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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9장의 주해와 적용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기적들
유상섭/총신대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마태복음 8-9장은 예수께서 행하신 10가지 기적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기적 사건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이해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째로, 저자는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산에 올라갔다고 기록한 이후 처음으로 예수님의 기적 장을 시작하는 8장 1절에서 그가 비로소 산에서 내려왔다고 기록한다. 이로써 저자는 8장부터 전개되는 예수님의 행위사역이 5-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언어사역과 주제적으로 연결됨을 보여준다.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천국 시민이 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이 어떻게 보다 나은 의를 추구하며 살아야 되는 지를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 같은 말씀에 뒤따라 나오는 8-9장의 내용들은 예수님은 말씀만 잘 하시는 말씀의 메시아만이 아니고, 자신이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정확하게 실천하는 행동의 메시아임을 보여주고 있다. 5-7장에 수록된 산상수훈에서 천국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은 8-9장에 기록된 10가지의 다양한 기적을 통하여 동일한 천국에 대한 메시지를 그의 행동으로 표출하셨다. 다시 말해서 산상수훈에서 보이지 않고 귀로만 들을 수 있는 천국의 실재를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기적을 통하여 시각화하신 것이다.
둘째로, 5-7장의 산상수훈과 8-9장의 내용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것은 5-9장을 한 그릇 속에 담는 동일한 구절을 산상수훈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4:23)과 기적의 장이 끝난 직후(9:35)에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𝙰 : 예수님의 천국 가르침과 치유사역 요약(4:23-25)
B : 산상수훈을 주시는 말씀의 메시아(5-7장)
B’ : 열 가지 천국 기적을 행하시는 행위의 메시아(8-9장)
A’ : 예수님의 천국 가르침과 치유사역 요약(9:35-38)
위에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마태는 독자들이 마태복음 8-9장을 읽을 때에 권위 있는 말씀을 하신 메시아가 권위 있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의 메시아임을 깊이 깨닫도록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저자는 제자들의 사명을 교훈하는 10장에서 예수님에 관한 중요한 두 가지 사실(말씀과 행함)을 통합함으로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이 바로 제자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야 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모습은 5-7장에 기록된 천국의 복을 선포하는 것과 8-9장에 기록된 각종 기적을 나타내는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참된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에게서 들은 것을 선포하고 예수님에게서 본 것을 친히 몸의 처신을 통하여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저자는 예수께서 그에게 나아온 제자들을 위해 산상수훈을 주신 것으로 기록을 했고(5:1), 기적을 기록한 본 장에서 기적과 직접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수록했고(8:18-22), 마지막 부분에서 제자들이 추수할 복음의 밑으로 나가야 할 것을 기록하는 것으로 기적의 장을 마무리했다(9:37-38). 따라서 독자들은 5-7장을 읽은 다음에 8-9장을 읽으면서 천국시민의 놀라운 복을 받은 제자들이 어떻게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을 가져야 할지 8-9장에 등장한 인물의 모습을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
독자들이 8-9장을 이해할 때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여기에 기록된 예수께서 행한 10개의 기적은 한결같이 사탄의 나라를 점진적으로 붕괴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점진적으로 도래시키는 영적인 전쟁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사탄의 나라를 파괴하고 하나님 나라를 점차적으로 도래시키기 위한 거룩한 전쟁을 예수께서 기적을 통하여 수행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8-9장에서 이 전쟁은 크게 두 가지 양상을 가진다. 한 국면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나라를 침투하여 그 나라의 포로가 된 사실들을 구출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삼는 것과, 다른 면은 세력을 얻어 가는 하나님 나라 앞에 사탄의 나라는 아무런 대책이 없이 무기력하게 무너지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전사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대항하여 사람들을 동원하여 반격을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전자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귀신축출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는 기적에 나타나고, 후자의 모습은 이러한 예수님을 풍랑으로 물에 빠져 익사시키려는 사탄의 행동(8:23-27), 가다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배척한 사건(8:34), 예수께서 귀신에 들려 말 못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축출했을 때에 바리새인들이 그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들을 축출하고 있다는 비난(9:34)에 나타난다.
이렇게 치열하게 전개되는 영적인 전쟁의 모습을 그려주며 저자는 이러한 전쟁이 예수님의 치유와 귀신축출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는 사건으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로 장식될 것을 8-9장의 기적 기록을 통하여 예비적으로 보여준다. 8-9장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는 요소들은 예수님의 치유사역과 이사야 53장과 연결하여 그가 우리의 연약한 것을 감당하고 친히 병을 짊어지셨다는 말씀(8:17),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8:20), 풍랑사건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27:54)과 부활(28:1) 때만 있었던 것으로 유일하게 마태복음만 기록된 지진이 풍랑사건의 기록에 등장하는 것(8:24), 예수께서 유대인 무리들에게 배척을 받은 것과 같이 가다라 도시에서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배척받은 사건(8:34), 십자가 위에서 조롱을 받은 것(27:38-44)같이 한 통치자의 집에서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은 사건(9:24) 등이다. 또한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예고와 함께 8-9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도 고난에 관한 것만큼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하여도 예고한다. 이와 관련된 것은 이방인들의 대대적인 개종에 관한 예언(8:11),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나 풍랑을 정복하고 이방 지역을 가신 것(8:23-27), 열 두 살 죽은 소녀를 살린 사건(9:18-26) 등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8-9장에서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결정적으로 도래시킬 고난의 메시아로 그려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저자가 예수께서 결국 도시 전체에 의하여 배척받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가다라 군대 귀신축출 사건(8:28-34)을 8-9장의 기적 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기록한 사실은 어떻게 사탄 나라를 파괴하는 하나님 나라의 전쟁이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절정에 도달할 것을 예시한다.
독자들이 이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둘 때 8-9장의 기적 장을 바른 각도에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 마8-9장의 이해와 적용은 이러한 해석의 틀을 반영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관점에서 8-9장의 내용을 하나씩 검토해 보자.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정결하게 하신 사건(8:1-4)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육체적으로는 가장 비참하고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는 중풍병자가 너무나 아름답고 흠모할 만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약의 제사제도와 제사장을 능가하면서 여전히 구약의 제도에 순응하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먼저 중풍병자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그는 예수님께 나와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참으로 이상한 요청을 했다(2절).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의 문둥병이 치료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문둥병 치료보다 자신의 문둥병과 관련된 주님의 주권적인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비록 그가 구약의 문둥병에 관한 규정을 무시하고 대담하게 주님께 나아왔지만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병 치료를 앞세우지 아니하고 주님의 주권을 앞세웠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산상수훈에 기록된 주님의 가르침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서 기대하는 참된 제자의 모습이다.
그 다음은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이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졌다는 사실은 구약의 규정에 빗나가는 놀라운 사건이다. 그를 만지지 않으면 문둥병을 치료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병자에게 손을 얹지 않고 예수님께서 치료하신 사건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만질 때 그 자신도 부정해 진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를 만졌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만짐으로 부정해지신 것이 아니라, 부정한 그를 정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구약의 제사장을 능가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부정한 문둥병자를 만져서 정결케 하신 사건은 그가 영적 의미에서 부정한 사람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인, 세리, 창녀들, 버림받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정결케 하는 메시아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졍결함을 가져오는 예수님은 부정한 죄인들과 접촉함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결국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죄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치료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리라고 했다(4절).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에 관한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서이고,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게 가서 나은 것을 증거하고 규정된 예물을 드림으로 예수님은 제사장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음을 증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문둥병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그를 예수님에게서 부정함을 완전히 치료받았으니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하다는 선고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 받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백부장의 종을 치유한 사건(8:5-13)
마태는 이 기록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권세를 강조한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주님이란 호칭을 사용하면서 그의 권세를 인정한 사실(6-9절)과 그가 치유의 말씀을 하신 바로 그 시간에 그의 종이 병에서 나음을 받았다는 사실(13절)은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저자가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는 다르게 권세를 가진 자로서 가르쳤다고 기록(7:29)한 이후 처음으로 권세란 단어를 여기서 사용한다(9절). 백부장은 자신을 예수님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했다(8절). 자신의 권세 있는 가르침으로 무리들을 놀라게 한 예수님(7:28)은 자신의 권세를 인정하는 백부장의 말을 듣고 놀랐다(8:10). 백부장이 인정한 예수님의 탁월한 권세는 원거리에서 그의 즉각적인 치유의 역사로 확증되었다. 예수님의 이러한 권세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믿는 자가 참된 믿음을 가진 자요, 큰 믿음을 가진 자이다. 이 점에서 백부장이 예수님께 대하여 보인 믿음은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믿음이다. 백부장도 문둥병자와 같이 산상수훈이 내다보는 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7:21b).
또한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보여 준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배척은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의 변화를 가져온다. 유대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믿는 백부장으로 대표된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메시아 배척은 앞으로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을 예수님은 여기서 예고한다. 이방인의 개종 시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의 처형을 지휘했던 백부장과 그 일행의 신앙고백에서 곧 도래할 것이 암시되었고(27:54),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28:19-20).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온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베드로 장모와 많은 사람들의 치유(8:14-17)
마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을 본문에 소개하고 있지 않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 같이 그곳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이로써 남는 사람은 단지 예수님과 베드로의 장모뿐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세 가지 행동과 베드로 장모의 세 가지 행동을 기록한다. 예수님의 행동은 베드로 장모의 집에 들어가시고, 그녀를 보고, 그녀의 손을 만지는 행동이다. 이에 반응하여 장모와 관련한 세 가지 행동은 열병이 떠나가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열병에 걸린 사람을 만지는 것을 금하는 유대 전통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가와 누가는 베드로 장모가 일어나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시중들었다고(막1:31, 눅4:39) 하는 반면에 마태는 베드로의 장모가 일어나 예수님께 시중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게서 베풀어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임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참 제자도의 삶은 주님의 섬김을 받아 치유 받은 사람이 이에 감사하여 역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이다.
마태는 16절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서 행한 귀신축출과 치유사역에 대하여 요약을 한다. 그는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축출했다고 기록한다. 문둥병자를 말씀 한 마디로 정결케 하신 예수님은 백부장의 종을 만나지 않고 원거리에서 말씀으로 치유했고, 이와 비슷하게 말씀으로 귀신들을 축출했던 것이다. 이러한 능력 있는 말씀은 사탄의 세력을 붕괴시키고 그의 지배 하에 있는 자를 구출하는 구원의 역사이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마태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는 예수께서 구약 예언의 성취로 치유와 귀신축출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가셔야 할 유일한 길이 십자가의 죽음임을 여기서 예고하는 것이다. 20절에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이해를 지지한다. 결국 예수님의 치유와 귀신축출 사건은 예수님이 자신의 희생적 죽음의 결과를 미리 적용하는 것으로 그가 필연적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으로 예시하는 사건이다.
온전치 못한 제자도의 두 모습(8:18-22)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도의 삶은 그가 보여주신 메시아의 능력에 대한 반응으로 그가 인정하는 반응이어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님이 인정하지 아니하는 제자도의 모습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마태는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반응은 예수님을 따라 오고자 하는 한 서기관에게 예수님을 따라오려면 어떤 희생이든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고(19절), 둘 째 반응은 먼저 자신의 부친을 장사하고 난 다음에 주님을 따르게 허락해 달라는 한 제자에게 그런 일을 접어 두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다루고 있다(20절). 제자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발하시는 명령을 따르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오고자 했던 한 서기관과 예수님의 한 제자가 예수님의 명령에 대하여 애매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명령대로(18절) 예수님을 따라 배에 탔다(23절).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른 제자도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아래 구조분석은 이 점을 잘 드러낸다.
𝙰 : 다른 쪽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명령(18절)
B : 한 서기관의 고백와 예수님의 반응(19-20절)
B’ : 한 제자의 요청과 예수님의 반응(21-22절)
A’ :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함(23절)
예수께서 배척한 제자도의 두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첫 번째 모습은 예수님께 나와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르겠다고 한 서기관의 모습에서 발견된다(19절). 예수님이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르겠다는 그의 각오만은 외관상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보이는 각오를 가진 고백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의 고백에서 결점을 보았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의 의미를 그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한 말로 예수님은 받아들였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를 따라온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선생으로 모시고 그의 가르침을 받는 정도만으로 족하지 않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을 모시고 따라 오는 삶에 어떠한 포기와 희생의 각오가 필요한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절)”고 대답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인자는 그 어디에도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구절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시며 전도 여행을 하시기 때문에 그가 자기 소유의 일정한 거처가 없음을 말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 이 땅에서는 배척받는 고난의 삶임을 암시한다. 결국 이렇게 고난받고 배척받은 삶의 초종결과는 예수님이 가는 십자가 죽음의 길이다. 이 답변에서 독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가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임을 발견한다.
예수님이 배척한 두 번째 모습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절)”라고 한 어떤 제자의 모습에서 발견된다. 이 제자는 주님을 전적으로 따르기로 결심하기 전에 자신의 부친을 장사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엄한 명령을 하신다. 독자들은 여기서 예수님의 답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적절한 장례를 중요시 여기는 유대인들의 관삽을 이해할 때 더욱 그러하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가 죽었을 경우에 그의 자식은 매일 기도, 율법 공부, 성전 봉사, 할례 준수, 유월절 양 잡는 일 같은 중요한 신앙적인 의무를 실행하지 아니해도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제자에게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일도 그를 섬기고 따르는 일보다는 앞장설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는 나를 따르고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22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의 삶은 영적으로 산 자의 삶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영적으로 산 자의 삶은 세상의 관심에 발이 묶여 사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최고 우선순위로 여기는 그런 삶이다. 제자의 삶에 있어서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음을 예수님이 여기서 밝힌 것이다. 제자의 삶에 있어서 주님의 요구를 따르는 일이 그들의 삶의 최우선 순위라는 이 말씀은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을 상기키신다. 천국 백서의 삶은 의식주 문제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다(6:33).
적절하지 못한 제자도의 두 모습을 돌아볼 때, 독자들은 주님의 제자로 그를 따르는 삶은 주님으로서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어떠한 십자가의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행위를 가장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제자도에서 이러한 특성이 결여될 때 이것은 참된 제자도가 아닌 것이다. 저자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던 서기관과 한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기록하지 아니함으로 예수님의 절대적인 요구에 순종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행했음을 보여줌으로 독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 이들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서 배에 탄 제자들의 모습에 있음을 알려 준다.
예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8:23-27)
이 사건은 마가복음 4장 35-41절과 누가복음 8장 22-25절에 기록딘 사건과 동일하다. 특히 마태복음에서 이 기록은 이들 복음서와는 다른 각도에서 기록되었다. 첫째로, 이 사건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도의 교훈과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도의 교훈에 대한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8:18-22). 이것은 풍랑을 잠잠하게 한 사건을 제자도의 각도에서 이해할 필요성을 제공한다. 둘째로, 마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풍랑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큰 지진(세이스모스 메가)이 바다에 있었다고 기록한다(24절). 셋째로, 마태는 큰 지진으로 인하여 바다에 큰 파도가 일어나 제자들이 탄 배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에 제자들이 한 행동을 믿음의 각도에서 기록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배에 탄 것은 예수께서 배척한 두 제자의 모습과 반대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또한 그들이 큰 지진으로 인해 격렬한 풍랑을 맞을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해 달라고 외친 거도 역시 제자들이 가져야 할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들에게 믿음이ㅣ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불안과 걱정을 극복하지 못하는 적은 믿음이다. 더욱이 풍랑이 예수님의 한 마디 책망으로 잠잠해졌을 때에 제자들이예수님게 보인 반응은 그들이 아직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만큼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아직도 주님의 정체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성숙해야 할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마태가 풍랑이란 단어 대신 큰 지진이란 단어를 본 기록에서 사용한 것은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심장하다. 마태복음에서 ‘지진’이란 단어는 풍랑 사건(8:24),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27:54)과 그의 부활(28:2)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첫 번째 지진은 예수님께서 배에서 주무시고 있을 때, 두 번째 지진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직후에, 세 번째 지진은 예수님의 부활 직전에 있었다. 지진이란 단어가 풍랑사건과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관련하여 있었다는 사실은 큰 지진이 있기 전에 배에서 잠을 자고 계시던 예수님이 잠에서 일어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후에 이방 땅으로 성공적으로 가는 모습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방 땅으로 건너가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바로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후에 가다라 지방에서 두 청년들에게서 군대귀신을 축출한 사건은 이러한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
가다라 군대귀신 사건(8:28-34)
군대귀신 들린 두 청년에 관한 본 기록은 마가복음 5장 1-20절과 누가복음 8장 26-39절에 기록되어 있으나 마태의 기록이 가장 짧다. 마태가 강조하려는 요점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저자가 이 사건을 보는 넓은 관점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격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임한다. 예수님께서 명령을 하지않아도 귀신들은 떨고 사람에게서 물러나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군대귀신 들린 두 사람에게 능력있게 임했다.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사탄의 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자들을 구출하여 그의 백성으로 삼는 운동이다(마12:20).
그러나 예수님의 귀신축출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인 도래는 현 단계에서 사탄과 그의 추종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는다. 29절에 언급된 때, 곧 마지막 심판이 이르기 전에 사탄 나라의 세력은 완전히 이 땅에서 제거 되지 아니한다. 군대귀신은 하나님 나라의 진행 계힉에 따라 아직 그들이 완전히 멸망될 시기가 오지 아니했음을 예수님께 상기시켰고, 아울러 예수님께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행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지정된 마지막 심판의 시간 이전에 사탄과 그 귀신들은 파괴활동을 계속적으로 전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추종자들이 가는 곳마다 파괴의 역사가 일어난다.
마태의 원독자를 포함하여 오늘의 독자들은 본 기록에서 예고된 것이 십자가 부활로 성취된 이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승리에 입각하여 복음을 통하여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쟁을 성실하게 수행하도록 촉구를 받는다. 이 전쟁은 아직도 사탄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파괴되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있기까지는 사탄 나라의 저항과 반격 속에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본문을 통해 자신의 삶이 예수님의 편인지 아니면 반대편에 서서 살아가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일 독자들이 예수님의 편에 있다면 그는하나님 나라의 편에 서서 영토확장의 전쟁을 하는 자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는 사탄 나라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어느 편을 택해야 할지는 본문의 기록 속에서 등장하지 아니하는 제자들과 같이 순전히 독자들의 지혜로운 판단에 달려 있다.
중풍병자의 치유(9:1-8)
마태가 본 기록을 예수께서 가다라 지역에서 전적으로 배척받은 사건과 연결하고 있는 사실은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선포한 죄의 용서가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이루실 구원의 선물임을 묵시적으로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는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와 죄용서의 연결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나고(26:28),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성취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예수님께서 죄용서를 선언하는 것이 너무나도 지당함을 보여 준다.
마태는 중풍병자가 사람들에 의하여 침상에 들려 어떻게 예수님께 데려와졌는지에 대하여 상사하게 말하지 않고 단지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기록함으로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는 행동과 그의 죄용서 선언을 연결한다. 마태의 문맥적인 흐름에서 볼 때 예수님이 본 그들의 믿음은 단지 중풍병자가 치료받을 것을 믿는 치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앞으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 죽게될 그를 믿는 믿음이다. 이러한 이해는 마태복음에서만 가능하다. 더 나아가서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 통하여 확보될 구원은 무조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만 주어짐을 보여준다. 따라서 제자들이(교회가) 사람들에게 죄용서를 선언할 수 잇는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다. 믿음이 없는 곳에 죄용서를 선언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허락하신 죄용서의 권세를 남용하는 것이요, 그에 대한 믿음을 죄용서 받은 방법으로 삼으신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마태의 부르심과 그의 집에서 식탁교제(9:9-13)
본 기록은 기적의 장에서 부적절한 제자도 교훈에 이어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마가복음 2장 13-17절과 누가복음 5장 27-37절에도 역시 기록되어 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13절의 말씀은 유일하게 마태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이 내용은 본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한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마태를 부르신 사건이고, 믿음으로 용서받은 사람들의 받는 복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예수님과 죄인들 사이에 있었던 식탁교제이다. 마태의 소명은 믿음이란 결국 조건 없이 부르시는 예수님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에 응답하는 계속적인 행위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은 마태는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였다. 세리는 11절에서 죄인의 대명사로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간주된다. 10절의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란 표현은 세리와 죄인을 각기 다른 그룹이므로 취급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저자는 11절에서 ‘세리들 곧 죄인들’이란 의미로 분명하게 표현했다. 예수님 자신도 13절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왔다”고 선언함으로 이러한 이해가 옳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심은 죄인 마태를 부르심이다. 이것을 믿음의 성격과 관련하여 볼 때 믿음이란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임을 독자들은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많은 세리들과 식탁교제를 나눈 것은 그들이 받은 불가시적인 구원을 식사행위를 통해서 가시화 하는 중요한 행위이다. 식탁교제에서 그들이 누리는 음식은 신랑 메시아가 이 땅에서 부름에 응답함으로 회개하고 믿는 죄인들에게 베푸는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그의 식탁교제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호세아 6장 6절의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말씀을 인용하시고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서 배우라고 따끔한 일격의 말씀을 주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 말씀은 마태복음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호세아서에서 이 말씀은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갈 것(6:1), 하나님을 인정할 것(3절)을 권고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때 예수님께로 돌아온 많은 세리들이 예수님과 가지는 식탁교제는 결국 하나님의 자비를 누리는 것임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비는 죄인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그들을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행위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부름에 응답한 후에 허락하신 죄 용서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식탁교제를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베푸는 자비의 구체적인 표현이 예수님과 죄인들 사이의 식탁교제이다.
금식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9:14-17)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제기한 금식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바로 위에 언급된 예수님과 죄인 사이에 식탁교제를 배경으로 할 뿐만 아니라, 식탁교제의 성격을 좀 더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 질문은 예수님과 많은 세리들이 식탁교제를 나누고 있는 마태의 집에서 있었다는 점도 이러한 주제적인 연결을 강화한다. 이 단락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같이 금식을 하지는 않지만 신랑이 그들에게서 제거될 때가 되면 금식하게 될 것을 가르치는 것 같다(15절). 그러나 이것은 외관상의 교훈이지 예수님의 진의는 다른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게서 죄인들과 함께 나누는 식탁ㄱ제는 신랑 메시아가 결혼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축하만찬이란 사실을 밝히는 데 있다. 구ㅡ약은 앞으로 메시아 도래 때에 있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관계회복을 결혼의 은유를 통해서 예언했다(호2:19, 사61:10, 62:5). 구약의 이러한 배경은 곧 예수님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신랑 메시아에게 돌아옴을 ㅗ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나누는 식탁교제는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들이 예수께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회복되었음을 가시적으로 확증하는 사건인 것이다.
질문을 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제시한 두 가지 예는 동이한 메시지를 두 번 반복해서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새 천을 낡은 옷에 기우려고 하는 것이나(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부으려고 하는 것은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둘 다 쓰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가장 지혜로운 처방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것이다(17절). 예수께서는 두 가지 예 중에 낡은 옷에 새 천을 깁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보다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예에 더 비중을 두었다. 그것은 구원의 축제만찬과 포도주란 단어가 아주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새 포도주는 신랑 메시아 예수님이 돌아오는 죄인들에게 베푸는 죄용서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고, 새 부대는 이러한 구원의 실재를 표현하는 예수님과의 식탁교제일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축제의 스타일은 예수님이 베푸는 구원의 은총에 대한 반응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축하잔치는 메시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금식과 같이 애곡의 장솔 바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제 스타일의 영구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혈루병 걸린 여인의 치유와 소녀의 다시 살아남(9:18-26)
마태의 본 사건 기록의 초점은 혈루병에 걸렸던 여인과 죽은 소녀의 아버지의 믿음에 있지 않고 전혀 다른 데 있음을 보여준다. 만일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것과 같이 저자가 이들의 행동이나 신앙에 관심을 가졌다면 이들 복음서에 기록된 상세한 내용들을 많이 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것과 관련된 요소들을 생략하고 초점을 예수님에게 맞추어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저자가 이 기록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마태가 본 기록을 예수께서 앞에서 하신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관한 말씀과 긴밀하게 연결한 사실은 저자가 본 사건의 기록을 통해 앞에 제시된 내용을 좀 더 구체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위 단원에서 신랑 메시아가 그의 제자들에게서 빼앗길 날들이 올 것이라고 말씀했다(15절). 저자는 이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피를 흐릴며 죽음을 향해 가던 여인이 너무나 명확하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다. 신랑 예수님이 제자들에게서 빼앗기는 구체적인 방법은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실 분이 아니라 두 여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다시 살아날 분이다. 저자가 예수님의 수난 예언(17:23, 20:19)과 그 실현으로 예수님의 부활(28:6-7)을 묘사할 때 집중적으로 활용한 동사 “일어나다(에케이로)”를 여기서 독특하게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이해를 지지한다. 더욱이 마태는 미묘하게 18절에 “나의 딸이 방금 죽었다”는 언급 후에 19절에서 “예수께서 일어나셨다”는 부활과 관련된 단어를 역시 수동태로 사용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18절은 죽음을 이야기하고 19절은 문학적으로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이것은 곧 마태가 이러한 치말한 표현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묘하게 예시하는 것이다.
두 소경의 치유사건(9:27-31)
본 기록은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독특한 사건이다. 예수께서 소녀를 살린 부모의 집에서 떠나 길을 가고 잇을 때에 두 소경이 그의 뒤를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27절)”라고 외쳤다. 이와 같은 동일한 외침은 나중에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떠나실 때 두 수경의 입에서 나온다(20:30). 특히 여깃 ㅓ주목을 끄는 것은 “다윗의 자손”이란 예수님의 칭호이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족보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1:1) 사람의 입에서는 처음으로 나오는 호칭이다. 이 사실은 비록 두 소경이 육적인 눈은 멀었지만 영안은 열려 예수님을 바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칭호와 함께 28절의 “주님”이란 호칭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주님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자신이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으로도, 주님으로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12:23, 22:42-44).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두 소경의 고백은 예수님에 대하여 독자들이 가져야 할 지식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종 메시아의 사역은 소경인 이스라엘 백성의 눈을 열어주는 사역으로 묘사되어 있다(사28:18, 35:5, 42:7, 18-19). 두 서경의 이중적인 모습 속에서 독자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메시아에 대하여 가져야 할 영안을 알려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알려준다. 특히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으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을 가장 많이 언급한다(11:5, 12:22, 15:30-31, 20:30, 21:14). 동시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를 향하여 눈먼 지도자들이라고 호되게 질책했다(15:14, 23:16-17, 19, 24, 26).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두 소경의 치유는 단지 개인적인 치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영적으로 눈먼 이스라엘을 치유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임을 보여 준다.
귀신 들려 벙어린 된 자의 치유(9:32-34)
본 사건 역시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이다. 마태는 여기서도 귀신들렸다가 구신이 축출됨으로 말을 하게 된 사람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와 같이 여기서 저자의 관심은 예수님의 능력 있는 귀신 축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 이러한 강조는 예수님께서 귀신축출을 통하여 사탄의 나라를 붕괴시키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영적인 전쟁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저자와 독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행하시는 귀신 축출은 사탄의 나라를 점진적으로 붕괴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전쟁인데, 바리새인들은 눈이 어두워져서 이러한 실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사탄의 나라를 계속적인 붕괴를 오히려 사탄 나라의 기만으로 돌리고 있다(34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비난할 때 그들이 망하고 있는 사탄 나라의 편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실을 꿈에도 인식하지 못했다. 본문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바리새인들을 통한 사탄 나라의 반격 작전은 12장에서 더욱 더 고조된 상태로 나타난다(12:22-32).
일반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백성들보다 더 영적으로 어두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긍정적인 인식을 부정적으로 바꾸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바로 지도하기 위하여 어떻게 영적으로 바른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께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일반 백성들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관련하여 예수님을 대적하고 이러한 지도자들의 편에 서서 불행을 저지르고 만다.
예수님의 사역 요약과 참 목자의 심정(요9:35-38)
본 요약은 4장 23절에 언급된 내용과 병행을 이룬다. 4장 23절이 예수님의 이중사역을 여는 창이라면 9장 36절은 이를 닫는 역할을 한다. 이 두 사이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중사역은 5-7장의 말씀의 사역과 8-9장의 치유와 귀신축출의 사역이다. 36절은 무리들을 대하는 참 목자로서 예수님의 심정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실 때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가련한 존재로 보았다. 이 말씀의 배경은 바로 앞 단락에 기록된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무지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인 도래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것을 사탄의 장난으로 간주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 일반 백성들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반면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과는 정반대로 무리들을 아끼고 보살피는 참 목자의 모습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은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사역임을 보여 준다. 여기서 예수께서 염두에 둔 목자상은 자신의 말씀 선포, 병자들의 치유와 귀신축출을 통해서 전개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같은 사역은 사탄 나라에 인질로 포박된 자들을 그 손아귀에서 구출하여 내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고 하신 말씀은 그의 십자가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추수가 확실할 것을 예견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편에 서서 이 거룩한 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이 심히 적은 것을 지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는 예수님은 추수하는 주인이며 추수할 밭은 바로 그의 밭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장인 13장에서 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추수할 밭에 더 많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사도행전에서 어떻게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추수의 주인인 예수님께 기도함으로 이 말씀을 실현해가고 있는지 잘 알 것이다. 오늘의 독자들도 구원의 추수가 완성되기까지 예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은 당연하다. 구원의 추수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의 혜택과 결과임을 알면 알수록 독자들은 전 세계에서 더욱 더 효과적인 구원의 추수를 위해서 기도에 힘을 쓸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원의 추수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대로 기도했다면 구원추수의 마지막 시점에 서 있는 우리들은 더욱 더 목숨을 걸고 더 많은 일꾼 파송을 위해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