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중에 같이하신 예수님
본 문 : 눅 24 : 13 - 35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렘브란트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참 인물도 잘났지만 그림에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부귀와 명성을 함께 가진 그런 사람 이였습니다. 아름다운 부인도 있었고 재산도 많았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온 정성을 다해서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 아내가 죽고 말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실망하고 낙담하고 절망했습니다. 물론 그림을 그리는 활동마저 다 때려치우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에 친구가 그를 교회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는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서 믿음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속에서 무한한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라는 유명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돌아온 탕자,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 이삭의 희생, 엠마오의 그리스도 등등, 지금 남아 있는 그림만 해도 유화가 600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수천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러분,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예수그리스도 생각해보십니다. 이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절망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그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따라가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가고 계시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사실 제자들은 절망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들과 같이 가고 있는 이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더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렇게 크고 놀랍다는 것을 미처 모르기 때문에 저들은 낙담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이 열려있지 않으면 불행한 일입니다. 놀라운 축복이 눈앞에 주어져 있는데도 항상 불만이고, 항상 투덜댑니다. 지금 현제 내 앞에 펼쳐진 삶의 아름다운 축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엠마오로 향한 제자들처럼 주님을 곁에 두고서도 절망과 낙심 가운데 거하는 거예요.
프랑스의 황제였던 나폴레옹이 어느 날 부관하고 둘이서 평범한 옷으로 변장을 하고 어느 시골여관에 가서 하룻밤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 아침에 여관비와 식비를 내려고 하니까 주인이 14프랑이라고 하는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습니다. (1프랑 : 1230원) 그런데 부관이 돈을 내려고 주머니를 보니까 하필 지갑에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쩔쩔매니까 나폴레옹이 “그럼 내가 내지”하고 지갑을 열었는데 나폴레옹도 지갑이 텅 비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인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주인장, 실수로 돈을 못 가져 왔는데 집에 가서 갖다 드릴 테니 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인은 펄펄 뛰면서 헌병대를 부르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때에 나폴레옹과 부관은 겸손한 자세로 통사정을 합니다.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꼭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어떻게 당신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당신들 혹 상습범이 아니냐고 하면서 더 큰소리를 칩니다. 그때에 웨이터 하나가 나와서 주인에게 말합니다. “제가 보니 믿을만한 사람들 같은데 한번 믿어보시죠.” 그러자 주인이 웨이터에게 큰소리를 치며 말합니다. “믿을만하면 네가 대신 내 줘” 그러자 웨이터가 “그럼 제사 대신 내 드리겠습니다. 다음에 저에게 가져다주십시오.” 하고는 14프랑을 대신 내 주었습니다. 물론 불과 얼마 후에 부관이 돈을 가지고 와서 웨이터에게 돈을 갚았을 뿐만 아니라, 주인을 불러서 묻습니다. “이 식당 얼마에 팔 수 있습니까?” 그러자 주인이 “삼만 프랑입니다.” “그래? 여기 삼만 프랑 있네.” 나폴레옹의 부관은 그 식당을 사서 그 웨이터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식당은 나폴레옹 황제가 자네에게 주는 감사의 선물이라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사람을 몰라볼 때가 있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기회를 몰라보기도 합니다. 내게 주어진 형편이 참 괜찮은데 또 행복할 수 있는데 내가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은 실망을 할 때가 있어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그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얘기하고 함께 길을 걷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해석해 주기 까지 하십니다. 너무나 다정하고 다감하신 주님을 곁에 두고서도 그들은 왜 절망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 경험에 집착되어도 상황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지금 잘못된 자신들의 기대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속적인 왕으로 오셨고 유대나라를 회복하실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나라의 정치적인 왕으로 믿고 있어요. 하루라도 빨리 이 나라가 독립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 간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으로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눈을 멀게 하는 또 한 가지 원인은 인간적인 경험과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걸 보아서 알고 있거든요.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하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건 말도 안 돼, 그럴 수가 없다’고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으로 단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경험과 자기 지식에 꽉 붙들려서 예수님의 그 거룩한 부활의 역사를 수용할 수가 없었어요.
또한 예수님이 지적하신 바, 26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성경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님 곧 메시아는 고난을 받고, 그 고난을 통해서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룰 것이라고 성경이 분명하게 예언했지만 성경의 예언을 똑바로 몰랐기 때문에 부활사건을 바르게 해석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인간적인 실수도 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들은 여자들이 무덤에 갔으나 예수님의 시체를 보지 못했고 부활하셨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너무나 소극적이죠? 만약 여인들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 그들 스스로 무덤엘 가서 확인을 해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미리 단정하고 낙심한 채 고향을 향해 발을 돌리고 만 것입니다.
미시간대학에서 연구한 발표에 의하면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활양식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성공한 사람들은 언제나 걸음걸이가 빠르답니다. 좌우간 느릿느릿 걷는 사람은 성공하는 일이 별로 없어요. 성공하는 사람들은 일이 있거나 없거나 빨리 걸어요.
두 번째는 언제나 앞자리에 앉는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앞자리, 어떤 모임에 가서도 앞자리,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앞자리에 앉습니다. 언제나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작은 일에도 집중한다고 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는 더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여기 보는척하고 딴생각을 한다든지, 눈을 뜨고는 있지만 실상은 잔다든지 그러면 안돼요. 집중해야 합니다. 또한 성공하는 사람은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일에도 웃는 얼굴로 여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매사에 적극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그런데 너무나 소극적이었습니다. 소극적으로 대처할 일이 따로 있지 지금 어떤 사건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놀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는 것으로 그냥 끝입니다.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리고 엠마오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 그랬습니다. 절망하고 낙심하고 코가 빠져서 낙향하는 저들을 찾아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스승을 버린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 분입니까? 그리고 하나하나 성경의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이 사람들아 성경을 알아야 될게 아닌가? 메시야는 당연히 고난을 받고 부활할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은 그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절망하고 낙심하는 바람에 흩어져버린 그들의 분별력을 새롭게 해 주시고,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드디어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본문 32절에 보면 그들이 이렇게 스스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망하고 낙심하고 포기 했을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절망 중에는 내 앞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수상을 지냈고,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여성 10명 중에 한 분으로 꼽히는 골라 마리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실망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우리가 절망하고 낙심하고, 실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 철저하게 실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욕망과 욕심과 기대를 깨끗이 버리는 순간에야 주의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세 가지 행복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할일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행복한 사람이다. 둘째, 사랑할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셋째,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소망을 가진 사람은 더욱 행복한 사람이다. 다시 그는 말합니다.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소망을 가진 사람은 할일도 알게 되고 사랑의 대상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문제는 소망입니다. 절망 중에 엠마오를 향했던 이 제자들이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확신에 꽉 차는 순간 어떻게 합니까? 오던 길을 돌려서 당장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왜요? 할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절망하고 낙심하며 시간을 보낼 수가 없습니다. 증인의 도리를 다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소망은 환경이 달라져야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을 꿈꾸는 사람에게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대상이 보입니다. 전에는 할 일이 없다고 푸념했는데 이제는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절망하는 엠마오를 가던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던 순간 새로운 삶의 소망과 소명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내가 할일이 무엇인지를 환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소극적이고 비겁했던 사람이 치열한 삶의 현장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증언하게 됩니다.
여러분, 혹 지금 나는 절망하고 낙심한 채 엠마오를 향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깨가 축 쳐져서 힘없이 실망하고 걷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 실망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내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현재도 주님은 확실히 나와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믿음의 눈을 크게 열어서 보십시오. 마음을 활짝 열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지고 새로운 역사는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반드시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역사를 체험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