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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크레포가라에서 피상으로 가는길목 ] |
이번 트래킹 코스는 안나푸르나봉을 정점으로 한 바퀴를 빙~ 돌아오는 코스다. 같은 코스로 가는 일행이 있어 '어... 저도요...'하고는 따라 나서면서도 사실은 내가 어디로 가는 줄 몰랐다. 지도 사고 이렇게 간다니까 다 그러나 보다 하고 있었던 거 같다. 라운드 트래킹의 정점은 3000m이상에서 보는 낙엽이 곱다.
히말라야에서 산속에서 가진 돈 잃어버리고 갈라섰던 일행과 다시 합류해서 귀환할 수 있었다. 푼힐과 ABC를 못 가봐서 아쉽긴 하지만, 쏘롱라의 기억이 있어 위로가 된다.
네팔에서 눈 맞춰보려고 했는데... 어째 저보다 튼실한 등빨이 없어서 포기, 아쉬움이 남는 일정이었지만, 돌아오면서 방콕에서는 묻지마 관광(아는 것 없이 무턱대고 한거라 어디 가냐고 뭐 할 거냐고 묻는 인간들이 젤~ 싫었음)도 하고 안 되는 영어로 무사 귀환했으니 이게 어디냐고 위안 삼아 본다. 한국을 떠나 21일 만에 다시 돌아왔다. 때 아닌 10월의 눈 속에 갇히기도 하고 쓰러진 전봇대며 마지막 담력코스까지 다채로운 시간이었다.
출발이다!
2005. 10. 6. (목)
네팔로 가져갈 짐이 생각보다 많아졌다. 어제 집회에서 잘 다녀오라는 격려를 받고 느즈막히 돌아와서 새벽까지 네팔 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용문 선배님과 친구에게 받아놓은 옷(네팔 어린이에게 줄 중고 옷들)이랑 경희가 부탁한 라면을 배낭과 라면박스에 구겨 넣고 작은 베낭에 넣을 것만 방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오전엔가 경희에게 전화를 받고서야 마지막 마무리를 했다. 중간경유지인 방콕으로 갈 비행기가 9시 출발이라서, 5시에 집에서 공항버스 타기 위해 출발했다. 배낭메고 두 손에 짐을 들고 에~고 힘들었다.
공항에서 짐을 붙치는 데 무게가 많이 나가서 5만원이나 더 내라고 한다. 다시 짐을 추려서 29.6kg(30kg이 최대한도다)을 카투만두로 보내고 두 손에 짐을 들고 기내로 들어갔다. 후다닥 결정한 여행이라 그런지 설렘도 없고 그냥 담담하다.(주변의 반응이 더 설레이는 거 같다.)
2005. 10. 7. (금)
새벽 1시에 방콕공항에 도착했는데, 호텔예약해준 여행사직원의 말과는 다르게 호텔에서 마중 나오지 않아서, 일단 택시를 타고 출력해간 호텔 예약지를 내밀고 "here"을 말하고는 편하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일단 택시 탔으니 찾아가는 고민은 택시기사의 몫이다.
호텔에 도착하여 불친절한 카운터 직원으로부터 키를 받아서 미로 찾기를 하여 방을 찾아 갔다. 아침에 "morning call"을 해달라고 했구만 역시나 불친절한 호텔 카운터 직원이 안 해주었다. 그래도 잘 일어났다. 카투만두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방콕 공항을 이리저리 배회하고 시간 맞춰서 출구로 가니 트레킹 복장을 한 승객이 수두룩하다. 옆에 서양인 부부가 앉았는데 기내식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손벽까지 친다. ㅋㅋㅋ
이제야 내가 히말라야에 가는구나 쬐금 실감난다.
카투만두에 도착하니 공항이 휑~~~ 하다. 카투만두가 네팔 수도람서... 이거이... 후진 지방 공항이 이럴까? 짐을 찾아 공항을 나가니 한국 사람으로 추정되는 남녀가 괜히 날보고 웃는다. "혹시..." 역시나 류배상씨 부부다. 류배상씨의 집으로 가니 최준환과 허상행이 시내 구경을 마치고 돌아와 있다. 잠깐 이야기 하다가 모자를 사러 함께 나갔다. 물건 사면서 내가 확~ 갂았더니 첨에 놀라더니 나중에 이 녀석들이 재미가 붙었나 보다.
두 친구는 네팔항공을 타고 왔는데 착륙할 때 몇 번 튀어서 승객들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네팔항공은 이륙하다 말고 시동이 꺼져서 고치고 2시간 후에나 이륙을 하는 경유도 있을 정도라고 하니... 연착없이 도착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한다. 난 타이항공 타고 갔다~ 지금이 네팔에서 한해 중 가장 큰 명절이라 교통편 구하기가 힘든 시기라고 한다. 나에게 '어떻게 왔네요? 못 올 줄 알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오래 계획하고 준비하고 그렇게 온다나... 모르면 무식하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몰라서 갈 수 있었다.
2005. 10. 8. (토)
류배상씨 집에서 마지막 한국 밥상을 받았다. 함께 트래킹을 할 준환이와 상행이는 야행성이라면서 시들하다.
[ 네팔의 최대명절을 맞아 분비고 있는 카두만두 시장 ] |
카투만두에서 7시에 로컬버스를 타고 트래킹을 시작할 Besisahar로 출발한다.
네팔의 명절이라 차가 무지 막힌다. 카투만두를 벗어나는 데만도 몇 시간이 걸렸나 모르겠다. 버스에 빼곡히 앉고 서고, 지붕에 앉기까지 했것만 그나마 차편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고향에 가져갈 선물을 들고 메고 찻길 옆을 걸어간다.
네팔의 차는, 자가용을 제외한 모든 승합차에 운전사와 차장이 있다. 길이 워낙 협소해서 일명 '칼치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운전사와 차장의 호흡이 맞아야 절벽이나 또랑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또한 크락션이 없으면 도로 나오기가 겁난다. 신호등이 어~쩌다가 있어서 수시로 크락션을 울려서 차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한국이 '어~이구 돈 많나 보네... 어디 받아봐~' 라면, 네팔은 '나, 차 있거든. 좀 살아. 죽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비켜' 식이다. 사람이 차에 치어 죽는다 해도 한국 돈으로 30~50만원이면 합의 끝이란다.
내가 탄 차의 운전사는 좀 살벌했다. 폭주족에다가 추월은 기본인데, 추월하다가 맞은편에서 차가와도 멈추지를 않고 '니가 알아서 비켜' 식으로 운전을 했다. 휙~휙~ 몸이 쏠리는 건 기본이고. 간혹 속도를 줄일 때는 좁은 길을 가야 할 때나, 수시로 있는 검문소를 지나갈 때 정도일 것이다. 군인과 경찰의 검문이 수시로 있다. 네팔인 남자들은 모두 버스에서 내려서 검문을 받고 온다. 한번은 외국인인 우리도 내리라고 했는데 ‘뭔 말이래~’로 밀고 나갔다.
Besisahar에 들어서니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페인트칠이 된 집들과 상점이 나왔다. 이곳에서 라운드 트래킹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곳에서 Kudi까지는 비포장도로에 휘청이는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옆 강가로 트래킹을 시작한 서양인들이 간혹 지나간다.
Kudi에서 트래킹이 시작되었다. Bhulbhule까지 약 1시간정도 걸어 첫날 숙소로 갔다. 첫 흔들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고소가 시작되려나 보다. 흔들다리를 건너고 나서도 땅이 흔들리고 머리가 띵~ 한 것이 영판 고소증상이다.
첫 롯지에서의 식사는 Dal bat 네팔의 일반적인 식사다. 근데 훅~ 불었더니 밥알들이 가뿐하게 날아간다. 에~구... 정녕 이것들을 보름간 먹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짜빠티라는 우리의 굽은 떡 같은 것을 꿀에 발라 먹으며 그나마 허기를 달래야 했다.
2005. 10. 9. (일)
준환이가 알람을 한국시간에 맞추어 놓아서 실없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설치다가 다시 잠들었다.
불브레에서 같이 출발했던 팀들은 생생 잘 가더니 우리가, 체르무에 도착하니 보이지 않는다. 중년의 한국인 2명도 있었는데...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는 일단 거대한다. 산, 강, 폭포, 일구어 놓은 밭...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 작고 소박하다.
상행이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다고 찡찡거리다가 가져온 고추참치와 라면에 행복해 할 만큼 단순하다. 준환이는 아직 모다 생소한가 보다. 난 한 적응하고 있다.
류배상씨로 부터 고소에 대한 경고를 받아서, 내 걸음보다 반 템포 줄여 걷고 있다.(얼마나 느린지 짐작이 되실지... --;;) 안나푸르나를 왼쪽에 두고, 회색 계곡 옆을 걷고 있다. 이곳은 해가 나면 따갑고 없으면 금새 서늘해 진다. 마을길을 따라 걷는데, 곳곳에 롯지가 있다. 히말라야의 사람들이 관광객들에게 의지해 주객이 전도된게 아닐까 싶을 만큼 롯지가 많다.
좋은 풍광 속을 걷지만 첫날이라 그런지 가축 똥 냄새만이 생각날 지경이다.(꿈에도 똥이 나왔다... 똥예찬론자인 선배가 와야 할 곳이 아닐까 싶다.) 우리 일행은 나, 준환, 상행. 네팔인 가이드 상계, 포터 덴징, 다빈조, 모혼. 상계는 32살에 3명의 아이를 둔 웃는 얼굴이 선량한 사람이다.
2005. 10. 10. (월)
점차 막연히 상상했던 히말라야의 웅장함이 나타나고 있다. 10대 때 막연히 30대가 되면 히말라야에 가야지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 길옆을 흐르는 강의 소리가 심장을 흔들 정도로 크다. 많은 폭포와 산과 사람들. 트레킹하는 사람들은 어제의 그들이 많아 인사정도는 하고 지나친다. 어린아이들이 '볼펜'을 달라고 하는데 '우리집'에 모다 주고 와서 안타깝다.
참제에서 점심을 먹고 얼마 걷지 않았는데, 외소한 네팔인 둘이 우리에게 오라고 한다. "뭐래?" 하고 가봤더니 돈을 달라고 한다. 가이드인 상계가 마오이스트(반군)들인데 돈을 주어야 한다고 곤란한 표정을 짖는다. 한 사람당 1500루피를 주었더니 영수증을 끊어준다. 내려올 때 마오이스트를 또 만나게 된다면 영수증만 보여주면 된다고 한다. 안주면 어찌되냐고 상계에게 슬쩍 물어보니 안주려고 버티다가 총 맞은 관광객도 있다고 한다. 무서라...
완만한 산길에서 제법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다 경치 좋은 곳에 하나 있는 롯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준환이는 이스라엘인과 카메라를 공통분모로 제법 친해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오르막을 지나 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앞을 보니... "와~"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계속된 산길의 롯지는 다들 계곡에 있는 작은 마을 정도였는데 딸은 계곡사이에 큰 폭포와 강을 사이에 낀 제법 큰 분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지금은 대부분 롯지로 바뀌었지만 예전부터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기꺼운 마음으로 딸에 도착하니 멀리서 본 모습보다 더 멋지다. 숙소에 영국과 스코틀랜드 여자둘이 함께 묵었다. 이들은 지난해 에베레스트 트래킹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한다. 이들의 목적은 우리처럼 라운드가 아니라 Tilicho Lake라고 한다. 이곳만 보면 좀솜에서 경비행기로 이번 트래킹을 끝낼 꺼라고 한다. 식사를 하고 상행이와 준환이는 쉬러 방에 가고, 난 우모복을 꺼내 입고 마을을 어슬렁거렸다. 마을 안에 있는 작은 다리위에 기대어 흐믓하다. 큰 글씨는 읽을 수 있을 만큼 밝은 달빛과 선명하고 큰 별, 그 빛 속에서 까만 산속으로부터 마을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하얀 폭포. 내가 신화 속에 있는 것 같다. 당장 하늘에서 옷자락을 날리며 선녀가 내려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꺼 같다. 한참을 서 있다가 다리를 지나다니는 당나귀무리 때문에 롯지로 돌아와야 했다. 창문으로 선명한 달이 비쳐든다.
2005. 10. 11. (화)
새벽에 일어나 어제 몽환적인 밤 분위기를 연출하던 폭포에 가봤다. 롯지와는 다른 자연의 냄새를 풍기는 길을 걸어서 잘 손질해둔 개울을 따라 폭포의 물방울이 날리는 곳으로 갔다. 밤과는 다르지만 폭포가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여유로운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두 동행은 하루를 준비하고 있다.
[ 딸부터 당나귀와 교대를 한 말들 ] |
어제 자가트까지는 당나귀가 주를 이루었는데 딸부터는 말들로 대체 되었다. 아마도 고도 때문에 운송 수단이 바뀐 듯 하다. 트래킹하는 사람들이 쌩쌩 가는데 걷다보면 뒤에서 나타난다. 어디에선가 푹 쉬다가 가나보다.
히말라야에서는 거의가 티벳 불교를 믿는다고 한다. 집집마다 제기를 갖추어 두고 아침마다 새 물을 떠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우리나라의 솟대 같은 것들이 꽂혀있다. 다라파니에서 점심을 먹고 포터인 덴징이 마한들(네팔의 전통악기)을 치고 다빈조와 모혼이 트레킹송을 불러 주었다. 구슬픈 네팔의 가락보다 흥겨웠다. 포터와 가이드는 걷는 동안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거나 휘파람을 불고 있다.
슬슬 걸어 다나큐에 도착하니 일찍 간 한국인 팀이 마을 어귀에 숙소를 잡고 '왜 이제 오냐고 한다'. 내가 느려서 그렇지 ㅠㅠ.
슬슬 고도가 올라가고 있다. 다나큐가 2300m다. 안나푸르나를 왼쪽으로 끼고 고도를 높히니 설산이 가까워 온다. 하루를 걸으면... 멀리있던 산들이 가까워 오고 고개를 젖혀야 보이던 산이 나와 시선을 맞추어 간다. 산에 구름이 걸리고 구름에 가리었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구름이 산의 8부에 걸려 지나면서 짙어지는 것이 마치 산이 구름을 조금씩 뿜어내어서 키우는 거 같다. 이제 흔들다리를 건너는데 익숙해져 간다. 작은 굴림을 하면서 장난도 친다. 다나큐의 숙소는 시설이 좋다. 뜨거운 물에 샤워도 했다. 주변의 모습도 장관이다.
한국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왔다는 롯지 여주인도 있다. 한국말이 능숙하다. 한국에서 처음엔 힘들고 외로워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한국 음식과 생활이 그립다고 한다. 나도 한국음식이 그리버~~~ 우리가 묵은 숙소에는 29인치 LG칼라 TV가 있었다. 우리식으로 하면 7천만원짜리 TV를 갖고 있는 부자 집인 셈이다. 인도의 LG공장에서 생산해서 인지 인도회사인줄 알고 있다. 'Korea company, best.'라고 알려주었다.
2005. 10. 12. (수)
다나큐에서 새벽에 길가에 나가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부스스 히말라야가 깨어난다. 봇짐장수들(커다란 짐을 메고 롯지에 물건을 팔거나 주문받은 물건을 배달하는 포터들)을 시작으로 트래커들도 점차 길을 나선다. 오늘은 한국의 언덕정도의 오르막이 있다. 아침에 롯지에서 감탄을 하며 고개를 젖혀서 보던 산들이 나와 시야를 맞추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경이롭기만 하다. 열심히 오르막을 올라서면 '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차메까지 가는 길은 공사 중이었다. 중국의 자본이 들어와서 안나푸르나 라운드 일부 구간에 버스가 다닐 예정이라고 한다. 나무가 길옆으로 늘어서 있고 말들이 달려 나가고 목가적인 풍경이다. Annapurna1의 설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다른 팀을 따라 만들다만 길로 들어서서 경사가 심한 자갈길을 내려와야 했다. 잘못해 미끄러지더라도 아무 안전장치가 없다. 발목이 아파온다. 고토에서 경찰이 트래커의 신상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히말라야 통행증에 도장을 찍어준다. 분위기 좀 살벌하다.
히말라야는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국립공원이라 입장료도 비싸게 받고 반군과 대치중인 군경이 네팔인은 짐까지 검문하고, 트래커는 신상과 지나간 시간까지 체크하면서 관리한다. 오늘부터 나타난 독일과 유럽의 팀들로 숙박예정이던 롯지가 꽉 차버렸다. 다시 돌아가 묵을까 하다가 그냥 옆의 허름한 롯지에 침낭을 폈다. 근데 많~이 허름해. 그나마 문밖의 의자에 앉아 보이는 산이 좋다.
히말라야의 롯지는 시설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을에서는 똑같은 메뉴와 방값을 받도록 담합을 하고 있다. 점심을 제때 안먹고 차메까지 왔더니 피곤하다. 가져간 침을 발목에 놓으며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트래킹을 준비한다.(발목이 안좋아 수지침을 상비하고 다닌다.) 차메에서는 한국에서 일했다던 다나큐의 아줌마를 다시 만났다. 아침에 롯지 손님 보내고 차메에 친구보러 와서 우리가 도착할 때쯤 다시 다나큐로 간다고 한다. 네팔인 들은 우리가 15~20일 걸리는 라운딩을 일주일이면 충분히 돈다고 한다.
2005. 10. 13. (목)
3200m인 피상까지 왔다. ㅎㅎㅎ 우리나에서 제일 높은 곳보다 더 높은 3000m를 넘었다. 차메에서 부터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조금씩 고도를 높혀갔다. 고도가 높아지니 길에 똥들이 현저히 줄어들어 깊은 숨을 쉬면 히말라야의 맑은 공기가 폐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점 고산의 모습이 나타난다.
멀리 바위산이 점점 가까워진다. 경사가 완만한 슬랩과 크랙으로 형성된 바위산이다. 등반이 가능하겠다. 상계에게 물으니 네팔에서도 바위를 오른다고 한다. 장비도 빌려주고 안내자도 있는데 암벽화는 비싸서 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두쿠레포카리에서 상행이와 준환이는 머리가 조금 아프다면서 낮잠을 자고, 난 먼저 출발해서 길에서 유유자적했다. 내가 한 미스다리(천천히)해서 고소걱정 없다던 민하언니의 말이 현실화 되고 있나?
1시간가량 늦게 도착한 두 친구는 컨디션이 안좋은지 Upper Pisang(3300m)에 가자고 하니 안간다고 한다. 혼자서 룰루랄라 하면서 어퍼피상으로 가는 다리를 건넜다. 로우피상은 신시가지로 주로 롯지들이 형성되어 있고, 어퍼피상은 구시가지로 티벳 절과 집들이 모여 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집들은 납작한 돌을 쌓아서 짖는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히피 부부와 서로 사진도 찍어 주면서 안통하는 언어대신 미소를 주고받는다. 티벳 절에서는 지속적으로 법회를 보여주었다. 어린 동자승은 어른들 사이에 앉아서 지겨운지 트래커들을 돌아보며 재미난 표정을 짖다가 엄한 눈길을 받기도 한다. 법회에 쓰였던 떡과 과자는 법회에 참석했던 네팔인과 트래커에서 골고루 나누어 준다. 어퍼피상에서 내려다보는 로우 피상의 모습은 사진 속에나 있을 그림이다. 앞에 보이는 설산도 뿌듯한 미소를 만든다.
[ 평온함을 가져다 주던 언더피상 ] |
[ 두크레포카라를 지나면서 간혹 보이던 웅덩이 ] |
2005. 10. 14. (금)
로우피상은 춥다. 새벽에 우모복을 입고도 추워서 침낭을 뒤 집어 쓰고 베란다에 앉아서 밝아오는 산을 봐야 했다. 멀리서 봐야 좋은 산이 있고 가까이 가서 좋은 곳이 있다. 로우 피상 뒤에 있던 산은 멀리서는 흉하다 싶더니 옆을 지나치면서 보니 점차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훔데는 경비행장이 있는 마을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모래 바람이 부는 완만한 평지를 걸었다. '엘도라도'를 연상시키는 사막지대를 바람에 날려가는 모자를 잡으며 걷는다. 단체팀 포터에게 짧은 영어로 설산의 이름을 물으니 Annapurna3와 Gangapurna라고 알려준다. 우~우~ 이 포터들의 친철 속에는 포터들 클럽에 기부하라는 저의가 숨어 있었다. 진짜로 쓰이는지 상계에게 물어보고 주려고 했는데, 정작 상계가 저 멀리 보이자 마낭에서 만나면 달라고 하더니 가버렸다. 그 후로도 만날 수 없었다. 포터클럽은 진짜 있다고 한다. 가난한 이들이라 등산화, 장갑, 자켓 같은 고산지대에서 필요한 장비가 없어서 클럽에서 장만해둔 것을 저렴하게 빌려 쓴다고 한다. 한국에서 얼마 전에 버린 등산화가 괜시리 미안해진다.
마낭의 숙소는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을 정도로 좋다. 트래킹 도중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고 있는 40대 중년 한국인 2인조도 같은 숙소에 묵었다. 무뚝뚝해서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외국인보다 못하다 그러고 있었는데... 몇 마디 건네고 고소 조심하라고 일러 주시는 것이 또 괜챦아 보인다.
나와 상행이는 내일 야카르타로 출발하고 싶은데 준환이가 고소 적응차 하루를 쉬고 가자고 한다.
2005. 10, 15. (토)
Manang(3540m) 꿈틀꿈틀, 고소 적응차 하루를 마낭에서 쉬었다.
새벽에 동네 한 바퀴 돌고 먼저 출발하시는 무뚝뚝 한국 2인조를 배웅하고, 침낭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굼벵이놀이를 하고 있다. 트래킹을 하면서 시간 가는 걸 모르고 있었는데, 손발톱이 긴 걸 보니 제법 걸었구나 싶다.
담배가 고소를 촉진시킨다고 하는데 두 넘은 열심히도 피워된다. 숨쉬기 힘들다는 상행이와 머리가 아프다는 준환이를 보고 있자니, 그들의 안일함에 짜증이 난다. 더럽게 말 안듣는다.
서양인들은 짧은 바지와 티를 입고 햇빛 쪼이기를 하는데, 나는 보온 모자에 우모복을 착실히 챙겨 입고 다녔다. 쏘롱페디와 야카르타에서 고소로 쓰러진 사람이 각기 생겨 헬기가 2번 떴다. 한번 뜨면 3백만원이라는데... 우린 돈 없어서도 고소 오면 안되겠다고 하면서 헬기가 지나간 하늘을 본다.
고소는 고도로 인해 기압이 낮아지고 산소가 부족해서 안좋은 것도 있지만 칼바람들이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도 한가 보다.(나...고소가 뭔지도 모르고 갔다. 그냥 다들 고소 고소해서 그냥 걸리면 안되는거구나 했는데...) 우리 홈페이지에도 고소에 대한 정보들이 있었다. 이제야 봤다. ㅋㅋㅋ
가이드 1일 $12~13, 포터 1일 $6~7, 근데 류배상씨 쪽을 통해서 고용한 우리는 가이드 1일 $17, 포터 1일 $12를 주었다. 류배상씨가 수수료로 받는 금액이 우리가 트래킹하는 비용에서 만만치 않게 차지한다. 한국인 2인조는 포터만 2명을 데리고 왔는데 작년에 ABC갈 때 함께 했던 포터인데 간단한 가이드 역활까지 한다고 했다. 그들의 포터는 1일 $6 주고 끝날 때 팁을 좀 두둑하게 챙겨 준다고 한다. 우리도 끝나면 포터에게 팁으로 10일에 15,000원 쳐서 통상 줘야 한다.
[ 고소적응차 하루를 완전히 머물렀던 마낭을 뒤로하고 ] |
2005. 10. 16. (일)
몇개의 찻집이 있는 완만한 경사의 외길을 걸었다. 4000m에서 가을의 단풍을 보니 새로웠다. 만년설과 시야가 맞추어져 가는 것도 즐겁다. 잠시 지나가는 나는 좋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삭막할 꺼 같은 모습이 이어졌다. 날씨와 고도로 인해 나무들의 크기도 현저하게 작아졌다. 하늘만 시리게 푸른 회색나라에 들어선 것이다.
고도가 높아지니 준환이는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상행이는 싸가지가 없어져서 날카롭다. 근데도 담배를 핀다. 히말라야 트래킹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와야지 싶다. 사진을 찍으려고 7월부터 회사까지 그만두고 트래킹을 기다렸다는 준환이의 열정이 좀 시들해져 간다.
2005. 10. 17. (월)
고도가 높아지니 숨쉬기가 힘들다. 자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숨을 쉰다. 잠결에 뒤척이다가 감기가 들었다. 편도가 붓고 코가 막혀서 걷는데, 가뜩이나 없는 공기에 숨쉬기가 더 힘들다. 어제와 같이 트래커들이 외길을 전세라도 낸 듯이 점령하고 줄지어서 걸었다.
저지대와 비교해 현저하게 약해진 물살이 저~ 밑에 흐르고 있고, 나지막한 잡목들도 줄어들고, 날은 차 졌다. 올라간 길을 내려갈 때면 아깝다. 롯지도 줄어들었다. 느릿느릿 힘들게 쏘롱페디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내일을 위해서 하이캠프까지 가서 자기로 했다. 쏘롱페디에서 하이캠프까지는 가까운 거리인데 경사가 만만치 않다. 길도 고불고불 형성되어 있다. 다른 이들은 성큼성큼 잘도 가는데 나는 20~50발자국을 가서는 헥헥 거렸다. 여전히 머리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는데 숨이 찬다. 다른 이들도 하이캠프에 숙소를 정하려고 해서 만원이다. 방이 없어 2인실에서 3명이 함께 잤다. 다들 어서 쏘롱라를 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2005. 10. 18. (화)
새벽 3시에 쏘롱페디 위의 하이캠프에서 출발했다. 춥고 고산지대라 숨쉬기가 쉽지 않다. 다들 잠을 설치고 있다가 시간이 되자 얼른 가자고 벌떡 일어났다. 마늘 스프를 먹고 하이캠프에서 제일 먼저 출발한다. 고산은 정오를 기점으로 바람이 세어지기 때문에 일치감치 하루의 트래킹을 마감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서 준환이가 구토를 한다. 쏘롱라만 넘으면 된다고 하면서 두통끼가 있는 상행이와 속도를 내어 먼저 갔다. 가이드인 상계만 내 보조에 맞추어 뒤로 쳐졌다. 쏘롱라 5416m ‘World's bigest pass lodge open in season' 보름달이라 밤인데도 랜턴이 필요하지 않다. 오르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 고소는 구토나 두통이 아니라 숨쉬기가 어려운 것이다. 여섯 발자국을 걷고 스무 번의 헐떡임을 했을 땐, 스스로 한심해 진다. 너무 비스다리해서 땀은 커녕 겹겹이 껴입고도 한기가 들고 손발이 시리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끝이 없을 것 같은 언덕을 오르면서 조급증이 생긴다. 저기만 넘으면 되겠지 싶은데 웬걸 정상은 보이지도 않는다. 힘들어서 울컥하고 ‘그래 조금만 참자. 힘내자’를 하고서야 쏘롱라에 올랐다.
쏘롱라에 오르기 전에 달이 지고 해가 비친다. 밤에는 달이 낮에는 해가 내 길을 함께 해 준다.
쏘롱라에서는 만년설이 내 가까이 있고, 다음 목표지인 묵티나트가 한참 발아래에 있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우~우~우~ 내 디지털 카메라의 밧데리를 아껴 두었것만 기온이 낮아, 카메라가 지도 살아 볼끼라고 기본 밧데리를 소모해서 정상에 오라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켜지지 않는다. ㅠㅠ 쏘롱라의 롯지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카메라 대신 내 머리에 찍어 둔다. 쏘롱라를 오를 땐 숨이 찬거 빼곤 힘들지 않았는데, 내려올 땐 감기에 오한이 들어서 다리가 후들거린다. 3시간이면 내려올 길을 5시간이 넘게 걸려서야 묵티나트에 도착했다.
오를 땐 든든했던 가이드 상계가 내려올 땐, 다리가 풀려서 힘든데 밉살스럽게 굴어서 짜증이 났다.
2005. 10. 19. (수)
[ 안나푸르나 포터들 ] |
묵티나트에서 좀솜까지는, 준환이는 포터들과 먼저 걸어가고 상행이와 나는 말을 타고 갔다. 쏘롱라를 기준으로 온 길과 갈 길의 분위기가 다르다. 문화도 좀 달라 보이고.
모래 바람이 풀풀 날리는 고산지대에, 노란 단풍으로 물든 묵티나트의 모습이 생경하다. 어제 컨디션이 안좋아서 카메라 밧데리 충전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마을을 벗어나니 사진 속의 전형적인 모래 바람의 외길이 이어진다. 길속에는 트래커와 그들의 가이드와 포터로 넘친다. 네팔에서 생활하는 현지 길손들이 더 이채로울 지경이다. 집에 돌아가 히말라야 하면 외지의 트래커들, 무거운 짐을 메고 가는 포터들, 가이드, 롯지 주인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카그베니에서 마신 사과쥬스는 맛있었다. 말을 타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걸어도 좋을 곳이었다 싶어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좀솜은 비행장이 있는 큰 도시다. 군인과 경찰에게 체크하고. 히말라야 속에 인터넷방도 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좀솜의 숙소는 하루에 500Rs로 좀 비싼 편이지만 시설도 좋고, 음식은 마낭보다 저렴하면서 맛있다.
2005. 10. 20. (금)
Jomsom(2710m) 눈 속에 갇히다. 새벽에 내리기 시작한 비가 눈으로 바뀌면서 하루 왠 종일 펑펑 내리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트래킹을 끝내려고 하던 상행이와 준환이는 발이 묶였다. 눈이 내리니 안좋은 전화사정은 불통이 되고, 전기도 오락가락한다. 전선줄은 쌓인 눈으로 내 눈높이 까지 내려왔다. 심히 불안하다. 롯지 주인장이 막대로 전선줄은 툭툭 치니 제 자리를 찾아 간다. 아침에 무리해서 좀솜을 출발한 트래커들은 다음 롯지에 발이 묶이거나 다시 돌아온다. 안나푸르나에서도 10월에 눈이 오는 예는 드물다고 한다.
2005. 10. 21. (토)
[ 가을에 쌓인 눈포터들 ] |
오늘 눈은 그쳤지만, 하늘이 흐리다. 구름이 많아 비행기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행이와 준환이는 그래도 남아서 비행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나는 경험 많은 포터 덴징을 데리고 트래킹을 끝내기로 했다. 좀솜에서 마르파, 투쿠체까지 가는 길은 눈이 녹기 시작해서 눈 반 물 반의 길을 걸어야 했다. 네팔인들 만이 간혹 마을 간의 교류를 시작하고 있다. 마을에선 지붕에 쌓인 눈을 나무로 만든 삽으로 치우느라 분주하다. 한적한 눈길에 간간이 빨갛게 단풍든 나무들과 철지난 보라색 꽃들도 보인다. 안나푸르나의 10월은 여름, 겨울, 가을이 함께 한다.
마을을 지날 때, 헉... 전보대가 군데군데 넘어져서 전선들이 발밑이 어지럽다. 전선이라는 걸 인식하고 초반엔 간 떨려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헌데 나중엔 눈길을 걷는 것도 피곤해서 에~라 모르겠다 싶다. 마을을 좀 벗어난 길에선 ‘우르르’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에 오던 트래커들이 소리를 지르고 달려온다. 눈으로 인해 낙석이 떨어지는 것이다. 안나푸르나의 낙석은 자동차 타이어만한 크기다. 굴러오는 소리도 살벌하다.
좀솜도 큰 도시였지만, 마르파와 투쿠체도 정돈이 잘된 도시다. 가게도 많고 물건도 많다. 쏘롱라와 이쪽저쪽이 딴 세상 같다. 일찌감치 라중에 도착해 덴징의 안내에 따라 숙소를 정했다.
이 숙소에서 내 트래킹여비를 분실했다. 짐을 풀다가 화장실이 급해서 갔다 온 사이에 벗어둔 자켓에 넣어둔 여비가 없어졌다. 황당했다. 좀솜에 있을 준환이와 상행이에게 연락을 하는데 전화가 잘 안된다. 십 여차례의 전화 시도를 해서야 겨우 경비행기를 기다리다가 도보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혹시나 길이 어긋날까봐 덴징이 되돌아가서 데려오기로 했다. 다시 그들과 합류해서 여비도 빌리고 카로파니까지 와서 밤을 맞이했다.
준환이와 상행이는 경비행기를 탈꺼라고 포터들을 먼저 보냈다. 그래서 그들이 직접 배낭을 메고 이동해야 했다.
2005. 10. 22. (일)
카로파니에서 일치감치 출발했다. 하산 길은 돌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곳이 많다. 라운딩의 시작과 끝은 똥냄새가 진동을 한다. 특히 오늘은 눈으로 인해 교역 물량이 많은지 당나귀와 말 행렬이 넘쳐난다. 지린내, 짐승내, 똥내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빨리 안나푸르나를 벗어나야 숨을 쉴 수 있을 꺼 같다. 위는 바람이 심하긴 해도 좋은데 아래는 똥이 심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경비행기를 이용하고 싶을 지경이다.
룩세차라라에서 점심을 먹고 졸려서, 나는 일행보다 일찍 출발했다. 절벽 위의 외길에서 만나는 말과 당나귀가 이제 더 이상 겁나지 않다. 자칫 이 무리에게 길을 내어 주고 나면 한참을 똥냄새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당나귀나 말의 몸통을 밀면서 내 갈 길을 서두른다. 흔들다리에서도 몸을 비껴가면서 건넌다.
서지수, 장족의 발전이다. 따또파니에 도착해서 마을 구경을 하고 롯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일행을 기다렸다. 1시간이 지나서야 덴징이 나를 찾으러 왔다. 어제 좀솜에서 투쿠체까지 경이로운 속도를 자랑하던 상행이와 준환이 것만. 오늘은 어찌 이리도 더딘지 모르겠다. 짐을 풀고 민하언니의 조언으로 준비해간 수영복을 드디어 꺼내 입고 온천에 갔다.
네팔 말로 “따또=뜨거운, 파니=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따또파니 즉 뜨거운 물, 온천. 깔끔쟁이 상행이와 준환이는 숙소에서 샤워만 한다네. 온천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쩍거리고 있다. 탕이 두 군데 있는데 한 쪽은 뜨겁고 또 한 쪽은 미지근하다. 탕 한 쪽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고 있고, 호수로 끌어온 차가운 물이 온도를 조정한다. 온천을 하는 많은 외국인들 손에는 맥주가 들려있다. 온천물에 들어 앉아 있으니 여기저기 가렵다. 긁으니 때가 밀린다. - -;;
롯지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트래킹 송을 부르는 가이드와 포터들을 보면서 흥겨워했다.
2005. 10. 23. (월)
따또파니에서 출발해 -포카라에서 간만에 도시의 밤을 기대하면서- 티프리앙에서 로컬버스를 타기로 하고 서둘렀다. 헌데 가이드인 상계에게도 베니에서 로컬버스를 타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어서인지 버스 타는 곳을 지나쳤다. 덴징이 다시 돌아가서 우리가 탈 버스 좌석을 확보하기로 했다. 우리는 버스가 서는 다음 코스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식사를 하고 유유자적 하고 있으니 베니까지 걸어가는 사람들이 지나치고 버스를 기다리는 트래커들도 속속 나타난다. 두 대의 로컬버스는 좌석도 없었지만 덴징이 없어 보내고 세 번째 버스에서 웃는 얼굴의 덴징이 내린다. 우리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트래커들은 좌석이 없어서 타지 못했다. 로컬버스는 짚차만한 크기인데 운전석 뒤는 천막으로 쳐서 사람들이 빽빽이 타고 지붕에도 사람들이 타고 있다. 나는 얼른 운전석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베니로 가는 길에서 담력코스의 로컬버스 ] |
트래킹의 마지막은 담력코스다. 벡코라에서 베니까지 가는 길은, 물론 비포장 도로이고 좁고 울퉁불퉁은 기본이다. 차의 속력은 5~30Km/H로 가는데 결코... 엑셀을 좀 밟지 하는 생각 안든다. 차 한 대가 지나가면 한 발걸음 정도의 여유가 겨우 남는 거까지는 좋다. 헌데 길이 워낙 울퉁불퉁하다보니 내쪽으로 15~20도가 기우는 건 다반사다.(내 쪽으로 30~50m의 절벽 아래로 콸콸 시원스레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차가 기울면 내 시야에 바로 뿌연 강물이 조금의 걸림도 없이 보인다. 혹여 좁은 길 앞에 돌출된 바위라도 있을라 치면 한 걸음정도의 여유를 포기하고도 절벽으로 좀 더 기울어서 비켜간다. 악~~~ 소리도 안나도 갑~갑~했다. 롤러코스트... 쨉이 안된다.
뒤에 천막 속에서 와야 했던 준환이와 상행이는 날라 다녔다고 한다. 헌데 그 와중에도 함께 탄 이스라엘 가족과 렌트비를 분담해서 카투만두로 가기로 했다고 한다. 15인승 봉고를 운전사까지 하루 빌리는데 10,000Rs(우리나라 돈 15만원)에 빌렸다. 안나푸르나 일대는 반군이 많아서 이곳에 등록된 차량은 경찰과 군인에게 허가를 받아야 타지방으로 갈 수 있다. 베니를 출발해서 운전사는 우리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곳곳에 차를 세우고 전화질이다. 슬슬 짜증이 난다. 그러더니 드디어 포장도로가 나오는 길에서 차를 한 쪽에 세우더니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사라졌다. 황당했다. 오늘 안에 베니로 돌아가야 하는데 카투만두까지 가면 오늘 중에 돌아올 수 없으니 다른 차를 구해 우리를 떠넘기려는 것이다. 1시간 후에나 좀 허름한 차를 구해서 왔다. 저희들끼리 흥정을 해서 계산을 끝내는 것 같다.
헌데 이 차는 뒷 창문 유리가 두 군데 없어서 비닐과 테이프로 봉해 두었다. 테이프가 떨어져 너플거리면 차장이 내려서 너플거리는 비닐을 손으로 다시 붙인다. 그리고 크락션이 고장이었다. 네팔의 도로는 크락션이 없으면 큰 길로 안나간다. 여기 저기 빵빵거리는 소리가 귀를 아프게 할 지경인데. 크락션이 고장이란다. 정령 이 차를 타고 카투만두까지 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
밤늦게 무사히 카투만두의 ‘우리집’에 도착했다. 류배상씨와 전화 통화를 시도했는데 안되어서 우리가 밤늦게 도착하자 놀랐나 보다. 우리도 미안했다.
2005. 10. 24. (화)
새벽에 상행이와 준환이는 비행기편이 달라 일찍 출발해서 가는 것을 보지 못해 아쉽다. 나는 비행기편이 정오라 아침을 먹고, 가이드인 상계를 만나 가이드와 포터의 팁과 그들에게 유용할꺼 같은 소모품을 전해주었다. 류배상씨가 공항까지 배웅해 주고 혹시나 비행기 좌석이 없으면 돌아오라고 약도를 한 장 챙겨 준다.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북쩍거린다. 트래킹 도중 스치며 지나가며 얼굴만 익힌 외국인도 보인다. 여유 좌석이나 취소 좌석이 있기를 기대하며 대기를 신청했는데... 뭐 기록하는 것도 없고 그냥 ‘wait’ 다. 단체팀이 많아서 대기 좌석을 쉽게 주지 않는다. 거기다 키 큰 백인이 데스크 근처에서 알짱거리면서 새치기를 시도하려고 한다. 괴~씸... 직원의 눈치를 봐서 쪼르륵 데스크에 얼굴을 올려놓고 눈 맞추기를 하며 “I want chance"를 중얼거렸더니 먼저 표를 준다. 데스크가 높아서 내 어깨 높이다. 내가 좀 덜 들어보이지 않은가. 쬐끔한 동양 여자애가 커다란 짐을 밀고 와서는 높다란 데스크에 팔을 걸쳐 겨우 얼굴을 올리고 말똥거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측은지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근데 공항이용료 영수증을 달라고 한다. 내 여권을 주면서 “wait"했더니 안된다고 한다. 혹여 좌석이 없어질까봐 마음이 조급하니 한국말이 나온다. 제스쳐를 하며 일단 여권을 맡기고 “ok” 한 마디 해주고는 공항이용료를 내러 뛰었다. 비행기에서 꺽다리 백인은 안보였다. ㅎ~
1시간이나 연착한 비행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급조되어 탈 많고, 변덕스럽기까지 했던 내 트래킹이 막을 향해 날고 있는거다. 방콕에서는 탈 없이 서울로 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옆에 탄 네팔인들 따라 맥주 한 캔을 주문해서 마셨다. 헤헤헤... 알딸딸하다. 창가에 앉은 네팔인이 안쪽에 앉은 나에게 히말라야를 보라며 몸을 비껴준다.
한 밤에 도착한 방콕은 잠시 갈등을 하게 한다. 좀 대기하다가 그냥 서울 갈까? 아님, 방콕 구경이나 하고 갈까? 배낭을 찾고 두리번거리는데 저쯤 데스크에서 방콕인이 친절하게 손짓을 한다. 여행데스크에 가서 숙소를 정하고, 환전하고 직원의 도움으로 택시를 탔다. 방콕시내에 있는 호텔이다. 내 방의 에어컨이 고장나서 똑똑 소리가 밤새 들렸다. 근데 책임자가 없다고 방을 안바꾸어 준다. 성질 좋은 내가 참고 잔다.
2005. 10. 25. (수)
아침에 호텔 데스크로 내려가 방 바꾸라고 얼굴 구기며 말했더니, 난처한 웃음을 짖는다. “room change"를 남기고, 호텔을 정하면 덤으로 주는 반나절 방콕 투어를 갔다. 보트를 타고 방콕의 수로를 돌아보는 여행이다. 선착장에는 가이드를 따라 나온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보트를 타고 젤 좋아 보이는 좌석을 차지했다.(몰랐다. 맨 앞에 가이드가 앉아서 설명할지는... 가이드는 할 수 없이 앞과 뒤를 오가며 설명해야 했다.)
수로에 사는 방콕인은 주로 빈민에 속하는 계층이라고 한다. 지금은 정부에서 관광유치를 위해 수로에 사는 주민에게 지원을 하지만 점차 수가 줄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왕궁과 사원을 둘러보았다. 이건 기사와 가이드에게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으~~~ 짧은 영어가 이리 원통할 수가... 일단 “ok”를 하고 났더니 돈을 내란다. 거기다 입장료까지 나보고 내란다. 정작 설명은 단체 한국 관광객들 틈에 끼어 들었구만... 한국 단체팀은 내가 자기들 팀인 줄 알았나보다. 옆으로 세는 나를 친절하게 데리고 간다. ㅜㅜ 사원에서는 방콕인 가이드가 짧은 영어로 열심히 설명을 해 준다. 왕궁과 사원은 화려하고 지속적인 공사를 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유적지였다.
그리곤 지겹게 상점을 돌아야 했다. 자유여행이 아닌 이상은 상점을 돌아야 한다고 양해를 구한다.
하루치 여행을 마치고 내일은 좀 외곽으로 가기로 했다. 헌데 내일 출발할 비행기편에 문제가 생겼다. 어제 공항 데스크에서는 가이드에게 비행기편을 말하면 예약해준다고 했는데... 신입 가이드라 모르는게 많다. 그래서 여행사 사무실까지 찾아갔지만, 내 항공권에 문제가 있어서 좌석을 배정 받을 수 없다고 한다. ‘error'라니... 이게 얼마짜리 항공권인데... 날 국제 미아 만들려고 한다. 여행사 가이드와 직원은 저희들 전화는 받는 것만 된다면서 못쓰게 한다. 방콕인들 돈 안되는 일에는 야박하고 알짜없다. -,.- 내일 투어는 취소하고 직접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공항에야 한국관광객들과 가이드도 있겠다. 아시아나항공이랑 대한항공에 한국인 직원도 있겠다. 야박한 방콕인들 신세 안지고 집에 간다 생각하니 차라리 속 안끓이고 편하다.
가이드를 보내고 호텔에 돌아오니 방을 바꾸어 두었다. 방 키를 손에 쥐고 밖으로 나왔다. 시내 구경도 하고 식당가서 밥도 먹고, 마사지샆에도 가고. 방콕시내엔 마사지샾이 무지 많다.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다가 태국인을 따라 들어갔다. 메뉴를 보며 손짓을 하고 달러를 내밀었다.(방콕돈이 없었다.) 근데 달러는 안 받나보다. 서로 안통하는 대화를 자국어로 했다. 주인이 옆 약국에서 달러를 바꾸어서 값을 치루고 서비스를 받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1만원이 안되는 액수로 두 시간 좀 넘게 받을 수 있었다.
2005. 10. 26. (목)
일치감치 방콕 공항에 와서 타이항공 데스크에 가서 내 항공권과 여권을 드리밀며 “I go to seoul, today." 했더니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저 표정 익숙하면서 싫다. 한 마디 더 해줬다. “money lost. no money. I go to home, today.” 5시에 다시 여기로 오라고 한다. 배낭을 맡겨야 겠는데... 어디다 해야 하는 줄 모르겠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까 배낭을 맡기는 사람이 있다. 배낭을 맡기고 공항버스를 탔다. 근데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겠다. 버스티켓을 끊어주는 여직원이 어디가냐고 묻는데... 난처하다. “I don't know. Just tour." 번화한 곳의 티켓을 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콕가이드책자라도 준비해 둘 걸... 알아야 면장도 한다고... --;;
공항버스 타고 가다가 외국인이 많이 내리는 곳에서 나도 따라 내렸다. 전부 무슨 복권 노점이 쭉~ 늘어섰다. 한참을 걸으니 건전한 사람들의 노점이 보인다. 노점에서 파는 음식을 사서 방콕인 따라 양념을 했다. 주인장이 보기에 내가 어설퍼 보이는지 이상한 양념을 집으면 웃으며 고개를 흔들다. 길거리에 앉아서 먹으니 맛있다.
찻길을 건너고 싶은데... 신호체계가 이상하다. 파란불인데도 차들이 지나간다. 어정쩡하게 서 있었더니 방콕여자가 내 손을 잡고 길을 건너 준다. 방콕투어 중이냐면서 어디로 가느냐고 한다. --;; 웃으며 “No question tour.” 못 알아 듣는다. 이런 세계적인 투어도 모르다니... “Just working." 다시 알려주었더니 웃는다. 헤어져 난 공터를 가로 지르고 방콕여인은 공터를 돌아와 다시 건널목에서 만났다. 내가 영~ 어리버리 해 보였는지 가까운 사원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태국인의 예배하는 방법과 생활화된 불교를 열심히 설명해 준다. 발음이 어려운 이름을 가졌던 방콕여인은 중학교 선생님이었다.
방콕여인 먼저 가고 혼자 사원에서 더 유유자적하다가 방콕투어 삐끼에게 걸려서 투툭이라는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모르는 곳에 내려져야 했다. ㅜㅜ 또 어슬렁거리고 걷다가 지도를 손에 든 서양인들이 삼삼오오 들어가는 건물이 있어서 따라 갔다. 박물관이다. 규모가 엄청나다. 방대한 유적량과 규모에 놀랐다. 몇 시간을 돌아다녔더니 피곤하다.
길거리를 걷다가 투툭을 잡아 탔다. 근데 이거 탈게 못된다. 엄청난 차량들의 배기가스를 몽땅 들이마셔야 한다. 간혹 티비에 나오는 낭만적인 모습을 상상한다면 됐다. 아침에 묵었던 호텔 명함을 내밀고 가자고 했다.(아는 곳이 있어야지...) 근처에 내려서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구경하고, 노점에서 사먹고... 사람들 따라 기웃거리다가 공항에 가려고 하는데... 어디서 타야하는지 모르겠다. 지나가는 화이트 칼라를 붙잡고 “airport bus" 했더니 다 모른다. 하는 수 없이 차길에서 교통정리에 여념이 없는 경찰을 불러서 다시 물었다. 모른단다. 그래도 내가 붙잡고 놓아줄 기미가 없자, 큰 건물에 근무하는 영어를 쬐끔 아는 사람을 불러준다. 이 곳에서는 가는 버스편이 없고 버스노선이 지나가는 길까지 가서 공항버스를 타는 것이 힘들다며 택시를 잡아서 공항까지 요금을 흥정해 준다.
공항에 도착하니 여전히 대기자 명단에 있다. 11시에 다시 오라고 한다. 그 때까지 뭐하고 있나... 방콕공항을 구석구석 다니면서 어슬렁거렸다. 마사지샾도 가고, 마지막으로 태국음식도 먹고. 근데 공항이라 그런지 비싸다.
11시에 데스크에 갔는데도 여전히 대기다. 11시 40분에 이륙하는 비행기 것만... 신혼여행객들이 11시 30분까지 꾸역꾸역 온다. 거기다 짐 붙치다 말고 여행배낭 열고 짐을 다시 싸고 있다... 다시 티켓팅하는 데스크에서 “Tai air is big airplane, I just one sit. my ticket." 하고서야 겨우 11시 35분에 좌석을 배정 받을 수 있었다. 급하게 게이트로 가다가 검색대에서 어택배낭에 넣어 두었던 휴대용 나이프가 딱 걸렸다. 네팔에서는 안걸려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압수당하고, 좌석 많은데 나 애 먹인거면 인천공항에 있는 타이항공 가서 따질 요량으로 비행기를 한 바퀴 돌아보니 좌석이 꽉 찼다. --; 거의 한국 신혼여행객이거나 단체 여행객들이다. 시끌시끌하니 생소하다.
2005. 10. 27. (금)
[ 인천공항에서 무사귀환!! ] |
아침에야 한국 상공으로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인천공항 상공의 안개로 일본에서 2시간이나 대기하다 자동운행으로 인천에 착륙할 수 있었다.
검역질문서에 “과거 1주일 동안에 아래 증상이 있었거나 또는 현재 있는 경우 해당란에 [v]표시를 하여 주십시오. 호흡곤란” 체크하고 싶었다.
나 무지 호흡곤란이었다. 공항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의무경찰에게 무사 귀환한 내 모습을 찍어 달라고 한다.淸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