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사건[─號事件]
정의
1866년(고종 3)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군민(軍民)의 화공(火攻)으로 불타버린 일.
역사적 배경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이는 이른바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배외 감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경과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그해 8월 정체 불명의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이것이 바로 제너럴셔먼호였다. 셔먼호는 원래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W.B)의 배였다. 그런데 프레스턴이 톈진(天津)에 기항하고 있던 중 그곳에 주재하던 영국 메도즈상사(Meadows and Company)와 용선계약을 체결해, 계약기간 중 셔먼호는 영국 상사에 위탁되어 있었다. 셔먼호는 80급 증기선으로 12파운드의 대포 2문을 갖추고 선원은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메도즈상사는 셔먼호에 조선과 교역할 상품을 싣고,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Thomas,R.J., 崔蘭軒)를 통역관으로 채용한 뒤 8월 9일 즈푸(芝芣)를 출항, 조선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셔먼호의 승무원 구성을 보면, 선주 프레스턴, 선장 페이지(Page), 항해사 윌슨(Wilson) 등 미국인 3명, 통역 담당 토머스, 화물 관리인 호가스(Hogarth) 등 영국인 2명, 그리고 기타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 19명으로 총 24명이었다.
이 중에서 셔먼호 승조원 중의 주역은 토머스였다. 토머스는 셔먼호를 타기 전 1865년 9~12월 황해도 연안 섬에서 선교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 조선이야말로 선교의 최적지임을 확신하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갈 날을 학수고대하던 끝에 때마침 셔먼호 통역으로 채용되어 대망의 조선행 꿈을 실현했던 것이다. 셔먼호는 백령도·초도(椒島)·곶석도(串席島)를 거쳐 대동강 하구의 급수문(急水門)을 지나 거침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셔먼호의 승조원들은 프랑스 신부를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과 교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관리는 통상·교역은 조선의 국법에 절대 금지되어 있으며, 외국선의 내강 항행(內江航行)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 대동강 항행을 강력히 만류했다. 그러나 중무장한 셔먼호는 이를 뿌리치고 항행을 강행, 드디어 평양 만경대(萬景臺)까지 올라왔다. 조선 관리는 이러한 무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는 유원지의(柔遠之義)에 따라 세 차례나 음식물을 후하게 공급하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셔먼호는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을 타고 평양까지 올라왔으나 장마비가 그치자 갑자기 수량이 줄어들어 운항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셔먼호 승조원들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중군 이현익(李玄益)을 납치하는 등 난폭한 행위를 자행, 평양 군민과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조선 군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은 몰살하였다.
결과
사건 당시 토머스는 스스로를 영국인으로 소개했고,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공공연히 경고했었다. 때문에 조선 당국은 미국 측의 항의 각서를 받고서야 비로소 이양선이 미국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건 발생 후 미국은 1867년 1월슈펠트(Shufeldt,R.W)의 탐문 항행과 1868년 4월페비거(Febiger,J.C)의 탐문 항행을 통해 셔먼호가 조선으로부터 양이(洋夷)를 동반한 중국 해적선으로 오인 받았으며, 승조원의 도발적 행동으로 인해 화를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두 번에 걸친 탐문 보고서 중 슈펠트의 온건한 포함책략보다는 페비거의 강경한 포함책략에 따라, 마침내 1871년 대한포함외교정책(對韓砲艦外交政策)을 수립하고 응징적인 조선 원정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동문휘고(同文彙考)』
『용호한록(龍湖閒錄)』
『주판이무시말(籌辦夷務始末)』
『淸季中日韓關係史料』
『근대한미교섭사』(김원모, 홍성사, 1979)
Diplomatic Negotiations(Paullin, C.O., 1967)
U. S. Diplomatic Correspondence(1866)
Shufeldt Letters(1866∼1867)
Febiger Letters(1866∼1868)
United States- Korean Relations 1866∼1871(Cable, E.M., Transactions 28, 1938)
The Two Visits of Thomas to Korea(Oh, M.W., Transactions 22, 1933)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갑곶돈대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며,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부른 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갑곶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조선 인조 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돈대로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 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24-11-1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