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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강 신 재
성혜는 자기의 소설이 실린 푸른 표지의 신간 잡지와 빨각빨각하는¹ 백 원짜리 아흔 장을 고스란히 포개어서 책상 위에 놓고는 언제까지나 우두커니 그 앞에 마주 앉아 있다.
그것은 잡지사의 사환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이었다. 공동 수도 앞에서 빨래를 하다가 성혜는 젖은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푸른 표지에 얼룩이 안 가도록 조심스레 옆구리에 끼고서 방까지 오는 사이 성혜의 마음은 기쁨과 자랑스러움으로 세차게 고동쳤다. 소녀처럼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것을 잘근잘근 입술을 깨무는 겸연쩍은 듯한 혼자웃음으로 겨우 흩어뜨리면서 그는 걸음을 걸었었다.
그러나 일각 대문에 다시 자물쇠를 채우고 수돗가로 돌아 나오고부터 그의 가슴에는 흐리터분한 구름이 끼어서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차츰 우울해져가는 것을 어쩌는 수가 없었다.
푸른 표지 속에 실린 성혜의 소설은 그의 남모르는 많은 고뇌와 정열을 짜 넣은 그로서는 온갖 힘을 다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아무려나 그의 오랜 비참한 혼자씨름에서의 첫 번 승리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극히 작게나마 어떤 반향을 기대케 하면서 이러한 큰 잡지에 실리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성혜에게는 형언키 어려운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실컷 그 속에 잠기어보고 싶은 봄바람같이 훈훈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또.
빨각빨각하는 이 아흔 장의 지폐는 요즈음의 성혜에게 있어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물건이었다. 요 이삼 년래 성혜들 부처는 자기네 몸에 걸쳤던 외투나 저고리나 또는 책이나―무엇이고 들고 나가 바꾸어 오는 이외에는 쉽사리 이것을 획득하는 길이 없었던 것이니까. 그러므로 하늘이 개었거나 흰 구름이 떴거나 매일같이 어두운 한 칸 방에 앉아서 엉킨 실뭉치를 끌러야 하는 (이 그물풀이의 내직은 남편 형식이 얻어다 준 것이었다) 질식할 듯한 생활을 면할 수 있을 구실을 만들어준 동시에 당장 오늘내일의 생활을 윤택히 하여줄 이 선물은 성혜의 얼굴에 화색을 돌게해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빨래를 끝마치고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은 성혜의 이마는 점점 더 짙은 그늘에 싸여져가는 것만 같다. 그의 가슴에는 클로즈업된 형식의 얼굴이 쉴 새 없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형식이 돌아오면 응당 벌어져야 할 어떤 불쾌한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 그는 미리부터 몹시 역겨웠던 것이다.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 대하여 굳이 설명을 하고 변명을 늘어놓고 결국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어찔 수 없이 우울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짓만 한다고 핀잔을 받을 것이 싫어서 형식이 없을 적만 골라 글을 쓰곤 한 것이 지금 와서는 오히려 실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것이 이처럼 활자가 되어 나오도록 그런 티도 보이지를 않았다는 사실은 과실이라면 제일 큰 과실이 아닐 수 없다. 말썽이 일어나면 그때 받자 하는 속마음으로 내버티기는 한 것이지만 막상 당하자니 고된 일이었다.
이렇게 성혜가 남편이 반가워해주기를 바라기는커녕 필연코 불쾌한 빛을 보이리라고―아니 더 험한 공기까지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는 데에는 성혜로서는 그럴 법 한 근거가 있어서이다.
원체 여학교 교원의 자격쯤은 가지고 있는 성혜를 그렇게 쪼들리는 살림살이임에도 직업 전선에 내놓지 않으려고 고집을 세우는 남편이었다. 그는 차라리 그물풀이의 내직을 권하였다.
“예펜네가 밤낮 바깥으루 나돌아 댕기다니 생각만 해두 불쾌하다. 불결해!”
“허지만 이렇게 힘만 들구 돈은 안 되는 일을 골라 할 게 무어예요. 도무지 위생적으루두…….”
“일하는 게 그렇게 싫음 당장이라두 그만둬요. 강요하는 건 아니니.”
“싫다는 것버덤……”
“글쎄 그만둬 !”
수없이 거듭된 이런 절망적인 언쟁 끝에 성혜는 형식이 원하는 그러한 아내의 타입 속에도 어쩌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중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을는지도 알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체념에 가까운 반성에 늘 사로잡히면서 남편을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새에도 몰래 소설을 쓰며 우선 그 그물풀이의 내직이라는 답답하고 비능률적인 생활 수단의 멍에를 벗어나려고 부단히 애를 써온, 결국 남편을 반역한 아내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그 밖에 또 한 가지 색다른 미안함이 섞이어 있었다.
형식에게는 (성혜가 속으로 한숨짓고 있듯이) 이중성격적인 점이 있어서 안에서는 이토록 봉건적이면서 밖에 나가면 대단한 자유주의자고 문화에 애착을 느끼기는 누구보다 심하였다.
따라서 그는 근실한―그러니까 평범하고 무의미한 직업에 종사할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소위 문화 사업이라는 것에는 가끔 한몫 끼이기도 하였으나 반년 이상 같은 자리에 머무는 일은 드물었다. 다만 그는 끊임 없이 시(詩)를 지었고 가끔은 그림도 그리고 다방의 음악도 남 못지않게 사랑하였다.
남 못지않게 사랑하였으나―결국은 그것뿐이었다, 문학계도 미술 전람회도 언제나 그와는 아무 관련 없이 지나쳐버린다. 따라서 그는 또 그대로 이 도도한 세계에 대하여 동경과 함께 그 어떤 반감을, 찬양과 동시에 또한 경멸을 느끼며 살지 않을 수 없었다.
성혜는 이러한 남편에 대해서 무슨 주제넘은 동정을 가진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남달리 겸손한 그의 성미로는 다만 남편의 시도 그리고 그림도 자기에게는 이해할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따름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자기의 소설이 남편의 입에 늘 오르내리는 바로 그 잡지에 발표되었다는 것은 그리고 또 뒤이어의 원고 부탁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남편을 불쾌히 할 것만은 정한 일이었다.
성혜는 무거운 마음으로 가난한 단칸방을 휘둘러보고 그리고 다시 푸른 표지와 새 지폐 위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단순한 근심이라든가 그런 것도 아니고―무엇인지 무겁고 지겨운 감정이었다.
저녁을 지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성혜는 장바구니에 돈을 집어넣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쨌든 너무 영양이 좋지 못했던 요사이의 식탁을 눈앞에 띄워 보면서 고기를 사고 생선을 사고 달걀도 한 꾸러미 사 넣었다.
부엌에 들어서자 그는 분주히 손을 놀려서 이것저것 반찬을 마련하였다. 밖의 얼음이 녹고 날씨가 누그러지면서부터 더 을씨년스럽게 춥기만 한 구들에다도 넉넉히 불을 넣고 남편을 기다렸다.
형식은 저녁상을 보더니 삐익 하고 휘파람을 불고서 두 손바닥을 벌려 보였다. 어쩐 영문이냐는 뜻이다.
성혜는 자기 먼저 상 앞에 다가앉아 있다가 수깃하고 젓가락 끝으로 상 위에 동그라미를 자꾸자꾸 그리면서 원고료를 받았노라고 말하였다.
“으응? 뭐?”
형식의 의아해서 찌푸린 얼굴이 몹시도 아프게 성혜의 신경에 와 닿았다. 그는 관념해버린 사람의 침착함을 의식하면서 소설을 발표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마음이 내키기에 적어본 것을 동무가 가지고 가서 어느 저명한 작가를 보였더니 발표가 되었다고…… 그러나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심신을 경주하여 작품을 고쳐 쓰고 고쳐 쓰고 하였는가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형식은 듣고 난 순간,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듯한 얼굴을 지었다.
“으흥?”
하면서 못마땅한 듯한 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도 보이는 싱거운 표정을 얼굴에 띄워 올리면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성혜는 우선 그만만 하여도 숨이 내쉬어져서 자기도 주발 뚜껑에 손을 대었다.
형식은 식사를 하면서 한참은 다시 또 시무룩해 있더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전날 친구 H군을 통해서 시를 갖다 맡긴 평론가 윤씨와 내일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가혹한 평을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지. 누구를 칭찬하는 법이라군 없거든. 그 대신 그 매서운 눈이 한번 새로운 보석을 발견하는 날에는……! 주저주저할 줄도 모른다는 인물야.
형식은 윤씨를 그렇게 설명하였다.
성혜는 그러냐고 하면서 진심으로 남편의 일이 잘되어 나가기를 축원하였다.
형식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이번에는 고기와 달걀부침과 생선구이가 그의 관심을 점령한 것 같다. 그는 정말 맛난 듯이 얼마든지 입으로 날라 들였다.
문득 성혜는 눈물겨운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전연 예기하던 감정이었다. 남편의 바삐 움직이는 입과 턱과 목덜미와―― 그런 것을 그대로 더 보고 있으면 눈물이 핑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는 또 뜻밖으로 간단하게 지나쳐버린 소설 건이 무척 다행으로 여겨지기는 하면서도 어쩐지 한편으로는 못 견디게 서글펐다. 그것이 어디서 오는 감정의 미오(迷誤)³인지는 자기도 알 수 없었자먼……
그러나 요행으로 무사히 난관을 돌파하였다고 생각한 것은 성혜의 조단⁴이었다.
다음 날 윤씨를 만난다고 서두르며 나간 형식은 저녁때 술이 얼근하게 취하여가지고 돌아와서는 지분지분 어제 그 일로 빈정대기 시작했다. 윤씨를 보셨느냐고 성혜가 묻는 말에 휘덮어 씌우듯이
“나두 인전 드러누워서 얻어 먹을 신세가 되었구나. 허 참.”
“예펜네 덕택에 시인 박형식도 일약 유명해지겠군. 어디 덕 좀 톡톡히 봅시 다.”
성혜를 힐끔힐끔 바라다보며 입을 삐뚤이고 말을 한다. 그러다가 그의 눈은 차츰 더 붉게 되어가면서
“집이라구 옛 참 방구석에 발을 붙일 수 없게시리 늘어놓구서 응? 문학이다? 것보담두 우선 양복바지에 프레스나 한번 똑똑히 해놔봐.”
“……”
“낸들 이게 글쎄 할 짓이냐 말야, 예펜네라구 제에길 이쪽이 되레 시중을 들어야 할 판국이니.”
“……”
“옛다, 여류 작가입네 하구 쏘다니기 불편한데 이 기회에 이혼이나 하면 어때?”
이렇게 빈정거림이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된다. 성혜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참고 있다가 끝내 얼굴을 들고서 형식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남편의 일그러진 자존심, 그 저열한 심정은 도저히 그대로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기를 본능적으로 저어하였다.⁵ 그러나 눈을 아주 가려버리기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그것과는 반대로 그의 머리를 번쩍 치켜들게 한 것 이었다.
‘다시는 절 대루 안 쓰겠습니다.’
성혜는 이런 말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얼마만큼 괴로운 일일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되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그러나 쉽사리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와지지 않는 데는 자기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성혜는 그것이 또 안타깝고 괴로워서 형식이 어서 더 한마디 속이 뒤집히도록 포악한 말을 던져주었으면 하고 대기하는 듯한 절박한 심사였다.
그러나 형식은 하고픈 말을 다 해버린 것이었는지 성혜의 정색한 얼굴을 가장 경멸한다는 듯이 흘겨보고 나서는 다시는 더 말을 끄집어내지 않고 그대로 방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성혜는 바윗돌같이 한자리에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활딱활딱 가슴에서 피가 솟구쳐 오른다. 그것이 무슨 무거운 것에 부딪치듯 뱃속으로 떨어져 내려가곤 할 때마다 성혜는 앞으로 쓰러질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이런 악몽 같은 시각은 일시라도 빨려 사라져주기만 기도하듯 눈을 감고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저녁상도 받는 듯 마는 듯 한편 구석에 밀쳐놓았다. 형식은 일어나 앉았다가 다시 누웠다가 하더니 그대로 흐지부지 잠이 들었다.
코까지 골며 잠을 자더니 별안간 눈을 뜨고 주정하듯
“나쁜 자식, 에익 나쁜 자식들. 평론가다? 문학이다? 흥. 윤가 따위가 다 뭐냐!”
고래같이 고함을 지르고는 눈을 부릅뜨고 성혜를 바라다보다가 돌아누워서 다시 코를 골았다.
성혜의 뇌리에는 그 밤이 지옥같이 처참히 새겨졌다.
며칠 지나고였다. 성혜는 아침에 대문을 나서는 형식을 두어 걸음 뒤로 따라가면서
“접때 가져온 건 다 했는데요, 저어 가시다가 양철집 아이 좀 오라구 해주세요. 요전번보다 두 꾸레미만 더 가지구 오라구요.”
되도록 천연스러운 말씨로 내직 감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형식은 결음을 멈추고 듣고 나서는 쓰다 달단 말도 없이 그냥 가버렸다.
양철집 사환 아이는 종일 오지 않았다. 형식에게 재촉을 하기도 무엇하여 그대로 이삼일 지나간 후에 성혜가 자신 갔다 오려고 실을 싸고 있는데 그 아이가 아주머니 하고 부르며 들어왔다.
아이는 웬일인지 꾸러미를 짊어지지 않고 왔다. 돈만 보자기에서 끌러 내놓고는 성혜가 주는 실을 거기다 옮겨 싼다. 일감이 이제는 없어졌느냐고 성혜가 걱정스레 묻는 말에 아니 이 댁 아저씨가 이젠 그만 가져오라 했다 한다.
성혜는 한참 동안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날은 집 안을 정돈하고 바느질을 하였다.
푸른 표지의 잡지는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치워버렸다.
얼마가 또 지나고.
혼자 쓸쓸한 저녁을 치르고 나서 성혜는 부엌 문설주에 기대어 좁은 뒤뜰을 내다보고 있었다.
꾸불텅꾸불텅한 벚꽃 고목이 한 그루 담장에 붙어 서 있다. 나무는 거의 다 가지가 마르고 장독대 위로 길게 뻗은 가지 하나에만 밥풀 같은 흰 꽃잎이 드문드문 붙어 있다. 연보라색 어둠이 그위를 자욱이 휘덮기 시작한다.
성혜의 서툰 솜씨로 돌멩이를 둘러막고 흙을 쌓아 올리고 한 명색뿐인 장독대는 한 귀퉁이가 또 허물어져 내려 있다. 아니 벌써 작년 여름부터 그렇게 된 것을 날마다 내다보면서도 그대로 내버려둔 것이다.
성혜는 끝이 모지라진 호미와 꼬챙이를 하나 찾아 들고서 뒤꼍으로 나갔다. 흙을 긁어 올리고 발로 밟고―몸은 그대로 움직이면서도 성혜의 마음은 어딘가 먼 데로 날고 있었다. 막연한 생각 속을 더듬으면서. 재미나게 일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성혜의 쓸쓸한 버릇이었다. 어째서인지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녀에게는 무엇을 생각하거나 쓰거나 하는 외의 대개의 일은 흥미에서보다도 필요에서 하여졌다.
그렇지만 이렇게 일하여 주위의 모든 것을 깨끗하고 쓸모 있게 간직하고 될 수 있으면 개량하고 윤택히 하고―이런 곳에 삶의 즐거움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비하면 추상적인 감정의 조각구름 따위에는 결국 아무 의의도 없을는지 모른다. 성혜는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중봉⁷에 동그랗게 떠오른 연주홍빛 달을 그는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연관도 없이 불쑥 사람의 운명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자기들 부처 간의 요즈음 미묘하게 얽히어가고 있는 감정에도 어느덧 생각이 흘러간다.
형식은 그 후 무엇이 동기가 되었던 것인지 성혜의 소설 공부를 말리지 않을뿐더러 놀랄 만한 열성으로 격려까지 하여준다. 그는 아내의 쓰는 원고를 일일이 읽어보고 붉은 잉크로 주(註)를 달아서 고치게 하며 때로는 새로이 긴 구절을 삽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혜에게 어떤 테마나 구상을 말하게 하고는 가혹한 악평을 하여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테마를 주면서 쓰라고도 하였다.
“이렇게 써보란 말야. 오늘 다방에 앉았다가 문득 머리에 떠오른 건데…….”
그리고 구구한 이야기를 들려준 끝에
“응? 이렇게 시대성을 반영시켜야 하거든. 써봐요, 틀림없이 센세이션을 일으킬 테니.”
하는 것이다. 옆에 지키고 앉아서 구술하다시피 씌우는 적도 있다.
형식이 이같이 변화하여준 것은 성혜로서는 지극히 감사하여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성혜는 한 줄의 글도 제 마음에 차게 써지지가 않았다. 남편이 자기가 말해준 대로 우선 초만 잡으면 고쳐주마고까지 간곡히 말하여도 그러면 그럴수록 어찌 된 셈인지 붓이 달려주지를 않는다. 자기도 못 견딜 만치 초조하였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아니 차츰 그 초조한 마음까지 사그라져가는 듯한 감이 드는 것이다.
‘소설은 무슨 나 따위가…….’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이런 절망감까지도 의식의 밑바닥에 깔리기 시작하였다.
성혜는 그물 풀기 이외의 무슨 적당한 내직이 없을까 하고 속으로 이것저것 물색해보았다.
지금까지 내놓은 두 개의 작품에 대해서는 성혜는 큰 애착을 느낀다. 모든 평가를 떠나 다만 자기의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그것만으로 해서 느끼는 그리움일지는 알 수 없다. 자기의 피를 나눈 듯한, 그것만이 자기를 알아주는 듯한, 그리고 이미 먼 곳에 사라진 것에 대하는 듯한 그러한 그윽한 심정이었다.
그 둘째 번의 작품은 형식의 눈도 거쳐서 잡지사로 넘어갔다. 그때 형식이 빼어버리기를 맹렬히 주장한 어떤 장면으로 하여 성혜는 지금도 다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그 장면은 성혜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뺄 수는 없는 장면이었다. 그 단편 전체가 이를테면 팽이의 중점같이 그곳에 발을 붙이고 형성되어 있었다. 그 점을 건드리면 팽이는 돌지 않고 이지러져 쓰러질 것이었다.
성혜는 오래 두고 망설인 끝에 편집자인 그 ‘저명한 작가’에게 편지를 적어서 원고와 함께 보냈다. 즉 그 월광의 벌판에서 벌어지는 작은 장면은 생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시면 빼도록 해달라고……
그런 글을 적으면서 성혜는 창작에의 단념을 속으로 준비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월광의 장면은 빼어지지 않을 것을 그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호미로 헤적이고 돋우어 올리고 하는 손끝에서는 흙내가 모락모락 풍기어 올라온다. 그는 올 여름에는 이 앞에다 화단이나 가꾸어볼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소꿉장난같이 빈약한 꽃밭을 앞에 하고 선 자기의 모양을 눈앞에 그려본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어떤 허전함과 서글픔은 흘러나오는 것 같아 그는 웃기도 울기도 싫은 심정이었다.
대문을 끼걱끼걱 흔드는 소리가 난다. 성혜는 호미와 꼬챙이로 흙을 털어 들면서 빗장을 벗기러 걸어 나갔다.
“여보, 얼른 옷 입어. 좋은 데 데리구 갈게 얼른 빨리.”
성혜는 호미를 든 손을 느른하게 내려뜨린 채 물끄러미 형식을 쳐다보았다. 단벌밖에는 없는 양복이지만 그레이 스코치⁸의 봄옷을 오늘 아침부터 바꾸어 입은 그는 오늘따라 한결 미끈해 보인다. 품질은 안 좋아도 차양이 넓은 유행형의 모자와 붉은 넥타이도 그를 쾌활히 비치게 한다. 동작도 대단히 경쾌한 것은 오늘 하루의 봄볕이 그에게 십분 행복하게 작용하였음을 말하는 듯하다.
성혜는
“어델 가요?”
하고 자기의 귀에도 거슬리는 생기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좋은 데! 댄스 파티. 응? 싫어? 가기 싫어?”
형식은 싫다고 할 리가 만무라고 생각하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한다.
“얼른 차비를 해. 조금은 출 줄 알지? 서양 예펜네한테 배웠으니까.”
그는 성혜가 다니던 미션 스쿨을 언제나 이렇게 말하였다.
“못 추면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해두 좋아. 아무튼 얼른!”
형식은 모자를 벗어 마루에 팽개치고는 손을 씻으러 우물가로 갔다. 성혜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이 별안간의 외출이 어째서 연유한 것인지 우선 이해하고 싶었다. 하기는 가끔 마음이 내키면 빌리어드에나 선술집 같은 데까지 같이 들어가자고 하여 성혜를 놀라게 하는 남편이었다. 그 대신 그것은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극히 드문 일이지만.
그리고 또 웬 댄스는……
새 풍습이라면 으레 관심을 가지는 형식이 댄스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 소리 없는 것을 별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별안간 파티라고 서둘러대니까 역시 어리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왜 또 오늘은 자기더러 가자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생각이 떠도는 한편 아무렇게나 그런 것을 꼬치꼬치 캐려 들 것 없이 그대로 따라 나서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각 대문을 꼭 잠근 그 좁은 안에서의 질식할 듯한 생활, 지굴 속처럼 어두운 방 안, 부엌, 손바닥만큼 쳐다보이는 하늘, 꽃밭이나 가꿀까 하는 초라한 꿈…… 애써 마음 한구석에 밀어두는 그러한 의식이 충동적으로 머리를 쳐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망설이는 듯한 시선이 우물가로 던져지고 거기에 매우 편펴롭지⁹ 못한 자세로 도사리고 앉은 양복바지의 뒤꽁무니에 머물자 그녀는 불현듯 밖에 나가고픈 생각에 사로잡혔다.
“가요! 그럼.”
성혜는 자기도 호미와 꼬챙이를 마루 밑에 팽개치고 어린애처럼 우물가로 달려갔다.
“누구네 집이에요, 파티는?”
반성이라든가 이론에게보다 충동적인 감각에 몸을 실었다는 의식이 성혜에게는 무척 신기하고 즐거웠다. 오래간만에 그는 저녁의 봄바람을 전신으로 호흡하며 소녀같이 가벼운 걸음을 걸었다.
그날 파티는 어느 개인의 집에서 열린 것은 아니었다.
형식이 걷고 있던 명동 거리를 왼편으로 꺾어 들어 으슥한 골목길을 한참 이끌고 간 곳에 나타난 것은 어느 헙수룩한 목조 이층이었다.
“많이 들 올라갔어?”
그는 그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양담배장수 아이에게 이렇게 말을 던지며 그 다 깨어진 유리문을 덜커덩 밀쳤다. 사람 하나 겨우 통할 수 있는 비좁은 문이다. 성혜는 기대와는 딴판인 이 광경에 놀라면서 가만히 발을 들여놓았다.
캄캄한 급한 계단은 역시 비좁고 한 발짝 떼어놀 때마다 삐걱삐걱 비명 같은 소리를 내었다. 성혜는 치맛자락에 몇 번이고 발부리를 걸리우면서 한 손으로 벽을 짚고 걸어 올라갔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 휘등크레져갔다.
위에서부터는 투닥투닥하는 여러 사람의 발자욱 소리가 무엇인가 귀에 익은 곡조와 함께 울려 나왔다. 어쩐지 오지 못할 곳을 온 것 같은 일종의 공포와도 같은 것이 성혜의 마음을 가로질러갔다.
이 마음은 계단을 다 오른 곳에 있는 또 하나의 비좁은 문을 밀치고 실내로 들어섰을 때 더욱 커졌다.
그것은 일견 넓은 창고 속을 연상시키는 헙수룩한 마루방이었다. 전등은 역시 켜 있지 않아 몇 갠가의 카바이드 불이 얽히어서 빙빙 도는 남녀의 모양을 비추어내고 있다. 그들의 그림자가 괴물처럼 흔들리고 있는 얼룩투성이 벽에는 천장으로부터 등그런 거미줄이 그물같이 가로걸려 나부끼고 있다. 부서진 책상이며 의자 같은 것이 기대어 쌓인 한편 구석에서 축음기 소리가 흘러나온다.
마룻바닥에 뿌려진 붕산 가루는 마루를 거무죽죽하게 빛내고 있다. 그 위를 미끄러져 돌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방금 들어서는 성혜들에게로 일제히 쏠리어질 때 성혜는 얼굴이 화끈하였다. 형식이 몸짓으로 가리키기 전에 그는 축음기 소리가 나는 쪽 벽에 기대 놓인 빈 걸상으로 걸어가 얼른 걸터앉았다. 형식은 그새에 모자를 벗어 걸고 두리번두리번 실내를 살피는 모양이다. 곧 그는 여러 사람들과 어깨를 툭툭 치는 인사를 교환하고 여자들에게도 웃어 보인다. 새 음악이 시작되니 그는 그중의 하나와 함께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하는 체하더니 스텝을 밟기 시작하였다.
성혜는 걸터앉아 남편의 서투른 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몹시도 서툰 춤이었다. 배우기 시작하고 며칠 안 되는, 아니 정통적인 교수를 한 번도 받은 일이 없는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형식은 그것으로 충분히 즐거운 모양이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는 듯이, 아는 얼굴을 만날 때마다 무어라고 짧은 말을 던지곤 하면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곡조는 일본의 옛적 유행가다. 옆에 서서 포터블을 돌리고 있는 짙은 화장의 여자가 조금도 사양 없이 자기의 모양을 뜯어보고 있는 데에 성혜는 말할 수 없는 모욕감과 불쾌를 느끼면서 편안치 않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남편은 언제부터 이런 곳을 출입하는 것일까, 옷차림들이 그리 호사롭지 못한 그들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해보았다. 군인 잠바를 입고 휘청거리고 있는 중년의 남자, 한편에서 열심히 혼자 연습을 하는 새파란 소년, 형식은 그 중에도 대부분의 여자들과 안면이 두터운 모양이다.
물결이 굼실거리듯 몹시도 몸을 하느작거리는 걸음걸이로 옥색치마를 길게 끈 여자가 이리로 걸어왔다. 형식의 첫 번 상대를 한 여자다. 눈썹을 시커멓게 그리고 어딘지 천하다.
그녀는 포터블을 돌리는 여자와 대하여 성혜에게는 등을 보이고 걸상 한쪽에 걸터앉더니 우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저기 저치 말이야.”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바른편 엄지손가락으로 누군지를 가리키며 그녀는 말하였다.
“시인이래지? 흥 뭐이 저따우야.”
몹시 무엇이 우스운 듯이 그녀는 까득거리면서 웃어 대었다.
“얘! 얘!”
상대는 주의시키듯 작은 소리로 속삭거렸다. 성혜를 눈으로 가리킨 모양이다. 그러나 그 역시 사양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던지 함께 소리를 내며 깔깔 웃었다.
“바보 같은 게 글쎄 날더러 말야…….”
성혜는 지금은 그것이 어느 편의 목소리인지도 분간하지 못했다. 다만 귀가 화끈한 것을 느꼈다. 뒤이어 누구 다른 사람 말이겠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옥색 치마의 여자는 일부러 성혜를 돌아다보기까지 하였다.
때마침 형식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헤엄치듯 사람들을 헤치고 미소를 띠면서. 성혜는 마주 일어서면서 대뜸 나가자고 하려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먼저 그 여자들에게 농을 붙인다.
“순자씨는 오늘은 왜 워얼 플러워신가. 나하구 좀 춥시다그려. 이따가 탱고를 걸어놓구서…….”
“아이유! 탱고를 다 추셔?”
날쎄고 코에 걸린 그 목소리에는 모멸의 뜻이 노골로 나타나 있다. 짙은 화장의 여자는 그 말과 함께 빙글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옥색 치마도 형식에게 곁눈도 안 주고 일어나 가면서 한 번 더 둘이 얼굴을 맞대고 킬킬거렸다. 형식은 무색한 듯이 성혜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가 두어 차례 춤을 더 추어서 기분을 돌린 연후에 두 사람은 같이 그곳을 나왔다. 밤거리는 아까보다 한결 싸늘하였다. 습기를 머금은 실바람이 겨드랑 밑으르 으쓱으쓱 스며들었다. 형식은 지금 추던 곡목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성혜는 잠자코 발끝만 내려다보고 걸었다.
“오늘은 잘 추는 애들이 나오질 않았군.”
형식은 성혜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하며 이렇게 말했다. 성혜는 잠자코 있었다.
형식이 내던진 담배꽁초가 물이 괸 곳에 떨어졌던지 쉬익 하고 뚜렷한 소리를 길게 끈다. 성혜는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언제까지나 그 여음만을 마음속으로 더듬고 있었다.
초록빛 랜턴을 내건 어느 다방 앞에 다다랐다. 형식은 차를 마시고 가자고 한사코 성혜를 이끌었다. 성혜는 엷은 봄 목도리를 귀밑까지 끌어 올리면서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사람이 자기 얼굴만 들여다보는 것 같다. 성혜는 앞에 놓인, 다방 이름이 새겨진 재떨이 속에만 눈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 이거 최선생 아니십니까. 아, 오래간만입니다. 이리로 앉으십시오. 자아, 자.”
형식이 지금 막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사람에게 반쯤 허리를 들고 황급히 던지는 인사말에 성혜도 당황히 얼굴을 들어 목례를 하였다. 그는 성혜의 소설을 잡지에 실은 최씨였다.
“어떻게 여길 다 나오셨습니다. 좋은 글 많이 쓰셨습니까?”
최씨는 이렇게 문단인의 인사말을 뇌면서 맞은편에 와서 걸터앉았다.
“글이 다 무엇입니까, 그게 어디 그리 쉬운 노릇인가요?”
형식은 마치 드러누우려는 듯이 깊이 의자 등에 기대면서 시비를 거는 사람처럼 이렇게 말을 가로채었다.
최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약간 민망한 듯이
“어려운 일이지만 많이 써주셔야죠.”
하고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참 잡지가 나왔습니다. 이건 윤씨에게 전하려고 하던 거지만 우선 드리지요. 궁금하실 테니까.”
그는 들고 있던 큰 봉지에서 성혜의 두 번째 소설을 실은 신간지를 꺼냈다.
"그때 그것 말씀입니다. 원고대로 넣었는데요.”
최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째서 그것을 빼느니 하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는 듯한 시선을 성혜에게 던졌다.
형식은 마침 곁으로 온 양담배장수 아이가 무어라고 한마디 말대꾸를 하였다고 화가 잔뜩 나가지고 아이를 나무라고 있다. 성헤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이 좋지 못한가요?”
담배장수 아이가 나간 뒤에 성혜는 평 같은 것은 실은 아무래도 좋았으나 그렇게 회화를 이어놓았다.
“대단히 좋다고들 하는 모양입니다. 첫 번 것보다도 훨씬 낫다고 윤씨도 말하던데요.”
최씨가 대답을 하자
“그야 첫 번 거버덤 낫지요. 낫구말구요, 얼마나 더 공을 들였기에요, 제가 좀 코치를 하기도 했지만.”
형식은 반가운 듯이 그렇게 이야기를 가로맡았다. 그 말소리가 성혜의 귀에는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네에?”
하고 최씨는 찻종 속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글쎄 말입니다. 무어 심심허니깐 쓴다구 야단이지요만 소설이라구 어디 바루 된 겁니까. 여길 뜯어곤치구 저 구석을 메우구 그래 겨우 그만큼 만들어놓았지요, 그러자니 이 사람이 또 말이나 고분고분 들어주어야지요.”
형식은 유쾌한 듯이 성혜를 돌아보고 껄껄 웃는다.
“여기서두 한 군데 어찌 빡빡 고집을 세우는지!”
그는 탁자 위의 잡지를 주르륵 앞으로 끌어당겨 놓고서 페이지를 획획 넘기면서 말한다.
“그게 무슨 장면이더라…… 옳지 벌판에서 무어 주인공이 혼자 빙빙 돌아다니면서 독백하는 장면이지?”
성혜에게 다짐을 주고 나서
“그게 도무지 틀렸거든. 단편소설이란 그렇게 맥 빠진 구석이 하나라두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오직 크라이막스 한 점을 향해 쓸데없는 넝쿨이나 가지는 추려, 추려, 얼마든지.”
남편의 기세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성혜는 어깨가 오므라드는 듯이 느꼈다. 가지를 추리고 넝쿨을 걷어버리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발붙일 자리를 빼앗아버린다면 그럼 이야기는 하늘로라도 둥둥 떠오르란 말인가.
최씨도 그런 뜻으로 대꾸를 하였다. 그의 잔잔한 구조에는 어딘지 가벼운 야유의 뜻이 엿보였다.
“산만하다는 건 단편에 있어 치명상이지요 물론. 하지만…… 가령 성혜씨의 작품을 예로 든다면 그런 소설의 생명은 소재의 적당한 배치 즉 구성의 묘(妙)에서 오는 효과, 어떤 환혹(幻惑)이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말하자면 모자이크의 세공물(組工物)이 가지는 아름다움 말입니다. 거기서는 한 조각만 빼놓아도 전체가 허전하여 볼모양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방면에 관해서는 성혜씨의 재능을 상당 정도 신뢰해 좋으리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번 작품에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네 가지 장면은 완전히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형식은 고개를 기우뚱하고서 한참 동안 묵묵히 앉아 있었다. 최씨는 말을 이어
“독백이라는 형식이 대개의 경우 지루한 감을 주게 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대단히 효과적인 용법도 없는 건 아닙니다. 가령 전번에 윤씨 ―평론가 윤씨 말입니다―그이의 필봉에 오른 「모란봉」이라는 작품에서라든가…….”
최씨는 이야기를 이렇게 일반론으로 돌렸다. 성혜는 손수건으로 가만히 이마의 땀을 씻어 내렸다.
형식은 이번에도 많이 지껄여 작품 평에 관해서도 일가언¹¹이 있음을 피력하였으나 마지막으로 또 한마디 이렇게 덧붙였다.
“요컨대 소설이란 것도 센시빌리티의 문제지요. 이 장면을 집어넣어야 옳으냐 안 넣어야 옳으냐 하는 판단이 직각적으로 머리에 떠올라야 하는 법이지 뭐 이렇게 몇 시간을 마주 앉아 토론해 봤자 쓸데없는 노릇이지요. 그래 윤씨가 좋다고 하더라구요. 흥 그러구 보면 그 양반두 아주 감각이 없는 건 아니로군.”
최씨는 지금은 약간 기분이 상한 듯이 입을 다물고 앉아. 있더니 조금 후에는 인사를 하고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성혜는 다방을 나오고부터 더욱더 두 뺨이 달아오르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격정이 가슴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참을 수 없는 수치, 분격, 그리고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초려,¹² 이런 것이 뒤섞이어 성혜의 가슴을 쾅쾅 짓눌렀다.
‘왜 다방에는 들어가자구 했어요. 최씨와의 얘기는 그게 무어예요. 그 장면을 빼어서는 결딴이라고 그렇게 노골적으루 말하는데도 왜 그것을 못 알아들어요.’
성혜는 마음껏 큰 소리로 부르짖고 싶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형식의 그것보다 훨씬 빨랐다.
“그것 보라니까, 나 시키는 대루 해서 손해 본 건 없지? 흥. 윤가가 다 칭찬을 하더라구…… 흥, 그게 짜장¹³ 누구의 코치이기에……”
성혜의 눈은 일순 번득 빛났다.
무어라고 말이 쏟아져 나오려는데 형식은 또
“지금 그 최씨라는 인물두 상당히 사람이 거만하지, 무어 나한테야 그럴 재비¹⁴도 못 되지만. 모자이크가 어떠니 독백의 형식이 어떠니 제법 그럴싸하게 떠들어대지 않어? 네 장면이 모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느니 무어니……그런데…….”
그는 별안간 우뚝 발을 멈추더니
“그게 장면이 셋뿐이었을 텐데. 비가 오는 데허구 거기허구 거기허구…… 하나는 뺐으니 말이지 응?”
손가락을 꼽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이 그는 옆구리에 끼었던 잡지를 잡아 빼 들고 앞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으슥한 골목 어귀에 전등불이 하나 높다란 전주에 매달려서 희미한 황선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 밑을 향하여 형식은 달음질쳐 가면서 부산히 책장을 뒤적거리는 것이다. 바른편 엄지손가락에 꾹꾹 침을 묻혀가며.
길에는 한 사람의 행인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과 자욱한 안개에 싸어서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형식은 불 밑에 책을 바싹 들이대고 그저도 정신없이 책장을 젖혀 넘긴다.
성혜의 가슴으로 날카로운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아픔은 처참한 비명이 되어서 일순 잔잔한 거리를 진동케 하였다. 아니 진동케 하였다고 생각한 것은 성혜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으나 실로 그 순간 성혜의 영혼은 아픔을 못 이기어 몸부림을 치면서 비명을 올렸던 것이다.
성혜의 눈에 비친 형식의 모습은 한 개의 기괴한 피에로였다. 언제나 하듯 그대로 생각 밖에 흘려버리기에는 너무나 우열(愚劣)한 피에로였다.
성혜의 까실한 두 뺨에 가느단 실바람이 얼음같이 차게 느껴졌다.
’싫어! 소설도, 공부도, 남편도, 사는 것도 다 싫어! 싫어!’
그는 이렇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마음속에 외쳤다.
땅을 기던 짙은 안개가 전선주를 휘감으며 연기같이 뭉게뭉게 올라가고 있다.
노란 그 빛이 초연(硝煙)과도 같이 처참해 보이는 짙은 밤안개가……
-끝-
2018년 6월 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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