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요셉의 믿음의 진면모
말씀: 히브리서 11: 22
서론 : 하나님께서 새 해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를 통해 받으실 영광이 있으시기에 우리에게 2004년을 허락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2004년도가 하나님께서 잔치를 벌이실 만큼 기쁘시게 해 드려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본문의 주인공처럼 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왜 그런가요? 본문의 주인공 요셉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어떻게 살았길래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뻐하시고 영광을 크게 받으셨을까요?
첫째로 요셉은 고난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후반부 삶은 평탄하고 부귀영화가 넘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반부 삶을 대부분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았을 겁니다.
더구나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형들의 질시를 받아 소위 가족 가운데 언제나 늘 왕따를 당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형들의 손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갑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애굽의 장군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 신세가 됩니다. 이때 나이가 약 27-8세 정도 됩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그런데 그런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요셉이 한 일이 뭡니까? 원망입니까? 절망인가요? 포기와 낙심인가요? 아닙니다.
요셉이 한결 같이 취한 자세는 오로지 한 방향만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원치 않는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주님이 주실 은혜를 사모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붙잡았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혈기 왕성한 나이에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다 완숙한 나이가 아닌데도 어떻게 이처럼 성숙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요셉이 어린 시절에 꿈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형제들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셉은 처절하게 힘들고 고통스런 삶의 한복판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차디찬 감옥 신세를 경험하면서, 피를 나눈 형제들에게 노예의 신분으로 팔려가면서 그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비전과 말씀을 가슴에 품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어찌 되었든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흔들리지 않았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이 가중 될 수록 하나님만 더욱 굳세게 붙잡고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그토록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2004년도는 그리 밝지만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양탄자 깔린 탄탄 대로를 달리게 하는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묵묵히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디다. “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정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하면서 올 한해 이 말씀만 붙들고 묵묵히 살아가라고 권면 했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세월이 더해질수록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그래요. 사람은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실망을 안겨 줍니다. 사람의 힘을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상처는 더 커져요.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마음이 참 편하고 행복해 집니다. 하나님을 붙잡으면 웃음이 있고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그리고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기뻐하자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베드로는 감옥 속에서도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붙잡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3대 정신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혁명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해서 한 일이 뭡니까? 강간과 약탈과 강도 짓이었어요.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자유와 평등과 박애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더 악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도 보세요. 공산주의의 출발은 빈민을 구제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온 사상입니다. 칼 막스가 독일에서 이 공산주의 이론을 강의하다가 대학 강단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영국으로 건너가서 런던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런던 도시 생활이 말이 아니였어요. 빈부 격차가 극심했고 거리마다 걸인들이 즐비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면서 칼 막스는 공산주의 이론을 독일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확립합니다. 그래서 이 공산주의 이론을 런던에 뿌리내리도록 하려고 했지만 당시 요한 웨슬리 형제의 도덕성회복 운동과 민족의식 개혁에 밀려 결국 소련으로 올라가서 공산주의 이론을 정착시켰습니다.
칼 막스의 주장은 공산주의 정치를 하면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고 함께 더불어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 분배의 원칙을 주창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죽이는 사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계 공산주의가 받아들여지면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죽었습니까? 모든 국민이 잘 산다 던 공산주의가 소수 지배 계층만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러시아의 스탈린은 자신이 공산주의 집권을 하면서 맨 먼저 한 일은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 숙청하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잘 살게 하고 모든 사람이 공분배의 원칙에 따라 평등하자고 만들어진 공산주의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잔악한 집단으로 돌변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이론,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생, 하나님 없는 출세. 이 모든 것이 불행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스런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큰 행복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이끌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뭔줄 아세요? “침묵하며 하나님 의지하는 법 배우라”는 뜻입니다.
AA라는 미국 알코올중독자 회복위원회는 그 안에서 Not Shalt(Sad, Hungry, Angry, Lonely, Tired)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즉, 슬프고, 배고프고, 화나고, 외롭고, 지쳤을 때는 아무 말 하지말고 아무 결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가운데서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의 광야 가운데서도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고난 가운데서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요셉에게 주어졌던 고난의 의미가 시편 105편 5-1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17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한 민족을 살리기 위해 선발대로 요셉을 보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한민족의 출발, 한민족의 모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의 고난은 개인의 고난이 아니라 민족의 고난이며 민족의 구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이유 없는 고난 주시는 것은 그 속에서는 해석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미 없는 고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높이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지 않는 환경이 주어진다 해도 그 속에서 오직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요셉을 그토록 기뻐하신 이유는 삶이 평탄할 때에도 요셉의 믿음은 한결 같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동시에 주어지게 된 겁니다. 그러나 이같이 만족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요셉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이 말씀은 요셉이 애굽에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릴 때를 기록한 겁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그의 자손들에게 하는 말이 “이스라엘이 살 곳은 애굽이 아니다. 애굽 땅은 뿌리 내 릴 곳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이곳을 떠나라. 떠날 때는 나의 뼈들을 가지고 떠나라” 참 현명한 믿음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도취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외모를 보고 평가하지 않고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디모데전서 6:17절에서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물질에 소망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 두는 인생이 믿음입니다.
권력과 명예와 돈이 있는데도 그 사람에게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참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탄한 인생을 주실 때, 그 평탄한 것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의 요셉은 꿈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었을 때, 부기영화를 한 몸에 지니고 살 때 그는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자 요셉은 다시 다른 꿈꾸었습니다. 즉, 영원한 본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꿈꾸던 본향,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받으신 것에 도취하지 않는 한 해가 되셔야 합니다. 삶이 형통하고 별 문제가 없을 때에도 여전히 더 큰 꿈을 가지고 한결 같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이 그토록 요셉을 기뻐하신 이유는 철저하게 하나님 의식의 믿음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요셉은 어떤 곳에 가든지 그곳에서 주어진 일에 대단히 성실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로 팔려 갓을 때에도 주인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또 감옥에 누명 쓰고 들어갔을 때에도 간수장이 감옥 내의 제반 업무를 다 맡겼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왜 요셉이 이렇게 성실했다고 생각합니까? 그가 우리와는 다른 별종이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었지만 차이점은 이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오로지 하나님을 의식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사람이 안 본다고 육신의 생각대로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그 장군의 부인의 성적 요구를 거부할 때 보세요.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인께서 이 집에 모든 제반 업무를 다 맡겼으나 오직 맡기지 않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의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요셉은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 의식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진실하고 성실하게 행했습니다. 총리로 있을 때에도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 한해는 요셉처럼 영적 눈을 밝게 뜨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쉽게 죄 짓지 말고 영적 안테나의 주파수를 하나님께 고정하여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세요.
그럴 때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가운데 찬란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