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리산둘레길 4구간 제2부
서암정사-벽송사-모전마을-용유담-
당나들골입구-송전마을-외암대
202521230
1.김종직의 유두류록길 탐방로와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제2부(서암정사-외암대) : 지리산둘레길 금계-동강 구간 중 서암정사-외암대 소구간을 정리한다. 서암정사瑞嵓精舍를 창건한 원응당元應堂 구한久閑 선사禪師의 발원發願 내용이 가슴에 뜨겁게 사무친다. 그 발원이 발원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발원인데 중생들은 서암정사의 기기묘묘한 서암瑞岩 풍경의 감동에 머무는 것으로 그치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 풍경 속의 원혼들은 중생들과 함께 해원의 길을 찾고 있다.
벽송사 삼거리에서 지리산 능선과 백무동계곡 능선, 창암산과 상재봉, 두류봉을 가늠하며 벽송사로 올라갔다. 금호장군禁護將軍과 호법대신護法大神 두 목장승이 지키는 입구를 지나 주차장 위 경내로 들어갔다. 벽송사碧松寺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맨 아래 1단에는 요사채 안국당과 청허루, 2단에는 수행 공간으로 벽송선원과 간월루, 원통전圓通殿, 산신각, 범종각 등이 자리하고, 맨 위 3단은 벽송사 옛 터로 3층석탑과 부도, 미인송이 자리한다. 벽송사가 6.25 전쟁 중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자 국군이 벽송사에 방화하여 벽송사는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후 1960년대 원응당元應堂 구한久閑 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벽송사碧松寺는 선禪 도량道場이다. 그래서 대웅전이 없고 지리산벽송선원 현판이 붙은 수행공간 선원禪院이 중심에 자리하는 것 같다. 원래는 맨 위 3단의 옛 절터에 대웅전과 3층석탑이 함께 있었는데, 당우들이 모두 불에 타서 결국 아래쪽으로 절터를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대웅전 동쪽에 자리했던 3층석탑은 홀로 뻘쭘하게 서 있는 꼴이 되었다. 3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인데, 이 탑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탑인데도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독특한 탑이라고 한다.
벽송사의 대표는 도인송과 미인송이 아닐까?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두 소나무, 아래쪽의 수령 300년이 넘는 소나무가 도인송, 그 위쪽에 줄기가 비스듬하여 받침목을 받쳐둔 소나무가 미인송이라고 한다. 두 소나무는 지리산 천왕봉과 하늘을 향하여 무엇을 염원하고 있을까? 벽송사 옛 건물들은 모조리 불에 타 사라졌다. 벽송사 두 소나무와 석탑은 벽송사의 이러한 역사를 증거하며 화해와 상생, 평화의 소망을 오늘도 간절히 소망하는 기도의 자세로 서 있다.
벽송사를 대충 살피고 벽송사 출입구로 나왔다. 산길나들목에 지리산둘레길 이정목이 서 있고, 그 옆에 김종직의 유두류록길 탐방로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이게 무얼까? 이 탐방로는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지리산 산행기 ‘유두류록遊頭流錄)’의 일부를 따라가는 탐방로이다. 선생은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중 1472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 동안 지리산 천왕봉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와 ‘유두류록遊頭流錄’을 기록하였다. 산행 주요 경로는 화암(현 동강마을), 운서마을, 고열암(함양독바위 근처, 1박), 쑥밭재, 하봉, 중봉, 천왕봉, 성모묘聖母廟(2박), 향적사(3박), 천왕봉, 제석봉, 세석고원, 영신사(4박), 한신능선, 백무동으로 내려왔다. 이 경로에서 국립공원에 속하는 어름터, 미타봉, 상내봉, 와불산, 함양독바위로 이어지는 4.5㎞ 구간이 유두류록길 탐방로에 속하며 유두류록길 탐방로는 벽송사~와불산~적조암~운서마을~둥지센터로 이어지는 11km라고 한다.
지리산둘레길은 유두류록길 탐방로와 함께 벽송사 동쪽 골짜기 비탈길을 따라 올라간다. 벽송사 뒷산에서 내려오는 능선과 만나는 곳까지 700m 거리는 가파른 비탈길이어서 힘들다. 드디어 능선에 올라섰다. 벽송사 뒷산에서 어름터와 상내봉으로 이어지는 이 동서 능선을 벽송능선 또는 벽송사 능선이라 이르는데, 지리산둘레길은 벽송능선에서 300m 거리에 있는 용유담 갈림길에서 유두류록길 탐방로와 헤어진다. 지리산둘레길은 벽송사에서 벽송능선 용유담 갈림길까지 1km 거리를 유두류록길 탐방로와 동행했다.
유두류록길 탐방로는 용유담 갈림길에서 벽송능선을 따라 상내봉으로 이어지며, 상내봉에서부터 남북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김종직 선행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의 실제 산행길이다. 그러니까 벽송능선의 끝 지점인 상내봉에서 와불산, 함양독바위와 적조암을 거쳐 운서마을로 이어지는 '유두류록'의 실제 산행길의 일부 4.5km 길을 유두류록길 탐방로라고 명명한 것이다. 실제의 유두류록 산행길은 상내봉에서 쑥밭재, 하봉, 중봉, 천왕봉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현재 비탐방로가 되어서 위쪽으로 오르는 길은 탐방할 수 없는 것 같다.
벽송능선의 용유담 갈림길에서 지리산둘레길은 북쪽 골짜기를 내려가 휴천면 송전리 모전마을과 용유담으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용유담까지는 2.6km 거리이다. 잠시 임천의 용유교로 내려가 용유담을 살폈다. 용유담은 마적도사와 아홉 마리 용 전설이 구전되어 오는 곳이다. 임천의 용유담에는 마적도사의 전설이 있는 나귀바위와 장기 알들이 변한 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안내판에 적혀 있는 '마적도사와 아홉 마리 용' 전설은 이렇다.
"신라 무열왕(659년) 때 마적도사가 용유담에 와서 마적사를 짓고 나귀를 기르고 있었다. 식량과 부식물이 떨어지면 쪽지를 써서 쇠도장을 찍어 나귀에 부쳐 오도재를 넘어 관동장에 보냈다. 상인이 물품을 챙겨주어 싣고 다시 돌아와 나귀바위에서 울면 마적도사는 쇠지팡이로 다리를 놓아 나귀를 건너오게 하였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지리산 천왕 할매와 장기를 두는 데 정신이 빠져 있었고 눈 먼 용을 제외한 여덟 마리 용이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여 하늘에 오르려고 물고 뜯고 싸우는 소리 때문에 나귀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귀는 울다 지쳐서 죽고 말았다. 뒤늦게 나귀의 죽음을 알게 된 마적도사는 장기 때문에 나귀가 죽는 줄을 몰랐다며 화가 나서 장기판을 던지니 깨어져 한 조작은 나귀가 죽은 나귀바위에 떨어졌고 한 조각은 마적동에 떨어져 바위에 장기판이 새겨졌다. 마적도사는 눈 먼 용 한 마리를 남겨 놓고 여덟 마리 용을 모두 쫓아 버렸다." -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안내판
마적도사馬跡道士 전설은 스님의 기인한 행적이나 도술적 측면이 부각되며, 불교와 도교의 접합점을 보여주는 전설이라고 한다. 이 지역 어떤 스님의 기행과 연관되었을 것이고, 오랜 세월 구전되는 과정에서 기발한 상상이 첨가되어 지명과 자연물의 유래담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안내판에는 마적도사 전설과 관련된 휴천면 송전리 지역의 지명들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탐방로를 따라 탐방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 같다. 지리산둘레길은 마적도사 전설과 관련된 용유담을 거치고 당나들골 입구를 지나며 전설이 깃든 임천을 따라가는 것으로 끝난다.
엄천이라고도 불리는 임천은 북쪽 휴천면 문정리와 남쪽 송전리 사이를 흘러간다. 지리산둘레길은 임천 북쪽의 언덕 휴천면 송전리 송전길을 따라간다. 서쪽 뒤에는 백운산과 금대산이 멋진 능선으로 가슴을 부풀리고, 북쪽에는 법화산이 가까이서 손짓하고 중턱 높은 곳에 견불마을이 자리하고, 산자락에 고정마을이 자리한다. 배산임수하여 남향한 명당에 문정리 고정마을과 견불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남쪽의 와불산과 함양독바위를 마주보며 생활한다. 송전길에서는 이 두 풍경을 모두 볼 수 있다. 와불산의 함양독바위를 보며 '유두류록'의 '유두류록'에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지리산 산행 첫날 잠을 잔 곳은 노장대(함양독바위) 근처의 석굴이 있는 암자 고열암古涅庵이었다. 현재 절은 사라지고 석굴만 남아 있다고 하는데 550년 전 점필재는 이곳에서 묵은 느낌을 오언율시로 이렇게 남겼다. "病骨欲支撑(병골욕지탱)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잠차포단숙)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송도비명월) 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오의유구곡) 구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부운복하의)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야반폐암곡) 한밤중엔 바위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유장정직심)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당득산영록)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 '숙고열암宿古涅庵(고열암에서 묵다)' 소나무를 출렁이는 달빛 물결의 황홀경에 빠진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세동細洞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송전松田마을은 창호지 생산으로 유명하여 어디를 가나 한지를 만드는 재료인 닥나무을 재배하는 딱밭으로 이름난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을 이름이 저전楮田이어야 하는데 왜 송전松田이나 세동細洞이 되었을까? 그 분명한 연유를 알 수 없다. 송전마을은 높은 언덕에 자리하여 임천 북쪽의 문정리 고정마을을 내려보는 지형이다. 송전마을 쉼터에서 북쪽의 법화산과 그 산자락 마을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다. 그래서 마을에 송은대, 광암대, 위암대, 심원대 등 누정대樓亭臺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 아래 송전길 언덕에 김달인씨의 묘비가 있는데 외암대巍巖臺라고 적혀 있다. 이곳이 풍경 조망이 좋아 외암대巍巖臺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 도로가 개통되면서 외암대巍巖臺는 사라진 것 같다. 문명은 편리를 가져다 주지만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앗아간다. 우뚝하게 솟은 법화산과 산자락의 고정마을이 겨울 오후의 햇살을 받아 환하게 반짝인다. 이 풍경에 물들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가야할 지리산둘레길 휴천면 동강리 동강桐江마을은 아직도 4.8km가 남아 있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4.6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11분
오른쪽은 마천면 추성리 추성마을 방향, 지리산둘레길은 위쪽 벽송사 방향으로 올라간다.
지리산둘레길 안내도와 현 위치에서 지리산국립공원 칠선계곡으로 연결되는 안내도가 그려져 있다.
벽송사 삼거리에서 오른쪽 창암산 남쪽에 자리한 추성마을을 내려본다.
중앙에 상재봉이 보이고 맨 뒤 능선은 백무동계곡 능선인 듯. 오른쪽 아래에 추성마을이 자리한다.
왼쪽 맨 뒤에 두류봉이 솟아 있고, 오른쪽 뒤에 상재봉이 보이며, 그 아래 계곡이 칠선계곡이다.
벽송사 삼거리에 지리산둘레길 이정목과 벽송사 가는 길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창암산은 마천면 의탄리, 추성리, 가흥리, 강청리 등 네 지역의 꼭지점에 솟아 있고, 그 남쪽 자락에 추성마을이 자리한다.
벽송사 올라가는 길 왼쪽에 아래쪽이 잘려나간 금호장군(禁護將軍), 오른쪽에 호법대신(護法大神) 두 목장승이 서 있다.
벽송사 경내 아래 오른쪽과 그 위 왼쪽에 벽송사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 표지판 뒤에 벽송사 안내판시 설치되어 있다.
지리산둘레길은 벽송사 경내 오른쪽 산길로 진행하는데, 벽송사 경내로 들어가 벽송사를 살피고 되돌아온다. 맨 오른쪽은 장승각이다.
전통 사찰 벽송사(碧松寺) 경내 입구 오른쪽에 벽송사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왼쪽에 안국당(安國堂)이 자리한다.
벽송사(碧松寺)는 중종 15년(1520)에 벽송지엄(碧松智嚴)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이곳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숙종 30년(1704)에 환성지안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때 법당, 선원, 강당 등 30여 동의 전각이 즐비하였다. 상주하는 스님은 300여 명에 이르렀고 부속암자는 10여 개가 넘었다고 전해지며, 벽송사는 근 300년 동안 조선불교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교겸수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한국전쟁기 빨치산들의 암약으로 말미암아 국군이 방화하여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60년대 구한원응 스님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보물 제474호 3층석탑과 경남 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 진영,「경암집책판」,「묘법연화경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2호인「목장승」등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 안내판
요사채인 청허당(淸虛堂) 왼쪽 위에 범종각이 자리한다. "벽송사의 당우(堂宇)는 크게 3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아래쪽 부분은 쌍둥이 건물로, 요사채인 청허당(淸虛堂)과 안국당(安國堂)이 마주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벽송사 맨 아래쪽에서 올려보았다. "중간 부분은 수행 공간이다. 수행 선방인 벽송선원(碧松禪院), 2층의 간월루(看月樓), 11면관음보살좌상과 지장탱 등을 봉안하는 원통전(圓通殿), 산신각, 범종각, 장승각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리산벽송선원 현판이 붙어 있다. 오른쪽 뒤에 산신각이 있다. 벽송선원 뒤쪽에 솟은 도인송과 미인송이 보인다.
간월루와 마주하여 벽송사 종무소가 자리하고 그 왼쪽에 산신각이 있다.
벽송선원 오른쪽 뒤에 원통전과 산신각이 자리하고 그 뒤에 수령 300년이 넘는 도인송과 미인송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도인송 위쪽 미인송이 있는 곳은 대웅전이 자리했던 벽송사의 옛 터이다. 공사 중이어서 벽송사 옛 터로 출입이 통제된다. "위쪽 부분은 벽송사의 옛 터이다. 이곳을 오르는 길목에는 ‘도인송(道人松)’으로 불리는 수령 300년의 보호수[2011년 지정]가 있고, 절터에는 현재 3층석탑, 벽송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부도가 3기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19년 6월 16일 오후 5시 30분이 넘어 벽송사를 들렀을 때의 미인송과 벽송사 옛 터 풍경이다. 이곳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그 동쪽에 3층석탑이 있었는데, 대웅전이 아래로 내려가고 현재는 탑만 남은 상태이다. 중앙 뒤의 산봉우리는 두류봉인 듯.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보물 제174호 벽송사 삼층석탑 (碧松寺 三層石塔) : 이 탑의 위치는 원래 벽송사 대웅전 동편에 세워 놓은 것인데 사찰이 아래로 옮겨져 탑만 남게 됐다. 2중기단 위에 방형의 3층 탑신부를 이룬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탑이지만 사찰이 세워진 때가 조선시대(1520년)이므로, 그때 탑도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탑의 위치기 법당 앞이 아닌 뒤편이라는 점이 특이하며, 신라시대의 삼층 석탑의 모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예로서 주목 되는 탑이다. 현재 탑의 상륜부에는 복발(覆鉢)과 노반(露盤)이 남아 있으며, 탑의 높이는 3.5m이다. - 안내판
도인송(道人松) 아래서 남서쪽을 조망한다. 오른쪽의 창암산과 그 아래 추성마을, 맨 왼쪽의 상재봉, 그 뒤 백무동계곡 능선이 확인된다. 중앙 맨뒤는 지리산주능선의 형제봉일 것이라 추정한다.
중앙에 상재봉, 그 왼쪽 뒤는 지리산주능선 연화봉이라 추정한다. 백무동계곡 능선 맨 오른쪽 뒤에 형제봉이 가늠된다.
왼쪽 뒤에 두류봉, 그 오른쪽 뒤에 지리산 천왕봉이 자리할 것이다.
벽송사 종무소 앞에 시주금 접수처가 있고 그 오른쪽에 벽송사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 : 벽송사(碧松寺)는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碧松智嚴)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에서 보면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회암정혜, 경암응윤, 서룡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를 겸수한 대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랑”(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고도 불렸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사의 제1대 조사인 백송지엄선사는 태고보우, 벽계정심 선사로부터 내려오는 심인(心印)을 전해 받아 조계정문(曹溪正門) 태고 하 5세손의 정통조사가 되었다. 벽송지엄선사는 간화선 수행법(看話正宗)에 따라서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된다. 그래서 벽송사는 간화선의 제일 조정(朝庭)으로서의 역사를 간직한 '한국선불교의 근본도량'이 되는 것이다. 벽송대사의 뒤를 이어 벽송산문의 제2대 조사에 오른 분이 부용영관(芙蓉靈觀) 선사이다. 부용선사는 도가 높고 학문이 깊어 배우러 오는 승속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서산대사로 알려진 청허휴정(靑虛休靜)과 부휴선수(浮休善修)이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사의 제3대 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데 진력을 다하게 된다. 한국선문의 거장 청허휴정(서산대사)이 벽송사의 제3대 조사라는 사실은 벽송사 사적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서산대사 문하의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 벽송사에서 오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부용영관선사의 다른 한 사람의 수법제자인 부휴선수선사 또한 벽송사에서 도를 깨닫고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행화하였다.
서산과 부휴 양대 조사가 모두 벽송사 출신이라는 사실은 벽송사가 조선 불교의 종가(宗家)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벽송사를 “조계조정(曹溪曹溪庭), 벽송총림(碧松叢林), 선교겸수(禪敎兼修), 간화도량(看話道場)"이라고 불렀다. 1704년(숙종30년)에 환성지안(喚醒志安)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 때에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 동의 전각이 즐비하였으며, 상주하는 스님은 300여 명에 이르렀고, 부속암자는 10여 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이로부터 금대암에 선원이 개설되어 수선납자가 운집하고, 벽송사 본당에는 강원이 개설되어 근세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었으니, 근 300년 동안 조선불교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리고 근대의 선지식이신 경허선사도 벽송사에 주석하며 서룡선사 행적기를 집필하였다.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벽송사의 사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지리산 빨치산들의 암약으로 말미암아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구한원웅(久閒元應)스님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옛날 선종의 최고 조정에 벽송선원을 낙성하여 을유년(2005년) 하안거에 개원하여 눈푸른 납자들이 수선정진할 수 있는 선찰종가(禪刹宗家)로 거듭나게 되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 석탑(보물 제474호)과 경남 유형문화 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책판, 묘법연화경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 등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 안내판
지리산벽송사(智異山碧松寺) 현판이 붙은 벽송선원(碧松禪院) 옆에 간월루(看月樓)가 자리한다.
벽송사를 살피고 벽송사 입구로 되돌아와 오른쪽 산길로 이어간다. 왼쪽에 있는 장승각을 살피지 못하고 지나쳤다.
벽송사 입구의 산길 나들목에 금계 2.9km, 동강 9.8km 지점을 알리는 지리산둘레길 이정목이 서 있다.
이정목 옆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생의 지리산 산행기 '유두류록(遊頭流錄)'길 탐방로 안내도가 서 있다. 탐방로는 벽송사에서 출발하여 벽송사 능선을 따라 와불산, 그리고 노장대(함양독바위)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운서마을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문신인 김종직(1431∼1492) 선생이 함양군수로 부임한 이듬해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와서 '유두류록(遊頭流錄)' 이란 기행문을 남겼다.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1472년 8월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13.3㎞ 가운데 국립공원에 속한 노장대(함양독바위)∼상내봉(향로봉)∼미타봉∼어름터 4.5㎞ 구간이다. 옛 문헌에 김종직 선생이 올랐던 탐방로가 지리산 전체 등산길의 제1호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유두류록'이 600여년 만에 다시 복원됐다. 신간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삼우반)는 70대 여성 산악인 류정자(72)씨가 30여년 동안 문헌 고증과 산길 답사 등을 통해 선생의 지리산 탐방로를 현재에 복원하는 과정과 성과를 담은 책이다. 이 책으로 인해 밝혀진 지리산길은 백무동·중산리·노고단·뱀사골·피아골 등 기존에 알려진 탐방로가 아니라 조선시대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이어서 역사적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2020.12.5. CBS노컷뉴스 곽인숙 기자.
벽송사의 산길 나들목에서 진입하여 곧바로 왼쪽으로 꺾어 벽송사 동쪽 골짜기를 따라 올라간다.
지리산둘레길 이정목과 벽송사 안내판이 있는 왼쪽 산길로 올라간다. 벽송사 안내판은 벽송사 주차장 입구에도 세워져 있다.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碧松寺) : 벽송사는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碧松智嚴)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며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입니다. 지리산둘레길을 양해해 주신 벽송사에 감사드리며 스님들의 참선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경건한 마음으로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산림청 사단법인 숲길 - 벽송사 안내판
가파른 오르막길이 힘들다. 해발 660m 국가지점번호표지목을 지나 계속 올라간다.
벽송사에서 700m를 올라와 벽송사 능선과 만나 동쪽 와불산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산길은 벽송사 뒷산에서 내려오는 능선이고, 왼쪽 골짜기 산길을 따라 능선으로 올라왔다.
벽송사 능선은 와불산으로 이어지고, 지리산둘레길은 왼쪽으로 꺾어 휴천면 송전리 용유담 방향으로 내려간다.
벽송사 능선은 동쪽 4km 지점의 와불산으로 이어지고, 지리산둘레길은 북쪽 아래 2.6km 지점의 용유담으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 13:06
해발 693m 갈림길에서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지역의 급경사 산길을 내려간다. 정면에 법화산, 맨왼쪽에 오도봉이 가늠된다.
서북쪽을 바라보면 중앙 나무 줄기 뒤에 등구재, 그 왼쪽에 백운산과 금대봉이 가늠된다.
급경사 비탈길에 나무계단이 조성된 곳이 있다.
동쪽 방향을 조망하면 상내봉과 와불산, 노장대(함양독바위)가 어림된다.
북쪽 방향을 조망하면 중앙에 오도봉과 삼봉산, 오른쪽 뒤에 법화산이 어림된다.
왼쪽 뒤에 법화산이 솟아 있고, 오른쪽 아래에 임천이 흐른다.
산골짜기를 벗어나 임도로 내려간다. 아래쪽에 임천이 흐르고 모전마을이 남쪽 언덕에 자리하며 전신주 왼쪽 뒤에 법화산이 보인다.
임도에서 오른쪽 골짜기로 들어가 골짜기 다리를 건너 내려간다. 중앙 왼쪽 뒤에 법화산이 봉긋하다.
임도에서 골짜기로 들어와 골짜기의 나무다리를 건너 골짜기길 동쪽 비탈길로 내려간다.
골짜기의 나무다리에서 중앙 뒤 봉긋한 법화산을 확인한다.
나무다리를 건너 골짜기 동쪽 비탈 자락길을 따라 내려간다.
골짜기 동쪽 비탈길(왼쪽)을 따라 임도로 내려와 뒤돌아보았다.
왼쪽 길을 따라 모전마을 입구의 지명선원(知明禪院) 삼거리로 내려간다.
지명선원(知明禪院) 삼거리에서 용유담 경유의 짧은 코스와 만난다. 지리산둘레길은 오른쪽으로 이어가지만 모전교를 건너 용유담 주변을 살피고 되돌아오기로 한다.
모전교를 건너 용유담을 바라보는 임천의 용유교로 내려간다.
왼쪽에 지리산둘레길 4구간 짧은 코스의 의중마을 가는 출입구가 있고, 그 뒤에 공중화장실과 오른쪽에 용유교가 보인다.
지리산둘레길 4구간 짧은 코스의 의중마을 가는 길 출입구가 왼쪽에 있다.
용유교 남단 서쪽에 용유담 설명안내판, 동쪽에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안내판이 서 있다.
엄천강의 상류에 있는 용유담(龍遊潭)은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인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용유담에 이르러 장방향의 평평한 호수를 이루게 된다. 이와 더불어 화강암으로 된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인 험준한 봉우리는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용유담은 신선이 노니는 별천지로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고, 여름이 되면 각처의 피서객들이 모여들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용유담의 절경을 이루는 풍치와 청아한 물빛, 물에 비친 웅장한 산그림자, 푸른 못의 반석에 펼쳐진 모래는 가히 도원경의 경지에 이르는 듯 보는 이로 하여금 하염없이 도취하게끔 한다. 길 언덕위에는 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용유담 주변에는 당나귀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로 인해 용유담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과 마적도사, 당나귀 관련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 안내판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안내판 아래쪽에 마적도사와 관련된 여러 전설들이 소개되어 있다. 일부를 소개한다.
●도사배나무 전설 : 마적동 앞에 있었던 큰 배나무인데 마적도사가 심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적도사가 절을 떠나던 날 배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서 이것이 살아있으면 내가 산 줄 알고 이것이 죽으면 나도 죽은 줄 알라고 말했다 한다. 배나무는 사라호 태풍에 쓰러져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장기판 바위 전설 : 마적도사와 아홉 마리 용 전설 중에 마적도사가 장기를 두는 데 정신이 빠져 나귀의 죽음을 뒤늦게 알고 화가 나서 장기판을 던졌고 반쪽은 나귀바위에 떨어졌고 나머지 반쪽은 이곳에 떨어져 장기란 바위가 되었다. 바위에는 장기판 형상이 남아 있다. ●도사우물 전설 : 마적도사가 마시던 우물로 가뭄이 들거나 비가 많이 와도 수량이 일정하다고 한다. 옛 마적사의 우물로 추정되기도 하여 이 우물물을 마시면 장수한다고 전해진다. ●말발굽 바위 전설 : 마적동의 지명유래가 된 발말굽 향상이 새겨진 바위다. 1990년대 태풍과 산사태에 의해 떠밀려 내려가면서 유실되었다. ●마적대 : 마적대는 지리산의 8대(臺) 중 하나이다. 옛 선인들에 의하면 일 금대, 이 마적 또는 일 마적, 이 금대라고 할 정도로 경치와 기가 좋은 곳이다. 지리산 8대를 다 등정하면 장수한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지네바위 전설 : 고양터 북쪽 길가에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 아래쪽에 굴이 있는데 옛날 지네가 이곳으로 들어간 뒤로 송대가 주변에서 가장 큰 마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근래 송전리 주민들은 이제 송대가 작아졌으니 지네가 아마 빠져나갔을 것이라고 한다. ●와불 조망 : 송대마을 인근에서 보면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의 산 능선이 보인다. 부처바위 또는 미타봉으로 불리는 와불산이 와불의 머리이고 그 왼쪽으로 보이는 상내봉이 와불의 목젖에 해당한다. 겨울이 되면 부처의 전체 형상 부분은 항상 눈이 먼저 녹지 않고 아래만 녹아 신기한 풍경을 연출한다. ●말귀바위 유래 : 송대마을 입구에 있으며 말귀를 닮은 큰 바위이다. 바로 앞에 죽통(구시)바위가 있었으나 도로공사로 인해 유실되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말이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빨치산 루트 : 지리산은 민족의 기상과 혼, 정서 그리고 애환이 깃들어 우리와 함께 숨쉬어 왔다. 이러한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한때 우리역사에 있어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빨치산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빨치산사건의 배경은 8.15 해방 이후 공산주의 세력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부터 시작되는데, 반란자들이 국군의 토벌작전에 의해 진압된 이후 잔여병력 약 200여명이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인근 좌익세력과 함께 지리산유격대(빨치산부대)를 결성하였다. 이들이 빨치산으로 활동하면서 6.25 전쟁 때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경찰관서와 군부대를 습격하고 민가에 피해를 주는 등 그 폐해가 심하였으며, 휴전협정 이후 1953년 8월 병단장인 이현상이 사살된 이후까지도 수년간의 격전이 벌어졌다. 빨치산과 토벌대의 전투로 인하여 피로 젖었던 민족비극이 묻혀있는 곳 지리산, 빨치산루트에는 당시의 인민군총사령부, 야전병원(벽송사), 이은조 사살지(선녀굴)를 비롯하여 빨치산들이 은신하던 비트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벽송사, 영원사 등 유서 깊은 역사자원이 있다.
용유교에서 임천의 용유담을 살펴본다. 임천이 마천면 의탄리와 창원리 사이를 흘러 내려와 평평한 호수를 이룬다.
용유담은 지리산 북쪽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엄천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기암괴석과 폭포소리, 서쪽 언덕의 나무숲과 푸른 담수에 푸른 하늘이 어우러져 신비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장방형의 평평한 호수, 절묘한 화강암 괴석들이 첩첩이 싸인 계곡은 용이 승천할 것 같은데 호수에서의 고기 잡는 어부의 작은 배는 한 폭의 신선도 같고 절벽의 풍치나 청아한 물빛, 물속의 반석과 모래사장에 빠져들면 마적도사와 아홉 마리 용의 전설과 더불어 황홀강에 빠져들게 된다. 아홉 마리 용을 그린 병풍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일제강점기 때 서울 박람회에 출품했다가 분실되었고 하나는 눈먼 용 한 마리만 남겨두고 싸우다 당나귀를 죽게 한 여덟 마리 용이 마적도사에게 벌을 받아 쫓겨나는 그림으로 마적도사의 철장과 함께 해인사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용유담은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 그리고 임천과 엄천의 경계이며 남쪽 지리산과 북쪽 법화산 사이를 따라 흘러가는 임천에는 용유담을 비롯하여 12곳의 바위, 소(沼), 정자 등의 경승지가 있다. - 안내판
임천이 휴천면 문정리와 송전리 사이를 흘러내려간다. 마적도사의 전설이 있는 나귀바위와 돌로 변한 장기 알들이 보인다.
●거북바위 전설 : 용유담의 소(沼) 안에 거북바위가 있는데 거북이가 토끼간을 찾아가기 위해 뭍으로 나왔다가 토끼를 놓쳐서 용왕으로부터 벌을 받아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거북바위는 물에 잠긴 정도에 따라 용으로 보이기도 한다. ●거품소와 눈먼 용전설 : 나귀바위 근처에 수심이 깊고 거품이 빙빙 도는 거품소가 있다. 이 거품소에는 용유담의 아홉마리 용 중에 마적도사가 쫓아 내지 않은 눈 먼 용이 거품소 깊숙한 곳의 굴에 잠들어 있어 거품이 생긴다는 전설이 있다. 이 거품소는 포호소(泡湖沼)라고도 한다. ●나귀바위 전설 : 마적도사가 장기판을 던져 반쯤 깨어진 빨간 핏빛의 나귀바위는 1960년대에 지방도로 공사를 위해 폭파해야 했다. 그 바위를 폭파하니 폭음과 함께 호두만한 말방을 16개가 쏟아져 나왔는데 마적도사의 애마 나귀 방울이었다. 송전리 주민의 말에 의하면 이것을 7명이 나눠 가지고 집에가 책상서랍 농 빼닫이 등에 보관하였는데 3일 후에 보니 모두 없어졌다. 모두 놀라서 마적도사의 도술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현재 나귀바위는 사라졌으며 거품소(沼) 부근 도로변에 있었다. ●장기 알 전설 : 용유담에서 거품소 가기 전 수많은 바위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곳이 있다. 마적도사와 아홉 마리 용 전설에서 마적도사가 던진 장기판의 장기 알이 흩어져서 이곳의 바위들이 되었다고 한다. - 안내판
용유교 남단 서쪽 용유담 설명안내판 왼쪽 뒤에 반야정사가 있다.
오른쪽 지리산둘레길 4구간 짧은 코스 출입구를 지나고 모전교를 건너 지명선원(知明禪院) 삼거리로 되돌아간다.
지리산둘레길 4구간 짭ㄹ은 코스와 긴 코스가 이곳에서 만나 모전길을 따라간다. 금계 5.6km, 동강 7.1km 지점이다.
수행 도량 지명선원(知明禪院)이 휴천면 송전리 용유담 남쪽 언덕에 자리한다.
지명선원(知明禪院) 앞 모전길을 따라 모전마을회관 앞으로 이어간다.
모전길을 따라 모전마을회관 앞을 지나 휴천면 송전리 모전마을 앞으로 이어간다. 세동마을 2.1km 지점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松田里)는 대표적 마을인 송대동(松臺洞)과 모전동(茅田洞)의 이름을 따서 송전리라 한 것이다. 송전리는 함양군 엄천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송대동, 모전동, 세동, 마적동, 장재동, 고양터, 장암동을 병합하여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가 되었다. 송전리는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종이의 생산지였다. 닥을 익히는 닥무지 과정을 거친 뒤 껍질을 벗겨 말리고 잿물에 삶아 두들긴 다음 닥풀을 넣어 빌러 종이를 뜨는 작업의 제지공장을 연중 운영하였다고 한다. 송대동은 용당이라고도 하였으며, 모전동(茅田洞)은 잔디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세동(細洞)은 평산신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한지 생산을 위한 닥밭이 많았다고 하나 지명유래는 알 수 없다. 마적동(馬跡洞)은 신라 무열왕 때 마적도사가 이곳에 마적사를 지어 ‘마적’이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이고, 장재동(長財洞)은 고랭지이며 장동감과 단성감으로 곶감을 생산하여 재물을 많이 모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쉼터정자 옆길로 1.2km 올라가면 송전리 고양터마을이 있다고 한다.
지명선원 앞에서 모전길을 따라 모전마을회관 앞을 지나 쉼터정자 위쪽 고양터 갈림길로 올라왔다.
모전마을에 펜션들이 즐비하다. 금계 5.8km, 동강 6.9km 지점의 모전마을 앞을 지나간다.
송전리는 함양군 휴천면에서 지리산국립공원에 가장 많이 속해 있어 높이가 높은 산간지역이며 임천 강변과 깊은 계곡, 기암절벽, 우거진 숲 등의 관광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특히 용유담이 명승지이다.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는 와불산[1,213.8m]의 서쪽 능선[벽송사 능선]의 북사면에 있으며, 남쪽 산지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북쪽으로 흐르며 북쪽의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와 경계부를 이루고 있는 임천으로 흘러들고 있다. 송전리는 함양군 휴천면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곳으로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대부분 산지지역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 농특산물로는 밤, 고로쇠, 토종꿀, 흑돼지, 고사리, 산나물 등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아래에 용유담이야기 펜션이 있으며, 송전길을 따라간다.
중앙 뒤에 법화산이 봉긋하고, 그 아래 임천이 흐르며 임천 남쪽 언덕에 용유담이야기 펜션이 자리한다.
아래에 임천의 용유담과 용유교가 보인다. 중앙 뒤 왼쪽에 금대산, 그 오른쪽에 백운산이 멋지다.
송전길을 따라 용유담이야기펜션 입구를 지난다. 앞쪽에도 펜션이 자리한다.
마적동의 세진대에서 모전마을로 내려오는 당나들골이 앞 능선 뒤쪽에 있는 것 같다.
용유교 아래 용유담과 임천에, 전설의 장기 알들이 흩어져 있다. 중앙 뒤에 금대산과 백운산 능선이 멋지다.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입구에 주식회사 지리산용유담 표지판과 그 옆에 '당나들골 전설' 안내판이 서 있다. "마적도사(馬跡道士) 전설은 마적도사가 장기 놀이에 빠져 심부름을 하던 당나귀의 죽음을 알지 못해 나귀는 죽어 바위가 되고 장기판은 부서져 다른 바위가 되었다는 유래담이다. 함양군에서는 ‘마적도사 전설탐방로’를 만들어 마적동, 마적사 터, 도사 배나무, 장기판 바위, 도사 우물, 마적대 등 마적도사의 흔적을 스토리로 한 산책로를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쉼터와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마적동의 세진대로 올라가는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입구에 '당나들골 전설' 안내판이 서 있다.
●당나들골 전설 : 마적동의 세진대에서 모전마을로 내려오는 당나들골길이 있다. 옛날 마적도사의 나귀가 마적동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던 길이다. 당나들골 중간에 화암대라는 넓고 큰 바위가 있었다. ●세진대와 마적송 : 마적동 아래에 있으며 옛날 마적사로 올라갈 때는 여기서 몸과 마음의 먼지를 털어냈다고 전해져서 세진대라 부른다. 마적도사가 장기를 두던 전설이 있으며 용유담과 나귀바위가 한눈에 보인다. 세진대 위의 마적송은 수령 400년의 소나무이다. 송전마을에 살았던 선비 강지주 등이 대를 쌓고 노닐던 곳이다. ●장독바위 전설 : 세진대 옆에 있는 바위인데 장독을 세워 놓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불어진 이름이다. 장독바위에 병든 환자가 돌을 던져서 그 위에 얹으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 마적도사의 부인이 치맛자락에 장독 뚜껑을 안고 얹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적동과 마적사 유래 : 신라 무열왕(659) 때 마적도사(馬跡道士)가 이곳으로 와 마적사를 짓고 수도한 곳에 마을이 생기면서 마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마을 앞 큰 바위 위에 말발굽 형상이 새겨져 있어 마적동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용유담의 비경으로 옛 선인들이 찾아와서 그때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마적사는 현존하지 않으나 대종교 천진전 또는 독가촌 뒤편 대나무 숲이 옛 마적사지로 추정된다. -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안내판
왼쪽에 지리산둘레길 전설탐방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송전길을 따라 펜션 앞을 통과한다.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마적도사와 관련한 용유담을 설명한다. 지리산둘레길과 마적도사 전설탐방로는 다른 길이다.
"지리산둘레길 전설탐방로 : 옛날 용유담에 아홉 마리 용과 마적도사가 살고 있었다. 마적도사가 쇠도장을 찍어 나귀에게 보내면 나귀가 생필품을 싣고 와 용유담 가에 와서 크게 울면 마적도사가 다리를 놓아 다리를 건너오게 했다. 어느 날 장기 삼매경에 빠져있던 마적도사는 용들이 싸우는 소리에 나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고 결국 나귀는 울다 지쳐 죽고 말았다. 화가 난 마적도사는 자신을 질책하여 장기판을 던져버리고, 용들을 쫓아버렸다. 그때 던진 장기판 조각들이 용유담에 있는 바위들이다. 이 길은 용유담과 세동마을을 잇는 옛길로 용유담의 전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이다." - 안내판
중앙의 골짜기를 타고 모전마을로 내려왔다. 오른쪽에 지리산둘레길 전설탐방로 안내판, 왼쪽에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출입구가 있다.
송전길을 따라 복바위쉼터 앞으로 이어간다. 왼쪽 나뭇가지들 뒤에 휴천면 문정리 견불마을이 가늠된다.
왼쪽 뒤에 법화산이 봉긋하고, 중앙의 산 중턱에 휴천면 문정리 견불마을이 자리한다.
송전길 오른쪽에 쓰러질 듯 비슴듬한 복바위가 있으며, 그 맞은편 아래에 복바위쉼터가 자리한다.
복바위 맞은편에 지리산둘레길 탐방객들이 쉬어가는 복바위쉼터가 자리한다.
송전길 오른쪽의 볼록거울 기둥에 기도도량 용천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용천암은 임천 남쪽 언덕에 자리한다. 마적도사 전설이 구비전승되고 있으니 민속 신앙이 발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휴천면 송전리 송전길에 단정한 소나무 한 그루가 멋지다. 임천 건너편 산자락에 휴천면 문정리 고정마을이 자리한다.
휴천면은 본래 함양군 남면에 포함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뒤에 함양군 휴지면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함양군 휴지면 11개 동, 엄천면 19개 동, 경상남도 산청군 서상면의 방곡동(芳谷洞)을 병합하여, 휴지면(休止面)과 엄천면(嚴川面)의 명칭에서 각각 한 글자씩 차용하여 함양군 휴천면(休川面)이 개설되었다. 후에 방곡동을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으로 편입시켜 현재 11개의 법정리와 20개의 행정리, 38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임천 북쪽은 휴천면 문정리 지역이다. 맨 왼쪽 법화산 중턱에 견불마을, 오른쪽 산자락에 고정마을이 자리한다.
문정리(文正里)는 경상남도 함양군 엄천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도정동(道正洞), 문상동(文上洞), 문하동(文下洞), 견불동(見佛洞), 백련동(白蓮洞), 고정동(高亭洞)을 병합하여 대표 마을인 ‘문상’과 ‘도정’의 이름을 따서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가 되었다. 견불동은 점불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이 처음 생길 때 땅속에서 불상이 발굴되었다 하여 견불동이라 하기도 하고 마을 남쪽으로 보이는 와불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한 견불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밑에 형성된 마을이라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고정동은 높은정이마을로 지반이 높으며 견불사 입구에 형성된 마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송전길에서 북쪽의 휴천면 문정리 견불마을과 고정마을을 살피고 남쪽을 바라보면 와불산과 노장대(함양독바위)가 가늠된다.
휴천면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되어 있으며 동부는 함양군 유림면 화장산, 산청군 금서면과 엄천강이 경계를 이룬다. 서부에는 함양군 마천면과 함양군 함양읍이 있다. 남부에는 함양군 마천면과 접한 법화산이 솟아 있고 지리산과 아름다운 엄천골 맑은 물이 흐른다. 북부에는 함양군 함양읍에 있는 삼봉산 줄기가 이어져 있다. 영남 내륙 산간지에 있고 대륙적 영향을 많이 받아 기온의 일교차가 심하며 여름철에는 덥고 겨울철에는 추운 내륙적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함양군 휴천면의 남쪽에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청정계수가 서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는 엄천강이 있으며 굽이굽이마다 기암괴석과 빼어난 절경이 펼쳐져 있다. 등산코스로 좋은 법화산[990.2m], 화장산[586m], 지리산 노장대[702m] 등의 명산이 있으며 노장대·하봉·중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곳이 있다. 주요 작물로는 식량 작물을 비롯하여 무·배추·마늘·시금치·토란·토마토 등이 생산되고 잎담배 등의 특용작물도 재배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법화산 산자락 배산임수 명당에 고정마을이 남향하여 자리한다.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는 법화산[992.9m]의 남동사면에 있다. 법화산의 남쪽 능선이 서쪽 구양리와 경계를 이룬다. 법화산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남동류하며 문정리의 남동쪽 경계부를 흐르는 임천으로 합류한다. 북쪽으로 법화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으로 임천이 북동류하며 곡류하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 나타난다. 문정리의 남동쪽 임천변을 따라 지방도 60호선인 천왕봉로가 지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휴천면 송전리 송전길 215 농가에 겨울을 나는 장작들이 싸여 있다.
휴천면 송전리 세동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송전마을 입구에 송전산촌생태마을이 자리한다.
예전에는 세동마을이라 불렸는데 지금은 송전마을이라 불리는 듯. 안내도 앞에 조경수가 자라서 안내도를 살필 수 없다.
휴천면 송전리 송전마을을 지나간다. 세동(細洞)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세동(細洞)의 지명유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세동(細洞)이라고 불리는 송전(松田)마을은 전국적으로 창호지 생산으로 유명하여 연중 행사처럼 제지공장을 운영하였다. 어디를 가나 딱밭으로 이름난 이 마을은 시대변화에 따라 펄프로 만드는 양지에 밀려 한지가 설 자리를 잃고 딱밭은 칡덩굴로 덮이고 말았다. 이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높은 당산제, 윗당산제, 아랫당산제 등 세 곳에서 지내면서 특히 윗당산제는 별도로 술 한 잔을 더 부어 올렸는데 이는 사도세자가 인재를 구하려 다니다가 이곳 세동 윗당산 정자나무 밑에 쉬어갔는데 그가 뒤주 속에 갇혀서 죽게 되자 애석하게 여겨 그를 추모하는 행사라고 한다. 그러나 6·25사변 후 소개령에 의해 마을을 떠나면서 당산제는 사라졌다. 예로부터 세동에는 평산신씨가 토박이로 살아왔다. 효자 신영언의 정려가 있다. 옛날엔 일신재(日新齋)라는 서당이 있었고 송은대, 광암대, 위암대, 심원대 등 루정대가 있다. 이 마을 뒷편에 있는 문수사는 원래 엄천사 산하에 있던 암자였다. 엄천사가 없어진 후 큰 삼존불은 밀양 표충사에서 모셔가고 다른 불상은 문수사 법당에 모시게 되었다. 6·25사변 때 문수사가 소실되고 지금은 다시 중건하여 대웅전 문수전 종각 등이 복원되었다. - 함양군청
송전마을 돌담 앞에 '지리산 자락 산촌휴양마을' 벽화가 그려져 있다.
둘레길 쉼터였는데 이제 운영을 중단한 듯. 감나무가 자라고 처마에 무청을 말리는 풍경이 정겹다. 위쪽 언덕의 마을쉼터로 올라간다.
언덕에는 마을쉼터와 운동 시설, 오른쪽 공중화장실 옆에 '국조 단군성전 지리산 마적 천진전' 표지판이 있다. 마적도사 전설탐방로는 용유교에서 출발하여 고양터, 송대마을, 마적사 터를 거쳐 송전마을 이곳에서 끝나기에 이 표지판을 세워놓은 것 같다. 마적사 터는 이곳이 아니라 모전마을에서 세진대로 올라가는 당나들골 독가촌에 있었을 것이라 한다.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에 있는 대종교 소속 교당 단군성전은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 지역에서 단군을 교조로 하여 민족 고유의 하느님을 신앙하는 대종교 교인들의 신앙 활동과 포교를 위하여 건립되었다. 1909년 단군교에서 출발하였다. 환인·환웅·단군이라는 삼신 일체를 신앙하고, 수련을 통하여 인간 본연의 참 성품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목표이다. 특히 한국 종교 가운데 창세 신화와 천궁(天宮), 지옥 등 내세관을 믿는 종교이기도 하다. 휴천면 단군성전은 1980년대 초반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운기마을에 사는 강길용이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594 일대를 매입하고 국조 단군성전인 ‘지리산 마적 천진전’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1987년 3월 15일에 완공되었다. 강길용 사후 단군성전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지리산둘레길에 있는 휴천면 단군성전 ‘지리산 마적 천진전’은 세진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2017년 7월 태풍 노루에 의하여 ‘지리산 마적 천진전’은 유실되었으며, 2018년 현재 이곳은 제당 터만 남아 있다. 휴천면 단군성전 ‘지리산 마적 천진전’에서는 매년 10월 3일 개천절 단군성조 제향을 봉행하였다. 2018년 8월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의 휴천면 단군성전인 지리산 마적 천진전은 성전이 폐쇄되고 터만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송전마을 쉼터 입구의 동강 5km 지점 송전길에 지리산둘레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임천과 법화산, 고정마을을 바라본다.
효자 신영언(申永彦)의 정려각이 송전마을 쉼터 입구 오른쪽 언덕에 있다. 세동마을은 평산신씨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송전마을 쉼터를 나와 송전길을 따라간다. 오른쪽에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안내판과 세동마을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안내판의 복잡한 해설과 달리 안내도에서는 세동마을과 마적도사 전설탐방로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세동마을 안내도 옆 바위에 암각문이 새겨져 있는데 문자가 분명하지 않다.
김달인씨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이 풍경 조망이 좋은 외암대(巍巖臺)였던 듯. 왼쪽의 법화산과 고정마을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