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단원(16-17) 로마서 주제
13,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16).
16-17절
두 절은 로마서의 핵심이 되는 대 주제(主題)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들어서 중세 암흑시대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회복케 하시는 종교개혁의 봉화를 밝히게 하셨던 것입니다.
16절에서는
복음에는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하고 말씀하고, 17절에서는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을 말씀합니다. 복음은,
“능력”(能力)입니다. 또한 능력이어야만 합니다. 왜 그런가? “사망에 매여 있는 영혼을 생명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능력(能力)이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에는 능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즉 해답(解答)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의”가
해답(解答)인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존전에서 추방을 당한 자가, 의로우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로 가림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만 올바로 깨닫는다면 로마서의 핵심은 파악한 것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 이 두 구절에 확고하지 못하다면, 당신이 누구이든지
당신은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 것이요 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상) 합니다.
㉠
이는 크게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16상) 하고 말씀합니다. 이는 “나는 복음을 자랑한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곡언법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어찌하여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더욱 그러하기 때문에, 저는 이점을 힘을 주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나는 복음을 자랑하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아야만 합니다.
㉡
만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 하고 말할 수 없다면 변명의 여지없이, 당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논리로는 중립지대(中立地帶)란 없기 때문입니다.
②
인간 이성(理性)의 잣대로 생각한다면 복음이란 부끄럽기 비할 데 없는 내용인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가 로마에 가서 전할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
“30대의 유대인 청년이 십자가에 처형된 사건이 있었다. 이 분이 누구인줄 아느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영광의 보좌를 내놓으시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 분이 왜 이러한 비참한 죽음을 죽으셔야만 했는지 아느냐? 네 죄 때문이었다. 그 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당신은 영원한 멸망이다. 그분은 죽은 것만이 아니라, 3일 만에 다시 살아 나셨다. 그 분은 머지않아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자 형제에게는 어떻게 들려 집니까?
㉡
바울은 장래가 촉망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총독으로부터,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도다”(행 26:24)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학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당시의 세계 중심지인 로마에 가서 이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 복음을 전하면 저들의 반응이 어떠하리라는 것도
모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 1:18) 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③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인 줄”(고전 1:22-23)을 알고 있지만, 나는 로마에 가서 이 복음을 전할 것이다. 이런 뜻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하는 말씀 속에는 들어 있는 것입니다.
㉠
사도는 소극적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 하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이 복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로마에 가려는 것입니다. 사도는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 12:15) 합니다. 왜 그러해야만 합니까?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④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중) 합니다.
㉠
복음은 “능력”(能力)이라는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복음에 능력이 없다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히 2:15)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눅 11:21) 합니다. 이것이 불신자의 심령상태입니다. 이처럼 사탄에게 매여 있던 한 심령이 생명으로 옮겨지는데 동원된 능력이 어떤
능력이었다고 말씀하는지 아십니까?
㉡
“그의 힘의 강력(强力)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能力)의 지극(至極)히 크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극히 크심”이란
최상급(最上級)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능력 중에 최상급의 능력이 형제를 구원하시는데 동원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
그래도 실감을 못할까 보아,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 1:19-20), 즉 주님을 부활하게
하실 때에 동원된 능력과 동일(同一)한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복음은 능력이다” 하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⑤
그런데 현대교회는 이 복음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백화점에서 장식용으로 팔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처럼, 잘 다듬고 가공한 설교를 하기에 급급한
것은 아닌지요.
㉠
주님이 지신 나무 형틀이 다듬지 않은 것이었듯이, 순수한 복음이란 미련하게 보이고 어리석게 들리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돌을 던질 만큼 분개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회중에게 만족을 주고 환영되는 메시지는 복음이 아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순전한 복음은 선포(宣布)되는 현장에서 영접하는 자와, 배척하는 자로(요 10:19), 가르는 심판의 기능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요
12:48).
㉡
그런데 오늘의 설교자들은 상대방의 마음이 불쾌하고 상할세라, 듣기에 좋은 말만을 골라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설교를 듣고
거부감을 느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지적(知的)이고 철학적인 훌륭한 설교였다고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복음(福音)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만일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합니다. 왜 복음에다
당의정을 입힙니까?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고기가 물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까? 그런 설교자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하고
단언합니다.
⑥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 마른 뼈가 가득한 것을 보여주시면서,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 37:3) 하고 물으십니다.
㉠
형제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네 능력으로, 네 말 수단으로, 네 지혜로, 교회 프로그램으로 살릴 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묻고 계시는 듯 합니다. 그런 설교로는 사람을 예배당으로 모을 수는 있을 지라도, “허물과 죄로 죽은” 심령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能力)은 이미 상실(喪失)했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은 “생기가 들어가리니 살리라”(겔 37:5) 하시고, 주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요 3:5)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알았기에 사도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하고 말씀합니다.
⑦
그러니까 믿는다는 “믿음” 중에는, 사람의 지혜에 의한 믿음도 있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곧
복음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
사도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고전 1:21)
하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전 1:20) 합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필요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중요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들이 이 세상 지혜입니다. 그런데 왜 “미련케 하셨다” 하는가? 허물과 죄로 죽은
심령을 살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형제는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그들을 설득하고 감동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합시다. 그러나 그들을 거듭나게 해줄
수가 있습니까?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들을 붙들어줄 힘이 당신의 말 수단에 있습니까? 그런 사람과는 성령(聖靈)께서 동역하시기를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⑧
사도는 말씀합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純全)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
벌써 2천년 전에 수다(數多)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混雜)하게 했다면, 2천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떠하겠는가? 형제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위임해주신 말씀에 더 하거나 덜할 권리가 설교자에게는 없음을 고백합니까?
㉡
공력(功力)을 시험하는 날이 온다고 말씀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고전 3:12-13) 합니다. 사도가 거론한 6가지는 “불타는 것과 타지 않는 것”, 두 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논리로는 “좁은 길과 넓은 길,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 두 종말만이 있을 뿐입니다. 불타버린 솔로몬의 성전처럼, 그가 세운
예배당 건물이 불에 탄다면 모르거니와, 그에게 위임하여주신 심령들이 불에 타버린다는 그 비참함과 책임을 어이 한단 말입니까?
형제여,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자랑하십시다. 아멘.
묵상해
봅시다.
1.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2.
사도는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
복음은 전파되는 현장에서 어떤 일을 합니까?
4.
당신은 주님이 죽으심으로 이루어주신 복음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