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위진 시조집, 『어제바람』, 시문학사, 2002.
제6시조집
주전골 단풍
내 무슨 개선장군
이 벅찬 환영인가
하늘 찌를 갈채 속에
산도 멍멍 귀가 먹고
영봉도
뚜벅뚜벅 걸어나와
모자 벗어 흔든다.
어제바람
밤 열시 내집 현관
열쇠로 문을 따면
어둠이 쏟아져나와
서로 밀려 흩어진다
방에는
산악같은 외로움
또아리를 틀고 있고-
한 바퀴 돌아오라고
북녘을 간 어제바람
무엇에 잠차졌는지
이 밤도 소식 없고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달빛이 와 기웃댄다.
모과
모과 한 개 받아 들면
밝은 기운 모여든다.
금빛 붕어 뻥긋뻥긋
몸으로 뱉는 자작시
가을은
제 철이라서
제 향으로 익는 하늘.
생모시 깨끼옷 차림
서늘한 매무새로
어느 댁 별당에 앉은
향그러운 규수였을라
전생의
수련 핀 연못 가
누런 달빛 그리우리.
풀꽃의 노래
-윤동주 시비
序詩 다시 읽습니다
가슴에 젖은 운율
투혼에 불을 당겨
돌도 뚫을 그 의지
살같은
선각의 꿈을
풀꽃으로 흔듭니다.
餘日
갈길이 멀었다고
뜀박질로 달린 일월
느긋한 팔자 걸음에
여유 한 번 못 부린 채
넝쿨길
짙은 안개도
무가내로 헤쳐왔다.
어느새 손이 잡힐 듯
종착지가 바라보여
이젠 좀 늦춰보려도
늦춰지지 않는 걸을
상고대
뽀얀 잔가지
햇볕 받아 반짝인다.
얼마를 달여왔나
이승의 끝모롱이
신들매 풀어놓고
허리 펴볼 새도 없이
또 먼길
떠나가야 할
징검다리 다가선다.
솥 아이야기
감꽃만한 하얀 밥솥
앙증맞은 나의 젖줄
할머니적 아랫녘에 큰 흉년이 들던 해면 솥은 그만 달아매두고 동네동네 더터올라오는 난민들을 위해 예닐곱 군데 가마솥 내어 걸고 끓여내도 끓여내도 모자랐다는 죽 이야기나 서말지기 큰 솥에 넘치도록 밥을 짓던 어머니적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푸던 동솥마저 전설로 흘러가 요즈음, 일인용 하얀 밥솥에 지은 밥이 서너끼는 넉넉한 분량이 된 日常임에랴.
가마솥에서 서말지기솥 그리고 동솥이 전기밥솥으로 바뀌어서 끝내는 일인용으로까지 손쉬운 내력이 밥을 푸는 손등의 주름마디에 가닥가닥 새겨서 꿈틀거리며 내 젖은 눈을 올려다 본다.
매미가 창틀에 와서 밍밍
소꿉장난 하느냐며 또 밍밍.
코스모스
군락을 이룰 때는
남의 가슴 설레게 하고
나부껴 홀러 서면
사슴처럼 슬픈 눈매
가을을
이슬로 마시고
살결 같은 고운 생각.
낮에는 실바람에
어깨춤이 일다가도
앞산의 단풍잎이
노을 받아 타고 나면
소롯이
밤을 지새워
별을 혜는 초립동.
詩人의 더듬이
詩人의 더듬이는
여러 가지 색깔이다
백합꽃밭 흑장미빛
청남바다 촉 튼 눈엽
저마다
쏴올린 하늘은
부처드의 별밭 화원.
시인의 더듬이는
때도 없이 잉태를 한다
계절과 눈맞추거나
조간신문 재채기에도
파르르
진통을 일으키는
알레르기 분진이다.
□ 부처드 : 캐나다의 광산업으로 거부가 된 이가 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뜻으로 화원을 만들어 무료로 입장을 하게 한 사람의 이름.
□ 부처드 화원 : 캐나다 빅토리아 섬에 있는 아주 규모가 큰 화원.
독도
한여름 태풍의 눈
모진 성화 다 떨치고
두 손을 불끈 쥐고
조국을 지켜선 너
올려면 와 봐라
눈망울을 굴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솟는
뭍을 향한 그리움이
밤잠을 앗아가도
아침해를 떠올리고
임진란
거북선인 양
의연하게 지켜선 너.
幻
車窓을 흐르는 건
들도 산도 아니었다
바람을 일으키며
스쳐가는 세월이었어
갓 피운
신록의 등에
업혀가는 나 그리고 봄.
세상은 지금 회오리
항간은 학질 앓아도
뜬구름 한가로운
하늘빛은 어제 같다
心身은
모두 환이라며
백목련도 뚝뚝 지네.
한라산
영실서 근 4킬로
윗새오름 가는 길에
시누대에 숨어 흐르는
물소리가 반짝이며
동 층층
물고 가야 할
오르막길 짚어준다.
혼자서 딛고 오른
첮길 벼랑 앞에
골에서 氣를 몰아
봉우리를 넘는 구름
나무에
기대 앉아서
나도 한 폭 병풍바위.
바다 앞에서
물려와선 부서지고
거품 몰고 다시 오는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또 오늘 같을
영겁을
광음에 깎여도
감기잖은 나이테야.
매마른 내 일상을
넘실넘실 넘겨보는
쪽빛 바다 한 필 떠다
가슴결에 옮겨보면
잃었던
하늘이 와서
구름 한 점 드리울까.
저 멀리 은빛 배 한척
어디메로 가고 있나
彼岸이 거기 있다면
나도 따라 가련마는
보라색
수평선 너무
그렇게 간 내 사랑아.
木蓮
너희들 분당 가고
동공 같던 아파트 뜰
백목련 가지 뻗어
요성궁을 세워놨다
바퀴를
달달 굴리며
발자국을 찍는 계절.
매화철 모란철은
앞질러서 파고들던
옷섶을 파고들던
건들마도 놓치고는
흰 서리
밟고 서서야
돌아돌아 뵈는 생애.
만남
금강상 만물상 같은
가지가지 사연 안고
소떼가 닦아놓은 길
피붙이를 찾아간다
세월이
다 갉아먹고도
실날만치 남은 인연.
오십년 단절에도
살이 있음 만나는데
낮달로 흘러간 그곳
무슨 수로 길을 여나
컴퓨터
인터넷으로도
닿지 않는 먼 하늘.
<작품해설>
順天의 詩, 또는 尙古와 불교적 상상력의 변주
金三柱(경원전문대 문창과 교수‧문학평론가)
그 노래 속에는 민족적 전통을 지탱하는 두 개의 정신이 있다. 그 하나는 아름다운 옛것을 숭상하는 尙古의 정신이요, 다른 하나는 무상과 윤회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는 佛家의 정신이다. 즉, 그의 시조에 노래된 정한은 전통 윤리적 삶의 도정에서 빚어진 것이며, 그것의 극복 노래는 불교적 존재론의 깨달음에서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노래는 逆天의 저항이 아니라 順天의 수용, 운명과 너그럽게 화해사는 삶의 예지가 펼쳐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젊다 그의 사에는 폭넓은 소재가 비유와 상징의 의장으로 구사되어 있으며, 다양한 시조 형태가 주제 의식을 닮고 있다. 소재의 단순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인은 여행을 한다. 동구의 여러 나라들, 지중해의 나라들, 일본, 중국 아니 국내의 명승과 사찰을 그는 답사한다. 형태의 획일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는 고전시조의 3장 형태를 재구성한다. 자유시형, 나아가 산문시형을 원용하여 그는 3장의 형태에 변화를 주고, 사설시조 형태도 추구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조는 전통적 서정이 현대적 틀에 담기는 새로움으로 구현된다. 그의 시가 젊어지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정위진 시인의 시세계는 불교적 진실, 불교적 상상력과 더불어 상고 정신이 든든히 자리잡고 있어 우리에게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