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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⑰
이 대 영
∥불신의 시대
아이들은 자갈 박힌 신작로를 걸어 학교에 가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의 덩치도 커갔다. 여자들의 엉덩이는 아이를 낳아도 될 만큼 넓어졌고 남자들은 소변을 보며 서로 고추가 까졌는지를 확인했다. 우리는 여전히 책보를 어깨나 허리에 매고 다녔으며, 고무신은 대체 불가한 자가용이었다. 남녀 할 것 없이 누구나 겨드랑이에 이를 키웠으며, 남자아이들의 머리에는 허연 곰팡이가 피어났다. 그래도 아이들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씩하게 자랐으며, 어른을 보면 허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어른들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었다. 고무신은 섬돌 근처에서 여전히 뒹굴었고, 그들이 입고 다니는 옷은 해가 바뀔수록 바느질로 누빈 흔적이 늘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기울면 장터나 삼거리 주막에 모여 시간을 줄였다. 이 고장에 너울성 파도 같은 사건은 없었다. 아버지들은 해빙기나 우기에 신작로 보수공사에 동원되었으며, 식목일에는 사방공사에 나가 소나무나 아카시아를 심고 밀가루를 받아 왔다. 어머니는 밭에서 일하다가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달려와 아이를 낳았으며, 저녁이 되면 밖에서 노는 아이들을 불러들이기에 바빴다. 그러는 동안 오십 원 하던 육성회비는 백 원으로 올랐으며 남자의 하루 품삯도 오백 원이 되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닭장에서 알을 꺼내 문방구를 들락거렸으며 몽당연필을 볼펜 껍질에 끼워 썼다. 필통에는 늘 시커멓고 너덜너덜한 지우개가 뒹굴었다. 좀 사는 집은 점심으로 누릉지나 국수를 먹었으나 대개는 점심을 건너뛰기 일쑤였다. 한 마디로 사는 것이 시련인 시대였다. 그리고 불신의 시대였다.
우리는 학교에 입학하여 간첩 신고요령부터 배웠다. 무장 공비 침투사건 때문이었다. 청와대 침투 작전은 비록 실패했으나 공비들이 서울 진입에 성공하자, 북한은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10월 30일에는 울진-삼척지구 연안에 무장 공비 열두 명을 침투시키는 대담함을 보였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갈 무렵, 북한은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켜 중국과 소련의 지속적인 군사원조를 확보해야 했다. 또한 남한 경제가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했고, 점진적인 군사력 증진은 남한을 무력으로 적화하려는 그들에게 조급증을 유발했을 것이다.
1968년 10월 30일, 북한 유격대가 울진과 삼척지구로 침투했다. 이때 울진·삼척 해안으로 침투한 무장 공비는 3일 동안 네 차례에 걸쳐 각 30명씩 특수정을 이용하여 해안에 상륙했다. 이들은 3일 동안 120명의 북한 유격대를 8개 조로 나눈 후, 야간을 이용하여 강원도 삼척의 고포 해안에 상륙하여 울진·삼척·봉화·명주·정선으로 침투했다. 당시, 이들이 상륙한 곳에 있던 해안초소 근무 인원은 총 여섯 명이었다고 한다. 초소 분대장은 말년병장의 전역을 축하해주려 두 명의 보초만 남기고 다른 세 명과 함께 술집으로 갔다. 게다가 일병 한 명은 두세 달 선임이란 이유로 내무실에서 자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이었던 일병은 그들이 상륙하는 것을 발견했으나 겁에 질려 도주했다고 한다. 그 후 일병은 분대장에게 보고를 했으나 횡설수설했고, 그들은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어서 박격포 몇 발을 바다로 발사한 후, 상륙하려던 적을 격퇴했다고 허위 보고했다. 해안에 상륙한 적은 마을 사람을 모아 위조지폐를 나누어 주고 남로당 가입서를 작성하며, 도망치려던 주민을 살해하기도 했다. 방송사는 대간첩대책본부 상황실과 군경과 예비군의 작전상황을 시간마다 송출했다. 무장 공비들은 삼척 산간마을과 평창 등지에서 일가족과 집배원을 살해하고 주민에게도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오금을 저리며 치를 떨었다. 내무부 치안국에서는 각종 포스터와 전단을 만들어 지역마다 배포하고, 면사무소 직원들은 이를 골목마다 내다 붙였다. ‘불온 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합시다!’라고 적힌 전단에는 어린이가 삐라를 우편함에 넣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또한 ‘민경이 한마음으로 간첩을 잡아내자’라는 전단에는 간첩과 민간인이 간첩을 함께 체포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삐라를 주워 경찰서에 가져가면 학용품을 준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인근 산과 벌판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북한이 날린 삐라가 공주까지는 날아오지 못하는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또한 공판장 창고에 간첩을 신고하면 20만 원을 준다는 벽지가 여러 장이 붙어 있어도 쓸 데가 없었다. 두 달에 걸쳐 무장 공비 소탕 작전이 마무리되긴 했으나 전쟁 체험 세대에게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은 뉴스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더 많은 지역에서 공비가 출몰했으며 군경사망자도 상당할 거라고 입을 모았다. 갓 전역한 장터 윤길이 형과 벌뜸 만석이 형은 그날 보초병은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며 몸을 사렸다. 그리고 소대장을 비롯해 지휘관들은 옷을 벗을 거라며 군에 대해 아는 체를 했다.
이 행수의 역할을 물려받은 갓바위 이 서방은 남 서방과 황 서방을 대동하고 도장골 금광에 다녀왔다. 나와 용길이 그리고 정일이는 막대기 하나씩을 들고 어른들을 따라나섰다. 딱히 우리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숯을 굽던 밭을 지나자 도장골을 상징하는 붉은 협곡이 나타났다. 우리의 눈은 절벽을 향하고 있었다. 예상한 데로 그곳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파여 있었는데 그것은 틀림없는 물총새의 집이었다. 물총새는 깃털이 화려하고 기품이 있어 꾀꼬리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다. 우리 집에는 사과 상자의 빈틈을 메우고 앞쪽에 철창을 붙여 만든 새집이 있었다. 물총새나 꾀꼬리 새끼를 그곳에 넣어 두면 어미 새가 개구리를 물어와 따로 먹이를 줄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은 성체가 되기 전에 죽었지만, 다 자란 새들을 산으로 날려 보내는 기쁨도 종종 있었다. 며칠 후면 용길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아 구멍에 손을 넣어 새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른들로부터 금광에 박쥐가 산다는 소리를 듣고 가보고 싶었지만, 겁부터 생겨 나서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도장골 금광 옆에는 조그만 우리 밭이 있었다. 주로 황토로 고구마 경작이 잘 되었지만, 아버지가 수확물을 지게로 나르느라 애를 먹었다. 그 밭에서 일하다가 목이 마르면 금광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셨다. 가끔은 돌무더기에서 금을 찾아보겠다고 나섰지만, 돌 틈에 숨어 있던 지내나 뱀에 놀라 돌아오기 일쑤였다.
어른들을 따라 동굴에 들어가자 입구부터 음습했다. 어른들은 예전과는 다르게 동굴이 너무 습하고 박쥐들이 살아 유사시 피난살이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걱정했다. 이 서방과 남 서방 그리고 황 서방은 돌 위에 앉아 지난 난리 때 피난 왔던 일을 상기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굴 안으로 들어가 실제로 박쥐가 사는지를 확인했다. 정말 그곳에는 박쥐가 살고 있었다. 우리가 굴 깊숙이 들어가자 놀란 박쥐가 굴 밖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흥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어른들은 깊숙한 곳에 곰이 살 수도 있다며 아이들을 불러냈다. 어른들은 여전히 지난 난리 통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신나게 주고받았다. 간간이 할아버지와 광재 아저씨의 이름도 호명되었다. 광재 아저씨는 근래에 간이 안 좋아져 가축 장사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어른들은 설마 또 난리가 나겠느냐며 아이들을 앞세우고 마을로 향했다.
한 달이 지난 후에야 본대에서 낙오한 무장 공비가 아군에 투항했다. 이어서 여섯 명의 무장 공비가 귀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학교를 오갔다. 그러다가 겨울 초입에 들은 이승복 어린이 사건은 우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의 시골 마을에 무장 공비 다섯 명이 침입하여 아이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것이었다. 엄마와 아이 네 명이 있는 집에 들어가 공비들이 아이들에게 “너는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초등학교 2학년이던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답하자, 공비들이 이승복 어린이의 입을 대검으로 찢어 죽였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가족은 모두 죽고, 한 어린이만이 겨우 살아남아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시 집을 비운 아버지와 살아남은 아들은 천운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이를 계기로 “나는 선생님이 싫어요!” “나는 아버지가 싫어요!”와 같은 패러디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남한 사회의 반공 이념 강화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울진-삼척 무장 공비 사건이 마무리되자 전국에서는 반공 궐기대회와 웅변대회가 열렸다. 연단에 오른 연사가 양손을 펼치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면 우리는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냈다. 그러면 연사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는 열변을 이어갔다. 대회가 끝나고 상을 받는 연사는 아이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들은 한동안 학교나 마을에서 머리를 뻣뻣이 세우고 마치 계백 장군처럼 돌아다녔다. 거만한 것이 장학사나 국회의원 같았다.
장학사가 오는 날이면 전교생이 비상 상황에 들어갔다. 고학년은 운동장과 화장실 청소를, 저학년은 교실 유리창과 복도를 맡았다. 담임 선생님과 학급 간부들은 오후에 남아 환경미화 작업을 했다. 교실 뒤편 벽에 여러 모양의 스티로폼을 붙여 놓고, 그 위에 아이들의 그림과 시화 등을 붙였다. 내 작품은 한 번도 그 벽에 걸린 적이 없었다. 나는 그저 무색무취의 순둥이였다.
선생님은 장학사 방문에 대비하여 광목천으로 만든 유리창 닦개와 직사각형 모양의 마루 걸레를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무 불평 없이 천 조각을 모아 두 개의 걸레를 만들어 주셨다. 걸레를 준비하지 못한 아이들은 다른 아이가 청소를 마친 후에 걸레를 빌릴 수 있었다. 우리는 걸레로 교실과 복도 유리창을 닦아 선생님에게 합격을 받아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또한 나무로 된 교실과 복도 바닥은 집에서 빈 병에 담아 온 들기름으로 윤을 냈다. 다른 아이보다 더 윤을 내기 위해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바닥을 문질렀다. 그러는 사이 바지의 무릎 부분이 닳아 튀어나오거나 구멍이 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우리를 더 괴롭힌 것은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2학년에 올라가자 학기 초부터 지난겨울에 공표된 국민교육헌장을 통째로 암송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그리고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면 교실에 들어와 학생을 지목하고 이를 확인했다. 일정 때 순사와 다름없었다. 반장인 나는 늘 긴장했다. 장학사는 으레 반장을 먼 불러 교단에 세워 놓고 ‘국민교육헌장’에서 시작하여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토씨가 정확히 매달려 있는가를 확인했다. 담임은 나와 부반장인 경숙이를 수시로 불러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도록 했다. 가끔 암송 중에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선생님의 입 모양을 보고 기억을 재생해 이어가도록 훈련했다. 같은 반인 윤태, 성철이, 성숙이는 수업이 끝나고서도 남아 암기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그래서 담임 선생은 교장이나 장학사가 교실에 들어오는 날에는 세 명을 동시에 화장실로 보내곤 했다. 우리는 이 세 명을 ‘돌대가리’라고 놀렸다.
국민교육헌장 암송은 비단 학생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교장과 교감, 그리고 교사들도 국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장학사는 교사들을 지목하여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게 했다. 다만 체면을 생각하여 교장은 제외했다. 교사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예산에 있는 어느 학교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지 못한 교사가 섬 학교로 좌천되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는다”라며 선생 노릇도 더는 못하겠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뿐 아니라 모든 공직자도 마찬가지이니 참고 견디자며 서로를 위로했다.
1학년 때의 담임 선생은 2학년에 가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반 편성도 그대로 이어갔다. 다만 청군과 백군의 편성은 새로이 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6학년까지 1반인 동시에 백군 소속이었다.
학교 운동회는 이 지역의 축제였다. 상급생은 덤블링이며 장애물 달리기 연습을 하느라 고생을 했다. 그리고 소사 아저씨는 남자 선생님들과 운동장에 만국기를 매다느라 애를 먹었다. 가을 운동회에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청백전 이어달리기와 씨름이었다.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면 운동장이 들썩였다. 특히 학부모 대항 이어달리기 경주가 가장 인기 있었다. 우리로서는 어른들이 뛰는 모습도 우습거니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옷을 잡아당기는 장면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리 대항 줄다리를 할 때면, 애어른 할 것 없이 운동장으로 뛰어나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가을 운동회의 백미는 먹거리였다. 아침부터 동네 어른들은 마을 공터에 모여 소달구지에 먹거리와 땔감을 싣고 나와 학교 운동장에 있는 나무 아래에 하얀 천막을 쳤다. 그리고 무쇠솥을 걸어 전을 부치고 국밥을 끓였다. 운동장 본부석 가운데에는 교장 선생님의 자리가 있고 다음으로 경찰서장, 면장, 조합장, 우체국장, 육성회장, 이장 순으로 위치했다. 그리고 천막 앞에는 굵은 매직으로 쓴 찬조금 액수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거기에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도 보였다. 할머니가 찬조금을 낸 증서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본부석 앞에 푸짐하게 싸놓은 공책을 바라보며 눈독을 들였다. 100m 달리기를 한 후 1등에게는 공책 세 권, 2등은 두 권, 3등은 한 권이 상품으로 주어졌다. 나는 한 권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100m 달리기에서 겨우 3등을 한 날에는 팔뚝에 퍼렇게 찍힌 확인 도장을 보란 듯이 드러내며 운동장을 돌아다녔다. 그것도 딱 한 번이었다.
청백 기마전 경기에서는 가끔 이기기는 했어도 체력이 열세인 나는 할머니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장애물 달리기를 하다 배구네트 그물에 걸려 애를 먹는가 하면, 기마전에서 말이 되어 싸우다가 상대방이 다리를 거는 바람에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담임 선생은 늘 나를 백군 대표선수로 내보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집은 운동회가 열리거나 소풍 가는 날이면 새벽부터 분주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작은어머니까지 부엌에 나와 음식을 준비했다. 작은어머니가 생김에 들기름을 발라 놓으면 어머니는 그 위에 고두밥을 밭두렁처럼 깔았다. 그리고 단무지와 햄 그리고 계란지단과 시금치를 올려놓고 볶은 들깨를 밭에 비료 주듯 좌르르 뿌렸다. 그러면 할머니는 이를 정확히 0.5cm 간격으로 잘라 찬합에 넣었다. 찬합은 나무로 만들어진 5단 8각형으로 안에는 일곱 가지 찬을 넣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세 개의 찬합에 각각 콩밥, 찰밥, 김밥을 넣었다. 그리고 두 개의 찬합에는 각종 나물과 고기볶음 요리를 나누어 담았다. 이는 모두 교사들을 위한 도시락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교사들은 담임 선생을 따라 할머니가 있는 장소로 몰려왔다. 그리고는 이구동성으로 음식을 준비한 할머니를 칭송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과 먹는 점심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친구들과 이웃의 시선도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서너 개의 김밥을 입에 움켜 넣고 다른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곤 했다. 상각이는 늘 혼자였다. 법사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동반하여 외지로 가 있으면 도시락 대신 누나가 싸 준 삶은 달걀을 가지고 왔다. 내가 손에 들고 온 김밥 두어 개를 그에게 내밀면 그의 얼굴에는 해바라기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주는 찐 달걀은 찬합에 든 어떤 찬보다도 맛있었다.
담임 선생은 2학년이 되자 나를 반장으로 내세웠다. 학생들에게 반장과 부반장 추천을 받아 눈을 감고 손을 들어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상각이의 추천으로 반장 후보로 나섰는데 상대는 장터의 선영이었다. 선영이는 1학년 중간 즈음에 서울에서 이사 온 계집아이였는데 얼굴도 뽀얗고 옷도 세련되게 입어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 같았다. 무엇에 들떴는지 상각이는 선영이도 반장으로 추천했다.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지만 내 입은 그믐달이 되었다. 상각이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실없이 웃기만 했다. 모두가 눈을 감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호명되면 손을 들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상각이를 주시했다. 그런데 상각이가 선영이를 선택하는 것을 확인하곤 배신감이 끓어 올랐다. 큰 차이로 반장이 되긴 했지만 영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그래서 하굣길에 누구에게 손을 들었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상각이는 망설이지 않고 “너!”라고 대답했다. 내가 실눈으로 선영이를 선택하는 것을 보았다고 해도 그는 끝까지 우겼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에 “대나무 숲에서 잡은 새들이 30마리는 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면 몇 마리 나누어 주겠다고까지 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산을 넘어 그의 집까지 갔다. 그러나 그에게 또 속고 말았다. 광 속에 넣어 놓은 새들이 열린 창문으로 모두 달아났다고 했다. 정말 창은 열려있었다. 폐병을 앓는 그의 형의 기침 소리에 나는 화도 못 내고 그 집을 뛰쳐나왔다.
내가 반장이 된 후로 선생님은 우리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쌀은 물론 텃밭에서 나는 각종 채소가 검은 보자기에 싸여 그의 손에 들려졌다. 대신 나는 학교에서 반마다 한 권씩 배당받은 <소년중앙>은 물론 <새 소년>, <어깨동무>와 같은 잡지를 집에 가져와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표지 모델로 나온 여자아이들을 반복해서 보고, 또 만지며 ‘이렇게 예쁜 계집애들이 서울에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도시를 동경했다. 또한 ‘주먹 대장’이나 ‘도깨비감투’ 같은 만화는 나에게 대리만족과 상상력을 키워준 값진 선물이었다.
개학을 몇 주 앞두고 라디오에선 남파간첩 이수근 사건을 연일 보도했다. 그는 판문점에서 남쪽으로 탈출한 북한 언론인이었다. 이후 결혼도 하고 반공 강연 등을 하며 살다가 여권을 위조하여 외국으로 달아나려 했다는 것이다. 이수근은 처음부터 간첩 활동을 목표로 위장 귀순을 했고, 남측에서 수집한 정보를 북한에 전달하기 위해 출국을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위장 귀순’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처음 들었다.
담임 선생은 신형 녹음기처럼 간첩 신고요령을 재생하곤 했다.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는 것처럼 그의 입에서는 반공이라는 용어가 흘러넘쳤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 따르면 1960년대 간첩 검거 수가 1,686건으로 가장 많은 시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오랜만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 등 웬만한 표어는 머리 나쁜 아이들도 외우고 다녔다. 관공서에서 나온 검은 지프차는 머리에 확성기를 달고 온 마을을 돌며 간첩 신고요령을 외쳤다.
젊은 아버지들은 부역과 향토예비군 훈련을 하며 투덜댔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에 창설한 향토예비군은 훈련과 행사가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용봉리와 보흥리 예비군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훈련을 하곤 했다. 그중에는 장터 윤길이 형과 벌뜸 만석이 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군복을 입은 현역 장교가 검은 안경을 쓰고 고함을 치면 예비군들은 운동장을 기며 낑낑댔다. 검은 헬멧을 쓴 조교들은 예비군들이 지나간 자리를 훑어보며 나뒹구는 동전 줍기에 골몰했다. 예비군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은 단연 학교에 전근 온 지 얼마 안 되는 순둥이 박 선생님이었다. 중대장은 그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훈련을 받는 것이 안 돼 보였는지 훈련에서 제외했다. 다만 여론을 의식하여 물 주전자를 나르는 등 허드렛일을 시켰다. 재미있는 것은 훈련을 받기 전에 공주보건소에서 출장 나온 직원이 인구증가의 심각성을 알리는 강연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관 수술의 필요성을 설명한 후, 수술을 원하는 사람을 지정병원에 보내 무료로 수술을 받게 했다. 그리고 남은 훈련 시간을 면제해주었다. 또한 원하는 사람에게 피임약과 콘돔을 나누어주었다. 이튿날이면 교실에 허연 콘돔 풍선이 날아다녀 처녀 선생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예비군들은 오후가 되면 막걸리로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도로 근처에 있는 산으로 가서 진지를 구축했다. 우리 집 뒷산은 물론, 산이란 산은 온통 진지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졌다. 방공호는 아이들이 놀기에 좋은 장소였다. 그뿐 아니라 놀이를 하다 똥을 누기에도 최적의 장소였다.
아랫집에 사는 상수 형은 밤마다 우리를 불러 군사 훈련을 시켰다. 실상 그 형은 군대도 안 간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저녁을 먹고 우리 집 안마당으로 모였다. 손에는 막대기가 하나씩 들려 있었으며 얼굴은 비장했다. 상수 형은 우리를 일렬로 세워 놓고 사격과 공격 명령을 내리는 등 지휘관 행세를 했다. 어른들은 이러한 광경이 재미있는 듯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그가 가끔 돌격을 외치면 아이들은 고함을 지르며 마을 아래로 내달렸다. 우리는 마치 상수 형을 직속상관으로 생각하여 그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가 “군대는 명령에 살고!”라고 외치면 우리는 “명령에 죽는다!”라고 외쳤다. 상수 형은 초등학교도 못 나왔지만, 사마산 아래 있는 한학 서당을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천자문을 들고 집을 나서는 아들이 장터 삼거리 큰길을 건널 때까지 까치발을 하고 바라보곤 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서당에 다닌 덕분에 상수 형은 국가공무원이 되었다. 군인 지휘관은 아니지만 교정직 공무원이 되었으니, 그는 적성에 맞게 직업을 선택한 셈이었다.
신작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올 때 가장 무서운 일은 거지나 상이군인을 만나는 것이었다. 유독 거지와 보따리 상인이 많던 시대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들에 나갈 때 문단속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나무나 싸리나무로 만든 대문일지언정 사람이 있고 없다는 표시를 확실히 해 놓고 다녔다. 신기하게도 닫힌 문짝을 밀고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하굣길에 나는 우연히 거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명이었다. 장터 삼거리를 50m 앞에 두고 나는 거지와 조우했다. 피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그날은 교실 당번이라 청소를 마치고 늦게 오는 길이라 옆에 친구도 없었다. 멀리서도 거지는 절뚝거리는 것이 역력했다. 가슴은 콩닥거렸지만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다는 생각에 위안이 되었다. 서촌길로 돌아가면 되었지만, 이미 샛길을 지나쳤기에 가던 길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거지가 오는 반대편에 서서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신작로에 두고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시커먼 거지의 수염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거지였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애야! 네 이름이 뭐니?
호준인데요?
음! 이름이 멋있구나!
너 어디서 사니?
나는 대답 대신 손으로 우측에 있는 마을을 가리켰다.
그렇구나! 너 학교에서 올 때 어떤 아저씨랑 같이 왔지?
나는 ‘그지 아저씨’라고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그래! 그지 아저씨 말이다.
나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그의 눈빛에 나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같이 오긴 했는데 처음 보는 아저씨였어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알고 있다. 근데 그 아저씨 어디로 갔니?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함께 오던 거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학교 문방구 앞에서 만난 거지였다. 아니, 할아버지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십 리 사탕과 껌 하나를 주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나는 한순간에 긴장을 풀어버렸다.
그는 나와 함께 신작로를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름과 나이, 그리고 사는 곳이며 장래 희망 같은 거였다. 장해 희망을 묻는 말에, 나는 경찰이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가 나에게 이유를 묻자 나는 ‘그냥’이라고만 말하고 겸연쩍게 웃어넘겼다. 사실, 시골에서는 면서기나 순경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그들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면 그에게 다가가 아는 체하는 이들이 많았다. 술자리 때마다 서촌 권 서방이나 장터 한 서방은 아는 면서기나 경찰 이름을 들먹이며 위세를 떨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경찰이 되는 게 꿈이었다. 도둑이 들어도, 싸움이 있어도, 밀주 단속반이 떠도 항상 나타나는 사람이 경찰이었다. 그들은 시골 어디에 나타나도 환대를 받았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내가 마땅치 않은 일을 하면 두 손목을 교차하며 형사가 포박해 간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거지 할아버지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는 경찰보다는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하라고 했다. 돈이 많으면 못 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기업 사장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꽤 유식한 할아버지 같았다. 그러던 할아버지 거지가 갑자기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앞에서 걸어오는 거지를 보고 어디로 내뺀 듯싶었다.
우리 아이들 사이에선 거지들이 공주 교동 다리 아래 모여 산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거기에는 왕초도 있고 우리 또래의 아이들도 많다고 했다. 어른들이 넝마주이를 하러 다니는 동안 아이들은 아이스께끼를 팔거나 동냥을 한다고 했다. 동냥한 돈은 저녁이 되면 왕초에게 바쳐야 하는데, 제일 적게 동냥을 한 아이는 죽도록 맞거나 밥도 못 얻어먹는다고 했다. 그리고 거지에게 동냥을 주지 않거나 그들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떼로 몰려가 해코지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 거지도 있다는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예쁜 거지도 있다는 말에 우리 집에 데려와 같이 살았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다.
다행히 수염 난 거지는 나에게 할아버지 거지에 관해 더는 묻지 않았다. 그가 내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나는 움찔하며 물러났다. 거지의 한쪽 팔이 쇠갈고리였기 때문이다. 거지는 ‘씩’ 하고 웃더니 다시 또 보자며 좌측에 있는 산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우리 마당 크기의 황토밭이 비탈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밭 가장자리 소나무 밑에 작은 움막이 하나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 거지가 그곳에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괴롭힌 것도 없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거지, 그것도 두 명의 거지와 동행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 후 나는 거지가 나쁜 사람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거지를 만나면 도망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도망가는데, 나만 거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할아버지 거지가 걱정되어 몇 번이나 움막을 돌아보았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해 질 무렵이었다. 아랫집에 사는 상수 어머니가 부리나케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육덕 좋게 생긴 그는 숨을 몰아쉬며 침을 두어 번 삼켰다. 옆집에 사는 가족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당황하는 낯빛이 얼핏 뜰에 비쳤다. 상수네에 돈 빌려준 것이 어림잡아도, 10만 원은 넘을 듯했다. 어머니는 이미 대청마루 밑에 놓인 디딤돌 위에 할머니의 고무신을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길호네 집으로 내려갔다. 길호 집 마당에는 이미 소문을 듣고 온 어른들과 아이들이 와 있었다. 아이들은 쓸만한 물건을 서로 가져가기 위해 집안을 뒤지고 다녔다. 이내 할머니의 입에서 “이런 몹쓸 것들!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 먹을 것이지!”라며 탄식했다. 이웃집 남 서방 막내아들과 황 씨 아들은 길호 동생이 쓰던 썰매를 두고 서로 가져가겠다고 실랑이를 하기도 했다. 나는 낡은 깡통 속에 들어 있는 팽이를 꺼내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방금 할머니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벼룩의 간을 빼먹고 싶지는 않았다.
집은 사람이 살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엌에는 솥단지가 그대로 걸려 있고, 길호가 산에서 해 온 나무도 몇 단 쌓여 있었다. 부엌을 뒤지던 황 서방댁이 뒤주에 있는 쌀은 다 퍼갔다고 했다. 장독을 열어 본 남 서방 댁은 “고추장과 된장 없이 어떻게 살라고 두고 갔노!”라며 혀를 끌끌 찼다. 다소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공수원 장터 차부집 주인이 오면서 수습되었다. 공수원을 대표하는 계주나 다름없는 그였다. 우리 집조차도 가끔 차부집 주인에게 돈을 빌리는 것을 보면, 그의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길호 엄마도 그에게서 얼마간의 부채가 있을 듯싶었다.
길호네는 아버지의 병 치료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길호 엄마는 공주에서 옷을 가져다가 마을을 돌며 봇짐 장사로 입에 풀칠을 했다. 간경화로 항상 검은 얼굴을 하고 다니는 길호 아버지는 강냉이 기계를 돌려 약값을 충당했다. 그러기에 길호는 초등학교를 4학년에 그만두고 그의 아버지 일을 도왔다. 손수레로 마을을 돌거나 장에 나가 일을 할 때면 그는 아버지 곁에 붙어 불쏘시개를 만드는 일을 했다. 아이들 입에서도 손수레와 뻥튀기 기계가 없어진 것으로 보아, 멀리 달아나지는 않았으리라는 말이 나왔다. 길호나 그의 동생 길선의 입에서 그들이 떠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방에서 왁자지껄하던 어른들이 갑자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갈호나 길선이에게서 들은 것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아이들은 잠시 두 눈을 굴리거나 머리를 긁다가 물러서며 제집으로 향했다. 방 안에서 “내 그럴 줄 알았어! 애들 입단속은 전옥서 관리처럼 하는 인간들이지!”라는 황 서방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큰길로 올라섰다. 마음 한편으로, 길호네 가족이 안 잡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마을 삼거리를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웬 낯선 이가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아까 만난 거지 할아버지였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똥줄 나게 집으로 달렸다. 거지를 보면 달아나지 않겠다는 생각과 내 몸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학교에서 돌아와 찐 고구마를 먹으며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내가 거지들을 만난 이야기를 하자, 어머니는 그들에게 가까이 가거나 절대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전쟁에서 상처를 입어 말과 행동이 거칠고 폭력적이라 배울 게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내가 “그들을 만났어도 두 사람 모두 나를 때리거나 욕하지 않았어요!”라고 해도, 어머니는 “안 된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면서 나분동에 사는 먼 친척 이야기를 꺼냈다. 월남에서 팔을 잃고 돌아온 청양에 사는 상이군인이 의처증이 심해 부인이 친정에 와 있다고 했다. 나는 의처증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다시는 거지들 근처에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거지가 우리 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우선 대문부터 닫았다. 빗장에 손이 가려다가 이내 멈췄다. 대문이 오래되어, 밖에서 세게 밀면 소음을 내며 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빗장을 걸더라도 누가 나에게 그 이유를 물어오면 사나이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사랑방으로 들어가 유리창을 통해 밖을 쳐다보았다. 거지 노인은 마치 우리 집을 목적지로 생각하는 듯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리고 수염만 길렀을 뿐 나이는 아버지 또래인 듯싶어 내 눈을 의심했다. 나는 고양이처럼 사랑방에서 나와 뒷마당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며 귀를 대문으로 활짝 열어 놓았다.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닫힌 대문을 보고 거지가 돌아갔나 싶어 발을 떼려는 순간,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지팡이로 두드리는 소리였다. 나는 움찔하며 몸을 숙였다. 그러자 대문이 “삐 걱!” 소리를 내며 열리는 듯했다. 나는 급하게 물러서 담 밑에 있는 화단을 딛고 담장을 타고 넘었다. 뱃가죽이 아팠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리고는 안마당이 보이는 장소로 기어갔다. 흙담에 생긴 틈새를 이용해 거지의 동태를 살필 생각이었다. 마당에 들어 온 거지는 돌아갈 마음이 없는 듯했다. 마치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려는 듯 죽담에 기대어 담배까지 태웠다. 마침 작은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작은어머니는 “어머!” 소리를 내며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긴장이 풀리려던 나는 다소 황당했다. 그리고 불만 섞인 소리를 뱉어내는 거지의 행동에 나는 몸을 더욱 움츠렸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대문 밖으로 나온 작은어머니가 나에게 오라는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산으로 향하다가 담 밑에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멋쩍게 작은어머니에게 걸어갔다. 그래도 빠르게 달리거나 당황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소리를 죽이려 뒤꿈치는 살짝 들어 주었다. 양 씨 산소에 앉은 작은 어머니는 나를 안으며 많이 놀랐느냐고 물었다. 나는 “별로!”라고만 짧게 대답했다. 나도 작은어머니에게 놀랐느냐고 묻자 “별로!”라고 짧게 대답하여 서로 웃었다.
다행히 남 서방 집을 지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황 서방댁이 집으로 오고 있었다. 내가 벌떡 일어서자 작은어머니가 내 손을 잡아끌어 자리에 앉게 했다. 그리고 “절대로 거지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가고 여기에 있었다”라는 말을 하지 않기를 다짐받았다. 나 또한 같은 약속을 받아냈다.
나는 태연하게 대문으로 들어섰다. 작은어머니가 먼저 들어가고, 나는 탱자나무 아래에서 잠시 기다리다 들어갔다. 그리고는 거지에게 인사까지 했다. 그러자 거지의 안색이 환해지며 “인사성이 밝다!”라며 칭찬을 했다. 이에 어색하던 분위기가 풀리는 듯했다. 다행히 거지는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할머니는 무섭지도 않은 지 거지 가방을 뒤집어 내용물을 다 털어냈다. 그러자 옷핀, 실, 빨래집게, 고무줄, 머리 집게 핀, 칫솔, 치약, 비누 등이 죽담 위에 흩어졌다. 할머니의 당찬 행동에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거지였다. 고무줄과 치약을 몇 개 산 할머니가 큰소리로 거지에게 얼마냐고 묻자, 거지는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보리쌀 한 되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거지의 쇠갈고리가 있는 팔뚝을 걷어 올렸다. 나는 물론 작은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지조차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할머니는 이내 “가짜 거지는 아니구만!” 하며 거지의 어깨를 다독였다. 잘생긴 얼굴을 왜 수염으로 가리고 다니느냐는 말까지 하자, 거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수줍어하기까지 했다. 그제야 나도 긴장을 풀고 거지에게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어머니가 담아 준 쌀을 가방에 넣은 거지는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할머니는 “밖에서 우리 손자를 만나면 잘해주시오!”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그 거지를 한동안 만나지를 못했다.
전쟁과 남북 분단, 이념의 혼재, 지긋지긋한 가난 등 그로 인한 불신은 사회 곳곳에 균열과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도망간 자나 남은 자,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울퉁불퉁한 삶을 숨차게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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