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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義士)란 절의(節義:절개와의리)를 지키는 자를 말함이니 여기서는 크게 나누어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또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 합병(合倂) 하였을 때 조국 광복(祖國 光復)을 위해 의병(義兵)을 일으켜 외적(外敵)과 싸운 의로운 인물(人物)이 소개 되었다. 한 정 만(韓 貞 萬)고종2년1865~1914 한말의 의병장 황해도 평산 출신 10907년 한국군 강제해산 이후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황해도 평산 도평산(桃平山)에서 4,000여명의 의병이 모여 의병 부대를 편성하고 당시 목천부사였던 박기섭(朴箕燮)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할 때 중대장이 되었다. 황해도 각지에서 여러번싸워 많은 적을 죽이자 일본군들이 법과같이 두려워하였다. 1910년 이진룡 (李鎭龍)김정안(金貞安)과 함께 예하에 500여명의 병력을 두고 20~80명의 소부대를 편성 하여 지속적으로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을 공격 하였다. 그해 2월 해주부근의헌병 분견소를 습격하고,또 순사 주재소를 불태웠다. 3월에는 이진룡과 함께80여명을 인솔하고 계정역(鷄井驛) 서쪽에서 수색나온 온정원(溫井院) 헌병 분견소의 일본군과 교전을 하였다. 이후 그들은 일본군의 연락과 보급을 끊기 위하여 경의선 선로에 큰돌을 놓아 기차를 탈선 시키고도 하였다. 1914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었다. 한 진 교(韓 鎭 敎)고종24년1887~1973 독립 운동가 호는 송계(松溪) 평안남도 중화 출신1914년 6월 중국 상해(上海)로 이주하여 해송양행(海松洋行)을 설립 경영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였으며, 홍성린(洪成麟),선우혁(鮮于 赫),과 협의하고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를 설립하였다.1918년 6월20일국내 동지들과 연락하기위하여 대구 들어가 서상일(徐相日),백남채(白南採),등을만나고 상해로 가던중 일본경찰에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귀환 하였다.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참여,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입법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청년운동도 겸행 하였다.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한 봉 근(韓 鳳 根)1986~? 독립운동가.호는 금산(錦山).경상남도 밀양 출신. 국권이 일본에게 침탈당하고 일제의 무단정치가 극악해짐에 따라 만주의 길림성(吉林省)으로 망명하여 김원봉(金元鳳)·황상규(黃尙奎)·이종암(李鍾嚴)등을 만나 독립운 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1920년 밀양 폭탄사건을 주도 하기 위하여 밀양에 왔다가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자 다시 만주로 들어가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그라고 단원의 확장에 주력하였다. 다시 폭탄사건을 주도하기 위하여 당시 중국 안동(安東)에 았던 이륭양행(怡隆洋行) 지하창고에 보관중이던 고성능폭탄 36개와 권총 5자루,학명선언서 600여매 등을 국내 로 반입하고 1진을 파견하였으나,일본경찰의 밀정으로 의열단에 잠입하여 있던 김모라 는 자의 밀고로 1진의 김시현(金始顯)·황옥(黃鈺)등이 모두 검거되었고,2진으로 계획되었던 이병희(李炳熙)와 함께 안동으로 돌아왔다. 1926년 12월 8일에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羅錫疇)를 위하여 폭탄 3개와 권총 7정,실탄 490발을 웨이하이웨이(威海衛)까지 김창숙 (金昌淑)과 함께 옮겨주었다.그뒤 국내에서의 의열단사건에 계속적으로 관계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하여 노력하였다.1980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봉공 한 용 순(參奉公 韓 容 淳)高宗 11年1874~1938 28世 공(公)의 휘(諱)는 용순(容淳)이고 자(字)는 성진(星振).초명(初名)은 종술(鍾述) 또는 종술(宗述).호(號)는 행담(杏潭)이다. 기창(基昌)의 아들이고 수신(守愼)의 손자이며 절제공 중손(節制公 仲孫)의 14대 손 이다.어머니는 경주정씨(慶州 鄭氏)로 익술(益述)의 따님이다. 공은 고종(高宗)11년(1874)5월 18일생이다.어려서부터 한문(漢文)을 익혀 1903 년 3월 순릉참봉(順陵然奉)에 서임(敍任)되었다. 1906년 4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의병 창의(義兵 倡義)에 참여하여 항일활동 (抗日活動)을 시작하였다. 공은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 노적산(井邑市 七寶面 水淸里 露積山)에서 왜적(倭賊)과 교전(交戰)하다 좌측 두퇴부에 총탄(銃彈)을 맞아 골절상(骨折傷)을 입고 불구(不具)의 몸이 되었다.공은 의병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자학(自虐)한 나머지 실성(失性)한 사람처럼 가장(假裝)하고 일제(日帝)를 저주(詛呪)하면서 일본패망(日本敗亡)을 기원(析願)하다 1938년 12월 24일 65세로 졸하였다.당시 사람들은 실성한 모습을 보고 한심란(韓心亂)이라 하였다 하는데 일본패망(日本 敗亡)을 외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배위(配位)고흥유씨(高興柳氏)는 원상(源相)의 따님이고 아들은 규남(圭楠),규동 (圭東)이다. 공의 배위(配位)고홍 유씨(高興 柳氏)는 1963년 12월 21일 졸하니 수천리 산해좌 (水川里 山亥坐)에 쌍조(雙兆)되었다. 참모공 한 상 렬(參謀公 韓 相 烈) 高宗 13年1876~1926 32世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휘(諱)는 상렬(相烈)이요 일명(一名)상열(相說)이며 자(字)는 문극(文極)이다.강원도 횡성(江原道 橫城)출신인데 고종(高宗)13년(1876)생이다. 동수(東洙)의 아들이며 영석(英錫)의 손자이고 절도사공 만손(節度使公 萬孫)의 18 대 손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締結)되고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 강제해산으로 국권(國權)이 일본에게 침탈(侵奪)되자 그해 8월에 국권을 회복(回復)할 목적으로 동지(同志)200여명을 규합한 뒤 향리인 횡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홍천 (洪川),횡성(橫城),원주(原州),지평(砥平),영월(寧越)등지에서 반일 투쟁을 전개, 일본군과 무려 500여차에 걸친 전투에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고 무기,탄약 등을 노 획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불의(不義)에 굽힐줄 모르는 성품을 타고 났으며 1908년 4월초 횡성 주둔 일본수비대가 그의 가산(家産)을 몰수(沒收)하고 처자를 납치한 뒤 협박하여 귀순을 강요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횡성읍을 습격하여 이들을 대경실색(大驚失色)케 하였다. 일제(日帝)가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를 앞두고 의병에 대하여 일대탄압을 가하므 로 국내에서의 의병활동 전개가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자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그 뒤 1920년 만주(滿洲)로 망명,대한의용부(大韓義勇府),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등 애국단체의 참모(參謨)로서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하여 활동하다 1926년 9월 19일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던 주중청년총연맹(駐中靑年總聯盟)의 공산당원의 흉탄에 51세로 순직하였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建國功勞勳章 國民章.第159號)이 추서(追敍) 되었다. 묘(墓)는 불전(不傳)이며 한상렬의사 추모비(韓相烈義士追慕碑)를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橫城郡 隅川面 文岩里)에 세웠다. 아들은 공의 동생 상규(相圭)의 아들 정희(正熙)로 계자(系子)를 삼았다. 참모공 한상렬의사 추모비(參課公 韓相烈義士 追慕碑)는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박한설(江原大學校 敎授 文學博士 朴漢卨)찬(撰)으로 1993년 6월 24일 세웠다. 배위(配位)밀양 박씨(密陽 朴氏)는 성훈(聖勳)의 따님인데 묘(墓)는 하궁리(下弓里) 울둔노루골 계좌(癸坐)에 있다. 배위(配位)밀양 박씨(密陽 朴氏)는 왜경(倭警)에 붙잡혀 수년간옥고(獄苦)를 치루다 탈옥 (脫獄)하여 해방(解放,1945.8.15)될 때까지 은거생활(隱居生活)을하다졸하였다. 지사 한 태 석(志士 韓 泰 錫)고종 17년1880 ~ ?) 공은 왜정 때 독립운동가.자는 학초(學初),여진공 성교(汝鎭公:省敎)의 아들로 감사공 배주(監司公:配周)의 7대손이고 충정공 응인(忠靖公:應寅)의 11대손이며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신호(薪鎬)의 따님이다. 충청남도 청양 출생으로 향리에서 서당교육을 받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충격을 받고 홍성의 민종식(閔宗植)의병대에 합류하여 항일투쟁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그뒤 독자적으로 충청남도 홍산(鴻山)지치(支峙)마을에서 청년 수십명 을 모아 기병(起兵)하여 이웃인 구병(九兵)·문장(文章)·서천(舒ll|)등지와 홍주성 교전시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06년 5월에는 서산·해미·예산·대천·광천 등 지에서 청년을 모아 의병대에 합류시켰다.그러나 왜병에 발각되어 붙잡힐 뻔하였으나 동지들과 함께 변장하여 탈출하므로써 위기를 모면하였다.1916년 비밀결사광복회를 조직할 때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으며 1920년 사이토 총독과 정무총감(政務總監)등을 저격,사살하기 위하여 동지 10여명과 함께 계획을 치밀히 짯으나 무기를 전달하기 위하여 귀국한 임시정부요원 한우석 (韓禹錫:공의동생임)이 붙잡힘에 따라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1929 년 충청남도 대덕군 기성면의 부호 정순학(鄭淳學)에게 군자금을 요청,그로부터 200원을 받아 가지 고 나오다가 잠복중이던 일본 형사 에게 붙잡혀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배위는 동래 정씨(東來 鄭氏)니 진사 익모(翼模)의 따님이다.슬하 에 아들 인수(寅洙)하나뿐이다. 송헌공 한 백 봉(松軒公 韓 百 鳳)고종(高宗)18년(1881~1950) 29世 공(公)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휘(諱)는 백봉(百鳳)이요 자(字)는 성의(聖儀),호(號)는 송헌(松軒)이다.영회(榮會)의 셋째 아들이고 필호(弼浩)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5대 손이다. 어머니는 김해 김씨(金海 金氏)로 형식(亨植)의 따님이다. 공(公)은 고종(高宗)18년(1881)8월 28일 광주군 돌마면 율리(廣州那 突馬面 票里:現 城南市 益唐區 票洞)에서 태어나 서진사 문하(徐進士 門下)에서 수학(受學)하고 경술국치(廣戌國恥)를 울분(鬱憤)으로 지내던 중 을미년(乙未年)(1919)3월 고종황제 (高宗皇帝)인산시(因山時)상경(上京)하여 손병희(孫秉熙),한용운(韓龍雲)등의 삼일 독립선언취지(三一獨立宣言趣旨)에 적극(積極)찬동(贊同)하여 독립만세(獨立萬歲)시위(示威)에 참가(參加)하고 독립선언(獨立宣言)대표(代表)인 청암(淸菴)권병덕(權秉悳)과 오화영(吳華英)선생(先生)을 만나고 고향(故鄕)에 돌아와 3월 27일 분당리(益庸里)장날을 이용(利用)하여 율리(票里)동민(洞民)50여명을 모아 뒷동산에 올라가 만세(萬歲)를 부르고 봉화(峰火)를 올려 돌마(突馬)낙생(樂生)오포면(五浦面)주민들 을 분당리(益庸里)장터에 모이게 하고 태극기(太極旗)를 앞세우고 1000여명이 다음날 저녁까지 돌마(突馬),낙생(樂生),대왕(大旺)을 오가며 시위(示威)를 하다가 일본(日本)헌병대(憲兵隊)에 붙잡혀 남한산성(南漢山城)파견대(派遺隊)수원(水原)재판소(裁判所)를 거쳐 서대문(西大門)감옥(監獄)에 투옥(投獄)되어 1년여의 옥고(獄苦)를 치루었으며 공(公)은 법정(法廷)에서‘우리가 조선인(朝蘇人)으로서 정의(正義)와 인도(人 道)에 기인(起因)하여 조선(朝鮮)의 자주독립(自主獨立)을 주장(主張)함은 죄(罪)가 아니다.’라고 강변(强辯)하였다. 공(公)은 출옥(出獄)후에도 동지(同志)들을 규합(糾合)하여 1927년 신간회(新幹會) 광주(廣州)지회(支會)를 결성(結成)하여 농민운동(農民運動)을 독려(督勵)하고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에 앞장서서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워주었다.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진력(盡力)을 하는 가운데 몇 년간 전국(全國)을 누비며 일가 (一家)들을 찾아 다니며 설파(說破)하고 일본(日本)수사기관(搜査機關)의 눈을 피(避) 하기 위해 문정공(文靖公)재실(再室)건립(建立)을 위한 수단(收單)을 하여 정성(精誠)어린 성금(誠金)으로 문정공(文靖公) 재실(齋室)을 1939년 준공(竣工)하고 그 이름을 영모재(永慕齊)라고 하였다.이때 에 공(公)의 노력(努力)은 눈물겨운 지극 정성(至極精誠)의 극치였다. 갖은 고난(苦難)끝에 해방(解放)을 맞고 1950년 한국동란(韓國動亂)중인 9월 8일 70세로 졸(卒)하였다. 1990년 8월 15일 정부(政府)에서는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로 지정(指定)하고 건국훈장(建國勳章)애족장(愛族章:제 177호)을 추서(追敍)하였다. 아들은 인택(仁澤)이다. 공(公)과 배위(配位)평택 임씨 부도사 회순(平澤 林氏:父都事 會淳)의 합조묘(合兆墓)이다 배위(配位)는 1982년 4월 14일 96세로 졸(卒)하였다. 의사 한 준 석(義士 韓 駿 錫)高宗 19年(1882)공(公)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휘(諱)는 준석(駿錫)이고 자(字)는 행림(否林)이며 호(號)는 태방(太方)이다. 의사 해용(醫師 海用)의 아들이고 태인공 대기(太仁公 大起)의 손자이며 예빈윤공 연 (禮實尹公 連)의 후손이다.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세윤(世允)의 따님이다. 공은 고종(高宗)19년(1882)10월 4일 생으로 함경남도 함주군 선덕면 서당(咸鏡南道 咸州郡 宣德面 書堂)에서 문하생(門下生)50여명에게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과 한문학(漢文學)과 의학(醫學)을 가르치던 중 경성(京城)에서 삼일만세운동(三一萬世 運動)을 일으켜 전국으로 확산(擴散)될 때 이 운동의 지시(指示)를 받고 문하생(門下生)50여명을 인솔하여 선덕면 경찰관 주재소(宣德面 警察官 駐在所)를 습격(襲擊)후 기물(器物)을 파괴(破壞)하고 경찰관을 무장해제(武將解除)시키고 이곳을 떠나가겠다는 항복(降服)을 받았으니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면민(面民)과 같이 독립만세(獨立萬歲) 를 부르게 되었다.그러나 다음날 함흥시 본서 경찰관 형사(咸興市 本暑 警察官 形事)30여명이 션덕면 서당(善德面 書堂)을 포위하고 훈장(訓長)인 공(公)과 서당학생 10여명을 체포하여 주재소(駐在所)에 가두어 놓고 갖은 고문(拷問)을 계속하다 학생들은 3일 후 석방하고 공 (公)은 계속 유치하다 3개월 후 석방하니 이는 민중(民衆)의 동요(動搖)가 심하고 경찰서가 좁아서 유치할 장소가 없어서였다고 한다. 석방된 후에 계속 주재소(駐在所)에 호출되어 문초(問招)하며 서당(書堂)을 없애게 하였다.공(公)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정평군 귀림면 하동리(定平郡 歸林面 河東里)에 이도(移徒)하여 다시 서당을 짓고 선덕면 서당(宣德面 書堂)때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 였다.그러나 약 5년이 지난 후 또 발각되어 이 땅을 피하여 함주군 선덕면 구납리(咸州郡 宣德面 九南里)에 이도(移徒)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잊지 않았다. 배위(配位)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용훈(用壎)의 따님이다. 아들은 영국(永國,系龜錫后),의학박사 영빈(醫學博士 永彬),덕유 영현(德惟 永賢) 이다. 한 양 리(韓 良 履)1883고종 20年~1946 한말의 의병.자는 여경(女敬),호는 석초(石樵).경상북도 문경 출신. 1906년부터 1908년에 걸쳐 이강년(李康秊)의 의병부대에서 종사관(從事官)으로 의 병소집활동을 하였으며,원주·단양·제천·갈평·안동·내성·재산,경기도 관악산 등 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바 있다. 또한,1908년 6월 청풍작산전투(淸風鵲山戰鬪)에서 의병이 패하고 대장인 이강년이 순국함에 따라 의병진이 분산되자 1909년 1월 이토:이등박문(伊藤博文)를 도륙(屠戮)하고자 이 강년의 장남인 승재(承宰)와 함께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에 이기하(李起夏)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성에 잠입해서 거사를 진행하던 중 비밀이 폭로되어 피신하다가 예천군 용궁(龍宮)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1919년 동지 이응수(李應洙)·서상업(徐相業)·김찬규(金燦奎)등과 거사를 모의하고 이듬해 4월에 의용단(義勇團)을 조직,길림군정서(吉林軍政暑)및 흥업단(興業團)과 제휴하였다. 군정서로부터 군자금모집·사서(事書)·권총·폭탄·암호문·독립신문 등의 지원을 받고 의용단 경상북도 간사에 임명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그뒤 1922년 11월18일 이응수·이대기(李大基)등과 함께 비밀사무실(대구 계림여관)에서 연락 서신을 작성하던 중,50여명의 동지와 함께 붙잡혔다. 1940년 이후에는 예천군 유천면에서 학숙(學塾)을 열어 문인(門人)을 모아 배일사상 을 고취하고,또한《운강문집 雲崗文集》의 정리 및《윤강선생창의일록 雲崗先生倡義日錄》을 위한 자료정리에 전력을 기울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한 흥 근(韓 興 根)1886고종23年~1948 독립운동가.호는 백암(白巖).함경남도 원산 출신,응구(應球)의 아들이다.어려서 향리에서 사서삼경을 수학하다가 근대화에 관심을 가지고 원산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졸업한 뒤 측량학교(測量學校)를 다시 이수하였으며,20세 때 원산 홍도학교(弘道學校)의 교사로 들어가 제2세 교육에 전심전력 하였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독립 운동에 뜻을 두고 이동휘(李東輝)를 만나 그 들의 권유로 만주로 망명하였다.다시 러시아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활동하다 신한촌(新韓村)으로 들어가 거기서 한국인 거류민단장 채성하(蔡成夏)와 제휴하고 동지를 규합한 뒤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보다 효율적인 독립사업을 위해서는 국내의 애국지사와 손을 잡아야 함을 깊이 인식 하고,장사꾼으로 가장,고향인 원산에 돌아와 함경·강원·평안·황해도 등 여러 곳을 내왕하며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조병철(趙炳喆)·김장석(金章錫)·안돈우(安敦雨)·최자남(崔子男)·문무술(文武術)·김상익(金相翊)등과 함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사살·공금탈취 등의 강력 한 무력투쟁을 논의하였다. 이때 거사용 폭탄 입수를 책임지기로 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성능이 강력한 폭탄을 입수,국내로 가지고 왔다.이것을 안돈우가 원산 광석동(廣石洞)야산에 묻어두고 가끔 장소를 옮겨다니면서 거사 장소와 그 대상을 물색하였다. 1919년 7월 하순 강우규(姜宇奎)의 방문을 받고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에 가입하였 으며,이때‘신임 조선총독 사이토(濟藤實)를 폭살할 계획 이라는 강우규의 거사 소식 을 듣고 동지 최자남의 가택에 그를 안내,유숙하게 하였다. 같은해 9월 2일 강우규가 서울역에서 사이토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로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해외로 망명,북만주와 러시아 일대를 전전하다가 항일유격대를 조직,일본헌병대·주재소 등을 습격,큰 타격을 입혔다. 마침내 국내에 산재한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를 단행하고자 갑산으로 잠입,국내로 깊 숙이 들어오려고 하였으나 밀고로 붙잡힐 찰나에 피신하였다.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다시 북만주 하얼빈 등지로 다니면서 투쟁을 모색하던 중 가족이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그곳에 갔다가 헌병대원에게 붙잡혀 원산으로 압송되었다. 여기에서 3년간 옥고를 겪다가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8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서대 문 감옥과 함홍 감옥에 복역하다가 1925년 8월에 출옥하였다. 1945년 8월 23일 원산에 소련군이 진주함과 동시에 소련군사령관으로부터 면담과 함께 협력하라는 압박을 받다가 1947년 4월 월남하여 서울에서 원산시민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의병장 한 봉 수(義兵將 韓 鳳 洙)高宗 21年1884~l972 31世 공(公)은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이다. 휘(諱)는 봉수(鳳洙)요 일명(鳳瑞),봉용(鳳用),봉룡(鳳龍·義兵活動을 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다.)이며 고종(高宗)21년(1884)4월 18일 청주군 북일면 서교(淸州郡 北 一面 細橋)에서 태어났다.소년시절(少年時節)부터 의(義)를 잊지 않았다.왜병(倭兵)의 압력(壓力)으로 한국군대(韓國軍隊)가 강제해산(强制解散)된 1907년 의병장 김규환(義兵將 金圭煥)을 만나 감화(感化)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의병(義兵)에 가담하게 되었다.청주 세교장(淸州 細橋場)에서 기의(起義)하여 4년 6개월 동안 33전(戰)1패(敗)의 전과(戰果)를 거둔 유격전(遊擊戰)의 명수(名手)였는데 17세부터 명포수(名砲)로 이름이 났다. 1907년 의병(義兵)10여명이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진천군 문백면(鎭川郡 文白面) 에서 일본군 헌병중위 시마자가(憲兵中尉 島崎善治)등 3명을 사살(射殺)하고 말도 폐사 (斃死:쓰러져 죽음)시켰다.그리고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약 3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미원(米院),진천,괴산,횡성,장호원 등으로 출동(出動)하여 혁 혁(赫赫)한 전과(戰果)를 올렸다. 그뒤(1909)상해(上海)로 건너가 의병활동(義兵活動)을 하려고 서울 선교사(宣敎師) 집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서울역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교수형(絞首形)을 선고(宣告)받았으나 일제(日帝)의 소위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출옥(出獄)되었다. 그후 3.1운동 때에는 청주(淸州)에서 시위(示威)하다 2년 6개월의 영어생활(囹圄生活)을 겪었다.해방후(解放後)삼일절(三一節)에 건국공로훈장단장(建國功勞勳章單章) 을 받았으며 1972년 12월 25일 89세로 졸하였다. 왜놈이 문백면(文白面)에 헌병중위 시마자가(憲兵中尉 島崎善治)가 죽은 자리에 시마자기비(島崎碑)를 세웠던자리. 죽은 말을 바위백이에 묻었 기 바위백이 말무덤이라고 전 하는곳. 이제 이 자리에 공의 위훈 (偉勳)을 추모(追慕)하고자 충청북도 정종택 도지사(忠淸 北道 鄭宗澤 道知事),한성동 진천군수(韓成東 鎭川郡守) 문백면민(文白面民)일동의 정성(精誠)으로 1977년 6월 죽산인후 안형렬 찬(竹山人後 安亨烈 撰)과 상산인후 임상훈 서(常山人後 林相熹 書)로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성암천 (鎭川郡 文白面 玉城里 聖岩川)옆에 의거비(義擧碑)를 세웠다. 한 흥 교(韓 興 敎) 고종22年1885~1967 독립운동가.일명 진산(震山)·헌산(憲山), 부산 출생. 1991년 10월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혁명군 구호의장(救護議長)으로 쑤저우(蘇州)·전장 (鎭江)등 전선에 나가 참전하였다. 1912년 북벌혁명군 홍십자회 대장(北伐草命軍 紅十字會 隊長)에 임명되었으며 항저우 (抗州)및 북경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의료활동 을 하였다. 같은 해 상해(上海)로 가서 신규식(申圭植)·조성환(曹成煥)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와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독립운동가의 의료를 전담하였다.1913년 10월 육군 군의정(軍醫正:소령)으로 멸하(熱河)형수(衝戌)병원장에 취임하 였다.1919년 북경(北京)에서 중외통신사,전광신보사(展光新報社)를 창립하고 만주·노령·미주·중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고,1926년 북경에서 원세훈 (元世勳)·송호(宋虎)등과 함께 선두자사(先頭者社)를 조직,기관지《앞잡이》를 발행 하는 등 한중연합으로〈타도일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35년 북경·텐진(天律)등 중국내 각지를 순방하다가 산시성(山市省)타이위안(太原)에서 대동병원(大同病院)을 개업하여 한중연합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한 봉 인(韓 鳳 仁)1898~1968 독립운동가.경상남도 밀양 출생. 1919년 만주 길림성(吉林省)길림(吉林)에서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成宇)·서상락(徐相洛)·한봉근(韓鳳根)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독립운동을 위하여 무력으로 투쟁할 것을 모의하고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선발대로 국내에 들어왔다.그리하여 대구부(大邱府)관내 칠곡군 지천면 신동에 있는 이명근(李命根)에게 수천 원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20년 12월 27일 군자금 모집활동에 주력하던 중 김원석(金元錫)·최경학(崔敬鶴) 등과 모의하여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에 가담하였다. 1925년 의열단 군자금모집의 밀양지방 지구책(地區責)으로 활동하면서 김재수(金在洙)·양건호(梁建浩)·이병태(李內泰)등과 협조하여 이종암(李鍾嚴)의 폭탄반입에 관 련되어 붙잡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의사 한 순 회(義士 韓 順 會)高宗 22年1885 ~1961 28世 공(公)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생부(生父)는 진협(鎭協)이고 휘(諱)는 순회(順會)이며 호(號)는 제암(霽菴)이다. 영우(永佑)의 아들이고 일용(一鏞)의 손자이며 문정공계희(文靖公 繼禧)의 14대손이다.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로 방(防)의 따님이다. 공(公)은 고종(高宗)22년(1885)12월 14 일 평택군 포승면 석정리(平澤郡 浦升面 石井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족숙(族寂)인 영창(永彰)에게서 수학(受學)하고 한학칠서(漢學七書:漢文學의 三經과 四書 즉 周易,書經,詩經,論語, 盟子,中庸,大學)에 통달(通達)하였으나 경술망국(廣戌亡國)과 3.1만세운동(獨立運動)을 체험하면서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전력(全力)하였다. 1919년 3.1만세 운동은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京畿道 廣州那 突馬面)에서도 대규모로 전개되었는데 당시 천도교 광주교구장(天道敎 廣州敎區長)인 공(公)은 이천(利川),여주(驪州),원주(原州),음성(陰城)등지에 연락책임을 맡고 크게 활약하였다.때때로 서 울을 왕래하면서 운동자금을 모금하여 독립운동에 긴요하게 쓰게 하였다.3.1운동 후에는 1927년에 신간회(新幹會)의 조직과 활동에 참여 광주지회(廣州支會)를 조직하고 지회장(支會長)이 되었다. 1936년 8월 14일 천도교 대도주(天道主)박인호(朴寅浩)의 아침,저녁 식고(食告) 에 따라 일본(日本)의 멸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特別祈禱)를 실시하라는 지시를 받고 전국교도(全國敎徒)에게 시행케하였다. 이 후 1938년 소위 무인년 왜멸기도(戊寅年倭滅祈禱)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1961년 1월 27일 천도교 교회장(天道敎 敎會葬)으로 선영(先瑩)에 안장(安葬)될 때까지 일평생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憲身)하였다.1993년 공훈(功勳)을 기려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이 추서(追敍)되었다. 배위(配位)파평 윤씨(城平 尹氏)는 영석(永奭)의 따님이고 아들은 백건(百健),백조 (百祖)이다. 묘: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 6번지 한 필 호(韓 弼 昊) 고종23年 1886~1991 애국계몽운동가·독립운동가. 황해도 신천 출신,1906년 황해도 안악에서 김홍량(金鴻亮)·최용권(崔龍權)·김효영(金孝英)등과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황해도지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양산학교를 양산중학교로 발전시키고,안악군 명학회의 사범강습소에서 교편을 잡고 교육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1910년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이 발생하여 황해도 신민회 회원 160여명이 검거펼 때,일본경찰에 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한 징(韓 澄) 고종 24年1887~1944 한글학자·독립운동가.호는 효창(曉蒼), 서울 출신,1922년부터 시대일보(時代日報), 중외일보(中外日報)·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 日報)의 기자로 근무하여 민족언론 창달에 노력하였고,1923년에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하였다. 1930년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에 항의하여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였으며,이윤재(李允宰)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로 하고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이 되었다. 사전을 편찬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사업이 한글의 맞춤법통일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그리하여 1933년 10월〈한글맞춤법〉을 제정,공포하고 곧이어 표준 어제정에 들어갔다. 이 때 조선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이 되어 사정심사에 참여하였고,16명의 수정위원 또는 제안설명위원이 되어 표준어 제정에 노력하였다. 그 뒤 사전편찬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잡혀 홍원경찰서에서 일본경찰의 악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다가 1944년 2월 이윤재와 같이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한 성 수(韓 聖 洙)1920~1945 광복군.일명 이상일(李相一)·한성수(韓成洙).평안북도 용천 출신. 1944년 3월 학도병으로 일본군 병영을 탈출하여 중국 푸양에 주둔한 광복군에 입대한 열혈청년으로서 제3지대의 발전을 위해서 자진 푸양에 잔류한 기간 간부의 한 사람이다.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한광반(韓光班)에서 군사훈련을 받고,같은 해 11월 지대장 김학규(金學奎)의 특명으로 적 점령지역 내의 초모 및 첩보공작 임무를 띠고 홍순명(洪淳明)·김영진(金永鎭)·김진동(金鎭東)등을 인솔하고 일본군의 최고사령부 가 있는 상해(上海)로 침투하였다. 1945년 3월 13일 대담한 공작방법으로 한교(韓橋)청년들과 접촉을 전개하면서 거점 확보 및 초모공작을 중점으로 하여 임무를 수행하던 중 상해에서 밀고자에 의하여 일본군 특무기관원의 습격을 받고 총격전 끝에 7명이 붙잡혔다. 1945년 5월 13일 난징(南京)형무소에서 25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한 계 석(韓 桂 錫)1888 고종25년~1939 한말의 의병.호는 낙촌(落村).전라북도 임실 출신.명교(明敎)의 아들이다. 1906년 일본의 한국침략에 항거하여 민종식(閔宗植)의 의병대에 들어가 홍주전투에 참가하였다.홍주성이 왜병에게 함락되자 낙오병이 되어 고향으로 피하였다. 1907년 이석용(李錫庸)이 임실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합세하여 임실·장수·순창· 진안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1월에는 동지 양인숙(梁仁淑)·최명칠(崔明七)등과 함께 임실 갈담(葛潭)에 있는 일본의 헌병병참소를 기습,소각하였다.각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1909년 9월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소위 호남대토벌작 전으로 의병활동이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09년 11월 고향에 잠시 돌아왔다가 친일파의 밀고로 붙잡혀,광주 지방재판소 전주지부로 넘어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감형되어 1913년 출옥하였다.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한 봉 석(韓 鳳 錫)1893고종30年~1942 독립운동가,경기도 김포 출신. 1919년 조선총독부의 토목기사로 근무하고 있던 중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그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 군자금 모금의 사명을 띠고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송촌공 한 훈(松村公 韓 焄)고종 27年1890 ~1950 왜정 때 독립운동가,본명은 우석(禹錫). 자는 훈(焄),호는 송촌(松村)충청남도 청양 출생,여진공 성교(汝鎭公:省敎)의 아들로 독립 운동가 학초공 태석(學初公:泰錫)의 동생인데 재 당숙인 양여공(良汝公:互敎)에게 계후입양 되었고 감사공(監司公:配周)의 7대손이며 충정공 응인(忠靖公:應寅)의 11대손이다. 1906년 홍주(洪州)에서 민종식(閔宗植)이 항일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소모장(昭幕將:불러서 모으는 장수)으로 홍주성 공격 작전에 참전하여 홍주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 였으며 각지에서 의병을 소모하여 1,000여명의 대부대로 편성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홍주성을 상실하고 왜군의 체포 망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귀국하여 임병찬(林炳瓚)과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13년에는 채기중(蔡基中)·유장열(柳璋烈)·김상옥(金相玉)등과 함께 비밀항일결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활동하였다. 1915년 박상진(朴尙鎭)·유재룡(柳在龍)등과 합류하여 광복단을 광복회로 개편,강화하고 군대식 조직으로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고 친일파 숙청활동을 하던 중 조직이 발각되자 재차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로 가서 정부요인과 협의하에 권총· 폭탄 등 무기를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0년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항일결사인 암살단(暗殺團)과 합류하여 김상옥·김동순(金東淳)등과 함께 당시 미국 국회의원이 국내에 오는 것을 계기로 일본 총독을 암살 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 열의를 세계에 알리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상옥에게 무기를 전달하고자 가던 도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8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 의병에 가입하였던 사실이 탄로나 형이 가형되어 19년 6개월간을 복역하였다. 그러나 6.25사변 때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학살당하였다.1968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고 동작동 국립묘지 순국선열묘 제87호에 안장 되었다. 배위는 두분인데 초배는 함양 박씨(威陽 朴氏)니 동준(東俊)의 따님이고 계배는 전주 유씨(全州 柳氏)니 의식(義植)의 따님이다.슬하에 1남 1녀를 생하니 아들은 대수(大洙)이다. 한 흥(韓 興)1888고종 25年~1959 독립운동가.일명 일선(日仙)·준형(俊炯) 함경남도 신흥 출생.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한 뒤 1912년 4월 간도(間島)로 망명,화룡현(和龍縣)동명학교(東明學校)강사로 지내면서 한 국교표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3년 3월 연해주(沿海州)의 해삼위 (海參威)권업신문사(勸業新聞社)통신원으로 활약하였다.1920년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서기로 선임되어 활동하였고,같은 해 군자금 조달차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가 평양에서 붙잡혀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3월 신간회(新幹會)상무간사로 활약하다가 다시 북경(北京)으로 망명,선두 자사(先頭者社)에 가입,원세훈(元世勳)등과 함께 활약하였으며〈중국국민의 구국구족 (救國救族)운동에 당하여 우리 2천만 형제자매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포하고 항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9년 8월 함흥 중앙학원(咸興 中央學園)및 유치원을 설립,경영하였고,1931년 2월 경성 여자상업학교(京城 女子商業學校)를 설립,부교장에 취임하여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편,1938년 4월 함흥 대흥상업학원(咸興 大興商業學院)을 창립하여 경영하였고, 1942년 6월에는 함흥 대동학원(咸興 大東學院)의 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다음 해에는 숙명여자실업학원(淑明女子實業學院)의 원장에 취임하는 등 1945년까지 주로 2세 교육 에 힘을 기울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몽당공 한 흥 리(夢堂公 韓 興 履)1897~1979 공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다. 아명(兒名)은 정봉(丁鳳),자는 항길(恒吉),호는 몽당(夢堂)이다. 경극공 용익(敬極公:用翼)의 장남이요 주원공(周元公:積格)의 손자이며 장도공 치의(章悼公 :致義)의 14대손이고 어머니는 연일 정씨(延日 鄭氏)이니 운회(雲會)의 따님이다. 공은 소년시절부터 일본 헌병의 행포(行暴:난폭한 행위)와 일본인 학생들이 우리나라 여학생 및 부녀자들에 대한 만행(蠻行:야만적인 행동)을 보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 (敵愾心:의분을 느껴 적과 싸우고자 하는 성낸 마음)이 점점 강해졌다.그리하여 1919년 22살 때 탑골공원에서 거사한 기미독립선언식(己未獨立宣言式)에 참가하였으며 이어 시흥역 안양역 군포역 등지에서 선언문을 배부하고 이를 대중 앞에서 낭독하여 만세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3월 5일 학생만세운동에 자기 반 학생을 인솔하여 서울역에 집결해 시가행진을 하다 가 연행되어 1921년 2월까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당하였다. 출감후 4월에 교원양성소에 입학하였고 1923년에 경성 법정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보인학교(輔仁學校:현 보인상고)교원으로 임명되어 1929년까지 근무하였다. 그뒤 경성 매일신문사 기자와 조선연초회사 직원 등으로 근무하였다. 해방 후 영구적(永久的)인 자주독립(自主獨立)을 위해서는 인재양성(人材養成)과 자립경제(自立經濟)가 절대적(絶對的)이라 생각하고 1947년 공민학교,1958년 공업중학교,1961년 공업고등학교 등을 설렵하고 1978년에 학교법인 한길학원(韓吉學院)을 설립하여 부천전문대학을 개교한 후 많은 인재(人材)를 배출하여 우리나라 공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공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1948.8.15 정부수립기념식에서 효자와 선행자 표창을 받았고 부천시 종친회 초대회장으로 종사에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1979년 향년 83에 작고하니 독립투사요 교육자이며 부천시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 있어 부천시민장(富川市民葬)으로 안장(安葬)하였다. 1997년 8월 15일에 중국 산동성 위해대학과 유가재씨가 중국 백설옥(白雪玉=雪花 白.매쉬에위)으로 제작한 220센치 크기 몽당공의 입상(立橡)을 기증하다. 배위는 세분이다.초배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인데 익수(益壽)의 따님으로 아들 영 교(英敎)가 있고 계배는 평양 조씨(平壞 趙氏)이니 종현(宗顯)의 따님으로 아들 창교 (昌敎)가 있으며 삼배는 부안 임씨(扶安 林氏)이니 종편(鍾편)의 따님이다.슬하에 5남을 생육(生育)하니 장남 방교(方敎)는 부천전문대학장이고 차남 화교(化敎)는 소사공고 교장으로 국민훈장을 받았으며 삼남 세교(世敎)는 중등학교사로서 국민 훈장을 받았고 사남 인교(仁敎)와 오남 원교(元敎)는 미국으로 이민갔다.묘:시흥시 매화동 산26번지 월봉공 한 기 악(月峰公 韓 基 岳)1897~1941 31世 공(公)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휘(諱)는 기악(基岳)이고 자(字)는 명오(明五),호(號)는 월봉(月峰)이다. 교리공 정우(校理公 正愚)의 아틀이고 정자공 석동(正字公:晳東)의 손자이며 구암 백겸(久華 百兼)의 十二代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繼禧)의 17대손이다. 어머니는 한양 조씨(漢陽趙氏)로 판서 종필(判書 鍾弼.趙光祖后)의 따님이다. 1897년 12월 22일 생으로 강원도 원주 출신.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뒤 이승복(李昇輹)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립.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며,곧 법무부 위원에 선임되어 입법활동에 참여하였다.그 뒤 귀국하여 중앙학교에 근무하다가《 동아일보》창간에 동인으로 가담하였다. 한편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한국청년운동 을 위하여 핵심기구를 설치,운영하도록 그 기초를 닦아두었다.또한,조선노동공제회 를 조직하고 기관지로《공제 共濟》를 발간하면서 한국청년의 진로 등을 제시하였다. 1924년 7월 동아일보사의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직을 맡아 펼봉으로 항일운동을 격려, 고무하여 일제의 탄압일변도적인 만행을 규탄,성토하였으며,동시에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5년 시대일보(時代日報)편집국장을 지냈으며,이해에 월간《개벽》잡지가 항 일민족기사로 인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자 언론 동지인 송진우(宋鎭禹)·민태원(閔泰瑗)과 같이 사이토(歸藤實)총독을 찾아가 항변,해금시키는 데 성공 하였다.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의 발기인으로 참가,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 1928년부터 4년간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팔봉으로 민족계몽 운동과 항일투쟁을 하였으며,1935년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인재교육에 헌신하면 서 이 학원의 감사로도 재직한 바 있다.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41년에 졸하였다. 배위(配位)는 의령 남씨(宜寧 南氏)로 주사 만희(主事 晩熙)의 따님이며 아들은 대학 원장 만춘(大學院長 萬春).일조각 사장 만년(一潮閣社長 萬年),서울대 병원장 만청 (서울大病院長 萬靑)이다.月峰公(諱 基岳)과 配 宜寧 南氏 合兆 位置:경기도 남양주시 화도면 묵계리月峰公(諱 基岳)事蹟碑 位置: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한 상 호(鐵醒:1899~1921) 독립운동가.함경북도 경성 출신.일찍이 간도에서 성장하여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졸업한 뒤 와룡소학교(臥龍小學校)교원으로 봉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간도에서 윤준희(尹俊熙)·임국정(林國禎)·최이붕(崔以鵬)등과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하여 항일독립 운동에 힘썼다. 그뒤 북로군정서(北路軍政暑)의 특파원이 되어 간도 와룡동에서 군자금모금 활동 중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수시로 거액의 현금이 용정(龍井)으로 송금된다는 정보를 입수,특파대장 윤준희와 특파원 임국정·최이붕 등과 이를 탈취하여 독립군양성과 무기구입자 금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1월 2일 동지이며 이 은행 용정출장소 직원인 전홍섭(全弘燮)으로부터 이달 4,5일경 현금 15만원이 용정으로 송금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박세웅(朴世雄)·김준(金俊)을 새로이 포섭하였다. 1월 4일 6명의 대원을 2개조로 나누어 화룡현(和龍縣)동양리(東陽里)에 매복하여, 현금을 싣고 다가오던 호송순사 구니토모(國友嘉相次)와 진길풍(陳吉豊)을 사살하고 현 금을 탈취하였다. 1월 10일 돈을 분산 소지한 뒤,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도착하 여 탈취한 자금으로 당시 그곳에 출병하였던 체코슬로바키아군대로부터 최신식무기를 구입하여 북로군정서에 제공하였다. 1920년 12월 밀정인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윤준희·임국정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혔고,최이붕 만이 탈주에 성공하였다. 1921년 국내로 압송되어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1921년 4월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사형이 확정되어,8월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윤준희·임국정과 함께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한 운 용(韓 雲 用)고종32年1895~1921 독립운동가.함경남도 정평 출생.일평 운룡(雲龍)·자룡(子龍).중국 절강성 항주 (浙江省 抗州)에서 체육학교를 졸업하였다. 19I9년 3·1운동 후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결사대를 조직,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이듬해 일본군이 대거 만주로 출병하여 독립군소탕작전을 전개하자 대부분의 만주지 역 독립군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통합,연해주로 이동하였다. 1921년 1월 이동휘(李東輝)의 지시에 따라 만주에서 이동해온 독립군조직과 연해주 에 있던 일부 독립군조직이 통합하여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를 구성하게 되자 이용(李龍)·채영(蔡英)등과 함께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 자유시 참변을 겪고 연해주로 탈출하여,한국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의 조직에 제3중대장으로 참여하였다.11월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계(白系)러시 아군의 공격을 받아 이만전투에서 제1소대 전원과 함께 전사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열사 한 정 도(烈士 韓 正 道)光武 4年1900~1920 36世 공(公)은 독립군 열사(獨立軍 烈士)이다. 휘(諱)는 정도(正道)이고 초명(初名)은 정문(正文)이다.치복(致福)의 셋째 아들이고 진기(普器)의 손자이며 충성공 명회(忠成公 明澮)의 22대손이다. 공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미륙동(平安北道 新義州市彌勒洞)에서 광무(光武)4년 (1900)8월 10일에 태어났다.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양시(平安北道 龍川那 楊下面 楊市)에서 1919년 3월 1일 12시경 3·1 독립운동(獨立運動)에 군중시위(群衆示威)의 선두(先頭)에서 평소 은밀 (隱密)히 보관하고 있던 태극기(太極旗)를 흔들며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시위(高唱 示威)하다 양시왜경(楊市倭警)에게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新義州 形務所)에서 약 3개 월간 투옥(投沃).혹독(酷毒)한 고문(拷問)으로 불구(不具)의 몸이 되어 석방(釋放)되었다. 그 후 동년(1919)10월 5일 남만주(南滿洲)로 망명(亡命)오직 일펀단심(一片丹心) 조국독립운동(祖國獨立運動)을 위해 남만주 요녕성 서로군정서 의용군(南滿洲遼寧省 西路軍政暑 義勇軍)에 편입(編入)되어 투쟁하다 백두산(白頭山)서방 약 100km 지점 (長春南方 約 110km지점)산수림중(山樹林中)에서 1921년 6월초 일본군인 산본헌병 (日本軍人 山本憲兵)등을 공등 6인이 사살(射殺)하는 쾌거(快擧)를 이루었다. 동년 6월 하순(下句)의용군 정사(義勇軍 正士)로서 제일중대 김우권(第一中隊金宇權) 의 영솔(領率)로 출동하였다가 요녕성 유하현 삼원포 야저구 김교성가(遼寧省 柳下縣三原浦 野猪溝 金敎成家)에서 일본군 약 400여명의 불시습격을 받아 교전중(交戰中)공을 비롯한 여러명이 전사(戰史)하였다.묘(墓)는 없다. 배위(配位)경주 이금여(慶州 李今汝)는 공이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할 때 내조(內助)가 컸다고 하며 1977년 5월 27일 졸함 에 경기도 부천시(京畿道 富川市)신앙촌묘지(信仰村幕地)에 안장(安葬)하였다. 아들은 이용(利用)이다. 1991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고 1993년 6월 1일 국가유공자 증이 내렸다. 의사 한 재 호(義士 韓 在 鎬)1901~1969 32世 공(公)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휘(諱)는 재호(在鎬)이고 일명(一名)기복(基福),호(號)는 유석(柳石)이다. 기현(基賢)의 아들이고 창우(昌愚)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8대손 이다.어머니는 풍산심씨(豊山沈氏)이다. 공은 1901년 5월 1일생이며 경기도 안성군(京鐵道 安城郡)출신(出身)이다.1919년 4월 1일 원곡면 사무소 앞에서 1,000여명의 만세시위대의 일원으로 참가하 여 독립만세를 외치고,태극기를 앞세우고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경계로 하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李裕奭)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고 원곡면과 양성면내의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 편소 등을 습격,파괴하고,일본인 거주자를 축출하기로 결의하였다.이날 양성면민들 로 구성된 수백명의 만세시위대가 양성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이들 원곡면의 시위대와 합세하여 재차 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때 몽둥이와 돌을 들고 선두에 서서 주재소 사무실에 투석을 하고,짚단을 모아놓 고 그 위에 주재소 안에 있던 의자와 탁자,집기류 등을 쌓아 불을 질렀다.이어 우편 소를 습격,투석하였으며,일본인 소토사토(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을 습격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혀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9년 3월 14일 졸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배위(配位)경주 이씨(慶州 李氏)는 계현(啓鉉)의 따님이고 아들은 보육원장 덕수(保育院長 德洙)이다. 공이 원곡면 지문리 선고묘하(元谷面 芝文里 先考幕下)해좌(亥坐)에 안장(安葬)되 었다. 배위 경주 이씨(配位 慶州 李氏)는 1987년 8월 21일 졸하니 지문리 선고 묘하(芝文里 先考 幕下)임좌(壬坐)에 안장되었다. 한 도 원(韓 道 源)1906~1984 독립운동가.일명 이국화(李國華)·왕소산(王少山).평안남도 대동 출신. 1925년 평양 숭실중학교(憲實中學校)를 중퇴하고 상해(上海)로 건너갔다.그곳에서 상해전차회사의 차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창세(朴昌世)·강창제(姜昌濟)등과 함께 항일 무장단체인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활동하였다. 1931년 이봉창(李奉昌)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여 일본 동경(東京)에서 의거를 일 으키도록 도왔다.1934년 김구(金九)의 밀령으로 상해 일본총영사관 후지이 경보 부의 밀정으로 일하면서 일제의 정보를 탐지하여 김구에게 전보하였다. 그뒤 후지이의 독립운동자의 동정을 조사,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난징(南京)의 중 국중앙군관학교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다가 중퇴하였다. 1936년 김동우(金東宇)·오면직(吳冕植)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맹혈단(盟血團) 을 조직하여 일제기관의 파괴,밀정의 처단,일제요인 삼해 등의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국내로 이송되었다. 1937년 6월 해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1977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한 원 빈(韓 元 彬)1905~1986 독립운동가.평안남도 평양 출생. 1930년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농민운동단체인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에 가입하여 알선부장 겸 조사출판부원으로 이 단체의 기관지인《농민》을 편찬,간행하였다. 1932년 이 단체의 상무로 근무하면서《농민》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게재하 였다가 필화사건을 일으켜 사직하고 만주로 건너갔다.장백현(長白縣)에서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인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를 결성하고 한중연합의 반만항일운동 (反滿抗日運動)을 전개하였다.즉,일제의 괴뢰인 만주국을 전복하고 조국의 독립을 실 현하기 위하여 일·만군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40년 2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같은 해 10월 20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 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진산공 한 용 국(振 山 公 韓 用 國)1906~1959 한말의 의병,자는 주언(周彦),응오공 병규(應吾公:秉奎)의 아들로 치원공 동수(致元公:東洙)의 손자이다.공은 경북 문경출신으로 총명강직(總明剛直)하고 인품(人品)이 출중(出衆:여러 사 람 속에서 뛰어남)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전념(專念)하여 유학(儒學)을 숭상(崇尙)하므로써 충효사상(忠孝思想)이 특출(特出:특별히 뛰어남)하였다.1895년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侵略)할 목적으로 국권(國權:주권과 통치권) 을 침해(侵害)하고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비참(悲慘)하게 시해(弑害:부모나 임금을 죽임)한 것을 보고 전국민이 국력(國力)의 약(弱)함을 비탄(悲歎:슬퍼하여 탄식함)하며 그 행위(行爲)를 비분(悲憤)하고 있을 때인지라 공도 이를 보고 비애(悲哀)와 울분 (鬱憤:쌓여 풀리지 않는 분노)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차에 경상도 문경(聞慶)에서 의거 (義擧)한 의병대장(義兵隊長)이강년(李康秊)의 휘하(摩下)에 참모관(參謨官)으로 있으 면서 서상업(徐相業),허달(許達),한양리(韓良履)등 20여명의 지사(志士)들과 함께 각지(各地)에 있는 일병(日兵)을 습격(襲擊)하는 등 항일투쟁에 많은 활약(活躍)을 하던 중 불행히도 일병에 패(敗)하여 단양(丹陽)산중(山中)에 은거(隱居:세상을 피하 여 삶)하면서 재기(再起:다시 일어남)의 기회(機會)를 도모(圖謀)하였다가 1907년 이강년을 도 창의대장(都 倡儀大將)으로 추대(推戴)하고 그 휘하에서 40여명의 지사들과 함께 청풍(淸風),황강(黃江),문경(聞慶),제천(提川),영천(永川),간성(奸城), 인제(麟蹄),안동(安東),내성(乃城),영주(榮州),이천(利川),장호원(長湖院),양근(楊根),진천(鎭川)등지(等地)를 전전(轉戰)하면서 많은 일병을 사살(射殺)하였다. 그러던 중 체포되었다가 탈출(脫出)하여 산중에서 은거하다 해방후 자유의 몸이 되어 1959년 졸하였다. 군수공 한 응 필(都守公 韓 應 弼:?~?) 생몰년 미상.조선 말기의 문신. 1863년(철종 14)용강현령(龍岡縣令)을 지내다가 1866년(고종 3)연안부사가 되었다.같은 해 9월에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강화도 및 한강연안의 수비군이 편성되었다. 한성근(韓聖根)은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지키고,양헌수(梁憲洙)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기조(李基祖)는 광성진(廣城鎭),신관호(申觀浩)는 양화진(楊花律),백낙현(白樂賢)은 행주(幸州),임한수(林翰洙)는 여석현(礪石視),유완(柳琮)은 파주,신숙(申蕭)은 장단을 지킬 때에 당시 초토사(招討使)로서 연안부에서 진을 치고 수비를 맡았다. 그뒤 1867년 부평부사,1870년 홍주목사,1878년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한 준(韓 準)1924~1950公의 諱는 준(準)으로 서산군 근홍면장을 지낸 관(館·初名 琦錫)의 아들이요,성품 (性品)이 너그럽고 학문으로 이름있는 종교(鍾敎)의 손자이다. 일찌기 1941년 경성사험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산군 부석초등학교에 17세 소년교사 (少年敎師·나이어린 선생)로 부임하여 고학년(高學年)생도들을 상대로 우국적(憂國的 :나라를 걱정함)울분을 토로하고,일본천황(日本天皇)을 모독하는 언행(言行)등 항일정신(抗日精神)을 고취하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실형(實形)을 선고받고 인천 소년형무소(仁川少年形務所)에서 3년간 징역을 살았으며 6.25국난(國難:6.25전쟁) 때에는 방위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순직(殉職)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에 公의 투철한 독립운동정선을 기려 건국훈장(建國勳章)애족장 (愛族章)을 추서(追敍)했다. 부인(夫人)은 달성 서씨(達城 徐氏)로 슬하에 무육(無育)하여 公의 兄,港의 二子 武 로 계후(系后:養子)하였으며 墓는 天安公園墓花德地로 九號 七番地이다. 한 국 언(韓 讀 彦) ?~1933 公은 고향이 성천(成川)으로 육군참의부 정사(陸軍參議府 正士)로 만주(滿洲)에 주둔 (駐屯)하여 1924년 대원(隊員)우승창(寓承昌)외 5人을 거느리고 성천 삼흥면(成川 三興面)에 이르러 왜적(倭敵)과 교전(交戰)하여 주재소장(騎在所長)고등(高藤)과 일본인 형사(日本人 形事)山本外三人을 사살(射殺)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체포 되어 경성(京城)감옥(監獄)에서 종신형(終身形)을 받고 복역(服投)하다가 1933년 12 월 18일 옥중(獄中)에서 순사(殉死)하였다. 한 봉 도(韓 奉 道) ?~1920 公은 신의주(新義州)가 고향으로 의주(義州)에서 독립군(獨立軍)황찬문(黃瓚文)등 을 인도(引導)하다가 전사(戰死)하였다. 한 문 기(韓 文 基) 성천(成川)이 고향으로 천도교신자(天道敎信者)이며 의용단원(義勇團員)으로 군자금 (軍資金)모금(幕金)과 평남경찰부(平南警察部)일경(日警)식월(植月)을 사격(射擊)하고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다. 한 봉 조(韓 鳳 朝) 公은 의주(義州)가 고향으로 의군부군인(義軍府軍人)으로‘본계(本溪)에서 통의부(統義府)장지환,장철호(張志煥,張哲鎬)에서 피살(被殺)되었다. 한 상 필 (韓 相 弼)?~1920 충남 천안(忠南 天安)이 고향으로 1920년 3월 1일 병천시장(竝川市場:아우장터)에서 만세운동(萬歲運動:示威)을 하다 피살(被殺)되었다. 한 중 건(韓 重 建) ?~1920) 公은 평남 개천(平南 介川)이 고향으로 한족회(韓族會)지방검찰원(地方檢察員)으로 만주대학살(滿洲大虐殺)때 일군(日軍)에게 피살(被殺)되었다. 한 전 산(韓 震 山) 公은 신의주(新義州)가 고향으로 3.1운동 후에 남만주(南滿州)관순현(寬句縣)에 건너가 청년단연합(靑年團聯合)에 가입(加入)하였으며 1920년 겨울에 文仁坤 張志興과 함께 국내(國內)에 출장(出張)하더니 평북경찰부(平北警察部)김극일(金極一)을 도강(渡江)하여 준다고 유인(誘引)하여 안동현(安東縣)진강산(鎭江山)에 이르러 암살(暗殺)하고 시체(屍體)는 압록강(鴨綠江)물속에 버렸다. 한 병 수(韓 丙 朱) ?~1920 公은 광복군 사령부(光復軍 司令部)대원(隊員)으로 中國 輯安縣 馬馳構에서 중국토군(中國土軍)에게 체포되어 만포진(滿浦鎭)일경(日警)에게 인도(引導)되어 옥사(獄死)하였다. 한 창 형(韓 昌 炯) ?~1920 公은 평북 강계(平北 江界)가 고향01며 1920년 11월 의용군(義勇軍)제1중대원으로 강계군 고산면(江界郡 高山面)주재소(騎在所)를 습격할 때 지휘자(指揮者)가 되었다는 혐의로 피살(被殺)되었다. 한 동 근(韓 東 根)公은 미국의원단사건(美國議員團事件)으로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建國功勞)대통 령표창을 수상(大統領表彰受賞)하였다. 한 덕 용(韓 德 溶) ?~1920) 公은 독립군(獨立軍)으로 1920년 7월 16일 삭주면 동부동(朔州面 東部洞)에서 전몰 (戰歿)하였다. 한 덕 유(韓 德 裕:?~1919) 公은 삭주(朔州)가 고향으로 1919년 7월 14일 인풍강(仁豊江)에서 일군(日軍)에게 피살(被殺)되었다. 한 도 원(韓 道 元) ?~1920 公은 독립단원(獨立團員)으로 1920년 만주대학살(滿洲大虐殺)때 장백현 팔도구(長白縣 八道構)에서 왜적(倭敵)에게 피살(被殺)되었다. 한 병 기(韓 炳 基) 公은 독립단원(獨立團員)으로 박문용(朴文鎔)등 5人과 함께 압록강변(鴨綠江邊)수림중(樹林中)에서 피살(被殺)되었다. 한 시 대(韓 始 大) 公은 황해도 해주(黃海道 海州)가 고향으로 1920년“하와이”에 이주(移住)캘리포니아 고등학교(學校)를 졸업하고 신민회(新民會)에 가입(加入)하여 위원장(委員長)이 되고 교포(橋胞)의 성금(誠金)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군자금(軍資金) 을 댔다.1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이 일어나자 파리국제회의(巴里國際會議)에 대표자파견(代表 者派遺)한국인의 여행자유(旅行自由)를 위하여 여행권제도(旅行券制度)의 폐지(廢止) 를 미국무성(美國務省)에 교섭(交涉)하였다. 2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이 일어나니 한국인 신분보장(韓國人 身分保障)을 받기 위하여 뺏지 착용(着用)을 실시하고 광복(光復)된 후에는 한국에 돌아와 있다가 도미(獲美) 하였다. 한 철 수(韓 轍 朱) 公의 호(號)는 이당(治庸)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특파원(特派員)강옥진(姜玉珍) 과 대한청년단 연합회 서기 유건혁(柳健赫)과 같이 군자금모금(軍資金幕金)과 기관조직 (機關組織)최승기(崔承基)와 같이 독립신문(獨立新聞),청년지(靑年誌)등을 배포(配布)1919년 12월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대한청년단연합(大韓靑年團聯合)에 가입(加入)하고 그 다음 해 아버지 흥동(父親興東)이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당하고 3년 집행유예,1920년 7월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를 통합(統合)후 제2영 제1대대 부관(副官)으로 활약.1921년 4월 사령부특파원(司令部特派員)으로 김창곤,신계관(金昌坤,申啓寬)과 같이 황해,평안(黃海,平安)양도에 출동하여 군자금모금(軍資金幕金)과 기관조직(機關 組織)에 활약하다가 의주교외(義州郊外)에서 일본헌병(日本憲兵)과 교전(交戰)2명을 사살(射殺)하고 동년 7월 김창곤(金昌坤)과 같이 환인지방(桓仁地方)에 출동하여 지방 대원 3인과 같이 달아나는 왜적을 토벌하는 등 활동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일본(日本) 중국군(中國軍)대부대와 충돌하여 한명을 사살하고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어 김창곤(金昌坤)과 같이 사형언도(死形言渡)를 받고 1922년 평양에서 2심(二審)때 4년형을 받고 경성(京城:서울)에서 1926년 출옥하여 오병섭(吳秉燮)과 같이 해삼위(海參威)로 탈출하려다 제지(被禁)당하여 일본경도(日本京都)로 가서 學籍을 두고 신간회 경도지 부(新幹會 京都支部)에 가입하여 비밀결사 철성단(秘密結社 鐵聲團)을 조직 활동하다가 월여간(月餘間)구금(狗禁),1929년 귀국 1933년 만주길림(滿洲吉林)에서 예수교 장로(長老)가 되고 8.15광복 후 귀국(歸國)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한 재 열(韓 在 烈) 1907년 강원도 홍천(洪川)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200여인을 데리고 활동하였다. 한 춘(韓 春) 公은 대구(大邱)가 고향으로 1907년 한봉수(韓鳳洙)의병대장(義兵大將)과 함께 청주(淸州)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선봉(先鋒)이 되어 적정(敵情)을 탐색하려다가 돌연히 적을 만나 빈손으로 타살(打殺)한 호장(虎將)이다. 한 이 경(韓 履 敬) 公은 평북 의주(平北 義州)가 고향으로 3·1운동(運動)후에 의주군(義州郡)동암산중(東岩山中)에 근거(根據)를 둔 보합단원(普合團員)으로 맹렬히 활동하다가 왜경(倭警)에게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新義州 感獄)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한 봉 식(韓 鳳 植) 公은 평북 의주(平北 義州)가 고향이며 청년단 간부로 1920년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이 한국에 왔을 때 전덕명,이만복(全德明,李萬馥)등과 같이 삐라를 뿌리고 시위 운동(示威運動)을 주도하여 도시(都市)를 폭파하기로 계획하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 되어 경성 감옥(京城監獄)에서 8년간 복역(服投)하던 중 죄수(罪因)대우개선(待遇改善)문제로 옥리(獄吏)와 투쟁하다가 순사(殉死)했다. 한 진 석(韓 鎭 錫) ?~1920 公은 평북 정주(平北 定州)사람으로 예수교 신자이다. 신안학교(新安學校)를 창립(創立)한 교장(校長)으로 신안병원(新安病院)을 설립(設立)하여 빈한(貧寒)한 환자(愚者)를 무료(無料)로 치료해 주고 안창호,윤치호(安昌浩, 尹致昊)등과 함께 애국정신고취(愛國精神鼓吹)를 위한 연설행각(演說行聊)에 여념(餘念)이 없더니 백오인사건(百五人事件)으로 체포되어 손정도 목사(孫貞道 收師)와 함께 전남 진도(全南 珍島)로 유배(流配)되어 3년을 마친 뒤에 1917년 정월 만주 흥경현 왕청문(滿洲 興京縣 王淸門)으로 망명(亡命)하여 한족회(韓族會)총관(總管)으로 활약하던 中 1920년 9월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참수(軟首)로 순국(碼國)하였다. 한 익 현(韓 籃 鐵) 公은 평북 정주(平北 定州)사람으로 백오인사건(百五人事件)의 일원(一員)인 한진석 (韓鎭錫)의 통생이다.국내(國內)에서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열중하다가 형(兄)진석 (鎭錫)이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한 후 기미운동(己未運動)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진두지휘자(陣頭指揮者)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나와 임시정부(臨時政府) 국채보상금(國債報償金)을 거액(巨額)모금(幕金)하여 임시정부에 비밀송금하고 상해 (上海)로부터 무기(武器)를 안동현(安東縣)까지 운반(運搬)하는 역할(投割)을 했다. 이윽고 왜경(倭警)안부장(安部長)이란 자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난타(亂打)당하여 순사(亂死)했다. 한 영 희(韓 永 禧) 公은 평북 용천(平北 龍川)사람으로 1919년(己未)에 만주독립단(滿洲獨立團)조맹선 (趙孟善)전덕원(全德園)과 연락하여 독립운동에 활약하다가 왜경(倭警)에 체포되어 1 년간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服投)하고 출옥후 계속 투쟁하였다. 한 우 종(韓 禹 宗) 公은 신의주(新義州)사람으로 일찌기 고향에서 서재(書齋·글방)를 설립하여 육영사업(育英事業)에 힘쓰고 1919년 김시황(金時晃),김동식(金東植),이광세(李光世),조시원(趙時元),박초식(朴初植),박중식(朴仲植),박완식(朴完植),백운기(白雲起)등과 월위(月韋)고관(古館)양면계 동암산(東岩山)에서 무장독립단(武裝獨立團)을 조직하고 군자금모금과 적기관 파괴 등에 활약하였고 1920년 8월 단장 김시황(金時晃)이하 단 원 10여명이 선천군(宣川郡)산내면 산사(山內面 山寺)에 주둔하다가 간교(好巧)한 중 의 밀고로 왜병(倭兵)의 습격을 받아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한 기 동(韓 基 東)1898~? 公은 인천(仁川)사람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가 대동단(大同團)에 가담하여 전협 (全協)과 협력,다음 해 의친왕(義親王)을 상해(上海)로 모셔가려고 한 사건에 관련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복역(服投)했다. 한 위 건(韓 偉 健) 公은 함경남도(咸鏡南道)경원 사람으로 서울 의학전문학교 4학년 재학 중 우재 이시영(又齋 李始榮)선생에게 사사(師事)하면서 3.1운동 시에 서울市內 학생을 동원케 하고 만주(滿洲) 로 탈주(脫走)했다가 다시 비빌리(秘密裡)에 入國하여 공소시효만료(公訴時效滿了)후 동아일보에 있다가 다시 탈주했다가 中國 北京에서 일본 헌병에게 총살(銃殺)당하였다. 한 봉 민(韓 鳳 民) 公은 1894년 7월 24일생으로 평북 강계(平北 江界)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동지(同志)21명과 함께 강계(江界)에서·만세시위(示威)를 하 다가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그후 1924년 시국강연(時局講演)을 하던 중 배일사상(排日思想)고취(鼓吹)로 경찰에 연행되어 1년 6개월의 형(形)을 살았다. 한 형 석(韓 亨 錫) 公은 1910년 2월 21일생으로 부산(釜山)사람이다. 1938년 항일강연단(抗日講演團)제2지대장으로 중국(中國)서주(徐州),개봉(開封), 서안(西安)등지에서 선전공작을 하고 항일가곡집(抗日歌曲集)을 출판하였으며 광복군 (光復軍)제2지대에 편입하여 항일가극(抗日歌劇)아리랑,조국행진곡(祖國行進曲)등을 작곡(作曲)하여 1943년 광복군가집(光復軍歌集)제1,2집을 출간(出刊)하고 1944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宣傳隊長)을 거쳐 1945년에는 광복군 제2지대 산동 제남 지구(山東 濟南地區)특파원(特派員)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 8월 15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한 영 태(韓 永 泰) 公은 1850년 7월 15일생으로 전북 임실(全北 任實)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임실,순창(任實,淳昌)지구의 연락책임자로 활약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취조(取調)를 받던 중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물어 자결(自決)하였다. 한 규 섭(韓 奎 燮) 公은 1898년 2월 7일생으로 충남 논산(忠南 論山)사람이다. 3.1운동 때 부여군(扶餘郡)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공주법원(公州法院)에서 6개월의 실형언도를 받고 상고(上告)하여 경성 복심원(京城 覆審院)에서 태형(笞形) 90대를 맞고 풀혔다. 한 윤 이(韓 尹 伊) 公은 1923년 3월 7일생으로 서울 사람이다. 1943년 9월 중국기중영편의대(中國棄中營便依隊)에 입대(入隊),1944년 한국광복군 (韓國光復軍)제3지대에 편입하여 특수공작원(特殊工作員)으로 활약하였다.1963년 8월 15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음 한 다 말(韓 多 末) 公은 서울 사람으로 1944년 12월 한국광복군 제3징모처(徵幕處)에 입대(入隊)하여 활약하였다. 한 성 수(韓 聖 洙) 公의一名은 이상일(李相一:假名).1921년 8월 18일생으로 평북 용천(平北 龍川) 사람이다.1944년 4월 일본학병(日本學兵)으로 중국 서주(中國 徐州)에 주둔(駐屯)하다가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조동린(趙東麟)과 접선(接線)하여 한인학병(韓人學兵)20여인이 같이 광복군(光復軍)에 입대(入隊),김학규(金學奎)의 특명(特命)으로 상해지구(上海地區)에 잠입(潛入)하여 활약 중 1945년 3월 남경로(南京路)에서 체포되어 일본군법회의(日本軍法會議)에서 사형언도(死形彦渡)를 받고 비공개(非公開)로 처형(處形)되었다. 한 면 필(韓 免 弼) 一名 免泌.公은 1922년 4월생으로 부산(釜山)사람이다. 1944년 3월 일군(日軍)에서 탈출(脫出)하여 광복군(光復軍)에 입대,8.15광복 때까 지 활약하였다. 한 진 원(韓 鍵 源) 公은 한필동(韓弼東),한성수(韓成洙),한응규(韓應奎)등과 같이 광복군 공적(光復軍 功績)으로 1963년 8월 15일 건국공로(建國功勞)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지사 한 태 현(志사 韓 泰 鉉)高宗 15年 1878~1951 31세 공(公)의 휘(諱)는 태현(泰鉉)또는 태연(泰淵)이요 자(字)는 경국(敬國),호(號)는 남사(南史)이다. 참봉공 찬석(參奉公 贊錫)의 둘째 아들이고 익교(翊敎)의 손자이며 참의공 충지(參議公 忠智)의 17대 손이오 감사공 전(參議公 전)의 18대손이다.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인수(仁洙)의 따님이다. 공(公)은 고종(高宗)15년(1878)9월 12일 전라북도 남원(全羅北道 南原)에서 태어 났다. 1919년 8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한 이후 고향인 남원지방을 중심으로 조직활동을 벌렸다.대동단의 조직 확대를 위해 남원군내에 청년단(靑年團)을 조직하고 단원(團員)의 모집에 힘썼다. 대동단은 1919년 3월 전협보(全協普),최익환(崔益煥)등이 조선민족(朝蘇民族)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로서,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처 에 지단을 설치하였다.또 이들은 당시 사회 각 층을 황족(皇族)·벼슬아치·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 (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副人)·지역 구역(地域 區域)등의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이와같은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통일·종합 함으로써 범국민적 조직을 구상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그는 동지 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등과 함께 많은 동지 를 포섭하였고,또 자금모금 활동도 전개했다. 그런데 1919년 11월 대동단 본부가 주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망명계획이 일경(日警)에 발각됨으로써 대동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어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 도 자연 발각되었고,이로 인하여 그는 1920년 3월 15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1951년 1월 21일 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90년 12월 26일에는 훈장증,1993년 6월 1일에는 국가유공자증을 받았다. 배위(配位)김해김씨(金海金氏)는 영두(永斗)의 따님이며 아들은 상윤(相鈗 系旭淵 后)상훤(相煊)이다. 지사 한 도 수(志仕 韓 道 洙)光武 1年 1897~1942 31世 공(公)은 애국지사(愛國志士)이다. 휘(諱)는 도수(道洙)요 자(字)는 관옥(貫玉)이고 호(號)는 죽파(竹坡)이다.의관공 효석(議官公 孝錫)의 아들이고 규태(圭泰)의 손자이며 군수공 희(郡守公 曦)의 16대손 으로 안양공 종손(安義公 終孫)의 17대손이다. 어머니는 숙인 전의 이씨(淑人 全義 李氏)로 수찬봉덕(修撰 鳳德)의 따님으로 공은 광무(光武)1년(1897)9월 27일 생이다.公은 천성(天性)이 강직(剛直)하여 대의(大義)를 이념(理念)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 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구고리(九皐里)의 사마제학교(司馬齊學校)를 수료한 후 23세때 삼일운동 (三一運動,1919年)에 참가하여 동지인 박용식(朴庸植),한기수(韓淇洙),최완수(崔完洙)등과 사마제학생(司馬齊學生)및 면민 수백명과 같이 구고리촌중(九皐里村中)대괴목하(大槐木下)에 운집(雲集)하여 대한민국만세를 고창(高唱)하였고 타부락 각처에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배포(配布)와 연락대표로 활약중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전주 법원(全州法院)에서 1년6개월 형(形)의 선고(宣告)를 받았으나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 法院)에서 1년형의 옥고(獄苦)를 치루었다. 그 후 공은 정의(正義)를 품고 고학으로 경성보성전문학교(京城普成專門學校)를 졸업 하고 종로(鍾路)에서 치과의원(齒科醫院)을 경영하면서 수입금은 항일투사(抗日鬪士)들 의 독립운동자금(獨立運動資金)으로 조달(調達)하였다. 그러나 조국광복(祖國光復)을 보지 못하고 1942년 7월 5일 46세로 졸하였다.임실군청웅면우지원(任實郡 靑雄面 遇地原)에 1922년 5월 11일에 졸한 배위(配位)부안 김 씨(扶安金氏,父 應述)와 합조(合兆)이다. 1983년 8월 3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고 보훈처(報勳處)에서 묘비건립비를 조달하여 주었다.아들은 병덕(秉德)이다.志士(諱 道洙)와 配位 按安金氏合兆墓 位置:全羅北道 任實郡 靑雄面 遇地原司勇公墓下 甲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