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신생독립국.
위치 : 남지나해와 인도양 사이 티모르섬 동부
면적: 14,874㎢(인니의 1/125, 남한의 1/7)
인구 : 83만 9000명(2002년 기준, 인니의 1/250)
수도 : 딜리
공용어 : 포르투갈어, 테툼어(티모르어), 파푸아어에 속하는 40개의 방언
통화 : US 달러
민족 : 말레이시아계, 폴리네시아계
종족분포현황 : 티모르인 78%, 인니인 20%, 중국인 2%
종교 : 캐톨릭 98%(토속신앙 72%)
주요 산업 : 농업, 어업(해안), 상업(중국계)
주요 자원 : 석유, 커피, 목화
▶동티모르 사태의 의의
1. 보편적 국제 정의의 실현
1999년 8월 30일 동티모르가 주민투표라는 민주적 방식에 의해 독립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은 우선 구스마오와 같은 지도자가 이끄는 독립파의 줄기찬 투쟁과 유엔 및 캐톨릭 국가 등 국제사회의 지지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동티모르의 독립 성취는 탈냉전이라는 세계 정세의 변화에 힘입은 바 크다. 냉전 종식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는 인권문제가 중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존중되게 되었다. 과거 냉전 기간 중에는 흔히 내정 불간섭이라는 명분으로 인해 국제사회가 개입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점차 붕괴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제 대량 학살과 난민이 발생하고 인권이 유린되는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그것이 비록 국내 정치적 성격을 지닌 쟁점이라 할지라도 세계 각국 및 비정부기구들의 성토 대상이 되며 인도적 개입 명분을 제공하게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동티모르 사태는 사태 초기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강대국들에 대해 인도적 개입과 제재를 촉구해온 국제언론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국제언론은 인권정책을 앞세우던 미국과 영국 등 강대국들이 동티모르의 인권유린과 인종청소 사태에도 불구하고 인니 군부의 태도, 경제적 악영향, 종교적 고려 등을 이유로 적극 개입을 기피하는 이중적이고 위선적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미국은 사태 개입시 인니 군부가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군사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인니의 민주화를 망치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도 470억 달러의 구제금융 중단을 통한 경제적 압박수단을 고려하였으나, 이 역시 인니 경제가 붕괴될 경우 2년여의 금융위기 끝에 겨우 안정기에 진입한 아시아 각국의 경제 동요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서방 국가들은 종교적 측면에서도 신중한 자세를 보였었다. 즉 사태의 개입이 동티모르의 대다수 캐톨릭 주민들에 대한 지원으로 비쳐져 말레이시아 등 인근의 이슬람 국가들을 자극, 국제적 갈등으로 확산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한 국제언론의 압력에 각국 정부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같은 동티모르 사태의 긍정적 반전은 국제관계를 지배해온 중요한 고려요소인 개별국가 차원의 전략적·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진정한 '보편적 국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 적절한 사례라고 하겠다.
2. 다민족국가의 체제 관리능력에 대한 의문 대두
동티모르 사태가 주민투표 방식으로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은 인니 정부의 체제 운영 및 관리 능력의 한계에 기인한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인니는 수하르토 정권의 퇴진을 전후하여 독재정권의 부정부패와 비효율적인 경제위기 관리능력, 군부의 분열상 등이 나타나면서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맞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도네시아 보다 더 많은 인구와 면적을 가진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등과 같은 다민족국가가 존재하고 있다. 개방형 민주정치가 정착된 미국을 제외한다면, 체첸(러시아), 티베트(중국), 캐시미르(인도) 등지에서는 분리독립운동이 지속되고 있으며 유혈 사태로까지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 다민족국가들이 안고 있는 공통점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여타 다민족국가들은 인도네시아와는 달리 핵보유국으로서 국제적 위상이 확고한 편이며, 체제 관리능력도 상대적으로 앞선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효율적인 체제 관리는 '통제와 융화'가 조화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공권력 활용과 분권화(자치 확대) 수준도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인도네시아는 다민족국가로서는 거의 유일한 도서국가이다. 유일한 통제수단인 군부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분리독립운동을 관리해온 인니는 과도한 중앙집권적 통치 행태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체제관리능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인니는 자카르타 중앙정부가 위치한 자바섬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우선시 해왔기 때문에 그 밖의 섬 지역 주민들은 사회·경제·문화적으로 편차 높은 소외를 경험하였다. 특히 분리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지역은 대체로 풍부한 부존자원을 보유하고 있는데 비해, 개발 이익은 중앙정부가 독점하는 행태를 보여왔기 때문에 지방의 반발과 저항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인니의 민주화운동 이래 군부와 공안조직을 활용한 정보정치도 변방의 외딴 섬 지역 주민들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감시와 통제를 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3. 분쟁 관리를 위한 지역적 기능과 역할의 필요성 부각
동티모르에서 친인니 민병대에 의해 인종 '청소'가 자행되고 있는데도 유엔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들은 인니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평화유지군 파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이는 1999년 3월 유고연방의 코소보 사태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측이 유엔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속하게 유고연방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던 경우와 크게 대조되었다. 주민투표 직후까지도 국제사회가 보였던 소극적 태도는 동티모르 사태가 기본적으로 인니의 국내문제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점도 없지 않았지만, 국제적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동 사태를 주도적으로 조정·해결할 지역국가나 지역기구, 특히 유럽의 NATO와 같은 강력하고 권위있는 군사안보기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에 비해 다양한 사회·문화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해양으로 격리되어 있어 그 동안 국제 교류 및 협력의 관행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이다. 최근 탈냉전의 분위기와 국제적 상호의존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면서 국제협력을 중시하고 있으나, 동아시아에서 협력의 제도화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경제 중심의 협력과 회원국간 결속을 목적으로 출발한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 이제는 동남아 10개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포괄적 협력기구로 발전하고 있고,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은 범지역적 안보문제도 논의하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ASEAN은 회원국의 국내문제에 대해서는 논의를 자제해왔으며, ARF 역시 '대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즉 ASEAN과 ARF는 영향력 있는 회원국인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무시하고, 동티모르 사태를 지역안보문제로 간주하여 주도적으로 관리하거나 조정할 의지와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결국 동티모르 사태는 지역협력기구의 관리·조정 범위를 벗어나는 쟁점으로 간주되면서 유엔을 통한 해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ASEAN의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은 중대한 지역문제, 특히 안보와 관련된 쟁점에 대해 향후 적절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지역협력체가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동티모르 사태와 한국
1. 평화유지군 파병 결정과 '전투병' 논쟁
한국 정부는 인도네시아의 유엔평화유지군 수용 결정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한국 참여 요청에 따라 이를 수락하였다. 평화유지군 파견 방침을 수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뉴질랜드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동티모르에서의 평화유지활동의 필요성을 주도적으로 거론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회의 동의절차를 거쳐 전투병력이 포함된 대대급 부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한국은 1993년 이래 유엔평화유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으며, 현재도 서부사하라, 캐시미르(인도-파키스탄 접경), 그루지아 등에 의료진과 감시단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투병력의 해외 파견은 베트남전 파병 이래 처음으로서 유엔평화유지군의 일환으로 전투병력이 파견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동티모르 유엔평화유지군 참여 문제를 놓고 전투병력 파견 여부가 국내 정치권을 중심으로 논쟁이 전개된 바 있다. 인도적 견지에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데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였으나, 전투병력의 파견 여부에 관해서는 대립 양상을 보였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평화유지군 참여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으나 실전투병력 파견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파병 결정에 대해 불만을 나타냈다. 또한 재인니 한인회의 입장은 파병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질 경우에도 동포의 신변안전과 진출기업의 활동기반 보호, 그리고 30여년간의 대인니 우호관계 훼손 등을 들어 최소한 비전투요원의 파견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폈었다. 한편 정부와 여당인 국민회의 측은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민주주의 및 인권 보호 차원에서 평화유지군 파견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당사국인 인니 정부가 평화유지군 수용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는 점에서 대인니 관계가 악화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우리 군의 효율적인 임무 수행과 최소한의 자위를 위해서도 보병전투병력의 파견이 적절하다는 입장이었다. 정부는 파병부대의 규모를 경보병 250여명과 의무, 공병, 수송, 통신 등 170여명의 지원요원 등으로 편성하고, 파병부대의 임무도 민병대 소탕작전이 아니라, 치안과 질서 유지, 그리고 주민 및 부대 보호 등 자위권 행사로 국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 동티모르 파병에는 보병과 지원 기능이 결합된 형태의 부대가 적합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그 이유는 동티모르의 현지 정황을 볼 때, 무력충돌을 예방하고 민병대의 활동을 감시함으로써 치안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려면 보병부대가 가장 적절하다는 점과 민병대의 무장수준을 감안한다면 최소한의 자위능력을 지닌 보병부대가 가장 안전하다는 점, 보병부대는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이며 평화유지활동 기여도도 높다는 점, 자원의 가용성 면에서 가장 풍부한 보병부대의 파견이 신속하고 용이하다는 점, 기동성 및 철수의 용이성 측면에서도 보병부대가 훨씬 융통성 있게 대응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2. 인권 보호와 지역 안정에 기여하는 한국
군대의 해외 파병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 실리적인 측면도 신중히 고려하여 결정하여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동티모르 유엔평화유지군 파견은 '동티모르의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민주적 방식에 의한 자결권을 존중하고 소수 민족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국제 정의의 실현이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한편 '인도네시아의 안보'가 동남아 지역의 안정에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한국은 인니 정부의 유엔평화유지군 파병 요청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였다. 한국은 그동안 지역적 영향력이 매우 큰 인니와의 외교 관계를 중시해왔고, 경제적으로도 상호보완성을 증대시키는 노력을 해왔다. 따라서 동티모르 파병이 기존 인니와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상당 부분 한국측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오히려 인니 정부와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니 정부는 국민 정서와 기존 관계 측면에서 서방국가보다 아시아권 국가의 평화유지군 파병을 선호하였다. 한국군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남다를 것으로 보이는 만큼 동티모르 치안 및 질서 확보 과정에서 신중하고 객관적인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한편 국제적 상호의존성이 증대되면서 동북아와 동남아는 경제적으로나 안보 측면에서 긴밀한 연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은 동북아 국가들 가운데 평화유지활동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유일한 국가로서 지역 안정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가질 만하다. 소수의 경찰 병력을 파견하기로 한 중국은 자국의 분리독립운동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며, 일본도 헌법적 제약과 과거 인니에 대한 점령통치의 경험 때문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은 적어도 자신의 인권 상황과 관련지어볼 때 참여가 불가능한 상태로 볼 수 있다. 요컨대 한국은 인권 존중국가로서, 그리고 지역 안정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국가로서 이번 파병 기회를 활용하여 인니의 대내적 고민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대외적 거부감을 불식시키는 모범적인 평화유지활동을 전개하여 국위를 선양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한국의 국익과도 일치한다고 하겠다.
▶동티모르 독립운동사(주요 일지)
1701 포르투갈, 동티모르 식민지 편입
1859 포르투갈령 동티모르와 네덜란드령 서티모르 분리
1945. 8 인니,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 50. 8 단일정부인 인도네시아공화국 선포
※ 65. 수카르노 실각
※ 66. 수하르토 군부통치 시작
75. 7 포르투갈, 동티모르 식민통치 종료 선언
75. 11 반군측, 동티모르 독립 선언
75. 12 인니, 동티모르 무력 점령
※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 결성
※ 1975 인니의 동티모르 강점 이후 주민 20만명 피살
75. 12 유엔, 인니의 동티모르 철수 결의
76. 7 인니, 동티모르를 27번째 주로 편입
※ 국제사회는 이를 불인정
79. 1 새로운 저항군 지도자에 사나나 구스마오 임명
82. 2 동티모르 주교(코스타 로페스), 인니군의 집단 살해 증언(81년, 500명)
82. 5 교황청, 인니의 동티모르 합병 반대
91. 11 인니군, 동티모르 독립 시위대 250명 사살
92. 11 인니, Fretilin 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체포
93. 5 인니 법원, 구스마오에 종신형 선고후 20년으로 감형
95. 9 동티모르에서 대규모 폭동 발생
96. 1 인니-포르투갈간 동티모르의 장래에 대한 런던회의 개최
96. 12 동티모르 독립운동가 카를로스 벨로와 라모스 오르타,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
98. 3 동티모르 문제에 대한 인니-포르투갈 협상이 인니의 국내정치 위기로 연기.
※ 동티모르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 심포지엄이 태국에서 개최
※ 국제사면협회는 동티모르의 인권이 개선되지 않음을 언급
98. 5 수하르토 인니 대통령 사임, 부통령 하비비가 후임 대통령 피선.
98. 6 인니 정부, 동티모르 자치안 제의
98. 7 모슬렘 지도자 라이스(Rais), 동티모르의 주민투표 요구를 지지. 하비비 대통령은 지방자치와 티모르에 대한 인니 주권의 국제적 승인이 포함된 협상안의 일부로서 구스마오의 석방을 제의. 6월 이래 5만명의 인니 이주민이 티모르를 탈출.
98. 7-8 7월말부터 세차례에 걸쳐 인니군 3개 대대(1,300명)가 동티모르에서 철수.
98. 8 인니 정부, 동티모르에서의 유엔 인권감시단 활동을 수용. 수감중인 구스마오는 인니의 자치 제의를 거부하고 독립을 요구.
98. 9 동티모르의 5개 정치 집단은 새로운 정당을 설립하고 수감중인 구스마오를 당수로 지명.
98. 10 뉴욕에서 인니 - 포르투갈간 동티모르 자치협상 개막
99. 1 인니, 자치 제안 거부시 동티모르 독립계획 발표
99. 2 인니 정부, 유엔 협상에서 주민투표에 합의. 친독립파 지도자는 인니 정부에 (동티모르 합병 이후 이주해온 인니인으로 구성된) 지방 민병대의 무장해제와 병력 감축을 요구. 인니 육군은 민병대의 민간인 학살 사실을 인정.
99. 3 인니, 동티모르 주민투표를 수용. 호주, 동티모르 사태와 관련하여 다윈 지역 군 6천명에 대해 경계태세 발령.
99. 4 구스마오, 유엔 평화유지군의 동티모르 개입을 요청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민병대에 대한 무장투쟁을 촉구. 인니-포르투갈 간 포괄적 자치에 합의
※ 동티모르 폭력 방지를 위해 유엔 경찰력 파견에 합의
99. 5 인니 정부, 동티모르 선거에 대한 유엔 국제 감시활동을 수용
※ 인니 정부와 티모르 반군간에 선거 기간중 휴전 합의에 서명
99. 6 친인니파와 독립파간 무장해제에 합의
※ 주민투표에 앞서 두 적대세력의 모든 무기를 인니 국립경찰에 인도
99. 7 유엔과 인니, 8월 30일에 주민투표 실시 발표.
99. 8 유엔, 인니에 민병대에 단속을 요구하고, 투표를 예정대로 강행키로 결정. 인니 정부, 구스마오를 주민투표 결과 발표 이후(9/15경) 석방하기로 결정.
※ 8/30 주민투표 실시
※ 8/31 외국인, 동티모르 탈출 시작
99. 9 주민투표 결과 공식 발표(9/4) 이후 무정부 상태 돌입
※ 9/2 독립반대파 민병대의 난동 격화
※ 9/3 호주, 파병의사 표명. 위란토, 군경 1800명 파견 발표
※ 9/4 유엔, 주민투표 결과(78.5% 독립 찬성) 발표
※ 9/5 민병대, 투표결과 불복 표명. 학살 및 방화 등 동티모르 전역 확산
※ 9/6 유엔동티모르파견단, 인니군의 주민학살 참여 언급
※ 9/7 인니, 구스마오 석방. 동티모르에 계엄령 선포
※ 9/9 세계은행, 인니에 추가 차관 중단 경고
※ 9/10 IMF, 인니 구제금융 중단 발표. 교황, 학살 중지 촉구
※ 9/11 호주 총리, 11개국 평화유지군 참여에 원칙적 동의 발표. 유엔 사무총장, 인니에 평화유지군 수용 촉구. 위란토, 평화유지군 수용을 대통령에 건의 표명. 동티모르 민병대사령관, 5만 3천 민병대원에게 모든 작전 중지 명령
※ 9/12 하비비, 평화유지군 배치에 동의
99. 9월 말: 유엔-포르투갈-인니 3자협상 개최, 독립절차 논의
99. 10월 중순: 인니 의회, (동티모르를 27번째 주로 편입을 명시한) 헌법 개정, 강제 합병 무효화 조치
99. 10월 이후
※ 인니 군·경 병력(최고 2만명), 단계적 철수(3-6개월 소요 예상)
※ 유엔 과도기구 구성: UNAMET의 파견 기간을 5년으로 연장
※ 유엔 감독하 총선으로 제헌의회 구성(정파 대표간 정부 구성 토의)
※ 대통령 선출과 독립 정부 수립
※ 최장 5년간 유엔 감독하 통치
▶동티모르 최근소식
티모르 반군지도자 사고로 사망 (3/30)
폭탄테러 기도 혐의로 징역 20년형 (4/2)
노벨상 수상자, 자유와 민주주의를 호소(4/2)
85명 티모르인 기아로 사망(4/4추정)
포르투갈, 티모르를 위해 NGO에 4백만달러 지원(4/4)
인도네시아 18000여 병력 주둔인정(11/2)
동티모르지역 긴장고조(11/9)
유엔, 동티모르 자치정부 제안(11/11)
샤나나 구스망, 유엔 PKO제안(11/17)
포르투갈, 학살 진상조사 요구(11/17)
인도네시아 Alas 지역에서 군사작전 재개(11/18)
유엔 자치협상 시작(11/19)
카를로스 벨루 주교, 11명의 반군이 사망했다고 밝혀(11/21)
Same지역 사상자 계속 증가(11/23)
동티모르 시위대, 정부건물 점거(11/23)
·티모르 반군지도자 사고로 사망(3/30)
티모르의 반군지도자가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군 라디오 방송에 따르면 코니스 산타나(Konis Santana)는 반군 기지로 돌아오던 중 추락하였고, 같은 날 뇌상으로 사망했다. 망명중인 저항지도자 주제 라모스 오르타(Jose Ramos Horta-1996년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자)는 반군기지와 접촉이 있는 호주의 소식통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고 한다. 산타나(42)는 20년전 대학생 신분으로 무장저항운동인 FALINTIL에 가담하였고, 1993년 반군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민주티모르 연합의 지도자 주앙 카라스카랑(Joao Carrascalao)은 그의 죽음을 반군운동의 커타란 손실이라고 애도했다. 산타나의 후임은 임시로 제 2인자인 Taur Matan Ruak가 대신할 것이라고 한다. 티모르의 내륙산악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군은 그동안 인도네시아의 거점에 대해서 산발적인 공격을 해왔다. 산타나는 1997년 3월, 41명의 인도네시아 경찰관과 군인이 희생된 일련의 반군 공격을 지휘하였다. FALINTIL구성원의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00여명이 안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그들의 무장은 주로 인도네시아 정부군으로부터 획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폭탄테러 기도 혐의로 20년형(4/2)
관영 Antara 통신은 콘스탄시우 코스타 두스 상투스(Constancio Costa dos Santos, 21)가 티모르의 수도에 위치한 딜리법정에서 인도네시아 정부의 전복을 기도했다며 20년형(!!!)을 선고받았고 보도했다. 두스 상투스는 현재 자카르타 형무소에서 인도네시아에 저항한 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티모르 저항운동 지도자 샤나나 구스망(Xanana Gusmao)이 보낸 20개의 수재 폭탄, 탄알, 현금을 소지한체 체포되었다. Antara 통신은 두스 상투스가 발리를 출발하여 딜리 항구를 통해 입국하는 도중 체포되었으며, 티모르 사회주의 연합의 일원이라고 전했다. 두스 상투스는 법정에서 폭탄을 딜리에서 폭발시킬 예정이었으며, 주요 목표는 인도네시아 정부관리와 군사시설이었다고 진술하였다.
·노벨상 수상자, 자유와 민주주의를 호소(4/2)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티몰의 주제 라무스 오르타와 티벳의 달라이 라마, 미안마의 아웅산 수키는 그들의 고국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호소하였다. "제국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정권이 불멸한 것은 아닙니다." 라무스 오르타는 런던에서 개최된 제 2차 ASEM 정상회의 전날 있었던 인권운동가 리셉션에서 연설하였다. "인간은 영원합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듭니다." 라무스 오르타는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신의 고국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다른 아시아인의 인권 자유를 호소하다. "ASEM 정상회담의 주요 현안이 될 아시아 금융위기의 근본은 몇몇 아시아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라무스 오르타는 말했다. "혼란을 피하려면... 혁명을 피하려면, 그러면 문제의 근본원인을 밝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가 없기 때문이고, 민주주의가 없기 때문이고,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무스 오르타는 덧붙였다. 저항운동가 주제 라무스 오르타(Jose Ramos-Horta)와 카를루스 벨루(Carlos Belo) 주교는 티모르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한 공로로 1996년 노벨평화상에 공동수상하였다.
·포르투갈, 티모르를 위해 NGO에 4백만불 지원(4/4)
포르투갈은 티모르의 비정부기구(Non-Governmental Organizations)에 4백만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안토니우 구테리스(Antonio Guterres) 수상은 지원금은 3년간에 걸쳐 인도네시아 정부와는 연관이 없는 단체에 지원될 것이라 말했다. 티모르의 옛 식민모국으로서의 이런 일련의 제스처는 인도네시아 정부를 당혹하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주제 라무스 오르타는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티모르에서 민족간 갈등이 폭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이 지원금이 현재의 아시아 금융위기 상황을 감안할때, 티모르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을것으로 기대합니다." 구테리스 수상은 ASEM회의가 끝나는 시점에서 덧붙였다. "우리는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사회문제로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티모르에서 활동하는 NGO중 충분히 자유로운 단체에게 조심스럽게 지원할 것입니다." 지난 3일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과 티모르문제에 대해 나눈 회담에서 구테리스 수상은 IMF의 인도네시아 지원은 절박한 상황에만 한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인도네시아와의 합의는 통화정책이나 재정개혁 문제 뿐만 아니라, 투명성, 그리고 부정, 부패 문제까지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없는 시장경제체제는 소용없습니다." 아난 총장은 이번 ASEM회의에서 나눈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 대표와의 개별회담이 유익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난 총장은 그가 제안한 양국간의 직접 회담을 인도네시아가 거부한것을 유감이라 말했다. 지난해 아난 총장은 티모르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UN 특별 대표를 임명했다. 그러나 아직 티모르에서는 아직 반 인도네시아 반군이 활동 중이다. 포르투갈은 대부분 카톨릭 신자인 티모르인의 문제를 직접 국민투표로써 결정하자고 요구하고 있으나, 회교의 인도네시아는 이런 제안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85명의 티모르인 기아로 사망(4/4추정)
85명의 티모르인이 긴 가뭄 뒤의 흉작으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은 티모르에서 돌아온 호주 구호 운동가에 의해 국제 티모르 지원센터(East Timor International Support Center)에 알려졌다. 구호 운동가에 따르면 지난 한주간 Fefudin 마을의 티모르인 85명이 기아로 사망하였다. 한편 이 구호 운동가는 인도시아 정부의 구호활동 방해를 염려한 나머지 신원확인을 거부하였다. 지난 1975년 강제 점령이후 23년간 티모르에서는 인도네시아 군의 탄압과 질병, 기아로 인해 20만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구호 운동가에 따르면 기근현상이 가장 심각한 지역은 북부, 서부 해안지역이라고 한다. 이 지역의 식량사정은 야자나무로 연명해야 할 만큼 심각하다고 한다. 또한 기근현상은 인도네시아의 금융위기로 인한 식량 가격 폭등으로 더욱 심각해졌다고 전했다. 기본적인 식량의 가격은 500% 이상 올라서 티모르인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한편 인도네시아 정부는 엘니뇨현상으로 식량사정의 악화를 인정하였으나 티모르의 식량사정이 겉보기와는 달리 그리 심각하지 않다며 구호운동가의 증언을 부인했다. 그러나 현장을 목격한 구호운동가에 따르면 티모르는 집단 기아사태를 직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지원으로 반입되는 식량은 보관, 관리 소홀로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한다. 구호운동가는 외부의 지원없이는 다가오는 기아사태를 피할수 없을 것이라며, 국제적 식량지원을 호소하였다.
·인도네시아 18000여 군병력 주둔인정(11/2)
인도네시아는 최초로 동티모르 지역에 18000여명의 군병력이 주둔하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동티모르 지역 군사령부 관계자인 Supadi 중령이 AP통신에 밝힌 바에 의하면, 18000여명의 군병력은 동티모르에 상주하는 군 병력이외에 단기간 동안의 훈련으로 주둔하는 병력, 그리고 군인은 아니지만 총기를 소지하는 군인 복장의 민간인을 포함한다고 밝혔다. 한편, 호주의 캔버라 타임즈에 따르면, 올해초 인도네시아 정부가 발표한 것과는 달리 동티모르 지역에서 인도네시아 군의 철수가 계속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동티모르지역 긴장고조(11/9)
7년전 딜리 공동묘지에서 발생했던 학살 사건을 추모하는 대규모 반 인도네시아 시위가 계획됨에 따라 동티모르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번 시위는 수감중인 반군지도자 샤나나 구스망(Xanana Gusmao)이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계 반군지도자로서는 유일하게 샤나나 구스망은 전화와 비서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인도네시아 군은 지난 주 반군의 공격으로 2명의 전사자와 1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유엔, 동티모르 자치정부 제안(11/11)
유엔은 동티모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치정부 선거를 포함한 일련의 제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은 안보, 외교, 재정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동티모르인의 자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샤나나 구스망, 유엔 PKO제안(11/17)
자카르타 포스트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투옥중인 반군지도자 샤나나 구스망이 독립의 첫 단계로 유엔 PKO의 주둔을 제안하였다. 샤나나 구스망은 동티모르의 독립은 대략 3년간의 과정이 필요하므로 18개월간의 사회안정 문제 해결방법으로 유엔의 PKO가 적당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또한 동티모르 경찰력의 창설과 동티모르인에 대한 교육개혁, 공공기관의 정비와 검열 폐지를 요구하였다. 샤나나 구스망은 인도네시아 정부의 자치지역화 제안은 동티모르인의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므로 의미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포르투갈, 학살 진상조사 요구(11/17)
포르투갈의 조르즈 삼파이우(Jorge Sampaio) 대통령은 지난 1991년 산타 그루스에서 발생했던 두차례의 학살사건에 대한 국제 조사를 요구하였다. 마누엘 카라스칼랑에 따르면 두차례의 걸친 학살사건에서 인도네시아 보안군은 500여명이 넘는 민간인을 학살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마누엘 카라스칼랑의 형이자, 전 티모르 총독이었던 마리우 카라스칼랑은 150명 이상이 학살됐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Alas 지역에서 군사작전 재개(11/18)
동티모르 민족저항 위원회(CNRT- Conselho Nacional da Resistancia de Timor-Leste)는 인도네시아 군의 반군 진압작전 중 살인, 고문, 납치를 자행했다고 밝혔다. CNRT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군은 Taidudak지역의 부족추장을 체포하여 살해했다고 밝혔다. 이번 진압작전에는 3개 대대 병력에 공수부대, 경찰타격대 등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작전 도중 4명의 지역청년이 고문 다했으며, 4명이 행방불명되었다. 한편 동티모르 지역 인도네시아군 사령부는 이 내용을 부인하였다. 한편 이번 군사작전이 진행된 Alas지역은 지난 몇주간 반군게릴라가 인도네시아 거점지역을 공격해오던 지역이다.
·유엔 자치협상 시작(11/19)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는 유엔이 제안한 동티모르 자치 제안에 대한 협상을 갖게 된다고 유엔 대변인이 밝혔다. 세부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유엔의 제안은 동티모르 독립의 첫단계로서 자치정부 선거계획을 포함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반군은 자치제안에 반대하고 있으나, 일단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자치정부 설립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한 서방외교관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또한 동티모르에 유엔이 동티모르에 상주하여 상세한 정보를 제공할 것과 인도네시아 군의 철수를 공식확인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아직까지 인도네시아는 이런 요구에 대해 이렇다할 대응이 없는 상태이다.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반군지도자 샤나나 구스망의 석방을 희망하고 있다고 대변인은 밝혔다.
·카를로스 벨루 주교, 11명의 반군이 사망했다고 밝혀(11/21)
지난 며칠간 인도네시아군의 진압작전으로 11명의 동티모르 반군이 사망하였다고 카를로스 벨루 주교가 밝혔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군 고위관계자는 이 내용을 부인하였다.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자인 카를로스 벨루 주교는 딜리 남동부 25마일 지점의 Same마일에서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11명이 반군이 살해됐으며, 30여채의 가옥, 차량등이 불탔다고 전했다. 한편 코피아난 유엔사무총장은 뉴욕에서 벌어지고 있는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간의 협상도중 발생한 동티모르 민간인 피해에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포르투갈은 즉시 협상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동티모르 주둔군 최고 책임자인 Suhartono Suratman 대령은 몇차례 반군과 무력충돌이 있었으나 사망자는 없었다고 하였고 오히려 인도네시아군 수명이 피해를 입였다고 주장하였다.
·Same지역 사상자 계속 증가(11/23)
동티모르의 Same지역에 대한 계속된 인도네시아 소탕작전으로 5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1명의 사망자 명단이 현지의 인권운동가에 의해 밝혀졌다. 이번 인도네시아의 소탕작전은 지난 11월 9일 동티모르 독립반군이 Alas에 의치한 인도네시아군의 거점지역에 대한 공격에서 3명의 인도네시아군이 사망한데 대한 보복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군인들은 반군의 공격에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여 체포, 처형한 민간인 30명의 집을 불태웠다고 한다. 한편 최근 딜리에 도착한 마을주민에 의하면 사람들은 교회로 피신하거나, 딜리 남부의 Viqueque, Same로 피난하고 있다고 한다.
·동티모르 시위대, 정부건물 점거(11/23)
1000명 이상의 동티모르 시위대가 딜리에 위치한 정부건물을 점거하고, 인도네시아군의 즉각 절수, 유엔 PKO의 주둔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시위대는 불법 점령한 인도네시아의 인권유린 실태를 고발하며, 최근 Alas지역의 소탕작전에서 발생한 50여명 사망사건을 조사하여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현지 군관계자는 1명의 사망자만 발생하였다며, 이 요구를 거부하였다. 한편 인권운동가들은 현재까지 밝혀진 사망자 수보다 더 많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동티모르 사태와 관련된 주요 인물
○ 수하르토(79세): 32년간 장기 집권했던 전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군부를 통해 동티모르 유혈 사태의 배후 조종 의혹을 받고 있음. 그의 둘째 사위 프라보워 수비안토 육군 특전사령부(KOPASSUS) 사령관은 동티모르 강점 이래 군부내 수하르토 파벌과 동티모르 민병대와 유착, 동티모르내 수하르토 가족의 자산을 관리해왔다는 의혹을 사고 있음.
○ B. J. 하비비(64세): 수하르토 실각으로 대통령에 피선된 그는 최근 국내적으로 곤경에 처함. 야당은 물론 여당-내각, 우파 및 진보-인권단체 등으로부터 비난의 대상. 대통령의 위상과 사태 장악력이 급격히 약화. 정부-군간 공조체제도 혼선. 취임 이후 최대의 시련기에 봉착. 가장 큰 이유는 인니 대다수의 정서와 무관하게 동티모르 독립문제를 이슈화하여 주민투표에 참패하고 무정부 상태를 자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 여론. 국제사회의 압력과 군부의 종용으로 유엔평화유지군 수용에 동의했으나, 10월 대선을 앞두고 국민들의 반발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아 있음.
○ 위란토(53세): 현재 국방장관 겸 군총사령관으로서 군부의 최고 실세이며 인니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평가됨. 98년 2월 육군참모총장에서 통합군사령관으로 발탁, 그 뒤 한달만인 3월 개각때 국방장관에 겸직할 정도로 수하르토 전대통령의 측근. 68년 육사 수석 졸업한 엘리트 장교 출신으로 89-93년 수하르토의 부관을 역임한 인연으로 승승장구. 동티모르 사태에 투입된 군도 그가 진두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짐. 그러나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오히려 군부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하비비에게 유엔평화유지군 수용하도록 압력. 인니 집권 골카르당이 동티모르 사태와 발리은행 스캔들로 인해 인기가 크게 하락한 하비비 대통령에 대신하여 그를 대선 후보로 지명할 것이라는 일부 보도도 있음. 최근 그는 대선의 부통령 후보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사나나 구스마오(53세): 가톨릭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던 구스마오는 1975년 인니의 강제 병합 이래 무력투쟁을 전개해온 '행동하는 양심'으로 평가됨. 79년 동티모르 독립운동 조직을 통합한 "독립혁명전선(Fretilin)"을 직접 이끌어 독립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됨. 그는 91년 말 200여명이 사망하는 최대 규모의 반정부투쟁을 주도했다가 92년 체포, 반란 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유엔과 포르투갈 등 서방의 압력으로 98년 9월 석방되어 가택연금 상태에 있음. '동티모르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는 가장 유력한 정부수반 후보자임.
○ 호세 라모스 오르타(49세): 포르투갈 식민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투신, 25년간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구스마오의 석방을 위해 노력. 96년 벨로 주교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 75년 12월 인니 침공 직전 망명길에 올라 주로 호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 언론인과 대학교수 경력을 지닌 그는 미국과 호주 등지의 지식인 사회를 상대로 동티모르 독립을 호소해온 해외 독립파. 구스마오와 함께 독립정부 구성에 적극 협력할 것으로 보이나 초대 대통령직을 놓고 경쟁을 벌일 가능성도 존재.
○ 카를로스 벨로(51세): 가톨릭 주교로서 비폭력독립운동으로 동티모르의 문화와 종교를 수호하고, 군부의 인권침해에 맞서 투쟁을 전개해왔으며, 90만 동티모르인들의 정신적 지주.
○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52세): 인도네시아의 국부인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맏딸로서 부친 실각(1966년) 이후 반독재 투쟁으로 일관하다 1987년 정계에 입문. 1998. 5월 수하르토 일가의 몰락 이래 인니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부각. 현재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인도네시아 민주투쟁당(PDIP)의 당수. 99년 10월 20일 대선에서 유력한 후보로 지목되고 있음. 99년 6월 총선에서 메가와티의 공약은 부정부패 척결과 개혁. 그러나 인니 정국의 암초인 동티모르, 아체, 이리안 자야 등 분리독립문제에 있어서는 강경보수원칙을 고수. 이는 인니 독립의 영웅인 부친 수카르노의 민족주의 영향 때문으로 보임.
▶동티모르사태의 배후세력 (기사 참조)
첫 번째, "하비비와 위란토가 동티모르 학살 명령"
동티모르 인권유린 행위자에 대한 사법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유혈사태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하비비와 위란토통합군사령관등이 민간인 학살을 명령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티모르 유혈사태를 주도한 뒤 서티모르로 피신한 민병대 지도자들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잔학행위를 조직적으로 지시했음을 입증하는 자료와 함께 자신들의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내용의 서한을 최근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에 제출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19일 보도했다. 민병대 지도자 3명과 함께 서한을 공동 작성한 네메치오 로페즈 데 카르발호는 하비비, 위란토, 아담 다미리 지역사령관등이 독립투표 10일 전인 지난해 8월20일딜리를 극비리에 방문, 민간인 학살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히비비는 이날 전체 민병대 지도자들을 소집, "동티모르 독립투표에서 영토통합이 실패할 경우 개미새끼 한마리도 남기지 말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을 대통령겸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명령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카르발호는 또 이같은 사실은 현재 서티모르 쿠팡에 피신해 있는 다른 민병대지도자 30명도 인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른 민병대 지도자인 조아니코 케사리오는 군과 경찰이 민병대에 무기와 자금을 공급한 뒤 민병대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통제했음을 입증하는 방대한 관련 자료를보유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군과 경찰은 우리를 살인기계로 악용했다. 이들은 학살관련증거를 없애기 위해 민병대 지도자들을 살해할 것"이라면서 "유엔이 향후 안전보장과 법적 사면을 보장해 줄 경우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유혈사태 배후세력에 대한 전모를 공개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지난달 6일 유엔구호요원 피살사건의 계기가 된 민병대 지도자 올리비오 멘도자 모룩 토막살인 사건은 군과 경찰에 의해 배후 조종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했다. 한편 인도네시아 검찰은 지난 2월 동티모르 인권유린 조사에 착수한 이래 그동안 30여명의 용의자들에 대한 소환조사를 완료했음에도 불구, 증거부족을 이유로 아직까지 한명도 기소하지 못해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아왔다.
두 번째, 미국의 은밀히 인도네시아에 협력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략하기 전날 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를 만나고 있었다. 키신저는 나중에, 그 회동에서 동티모르 문제가 논의된 바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거짓말로 드러났다. 사실상 미국정부는 수하르토에게 침략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린 셈이었다. 인도네시아 군대의 침략과정에서 사용된 무기 중 90%가 미국제였으며(침략의 목적을 돕기 위해 자국의 군수물자가 사용되는 것을 미국 국내법이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 게릴라용 군사장비를 포함한 무기공급의 흐름이 비밀리에 증가되었다.(이 점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해석하는 것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은 또한 침략자들에게 외교적 지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미 유엔 대사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이 그의 자서전에서 자랑했듯이, 그는 국제기구가 인도네시아의 침략에 대처하는 데는 무능하다는 사실을 확신시킬 정도로 유엔에서 성공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스스로 인권대통령임을 선언했던 지미 카터 정부 하에서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수원조는 훨씬 더 늘어났다. 1975년 이래로,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10억달러어치가 넘는 군수물자를 판매해왔다.
▶동티모르의 장래
동티모르 주민 대다수가 독립을 지지한 투표 결과에 대해 친인니 민병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학살, 방화 등 무장 반발을 지속해옴으로써 유엔은 인니 정부에 평화유지군 파병 요청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평화유지군 파병이 국내사정상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부하던 인니 정부는 국제적 압력과 군부의 태도 변화에 따라 1999년 9월 14일 아무런 조건 없이 유엔평화유지군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유엔-인니-포르투갈 3자가 합의한 동티모르 독립 일정이 예정대로 추진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낙관적인 전망은 아직 이르다. 인니 정부도 통제하기 어려운 강력한 군부가 유엔평화유지활동과 독립절차 이행에 얼마나 협조적일 것인가는 불투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편 독립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에도 동티모르가 완전한 독립국가로 홀로 서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는 3-5년간의 과도정부의 운영이 필요할 것이다. 정치적 구심점이 될 독립운동 지도자 3인(구스마오, 벨로, 오르타 등)의 정치적 역량이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그리고 대다수 주민이 신봉하고 있는 캐톨릭교 역시 독립국가 건설의 정신적 지주로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제적 자립 여건을 조속히 마련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원조 등 국제적 지원이 필수적인 바, 오랜 전화로 피폐된 동티모르 사회가 안정되고 외국 자본이 투입될 수 있으려면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과거 식민통치의 종주국이었던 포르투갈은 향후 수년간 지원 의사를 표명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은 유엔을 통한 간접지원 방식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동티모르 사태의 영향
동티모르 사태는 당사국인 인도네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 지역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전망이다. 동티모르 사태가 세계적인 쟁점으로 부각되고 해결되는 과정은 주로 동티모르의 '인권' 보호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독립 동티모르'의 장래를 위해서도 인도네시아의 '안보'가 고려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더욱이 인니의 안보는 동남아의 안보에 직결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동티모르 사태가 초래한 인도네시아의 안보 문제로서는 인니의 분할 가능성, 인니의 대선 정국과 군부의 향배, 인니의 대외관계 등이 분석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동티모르의 독립 쟁취 과정
1975년 400여 년간의 식민 통치 끝에 포르투갈이 철수하면서 동티모르는 즉각 독립을 주장하는 강경 독립파, 경제적 자립이 가능할 때까지 포르투갈 통치하에서 일정한 자치권을 확보하자는 온건 독립파, 이웃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주장하는 친인니파 등 3개 파로 갈려 무력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인니는 이러한 힘의 공백상태를 틈타 이미 서티모르에 주둔하고 있던 인니군을 동원하여 동티모르를 점령·합병하였다.
이후 결성된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Fretilin)을 중심으로 인니군에 대항하는 독립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투쟁 과정에서 인니군은 10년간 약 20만명의 동티모르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티모르인의 대다수(98%)는 카톨릭교도로서 회교도가 주축인 대부분의 인니 지역과는 문화·종교적 유대가 적고, 동티모르의 경제 여건은 석유 등 풍부한 부존자원에 비해 인니 전체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빈곤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동티모르 주민들은 중앙정부로부터의 정책적 소외와 무관심, 그리고 경제 착취 등에 대한 불만까지 안고 있었던 것이다. Fretilin은 1975년부터 인니군에 저항하여 국내적으로는 소규모 게릴라전을 수행해왔다. 이에 비해 동티모르의 분리독립을 반대하는 친인니 자치파 민병대 세력은 13-20개 조직의 수천명에 달하고, 인니군 및 경찰의 비호와 지원까지 받고 있어, 독립파는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특히 1992년 독립운동 지도자인 구스마오(Xanana Gusmao)가 체포되는 것을 계기로 국내 세력이 약화되자, 호주와 포르투갈 등을 중심으로 해외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냉전기 동안에는 동티모르의 처절한 독립투쟁이 미국, 호주, 동남아국가연합(ASEAN) 등 강대국이나 주변국들의 정책적 무관심 속에 인니 정부의 인권정책에 대한 비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기에 들어 국제기구와 인권단체, 국제언론, 그리고 해외 독립파의 활동 등에 힘입어 동티모르의 비극적 현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인니 경제가 국제적 지원에 의존하게 되고 수하르토 대통령이 퇴진하면서 거세지기 시작한 국제적 압력에 대해 인니 정부는 동티모르 사태를 더 이상 내정 불간섭을 이유로 덮어둘 수 없게 된 것이다. 유엔선거감시단이 파견되어 1999년 8월 30일 주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유권자 45만명의 독립 여망은 투표율 98.6%, 독립지지율 78.5%이라는 압도적 결과로 나타났다. 이제 동티모르는 1702년 이래 포르투갈의 식민통치와 1975년 이후 인도네시아의 강점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
1. 동티모르는 어떻게 인도네시아에 편입되었는가?
포르투갈이 동티모르를 통치하는 동안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에 대한 공격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정부가 동티모르로부터의 철수의사를 선언하자, 수하르토는 동티모르의 영토와 천연자원을 복속시킬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1975년 당시 동티모르의 인구가 70만명이었던 것에 비해 인도네시아의 인구가 1억3천6백만명이었던 사실을 놓고 볼 때, 동티모르는 획득하기 손쉬운 목표물로 보였던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처음에 동티모르 지역 내의 소요를 조장함으로써 동티모르의 독립을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도네시아는 치안유지를 핑계삼아 1975년 12월 동티모르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2. 인도네시아의 침략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인도네시아의 침략 및 이후의 무자비한 게릴라 진압활동은 약 20만명의 동티모르인들을 죽음-대량학살, 강제아사, 질병에 의한-으로 내몰았는데 이 숫자는 동티모르 인구 전체의 1/4이 넘는 숫자로, 전체 인구에 비례한 숫자로 볼 때 이는 근대사에서 최대의 유혈사태 중 하나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군대가 저지른 커다란 일들을 덧붙이면, 고문과 강간, 강제이주의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3. 인도네시아의 1975년 침략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인도네시아의 침략은 국제법과 자결권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침략을 비난하고,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로부터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유엔총회는 동티모르를 자신의 27번째 주로 채택하는 인도네시아의 합병안을 거절했으며, 동티모르인들이 그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도록 두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호주를 제외한 어떤 국가도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4. 티모르인들은 그동안 어떻게 저항해왔는가?
티모르인들은 진정으로 고무적이고 용기있는 투쟁을 벌여왔다. 그들은 비자발적이던 저항세력을 조직화시키고, 무저항주의자들을 움직여 소름끼칠 정도의 차별에 맞선 게릴라전을 펼쳐왔다. 학생들과 카톨릭교인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게릴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데모에 참가하며, 조직원들을 숨겨주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그 투쟁에 동참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끔찍한 억압,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가 자국 국민의 다수를 동티모르에 이주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는 자결과 자유에 대한 그들의 열정적 행동을 계속 지켜왔다는 점이다.
5. 수년동안 동티모르 외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대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한동안은 작고 외로운 목소리만이 울렸다. 그 울림을 시작한 이후 줄곧 동티모르에 대한 연대행동의 중심에 있었던 아놀드 코헨이 바로 그 예의 인물이다. 호주와 영국에서는 동티모르 문제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노력한 소규모 단체들이 있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그 숫자와 행동은 늘어났다. 1991년 발생한 딜리 대학살-인도네시아 군대가 평화적인 장례식장을 공격함으로써 270명 이상이 학살된 사건에 대한 상당한 분노의 움직임들이 있었는데, 이 학살은 미국의 자유기고가인 애이미 굿맨과 앨런 나이른, 그리고 학살장면을 비밀리에 필름에 담은 한 영국 TV 사진기자에 의해 공개되었다. 종교단체 및 인권단체들은 활발히 움직이게 되었고, 동티모르 행동연대가 찰리 샤이너에 의해 구성되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많은 나라에서 부차적인 조직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제 이들은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동티모르 문제는 항상 정확했던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주류언론에 등장하게 되었다. 동티모르 활동가들의 열성적인 로비활동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 제한안이 미 행정부에 의해 의회에 상정되었다.-이를 교묘히 피해가기도 했지만 어쨌든 상정되었다. 동티모르 외교대표위 위원장 호세 라모스 오르타(그는 당시 동티모르 저항국민회의(CNRM) 의장이기도 했다.)와 동티모르의 정신적 지도자인 비숍 카를로스 필리페 시메네스 벨로는 1996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동티모르 사태에 대한 더욱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다.