 했다. 서 일병이 일어나 반합으로 끓인 물을 쌀이 든 용기에 부은 후, 대원들에게 돌렸다. 마치 야유회에 나온 분위기였다. 고장 난 자전거를 수리한 후에는 꼭 소주 한 잔씩을 마셨다는 최 상병이 박 상병을 멀뚱히 쳐다봤다.
최 상병님! 왜 그러세요?
내 놔!
뭘 내놔요?
내 놓으라니까?
아이 참! 뭘 내놓으라는 거에요?
죽지 않으려면 내놔라 잉!
같은 상병끼리 왜 그러세요?
뭐-이 새끼야! 같은 상병?
분대장이 웃으면서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김 병장도 박 상병에게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박 상병은 할 수 없다는 듯 참호로 가더니 술 한 병을 들고 왔다. 검은 라벨이 붙은 조니워커였다. 중대장에게 사교춤을 교습한 대가로 받은 술이었다. 분대장은 반합 뚜껑에 술을 따라주며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니 한 잔씩만 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김 병장과는 한 잔씩을 더 했다. 남은 술은 분대장 몫이었다. 못내 아쉬웠던 최 상병이 한 잔 더 달라고 조르자 박 상병이 재빠르게 한 잔을 더 따라줬다. 최 상병의 얼굴에 금세 꽃이 피어났다.
식사가 끝난 후 참호로 돌아온 대원들은 모기약을 더 바르고 용변 볼 장소도 정리했다. 화장실이라고 해야 구덩이를 대충 파고 양쪽으로 발을 디딜 수 있는 나무를 세 개씩 걸쳐놓으면 그만이었다. 담배도 여기저기 뿌려 놓아 뱀이나 개미들의 접근을 막았다. 날은 후텁지근한데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수건에 물을 부어 연신 얼굴과 손을 닦는 게 전부였다. 최 상병은 가끔 바지를 내리고 사타구니를 닦다 물을 너무 쓴다고 분대장에게 핀잔을 들었다. 모기, 지네, 산게, 산거머리, 불개미 등 아군을 빼고는 전부가 적이었다.
최 상병은 열 시가 넘어가자 무료했던지 가끔 견인 줄을 당겼다. 2분대에서도 처음에는 약속대로 한 번씩 신호를 보내다가 나중에는 적군이 나타났다는 신호로 계속 줄을 당겼다. 바짝 긴장하는 남 일병에게 분대장은 장난이라며 안심시켰다. 박 상병은 분명 최 상병 짓이라며 맞대응 격으로 줄을 계속 당겼다. 견인 줄은 무료한 병사들의 놀잇감에 불과했다. 소대장은 P-77 무전기를 통해 분대장들에게 한 시간마다 보고를 받았다. 남 일병의 임무는 참호 뒤편에서 잠자는 분대장을 한 시간마다 깨우는 일이었다. 경계는 최 상병과 남 일병의 몫이었다. 다른 초소도 상황은 똑같다고 했다.
자정 무렵 우측 지점에서 요란하게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겁하는 남 일병을 보고 박 상병이 어깨를 두들겼다. 원숭이들이 이동하는 소리였다. 남 일병이 자세히 들어보니 원숭이 소리였다. 원숭이 무리도 1소대 매복지를 확인하고 우두머리가 자주 다니던 경로를 우회하여 통과하는 모양이었다. CP에서 소대장으로부터 무전이 날아왔다. 그리고 이어 원숭이들이 조명지뢰를 건들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메시지였다. 왁자지껄한 무전기 소리에 분대장도 깨어 참호 속으로 들어왔다.
사단은 새벽 두 시경에 났다. 2분대와 3분대 계곡 초입에 아래로 내려갔던 원숭이 떼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미에 민가에서 입산하는 베트콩이 섞여 있었다. 2분대 문 일병이 계곡을 향해 소변을 보다가 원숭이가 아닌 진짜 베트콩을 발견한 것이었다. 몇 명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문 일병이 참호로 돌아가 분대장에게 보고하자 견인 줄이 당겨지고 무전기가 요란을 떨었다. 그런데 사격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겼다. 이어서 요란하게 콩 볶는 소리와 함께 원숭이인지 사람인지 모를 물체들이 뒹굴었다. 검은 물체가 괴성을 지르며 흩어지고 조명지뢰가 터지자 멀리 달아나는 두 명의 베트콩도 보였다. 그들이 첨병이었는지 아니면 전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중대와 대대에 상황이 보고되었지만, 그 후에도 무전기는 징징거렸다.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하기는 대원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무전기를 통해 누가 먼저 사격을 했는지를 밝히는 일은 무의미했다. 모두가 함구하고 비밀로 하는 수밖엔 없었다. 적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동이 터야 알 일이었다. 자칫 성급하게 내려갔다가는 총알받이가 되기 쉬웠다. 월남전에서 적이나 아군이나 동료의 시체를 적진에 남겼을 때는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철칙이었다. 만일 적군 중 사망자가 있을 경우는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더 많은 적이 출동하여 습격할 위험이 있었다. 이미 대대로부터 매복지점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이동하지 말라는 무전도 전달되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안개로 이동할 수 없었다. 졸병들은 오금이 저려 소변도 제대로 못 보고 구덩이에서 밤을 지새웠다. 반면, 김 병장과 최 상병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후 겁이 나서 못 견디겠다며 남은 술을 먹으러 왔다. 분대장이 기가 찬 표정을 보였다. 쇠고기 조림에 술병을 게 눈 감추듯 비운 후에야 그들은 떠났다. 결국, 깡통과 빈 병을 땅에 묻는 일은 남 일병의 몫이었다. 그러나 남 일병은 크레모아 방향으로 수류탄 던지는 자세를 취하며 집어 던졌다. 옆에 있던 최 상병이 피식 웃었다. 적이 나타났어도 총 한 번 쏘지 못한 아쉬움은 최 상병도 마찬가지였다.
동이 트자 크레모아와 조명지뢰 등을 제거한 후 이상 유무를 보고하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크레모아는 분대장이 직접 제거하고, 조명지뢰는 화기 소대가, 견인 줄 및 주변 정리는 병사들의 몫이었다. 이어 전방 30m까지 분대별로 수색하라는 명령이 전해졌다. 2분대와 3분대는 사고 지점으로 수색을 좁혀가고 1분대와 화기 분대는 전방과 측방을 사주 경계하며 수색에 임했다. 매복지를 들락날락하며 몸을 풀던 병사들은 긴장 반 호기심 반으로 실탄을 장전하고 앞으로 나갔다. 1분대도 단독군장 차림으로 유사시에 대비해 실탄을 장전하고 5m 날개 대형으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 일병은 얼마 가지도 못해 벌러덩 미끄러져 졸병티를 냈다. 분대원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은 것은 최 상병 때문이었다. 남 일병이 전방으로 던진 깡통을 최 상병이 밟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깡통을 밟자마자 똥 밟은 얼굴로 분대장을 다급하게 불렀다. 김 병장도 달려왔다. 최 상병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뢰를 밟은 것 같다며 징징거렸다. 분대장은 군화 사이로 보이는 깡통 뚜껑을 보고는 최 상병의 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남 상병이 갸우뚱하며 쓰러지자 분대원 모두가 한바탕 웃어댔다. 밤새 참고 견딘 소리였다. 그래도 최 상병은 목숨을 건졌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에 이상이 없는지 사타구니를 만지며 확인했다.
가장 긴장하며 현장 수색에 나선 것은 3분대였다. 행여 베트콩이 지뢰라도 매설하고 도망을 갔으면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3분대장은 야전에서 독도법과 화기 운용에 익숙한 하사였다.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그는 휴가를 마치고 귀대 차 들른 청량리 골목에서 앳된 창녀에 반해 그를 아내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나 계집질과 노름에 이골난 그의 아내는 결국 어린 딸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서울 뒷골목을 샅샅이 뒤지고도 아내를 찾지 못한 그는 아이들을 노부모에게 맡기고 월남전에 자원했다고 했다. 가끔 장교들에게 꼴통 짓을 해서 그렇지 사병들하고는 잘 어울렸다. 그는 분대원들을 날개형이 아닌 일자형으로 갖추게 한 뒤, 정글도를 휘두르며 선두에 섰다. 전투 경험으로 보아 적들은 무엇을 매설하기는커녕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기 바빴을 것이었다. 이런 때 분대장의 용맹함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의 기회였다.
원숭이들이 죽은 현장은 처참했다. 한 번도 교전을 경험하지 못한 병사들은 ‘원숭이들이 사람이라면 어떤 느낌일까’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육시를 당한 원숭이는 총 네 마리였다. 그리고 주변에서 AK-47 소총 한 정과 잘린 원숭이 꼬리가 발견되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자원했다는 문경새재의 오 일병이 발견한 것이었다. 분대원은 너나 할 것 없이 함성을 질렀다. AK-47 소총 한 정은 베트콩 1명을 사살한 것과 같은 전과로 평가했다. 베트남전에서 시체 수습은 짐이 될 뿐이라서 전리품만 챙겨 전과를 인정받았다. 고참들은 미리부터 오 일병에게 자기와 동시에 소총을 발견했다며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3분대장은 원숭이 다섯 마리 사살에 AK-47 소총 한 정 습득이라고 소대장에게 보고했다. 이어 소총은 분대원 전원이 동시에 발견한 거라고 보고하자, 소대장도 이를 알아듣고 웃으며 철수를 명했다. 분대원 모두가 인근 도시로 특박을 나갈 수 있는 전과였다. 그러나 웃음도 잠시, 대대본부로부터 날아 온 무전에 소대원 전체는 낙담했다. 소대는 조식을 마친 후 철수하지 말고 마을로 숨어든 베트콩을 수색해서 잡아 오라는 것이었다. 소대장은 불평하는 대원들에게 그나마 산에서 개활지로 이어지는 늪지대는 2소대와 3소대가 수색에 들어간다고 위로했다. 1소대가 매복하던 지역은 자리를 좌측으로 100m 이동하여 화기 소대가 맡는다고 했다.
아침부터 계곡과 늪지대에서 뿜어 올리는 안개가 세상을 하얗게 말아 올리고 있었다. 남 일병은 철모에 꽂혀 있는 나뭇가지들을 뽑아내면서 야릇한 흥분감을 느꼈다. 그것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 섞인 감정이었다. 갑자기 엉덩이 근육이 뭉치며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