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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십일조와 봉헌물[8]
말 씀 말라기 3장 7-12절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개인의 소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유가 적으면 살아가는데 힘겹기 때문에 그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풍족한 삶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내가 일을 해서 벌어들인 재물일지라도 영원히 내 개인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나그네와 같이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를 영원히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라 하시면 세상에서 빌려 쓰던 모든 소유를 놓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려서는 안 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후에 천국으로 인도하시려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면 영안이 열리면서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왕권이나 주권, 그리고 통치자와 권세가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믿음을 통해 세상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며,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 빌려 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성도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세상을 중심으로 바라보던 모든 관점을 천국으로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성도들은 헛된 세상을 버리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므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삶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면 지금까지 불완전하고 불안정했던 인생이 그리스도의 반석위에서 흔들림 없이 안식과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라는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타락하자 더 이상 제사를 통해 죄사함의 은혜를 주실 수 없게 되자 인간의 몸을 가지고 직접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거룩한 사건을 사도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제사를 파하시고 나서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실 방법은 바로 성육신 하시는 것뿐이었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해서 피조물과 같은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둠에 가려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조롱했고, 자신들의 죄를 위해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을 핍박하며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했지만 이 모든 사건 역시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이셨습니다.
이렇게 깊으신 사랑과 계획은 성도들이 믿음을 가져야만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보는 성도들만이 이 세상이 지나가는 바람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도들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소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4장 20절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지난 주에 아브람과 멜기세덱에 관해 자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일조가 율법으로 법제화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멜기세덱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모든 믿음의 자녀들이 십일조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도중 벧엘에서 “여호와께서 아버지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도록 도와주시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 자라고 인정하신 아브람과 야곱의 서원을 보면 제사장이 없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스스로 서원했다는 것은 십일조가 그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14장 28-29절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중에 분식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는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매 삼년끝에 드리는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들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을 볼 때 아브람과 야곱이 드린 십일조 역시 고아와 과부와 객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이 건강하고 인간답게 올바로 살 수 있도록 율법을 주실 때 십일조를 온 백성이 지키도록 법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율법으로 정하신 것은 아브람과 야곱이 드린 십일조의 근본을 올바로 알려주시기 위함이었고, 온전한 십일조를 지키는 경건한 백성에게 하늘의 문을 열고 복을 부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방법이 성육신이라고 한다면 성도들이 믿음을 보여드릴 수 있는 방법은 믿음의 삶을 사는 자신을 드리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 십일조를 온전하게 드리며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의 생명까지 모두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십일조의 돈을 드리면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시험한다면 그 자체로 악한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주인으로 함께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사람들이 헛되고 헛된 세상의 재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과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자연스럽게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기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세상과 재물보다 더 소중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책망하셨습니다.
아모스 4장 4-5절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 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북이스라엘은 제사장이 모두 남유다로 갔기 때문에 일반인으로 세운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타락했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했는데 그들이 낸 십일조는 모두 우상숭배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남유다 역시 제사장과 백성이 타락하여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는 일에 태만해졌고, 흠있는 제물을 드리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자 제사장들은 성막에 전념 할 수 없게 되어 세상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느헤미야 13장 10절에 보면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믿음을 버린 결과 십일조를 하지 않았고, 기업이 없이 성막에서 일해야 하는 레위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세상의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일을 해야 하는 제사장은 백성을 가르치지 않았고 백성은 배우지 못해서 십일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순환이 반복되고 만 것입니다.
제사장은 말씀을 상고하고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백성을 위해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북이스라엘과 유다백성이 이혼과 잡혼이 성행한 것을 보면 아브람과 야곱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속에서 우러나오는 십일조를 드리는 신앙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만약 십일조를 드렸다고 해도 그 믿음은 세상의복을 받기 위한 수준이기 때문에 공의로운 제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십일조는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고 영생을 받기 위해서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이 드리는 봉헌물입니다.
이런 성도가 자신의 삶을 통해 드리는 봉헌물을 기뻐 받으시는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의 개념입니다.
헌금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는 믿음의 행위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을 성도가 자신의 삶 전체를 드리는 믿음으로 받으시기 때문에 깨끗한 봉헌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헌금, 시간, 말, 행동까지 모두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스스로 자원하여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시간과 헌금과 헌신이 바로 십일조이므로 성도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신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들에게 죄의 길에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백성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며, 말씀으로 인도하시지만 그들은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죄에 빠져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도 떠난 줄 모르고, 저주를 받아도 받은 줄 모르는 그들의 교만은 극에 달아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더러운 줄 아는 자만이 실로암으로 가서 씻는 것처럼 더러운 줄 모르는 자들은 왜 씻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씻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제사장과 백성들이 점을 치고, 간음하며, 거짓맹세하고, 품꾼의 삯을 억울하게 하고,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말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던 길을 왜 돌이켜야 하는지 모르는 그들은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계속 말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 백성에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느냐고 다시 말씀하시자 그들은 우리가 언제 주의 것을 도둑질 했느냐고 불평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모르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곧 십일조와 봉헌물을 도둑질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말라기 강해를 들으신 여러분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백성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멸시하는지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셨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타락한 그들은 하나님께 더러운 떡을 바쳤고, 점과 흠이 있는 제물을 드렸으며, 이혼과 잡혼을 하며 거룩한 자손을 낳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믿음을 가지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하시며 십일조와 봉헌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원하신 것이 정말 재물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것이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면 백성들이 십일조와 봉헌물만 잘 드린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재물이라면 이렇게까지 화를 내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백성들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십일조를 못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다면 이혼이나 잡혼을 하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점을 치거나 간음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아브람이나 야곱처럼 아낌없이 십일조를 떼어 성막의 일을 하도록 도왔을 것이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대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신 것은 재물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신앙을 가졌다면 십일조를 법으로 드리던 이 때에 믿음의 백성들은 십일조를 범하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드리는 봉헌물이 바로 공의로운 제물이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28-29절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고 싶거든 예수님을 잘 믿고 주의 말씀대로 사시면 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거듭난 성도들의 믿음이라고 본다면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영혼구원을 위해서 구속사업을 완성하는 것이므로 영원구원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에 양식을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속사업을 완성하시자 성도들은 모두 성전이 되었습니다.
성전이 된 심령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즉 영혼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구원을 위해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복을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축복은 영적인 복일 수도 있고, 육적인 복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복은 세상에 빼앗기지 않는 복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말씀대로 산 사람만 시험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 자는 이미 복을 받은 성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만이 절대자라는 것을 믿는 성도가 드리는 믿음이 바로 십일조이며 시험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온전한 십일조의 삶을 드리는 성도가 드리는 제물이 바로 기뻐 받으시는 공의로운 봉헌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십일조와 봉헌물을 제대로 드리기 위해서 성도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실된 믿음을 가진다면 12절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삶을 살아낸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실 것이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했을 때 이방인들이 소문만 듣고도 두려워했던 것처럼 축복받은 민족이라는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삶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받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할 수 있으므로 먼저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사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응답 받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출의 십일조를 바치는 법은 율법 이전에 족장시대부터 있었던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법제화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십일조의 근본은 세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 둘째 과부와 고아를 돕는 구제, 셋째 성전을 운영하는데 모든 백성이 함께 동참하도록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은 자발적으로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귀한 뜻을 담아 십일조를 명하셨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이 사람들에게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외식적인 신앙을 보이자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단지 물질로만 보셨다면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십일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삶을 통해서 드려야 하는 봉헌물이기 때문에 외식을 행하는 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도 행하고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와 언약을 믿는 진실한 믿음을 갖는 것이 먼저이고, 그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헌금을 드려야만 올바른 십일조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는 법 이전에 백성들이 당연히 믿음으로 드리던 봉헌물이었습니다.
그 십일조가 법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자기의 소유물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이므로 절대자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자기를 바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세상사람들이 천국에 관해서, 주일마다 교회 가는 것에 대해서, 인생을 즐기지 않고 헌신하는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 쉽게 이겨내면서도 헌금에 관해서 시비를 걸면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 안에 돈을 주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시간으로, 몸으로 헌신하는 것보다 물질로 헌신해야 하는 부담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물질로 헌신하는 것은 주저하면서, 물질의 복을 더 받기 위해서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다면 신앙 자체가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에는 거부감 없으면서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리라는 말씀에는 시험 든다면 그 마음 역시 신앙의 중심이 물질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지 않으려고 헌금에 관해 불평하는 자체가 이미 재물에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을 때 자원하여 십일조를 드리고, 야곱처럼 자기의 인생이 힘겨울 때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십일조를 서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십일조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타락하여 하나님께 점과 흠이 있는 것을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내리신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자비를 주시고, 백성들은 정직한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림으로 이 선한 관계가 계속 이어진다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안전하고 행복할 것입니다.
험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만 믿고 사는 성도들이 부끄럽지 않도록 창고에 가득 복을 부어주셔서 성도의 얼굴이 빛나게 하시고, 근심과 염려를 물리치도록 도우실 것이며, 세상의 부러움을 사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타락한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심판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던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대로 십일조와 봉헌물을 온전히 회복하여 축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믿음의 삶의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 받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면 그것으로 세상의 고난은 끝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집을 양식으로 채우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 하늘의 복을 받아 창고가 넘쳐나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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