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벤에셀 예배는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사무엘상 7:1-17 . * 설맥님의 <예배는 신앙의 시금석이다>를 보충하여 설교를 작성했습니다.
<생활의 달인>이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생활의 달인>은 2005년부터 SBS에서 방영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수십 년간 한 분야에 종사하여 열정과 노력으로 달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삶과 스토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2008년 방영된 위폐 감별사 이야기입니다. 미션을 수행하는데, ‘방 사방에 5만 원짜리 지폐 1000장을 다닥다닥 붙여놓고, 그 중에 3장의 위폐가 있으니 찾으라.’는 것입니다. 위조지폐 감별사는 제한된 시간에 2장을 찾아낸 후 ‘나머지 한 장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미션은 실패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PD는 ‘위폐는 본래 2장뿐이었다’며, ‘미션을 성공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이 위조지폐 감별사가 바로 서태석 씨입니다. 서태석 씨는 현재 70세로,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신 분이십니다. 그는 카투사에서 근무 시 위조지폐를 감별하는 출납부서에서 어깨 너머로 본 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은행에 입사하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는 중학교 학력 때문에 은행입사가 막혀버렸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외환은행 허드렛일을 하는 용역으로 일하는 잡부가 되었습니다. 서태석 씨는 그 때부터 수많은 화폐들을 집에 가지고 와서 사진촬영을 하고 분석을 했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냄새를 맡고, 찢으며 청각으로 흔들림을 감지하고, 혀로 맛을 보고, 손가락으로 튕기며 촉감을 익혔습니다. 그는 이러한 완벽한 동물적 프로의식에 자기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부되면서 최고의 위폐감별사로서 능력을 스스로 터득한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미국 FRB에서 수입한 200만 불을 이송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루 속에 든 지폐의 무게가 이상하다’는 직감아래 지폐가 위폐임을 지적했고, 수사 결과 그의 지적이 맞아, 전문가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1988년 올림픽 때 쏟아져 나왔던 위폐 검증 실적과 미국 미 국토방위청 산하 비밀수사국에 참석하여 위조지폐에 대한 판별력을 검증받으면서, 세계 최고의 위폐감별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회가 어떠합니까? 학력과 인맥이 조직 내 인사를 지배합니다. 아무리 위폐감별을 꼭 하고 싶고, 열심히 분석하고, 재능이 있었다 한들, 정식으로 은행에 입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코스를 밟은 사람들의 밥그릇 챙기기를 결코 서태석 씨는 이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태석 씨는 성공했고, <내 인생이 진짜 인생이었다.>는 감동스런 책까지 썼습니다. 서태석 씨는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위폐는 첫인상에서부터 감이 온다. 사람마다 표정이 있듯이, 지폐 또한 감지되는 저마다의 표정이 있다. 99% 비슷해도 비슷한 것은 가짜다.’
저는 위조지폐 감별사인 서태석 씨를 보며, ‘이 분은 바로 지폐의 시금석이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금석’이란 어떤 상황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시금석’이란 귀금속을 판정할 때 쓰이는 검은 돌로서, 흑색 규산질 암석입니다. 금과 은의 순도를 검사할 때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순도가 몇 %인지, 혼합물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를 알기 위해 진짜와 비교할 대상의 표면을 시금석으로 긁어서 그 가루의 색깔을 비교함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시금석은 누구이십니까? 영원불변한 진리의 시금석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진리의 시금석이십니다. 마 16장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 14:6에서 ‘자신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스스로 증언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세상에 진리라고 불리는 것들이 많지만, 예수님은 ‘나만이 영원불변하고, 참된 진리의 시금석이심’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금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조명하면, 참과 거짓이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시금석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 선지자가 어느덧 45세 가량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사사가 되었을 때 기록된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매우 타락해 있었고, 무능력과 패배감에 빠져있었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회복’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면,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며, 그만을 섬기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3절)고 선포하였고,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삶속에 박힌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구체적인 영적 부흥을 하게 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리라”(5절) 명령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백성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하루 종일 금식하면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6절) 회개했습니다. 영적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된 회개를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자기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을 깨닫고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적으로 부흥하게 함으로 축복을 주셨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는 평강과 풍성의 축복을 현실적으로 누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때 원수 블레셋이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을 침략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의 침입으로 심히 두려워하게 될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20년 가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다가, 이제 막 ‘하나님을 가까이 해 보겠다’고 회개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옮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는데, 이렇듯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평안을 축복으로 누려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도 작은 시험이 아니라, 큰 시험이었습니다. 잘못했다가는 모처럼 이스라엘이 마음먹은 영적 부흥도, 신앙 결심도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마음에 찾아온 두려움에 계속 사로 잡혀있다면 큰일입니다. 그 뒤 상황은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 운동은 중단 될 것이고,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순식간에 동요하여 뿔뿔이 흩어질 가능성이 90% 이상입니다. 그들은 블레셋에게 사로잡혀 또 다시 그들의 종이 되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패배감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학대하며, 우리들을 진짜로 버리셨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옛 생활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성장과 축복의 길로 갈 것인가?’ 갈림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적 갈등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뭐라 말합니까?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요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당신이 가서 블레셋에 항복하든지, 블레셋과 타협하여 우리의 생명을 구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닥친 블레셋이라는 두려움의 존재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여 우리의 이 생명의 부흥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도하게 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앙망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상을 버리고, 금식하며 회개하는 진정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무엘 선지자가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9절)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을 들으시고, 지도자 사무엘의 중보기도에 응답하셔서 블레셋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여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셨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사방 지경을 도로 찾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 부흥뿐만 아니라, 땅의 회복을 축복으로 누리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는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며, 그 돌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회개하고, 위기 앞에서도 옛날과 같이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셔서 영육 간에 회복시켜 참된 평안을 축복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도움을 받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셨고, 우릴 도와주시고, 우릴 도와주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도와주셨고, 지금도 도와주시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벤에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고 영육 간에 회복되는 축복을 받은 것 같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영육 간에 회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고 승리할 수 있다면,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제 이스라엘을 도와서, 어떻게 블레셋을 물리치셨나?’를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다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하나님이 언제 이스라엘을 도와주셨습니까?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번제,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원수 블레셋의 공격이 코앞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이제 막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백성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어 의지했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온전한 번제를 드렸습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마음과 생각이 좌우로 흩어짐이 없이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그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모하는 겁니다. 또 “번제”는 ‘제물을 각을 떠서 태워드리는 제사’로, ‘내 영혼과 내 생명과 내 육신과 내 모든 삶을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태워, 헌신과 충성을 제물로 드리는 향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무엘 선지자는 블레셋으로 인한 그 위기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의 제사를 예배로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번제 같은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어려울수록 원칙대로 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대충 뛰어 넘어가면, 당시는 모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중에 그 일로 발목이 붙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급하다고 대충 제물을 잡아서 번제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의 결론으로 17절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라마에서도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무엘 선지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그 신앙이 회복되어 이제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차피 문 앞에까지 다다른 적들의 칼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형편은 태풍 전야,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들은 신앙이 회복되어, 하나님만을 에벤에셀로 삼고, 위기 중에도 도와주실 하나님만 순교자의 마음으로 오직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을 응답하여 주셔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더 이상 아무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으로 시작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가치는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를 판단하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있을까?’ 장담하긴 어렵겠지만, 그러나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부터 페르시아 제국까지 국가의 재상을 지낸, 믿음의 사람입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 때에, 다니엘은 정적들로부터 모함을 받아 한 달 동안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다가 발각되면 사자의 밥이 되어야 했습니다. 정적들은 다니엘이 이런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기도할 줄 알았기에 이런 모함을 꾸민 겁니다. 이 법은 다니엘을 사랑하는 다리오 왕도 변개할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법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 법을 알고도 어떻게 했습니까? ‘한 달 동안이니까, 한 달만 좀 다르게 기도하자. 소나기가 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지금은 소나기가 오는 것 같으니, 문을 닫고 하던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던지, 아니면 개점휴업을 하던지 하자’ 타협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다니엘은 평소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누구든지 보라’는 듯이 변함없이 하루에 세 번씩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이 일로 사자 굴에 끌려가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막으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오히려 다니엘을 모함한 원수들이 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의 공격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온전한 제사를 드린 사무엘과 백성들처럼, 다니엘도 온전한 예배를 기도로 하나님께 드렸던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에게 예배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4:23)고 말씀하시고, 연이어서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지금까지도 계속 찾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는 자들이 돼야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하나님을 찾는 자 10명이 없어 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1명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었어도, 하나님은 그 한명으로 인해, 심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민족이 살고, 우리 늘푸른교회가 부흥하고, 우리 가정이 평안하게 살게 됩니다.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온전하게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요즘은 핸드폰이 우상입니다. 예배 중에 핸드폰 사용을 막아야 예배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금 이 순간도 마귀의 추종자가 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스리시고, 복을 주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배를 통해서 다스리시고, 복을 주십니다. 성도는 예배에 참여하고,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은혜와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통치권 안으로 점점 더 들어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성도가 예배를 가볍게 여겨 주일을 성수하지 않고, 세상일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는 먼 이방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배를 우선해서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은 어디서 공급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다’면 먼저 예배를 회복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불가피하게 주일 예배에 참여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있는 곳에서 예배를 드릴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11시에 참여 못하다면, 대신 새벽에라도, 오후라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느 곳이든, 어느 때든 구별하여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창을 열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곳이 참된 예배의 장소일 수도 있고, 짧은 시간일지라도 온전한 제단이 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언제 블레셋이 물러갔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드릴 때입니다. 언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더 이상 침공하지 못하고,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육 간에 회복되어 평강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누렸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을 때입니다.
우리 성도는 위기의 순간 앞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혀 없어 보이는 듯한 절대절명의 순간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군대,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 있을 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오늘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앙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런 상황인데도 예배를 드리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 드립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ale고 삽시다. 오늘 우리가 있는 이곳이 에벤에셀이 되게 합시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 찬양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도 오늘, 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에벤에셀 예배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시금석은 무엇입니까? 그 시금석이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음에 다시 깨닫고, 하나님이 찾으시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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