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전강해(11)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본문 : 살전 2:17-18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데살로니가란 도시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 것은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유럽에 첫 발을 내딛은 곳이
마게도냐의 빌립보였습니다. 그곳에서
최초의 회심자인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유럽 최초의 교회 빌립보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오래 목회 할 수 없었습니다.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을 고쳐준 것이
빌미가 되어 그 여종을 통해 이익을 보는
자들에 의해 송사를 당하게 되었고, 결국
무참히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맙니다.
그날 밤 바울과 실라가 찬송할 때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행16:25-26).
그 사건으로 간수와 그의 집이 구원을 받는 감동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더 이상 빌립보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습니다.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무려 160Km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빌립보에서 당한 고난과 능욕의 상처가
아직 완전히 치유된 상태가 아니었음으로...
데살로니가로 가는 여정은 매우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17:1-3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유대인의 회당에서 3주간
동안(세 안식일)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있었고, 약간의 유대인들도 바울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졌습니다(4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 일은 유대인들의 반발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가르치지 못하고 야손이란...
사람의 집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불량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야손의 집을
침입하여 바울의 일행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정보를 미리 알고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야손과 몇몇 성도들이 잡혀 읍장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읍장에게 “이 사람들이 예수
라고
하는 또 다른 황제를 추대해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려는 선동자들을 받아들였다”며
은닉죄로 고발을 했습니다. 그들의 바울의 죄목을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와 같은
죄목(반역죄)으로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들을 숨겨준 죄도 반역지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야손 일행은 구속되지는 않았지만
보석금을 내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행17:5-9).
이 사건으로 바울과 실라는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바울의 일행은 밤에 베뢰아로
가게 되었습니다(행 17장).
훗날 디모데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7절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예, 본의 아니게 몸으로는 떠나 있지만 마음으로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있다는 고백입니다(골2:5).
여기 “너희를 떠난 것은”이란 표현은 어린 자식을
두고 생을 마치는 부모의 심정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강한 애정과 함께 아픔으로 내포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모하는 마음은 ‘잠시’라는
말에도 담겨 있습니다.
이 마음은 제자들을 남겨놓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에게서도 볼 수 있는 마음입니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다시 방문하려는 열정이 있었으나>.....
바울 사도의 이 말은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닙니다.
실제로 다시 방문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17-18절>
17절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절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몇 번이나(한번 두 번
– 지속적인 것에 대한 관용적 표현) 방문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나열하지 않고
단지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방해로 인해
방문 길이 막혀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사탄’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바울 서신에 나온 사탄).
첫째, 가장의 명수입니다.
<고후11:13—15>
13절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둘째,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예수님도 - 눅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예수님의 오신 목적도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함입니다.
행26:18(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절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셋째,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합니다.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넷째, 믿는 자들을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고전7:5(결혼에 대해)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도 시험함 - 막1: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마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의 책망 - 막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눅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다섯째 육체의 질병을 유발시킵니다.
고후12:7(육체의 가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여섯째, 바울은 사탄이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목적들을 방해하려고 활동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가 사탄의 천사의 가면을 쓰고,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을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자신이
결국이 멸망이듯(계20:1-3. 10절)...
그에게 속은 자들도 멸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살후2:8-11>
8절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
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9절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절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절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 구절(18절) 가운데 나타난 사탄의 역사>...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지 못한 이유,
즉 ‘사탄의 방해’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는데,
성서학자들은 다음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고린도 교회에서의 궁핍과 환란입니다.
3: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예, 바울은 고린도에서 자비량으로 목회하면서
물질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 못하는 구체적인 이유로 밝히면.....
현재 바울이 목회하고 있는 고린도교회가
난처해 질수도 있습니다.
어떤 말로 인해 이해 당사자 간의 갈등을
가져올 수 있다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려 깊지 못한 말 한마디가 서로 간에
감정을 불러 온 것입니다.
둘째, 건강의 문제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갈4:13-14>
13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고질적인 눈병)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셋째, 바울이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할 경우 야손의 가정에
큰 해가 임할까하는 염려 때문일 가능성도 높습니다(행17:9).
바울을 데살로니가에서 내쫓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조건으로 읍장들에게서 풀려난 야손의 안전을
고려했기 때문에 방문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물론 바울 자신의 생명도 위험.
한 가지 이상의 복합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꼭 무엇 때문에 가지 못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사탄이 막았다”고 하는
다소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여기서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비록 바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우리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22절에도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과 비슷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품었던 꿈이 허사로 돌아간
쓰라린 경험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사도 바울의 희망은 서반아로 가서 세계의
끝이 되는 고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된 것은 그가 희망하던 대로가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바라던 서반아로 가지 못하고 로마에서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있었으므로 그의 꿈이
아주 깨어지고 말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감옥 생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는 귀중한 옥중 서신이 쓰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길이 막혔을 때 오히려 불멸의
저서를 남기게 되었고, 그 당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오고 오는 세대의 많은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쉽게 방문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굳이 편지를 쓸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그 막힌
길로 인해 살전, 살후의 주옥과 같은 성경이
우리 손에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인간의 계획과 그것을 인도하시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사탄의 방해까지도 이용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원망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 때문에 당한 어려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 번 여행에서의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와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증거하기를...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여기까지(유럽- 고린도) 인도하신 이도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생의 심연에 빠져 들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평강을 얻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평안은 하늘이
맑고 태양이 아름답게 빛날 때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넉넉하고 마음과 몸이 건강할
때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평안은 고통 속에서의
영혼의 평안이요,
외적 폭풍이 닥쳐오는 항로에서 내적인 평정이며,
환란 풍파 속에서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내가 계획하던 대로 되든 되지 않았든,
길이 열렸든, 그 길이 막혔든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꿈이 안 이루어진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사탄이 우리 길을 막는다고 포기하지 맙시다.
더 좋은 것으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바르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나아갑시다.
어려운 가운데서 주시는 하나님의 족한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